드디어 바울의 로마 전도가 시작되었습니다. 16절입니다. “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 바울에게 자기를 지키는 한 군인과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더라”(16절)
이것이 로마에서의 바울의 생활 환경이었습니다. 다른 죄수들보다는 자유로웠던 것 같습니다만 파수병이 딸리는 죄수였던 것은 조금도 변하지 않습니다. 바울의 로마 전도는 바울 자신의 큰 비전이긴 했지만, 그것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사23:14) 라는 하나님의 명령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여기서부터(쇠사슬에 매인 죄수로서의 입장에서) 로마 전도를 시작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의 성경 말씀의 포인트가 됩니다.
우리는 전도할 때에 장애나 마이너스 요소가 눈에 띕니다. 그러나 어떤 장애가 가로막아도 또 어떤 곤란에 둘러싸여도 그것들이 복음을 가둘 수는 없습니다. 어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울리는 것입니다. 실은 복음 선교에는 마이너스 요소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전도의 주인이신 성령께서 마이너스 요소를 플러스 요소로 바꿔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도행전은 그 사실을 줄곧 보여주었습니다. 복음 선교에는 마이너스 요소는 없다. 사도행전이 우리의 생명의 말씀이 된다는 것은 이것을 확신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전도 거점에서 맨 먼저 바울이 한 것이 17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흘 후에 바울이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그들이 모인 후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내가 이스라엘 백성이나 우리 조상의 관습을 베척한 일이 없는데 예루살렘에서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내준 바 되었으니”(17절)
바울은 우선 로마의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불렀습니다. 이 “높은 사람들”이라는 것은 로마의 유대인 사회에 있어서 지도적 입장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야말로 로마에 온 죄수 바울에게는 가장 위험한 사람들이 아니었을까요? 왜냐하면, 예루살렘에서 그들에게 바울 암살의 사전 지시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로마의 유대인들로부터의 회답은 의외였습니다. “우리가 유대에서 네게 대한 편지도 받은 일이 없고 또 형제 중 누가 와서 네게 대하여 좋지 못한 것을 전하든지 이야기한 일도 없느니라”(21절)
즉 예루살렘으로부터의 정보가 전혀 전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울은 최악의 사태도 상정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와 똑같이 폭행을 당하거나 폭동에 말려드는 각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체포되고 가이사랴에서 이년간 유대인들에게 고발당하고 있었다는 정보조차 전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도 예상 밖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냉정하게 생각하면, 사실은 이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곳이야말로 당시 유대교와 기독교의 큰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로마에 온 바울을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맞아들였을까요? 그들은 서둘러 로마 중심부에서 바울을 맞이하러 찾아 왔습니다.(15절)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교제이며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유대교는 어떻습니까? 사실 지금 예루살렘과 로마 사이에 분단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 시대의 기독교와 유대교의 차이입니다.
유대교의 성지인 예루살렘의 종교적 지도자들은 자긍심 강한 성전의 제사장들이었습니다. 거기에 그들의 스테이터스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주변의 유대교 공동체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하물며 멀리, 이교의 땅에 있는 로마의 유대 교도들과의 교제 등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년간 예루살렘에서 소동이 일어난 지명 수배범이 이 로마에서는 타관 사람 취급을 하는 정도로 해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교제와 분단, 이 양자의 차이가 이 유대인들의 최초의 회답에 명확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이 회답 속에서 유대인들이 날카로운 말을 바울에게 들이대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이 파에 대하여는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 알기 때문이라”(22절), 이들의 발언입니다. “이 파” 라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기독교를 말합니다. 즉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 안다”, 이것이 그들의 기독교 이해입니다. 여기에서 두 가지의 소중한 진리가 주어집니다.
첫번째는 사도행전을 읽으면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복음이 온 세상에 전해졌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 안다”는 것은 결코 크게 성공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교회는 도처에서 반대하고 싸우고 있는 것이 현실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지금 사도행전은 간단히 그 페이지를 덮으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문에 두번째, 실로 복음 선교, 그리고 교회에는 곳곳에서 반대가 있지만 오히려 이것이 기치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원래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반대가 있어 십자가에 못박히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곳에서 반대가 있는 것은 십자가 위에서 주 예수님께서 조망하신 풍경 그대로였습니다. 이 세상은 우리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입니다.
그것은 주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을 때에 이미 예고되어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2장에 구세주를 대망하고 드디어 구세주를 만난 늙은 신앙인 시므온이 한 말이 있습니다. “시므온이 그들에게 축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룩 2:34)
주 예수 그리스도 그 자체가 “반대를 받는 표적”입니다.
누가복음의 속편이 사도행전입니다. 즉 누가복음에서 최초로 예고된 “반대를 받는 표적”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밝혀지고, 그리고 최종적으로 이 십자가의 말씀을 선교하는 복음 선교가 “반대를 받는 표적”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대를 받는 표적”인 주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타협하지 않고 선교했기 때문에 바울은 지금 쇠사슬에 묶여 있는 것입니다. 실로 이 이스라엘의 소망이 반대를 받는 표적과 다름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것을 이 로마 땅에 보낸 로마서의 테마라고 말할 수 있는 부분으로 명확히 선언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리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로마 1:16)
이것이 로마서를 관철하는 테마입니다.
그렇다면, 그 테마로 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한다”고 바울은 선언했을까요? 그것은 복음이 곧 반대를 받는 표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복음이 반대를 받는 표적이기 때문에 바울은 지금 쇠사슬에 매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부끄러움이 아닙니다. 오히려 소망입니다. 이것은 소망의 쇠사슬인 것입니다.
우리는 전도를 시작할 때, 맨 먼저 마이너스 요소를 찾아 버립니다. 그러나 이 쇠사슬에 매이고 로마 전도를 시작한 바울의 모습은 복음 선교에 마이너스 요소는 없다는 것을 웅변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복음 선교에 마이너스 요소는 없음을 사도행전은 여기까지 나타내 온 것입니다. 이 사도행전이 우리의 생명의 말씀이라면 복음 선교에 어떤 해로운 요소도 없다고 확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어려움은 소망의 쇠사슬이 될 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이 내용은 지금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묻고 있는 물음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반대를 받는 표적”을 기치로 이 세상의 싸움에 보내어져 있는 것입니다.
각자 보내져 있는 그 장소, 그 깃발 아래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싸움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2021年11月7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ローマ(로마서) 18章 19~20節
〇讃 頌 讃頌歌 200(1, 3節)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聖書奉読 使徒言行録(사도행전) 28章11~15節
〇説 教 「希望の鎖につながれて(소망의 쇠사슬에 매여서)」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488(1, 3節)
〇献 金
〇報 告
〇感謝祈祷
〇頌 栄 讃頌歌 1
〇祝 祷
【 2021年 11月 7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
「希望の鎖につながれて」 使徒言行録 28章 16~22節
いよいよパウロのローマ伝道が始まりました。16節です。「わたしたちがローマに入ったとき、パウロは番兵を一人つけられたが、自分で住むことを許された。」(16節)
これが、ローマにおけるパウロの生活環境です。他の囚人たちよりは自由であったようですが、番兵がつけられた囚人であったことは、何ら変わりません。パウロのローマ伝道は、パウロ自身の大きなビジョンではありましたが、それは「エルサレムでわたしのことを力強く証ししたように、ローマでも証しをしなければならない」(使23:14)という神さまの命令でもありました。ですから、神さまが、ここから(鎖につながれた囚人としての立場から)、ローマ伝道を始めよとおっしゃっているわけです。これが、今日の御言葉のポイントとなります。
私たちは伝道をするときに、障害やマイナス要素に目が留まります。しかし、どのような障害が立ちはだかろうが、どのような困難に囲まれようが、それらが福音を閉じ込めるようなことは出来ません。どのような中でも、神さまの御言葉は響くのです。実は、福音宣教にはマイナス要素はないのです。なぜなら、伝道の主である聖霊がマイナス要素をプラス要素に変えて下さるからです。この使徒言行録は、そのことをずっと示してきました。福音宣教にはマイナス要素はない。使徒言行録が、私たちの命の言葉になるというのは、これを確信し、イエス・キリストに仕えることなのです。
さて、その伝道拠点で、真っ先にパウロがしたことが17節に記されています。「三日の後、おもだったユダヤ人たちを招いた。彼らが集まって来たとき、こう言った。『兄弟たち、わたしは、民にタイしても先祖の慣習にタイしても、背くようなことは何一つしていないのに、エルサレムで囚人としてローマ人の手に引き渡されてしまいました。』」(17節)
パウロは、まず、ローマに住むおもだったユダヤ人たちを招きました。この「おもだったユダヤ人たち」というのは、ローマのユダヤ人社会のおいて指導的立場にあった人たちのことです。しかし、彼らこそがローマにやってきた囚人パウロにとって、最も危険な人々ではなかったでしょうか。エルサレムから彼らに、パウロ暗殺の根回しがあってもおかしくなかったからです。
ところが、ローマのユダヤ人たちからの回答は意外なものでした。「私どもは、あなたのことについてユダヤから何の書面も受け取ってはおりませんし、また、ここに来た兄弟のだれ一人として、あなたについて何か悪いことを報告したことも、話したこともありませんでした。」(21節)
すなわち、エルサレムからの情報が全く伝わっていなかったのです。パウロは最悪の事態も想定していたはずです。今までと同じように暴行を受けたり、暴動に巻き込まれる覚悟もあったでしょう。しかし、パウロがエルサレムで逮捕され、カイサリアで2年間ユダヤ人たちから告発されていたという情報さえ伝わっていなかったのです。これはパウロも予想外であったはずです。
しかし、冷静に考えますと実はこれが非常に大切です。ここにこそ、当時のユダヤ教とキリスト教の大きな違いがあるからです。
思い出していただきたいのです。ローマにやってきたパウロをローマのキリスト者たちはどうやって迎え入れたでしょうか。彼らは、大急ぎでローマの中心部からパウロを迎えに飛んできました。(15節)これがキリスト者の交わりであり、教会の姿です。
しかし、ユダヤ教はどうでしょうか。実に今、エルサレムとローマの間に分断が起こっているのです。これがこの時代のキリスト教とユダヤ教の違いなのです。
ユダヤ教の聖地であるエルサレムの宗教的指導者たちは、誇り高き神殿の祭司たちでした。そこに彼らのステータスがありました。ですから、彼らは、その周辺のユダヤ教の共同体には、さほど関心がなかったのでしょう。ましてや、遠く、異教の地にあるローマのユダヤ教徒たちとの交わりなどには、全く興味がなかったのです。だから、2年間エルサレムが騒いだお尋ね者、指名手配犯が、このローマではよそ者程度で済まされているわけです。交わりと分断、この両者の違いが、このユダヤ人たちの最初の回答で明確に示されているのです。
さらに大切なのは、この回答の中で、ユダヤ人たちが、鋭い言葉をパウロに突き付けているところです。それは、「この分派については、至るところで反対があることを耳にしている(22節)」、この彼らの発言です。「この分派」というのは他でもないキリスト教のことです。 つまり、「至るところで反対があることを耳にしている」、これが彼らのキリスト教理解です。ここから2つの大切な真理が与えられます。
一つ目は、使徒言行録を読みますと、聖霊の働きによって、福音が世界中に伝えられていったことがよくわかります。しかし、「至るところで反対があることを耳にしている」ということは、決して大成功しているわけではないのです。むしろ、教会はいたるところで反対され、戦っている、それが現実であったのです。そういう状況で、今、使徒言行録はあっさりとそのページを閉じようとしているのです。
しかし、それゆえに二つ目、実に福音宣教、そして、教会には、至るところで反対があるが、むしろこれが旗印ともなっているのです。なぜなら、それは、そもそも教会の頭であるイエスキリスト御自身が、反対があるがゆえに十字架につけられたからです。至るところで反対がある、それは十字架の上から主イエスさまが眺められた風景そのものであったわけです。この世は、私たちの主を十字架につけたのです。
そのことは、主イエスさまが誕生された時に、すでに予告されておりました。ルカによる福音書2章に、救い主を待ち望んで、ついに救い主にまみえた年老いた信仰者シメオンが語った言葉があります。「シメオンは彼らを祝福し、母親のマリアに言った。『ご覧なさい。この子は、イスラエルの多くの人を倒したり立ち上がらせたりするためにと定められ、また、反対を受けるしるしとして定められています。』」(ルカ2:34)
主イエス・キリストそのものが、「反対を受けるしるし」なのです。
ルカによる福音書の続編が使徒言行録です。すなわち、ルカ福音書で最初に予告された「反対を受けるしるし」は、キリストの十字架で明らかになり、そして、最終的に、この十字架の言葉を宣教する福音宣教が、「反対を受けるしるし」になっていた、ということなのです。そして「反対を受けるしるし」である主イエスの十字架と復活を妥協せず宣教したので、パウロは今鎖につながれているのです。実に、このイスラエルの希望が、反対を受けるしるしに他ならないのです。
そして、パウロは、これを、このローマの地に宛てたローマの信徒への手紙のテーマといえる部分で明確に宣言しています。「わたしは福音を恥としない。福音は、ユダヤ人をはじめ、ギリシア人にも、信じる者すべてに救いをもたらす神の力だからです。」(ローマ1:16) これがローマの信徒への手紙を貫くテーマです。
では、そのテーマで、どうして、「わたしは福音を恥としない」、とパウロは宣言したのでしょうか。それは、福音が、そのまま反対を受けるしるしであるからです。そして、福音が反対を受けるしるしであるがゆえに、パウロは今鎖につながれております。しかし、それは彼の恥ではありません。むしろ希望です、これは希望の鎖なのです。
私たちは伝道を始める時、真っ先にマイナス要素を探してしまいます。しかし、この鎖につながれてローマ伝道を始めたパウロの姿は、福音宣教にマイナス要素はない、ということを雄弁に語っています。それどころか、福音宣教にマイナス要素はない、それを使徒言行録は、ここまで示してきたのです。この使徒言行録が私たちの命の言葉とされるならば、福音宣教にマイナス要素などないと確信できるのです。
これから先、キリスト者であるがゆえに、私たちに与えられるあらゆる困難は、希望の鎖となるでしょう。「わたしは福音を恥としない」、これは今、全てのキリスト者に問われています。そして、私たちは「反対を受けるしるし」を旗印に、世の戦いに遣わされているのです。
それぞれ遣わされた場所で、その御旗のもとにあって、「わたしは福音を恥としない」、これが私たちの信仰の戦いです。私たちキリスト者の生き様なのです。
【2021년 11월 7일 주일예배(요약판)】
“소망의 쇠사슬에 매여서” 사도행번 28장 16~22절
드디어 바울의 로마 전도가 시작되었습니다. 16절입니다. “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 바울에게 자기를 지키는 한 군인과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더라”(16절)
이것이 로마에서의 바울의 생활 환경이었습니다. 다른 죄수들보다는 자유로웠던 것 같습니다만 파수병이 딸리는 죄수였던 것은 조금도 변하지 않습니다. 바울의 로마 전도는 바울 자신의 큰 비전이긴 했지만, 그것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사23:14) 라는 하나님의 명령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여기서부터(쇠사슬에 매인 죄수로서의 입장에서) 로마 전도를 시작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의 성경 말씀의 포인트가 됩니다.
우리는 전도할 때에 장애나 마이너스 요소가 눈에 띕니다. 그러나 어떤 장애가 가로막아도 또 어떤 곤란에 둘러싸여도 그것들이 복음을 가둘 수는 없습니다. 어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울리는 것입니다. 실은 복음 선교에는 마이너스 요소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전도의 주인이신 성령께서 마이너스 요소를 플러스 요소로 바꿔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도행전은 그 사실을 줄곧 보여주었습니다. 복음 선교에는 마이너스 요소는 없다. 사도행전이 우리의 생명의 말씀이 된다는 것은 이것을 확신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전도 거점에서 맨 먼저 바울이 한 것이 17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흘 후에 바울이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그들이 모인 후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내가 이스라엘 백성이나 우리 조상의 관습을 베척한 일이 없는데 예루살렘에서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내준 바 되었으니”(17절)
바울은 우선 로마의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불렀습니다. 이 “높은 사람들”이라는 것은 로마의 유대인 사회에 있어서 지도적 입장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야말로 로마에 온 죄수 바울에게는 가장 위험한 사람들이 아니었을까요? 왜냐하면, 예루살렘에서 그들에게 바울 암살의 사전 지시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로마의 유대인들로부터의 회답은 의외였습니다. “우리가 유대에서 네게 대한 편지도 받은 일이 없고 또 형제 중 누가 와서 네게 대하여 좋지 못한 것을 전하든지 이야기한 일도 없느니라”(21절)
즉 예루살렘으로부터의 정보가 전혀 전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울은 최악의 사태도 상정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와 똑같이 폭행을 당하거나 폭동에 말려드는 각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체포되고 가이사랴에서 이년간 유대인들에게 고발당하고 있었다는 정보조차 전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도 예상 밖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냉정하게 생각하면, 사실은 이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곳이야말로 당시 유대교와 기독교의 큰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로마에 온 바울을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맞아들였을까요? 그들은 서둘러 로마 중심부에서 바울을 맞이하러 찾아 왔습니다.(15절)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교제이며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유대교는 어떻습니까? 사실 지금 예루살렘과 로마 사이에 분단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 시대의 기독교와 유대교의 차이입니다.
유대교의 성지인 예루살렘의 종교적 지도자들은 자긍심 강한 성전의 제사장들이었습니다. 거기에 그들의 스테이터스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주변의 유대교 공동체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하물며 멀리, 이교의 땅에 있는 로마의 유대 교도들과의 교제 등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년간 예루살렘에서 소동이 일어난 지명 수배범이 이 로마에서는 타관 사람 취급을 하는 정도로 해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교제와 분단, 이 양자의 차이가 이 유대인들의 최초의 회답에 명확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이 회답 속에서 유대인들이 날카로운 말을 바울에게 들이대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이 파에 대하여는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 알기 때문이라”(22절), 이들의 발언입니다. “이 파” 라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기독교를 말합니다. 즉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 안다”, 이것이 그들의 기독교 이해입니다. 여기에서 두 가지의 소중한 진리가 주어집니다.
첫번째는 사도행전을 읽으면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복음이 온 세상에 전해졌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 안다”는 것은 결코 크게 성공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교회는 도처에서 반대하고 싸우고 있는 것이 현실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지금 사도행전은 간단히 그 페이지를 덮으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문에 두번째, 실로 복음 선교, 그리고 교회에는 곳곳에서 반대가 있지만 오히려 이것이 기치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원래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반대가 있어 십자가에 못박히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곳에서 반대가 있는 것은 십자가 위에서 주 예수님께서 조망하신 풍경 그대로였습니다. 이 세상은 우리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입니다.
그것은 주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을 때에 이미 예고되어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2장에 구세주를 대망하고 드디어 구세주를 만난 늙은 신앙인 시므온이 한 말이 있습니다. “시므온이 그들에게 축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룩 2:34)
주 예수 그리스도 그 자체가 “반대를 받는 표적”입니다.
누가복음의 속편이 사도행전입니다. 즉 누가복음에서 최초로 예고된 “반대를 받는 표적”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밝혀지고, 그리고 최종적으로 이 십자가의 말씀을 선교하는 복음 선교가 “반대를 받는 표적”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대를 받는 표적”인 주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타협하지 않고 선교했기 때문에 바울은 지금 쇠사슬에 묶여 있는 것입니다. 실로 이 이스라엘의 소망이 반대를 받는 표적과 다름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것을 이 로마 땅에 보낸 로마서의 테마라고 말할 수 있는 부분으로 명확히 선언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리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로마 1:16)
이것이 로마서를 관철하는 테마입니다.
그렇다면, 그 테마로 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한다”고 바울은 선언했을까요? 그것은 복음이 곧 반대를 받는 표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복음이 반대를 받는 표적이기 때문에 바울은 지금 쇠사슬에 매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부끄러움이 아닙니다. 오히려 소망입니다. 이것은 소망의 쇠사슬인 것입니다.
우리는 전도를 시작할 때, 맨 먼저 마이너스 요소를 찾아 버립니다. 그러나 이 쇠사슬에 매이고 로마 전도를 시작한 바울의 모습은 복음 선교에 마이너스 요소는 없다는 것을 웅변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복음 선교에 마이너스 요소는 없음을 사도행전은 여기까지 나타내 온 것입니다. 이 사도행전이 우리의 생명의 말씀이라면 복음 선교에 어떤 해로운 요소도 없다고 확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어려움은 소망의 쇠사슬이 될 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이 내용은 지금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묻고 있는 물음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반대를 받는 표적”을 기치로 이 세상의 싸움에 보내어져 있는 것입니다.
각자 보내져 있는 그 장소, 그 깃발 아래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싸움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