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 일행은 멜리데 섬을 출항하여 수라구사, 레기온, 보디올로 가고, 보디올에서는 육로를 통해 로마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확실한 인도하심 가운데 무사히 목적지인 로마에 도착했습니다.
오늘의 성경말씀은 단지 그 내용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냥 무심코 읽고 지나쳐 버립니다만, 주의 깊게 읽어보면 사실 여기에는 이상한 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14절의 내용입니다. “거기서 형제들을 만나 그들의 청함을 받아 이레를 함께 머무니라 그래서 우리는 이와 같이 로마로 가니라”(14절)
바울의 이때의 입장이란 어디까지나 죄수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밖에도 다른 죄수들이 있어서 로마 황제 밑에서 재판을 받기 위해 백부장 율리오가 로마까지 호송하고 있는 도중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여기에서는 “그들의 청함을 받아 이레를 함께 머무니라” 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느새 로마의 성도들과 바울의 사정으로 이 로마로의 죄수 호송이 중단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청함을 받아 이레를 머무니라” 라고 번역된 말은 그리스어 본문으로는 조금 뉘앙스가 다릅니다. 이 부분을 직역하면 “이레를 머물면서 우리는 위로를 받았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위로하다” “위로받았다”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파라칼레오(παρακαλέω)” 라고 합니다. 이 “파라칼레오” 라는 말이 성경적으로 아주 중요한 말이고, 그리고 이것이 사도행전의 종결 부분에 나오는 것이 바로 포인트입니다.
사실 이 “파라칼레오” 라는 말은 사도행전에 있어서 신도들의 주고받는 교제의 본질을 잘 나타내는 중요한 말입니다.
사도행전 14장 22절에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사14:22) 라고 쓰여 있습니다. 여기에 있는 “마음을 굳게하여(격려했다)” 라는 것이 “파라칼레오”이고 바울은 제1차 전도 여행 말미에 전도 여행 중에 주어진 신도들을 격려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라는 것은 이 이후의 바울의 모습 그대로가 아니었을까요?
제2차 전도 여행, 제3차 전도 여행, 그리고 이번 로마로의 여행에서 실로 바울은 정말 많은 환난을 맛보았습니다. 투옥되거나, 폭동이나 폭풍우를 만나거나, 병으로 쓰러지거나 하는 그런 많은 괴로움을 거쳐 바울은 로마에 도착한 것입니다. 바울은 남의 일처럼 여기며 격려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자기 자신에게 이제부터 일어날 괴로움을 생각해서 말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 사람들과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 괴로움은 다를지도 모른다, 그래도 바울은 “우리가” 라고 말하면서 서로 격려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격려한다(파라칼레오)” 라는 말은 교회를 포괄하는 말인 것입니다.
이것은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괴로움은 각각 다르고 장소도 다릅니다. 그래도 누군가의 괴로움은 우리의 괴로움이며 교회의 괴로움인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의 누군가의 괴로움이나 슬픔이라는 것을 얼마나 담당하고 있을까요? 여기에 현재의 교회의 약함이 있는 것이 아닐까요?
바울은 이미 이 2년 이상 전에 로마를 향하여 편지를 쓰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로마서입니다. 그리고 그 로마서의 서두에 “파라칼레오”가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회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로마1:12)
이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라는 말이 “파라칼레오”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편지의 인사로서 우선 “파라칼레오”인 진정한 성도의 교제를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로마 땅에서 “파라칼레오”를 찾아 여기까지 걸어온 것입니다. 또한 로마 땅을 밟은 그 바울의 최초 모습에 “파라칼레오”가 사용된 것입니다. 이 얼마나 재치 있는 말씀의 연출입니까?
“그들의 청함을 받아 이레를 함께 머무니라” 는 바꾸어 번역을 해봐도 “이레를 머무는 것으로 우리는 위로를 받았다” 라고 여기에서는 담담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얼마나 큰 기쁨이 있었을까요? 바울에게는 만감이 교차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언젠가는 가고 싶다고 바라면서도 몇 번이나 발이 묶여 방해를 받고 죽을 고비를 몇번이나 넘기고 겨우 당도한 이 로마 땅에서 바울은 “파라칼레오”로 말미암아 사랑하는 형제 자매에게 초대를 받은 것입니다. 그 기쁨은 얼마나 큰 것이었을까요?
그리고 백부장이나 병사들은 이 이레동안 “파라칼레오”인 성도의 교제를 적어도 묵인한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로마 중심부에서 성도들이 찾아왔습니다. “그 곳 형제들이 우리 소식을 듣고 입비오 광장과 트레이스 타베르네까지 맞으러 오니 바울이 그들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으니라”(15절)
여기에는 조금 전의 “파라칼레오”에 이어 하나 더 교회의 모습을 상징하는 중요한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그들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이 “감사한다”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주의 만찬의 말씀으로, 예수님께서 떡을 뗄 때에 사용되고 있는 매우 중요한 말입니다. 우리 교회의 성찬식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실은 이 말은 저 폭풍의 바다 장면의 클라이맥스 부분에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때어 먹기를 시작하매”(사 27:35) 이 “축사” 라는 말입니다.
실은 여기에 교회가 세워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 폭풍의 바다 가운데 말입니다. 276명 중 아마 성도는 바울과 누가와 아리스다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데도 불구하고 거기는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마18:20)이었습니다. 훌륭한 교회입니다.
바로 거기에서 이 폭풍우 가운데의 교회에서 바울은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때어 먹기를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실로 이 폭풍우 바다가 초기 교회가 처한 상황 그 자체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박해나 궁핍에 둘러싸여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서 전도를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최초로 이 사도행전의 말씀이 주어진 교회에 있어서 이 폭풍속 바다의 어둠 가운데서의 떡 뗌(성찬식)의 모습 그대로였던 것입니다.
이 사도행전의 말씀 하나로 얼마나 많은 위로와 용기가 교회 전체에 주었을까요? 그것을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 사도행전의 하나 하나의 말씀은 바로 생명의 말씀 그대로였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떨까요? 지금까지 주어진 말씀이 정말로 우리에게 있어서 생명의 말씀이 되어 있을까요?
우리는 많은 것이 주어져 있는 풍요로운 환경에서 복음 선교를 섬기는 것이 허락되고 있습니다. 너무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없어져도 교회는 쓰러지지 않습니다. 돌연 그 하나 하나가 빼앗기거나 없어지거나 하는 일도 있습니다. 지금도 코로나 때문에 활동이 제한되고 있습니다. 앞으로 또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사도행전 전체를 배웠습니다. 우리는 이제 이 사도행전의 말씀을 갖고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이 말씀을 따라가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들에게는 주님이신 하나님과 말씀 밖에 의지할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늘 말씀만을 의지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기도하고 계속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그리스도의 복음은, 십자가의 말씀은 땅 끝까지 전파된 것입니다.
지금 전도가 잘 안된다는 것은 이것이 결여되어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말씀만을 의지하고 계속 기도하는 것, 그리고 위로의 교제를 계속 가지는 것입니다.
2021年10月31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マタイ(마태복음) 18章 19~20節
〇讃 頌 讃頌歌 35(1, 4節)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聖書奉読 使徒言行録(사도행전) 28章11~15節
〇説 教 「教会の姿がここに(교회의 모습이 여기에)」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221(1, 2, 3節)
〇献 金
〇報 告
〇感謝祈祷
〇頌 栄 讃頌歌 1
〇祝 祷
【 2021年 10月 31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
「教会の姿がここに」使徒言行録 28章11~15節
今週からいよいよこの使徒言行録の終結部分へと入って行きます。
パウロたちは、マルタ島を出航し、シラクサ、レギオン、プテオリへと行き、プテオリからは陸路でローマへと向かいました。そして、神さまの確かな導きの中で、無事に目的地のローマへと到着いたします。
今日の聖書箇所は、ただそれだけの内容です。それで私たちは何気なく読んでしまいますが、注意深く読みますと、ここにはおかしな出来事が記されているのです。それが、14節の内容です。「わたしたちはそこで兄弟たちを見つけ、請われるままに七日間滞在した。こうして、わたしたちはローマに着いた。」(14節)
パウロのこの時の立場というのは、あくまでも囚人の一人でありました。他にも囚人たちがいて、ローマ皇帝のもとで裁きを受けるために、百人隊長ユリウスがローマまで護送している途中であったわけです。それがここでは、「請われるままに七日間滞在した」と記録されているのです。いつの間にか、ローマの信徒たちとパウロの都合で、このローマへの囚人護送が中断され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
この「請われるままに七日間滞在した」と訳されている言葉は、ギリシャ語本文では少しニュアンスが違うんですね。この部分を直訳しますと、「七日間滞在することで、私たちは慰められた」となります。この「慰める」、「慰められた」という言葉は、ギリシャ語で「パラカレオー(παρακαλέω)」と言います。この「パラカレオー」という言葉が聖書的に非常に大切な言葉で、そして、これが使徒言行録の終結部分に出てくるのが、ポイントなのです。
実は、この「パラカレオー」という言葉は、使徒言行録において、信徒たちの交わりの本質を示してきた大切な言葉なのです。
使徒言行録14章22節に「弟子たちを力づけ、『わたしたちが神の国に入るには、多くの苦しみを経なくてはならない』と言って、信仰に踏みとどまるように励ました。」(使14:22)とあります。ここにあります「励ました」というのが、「パラカレオー」で、パウロの第一回伝道旅行の終わりに、伝道旅行中に与えられた信徒たちを奮い立たせているところです。それにも関わらず、この「多くの苦しみを経なくてはならない」というのは、この後のパウロの姿そのままではないでしょうか。第二回伝道旅行、第三回伝道旅行、そして、この度のローマへの旅において、実にパウロは多くの苦しみを味わいました。投獄される、暴動や嵐に遭う、病に倒れる、そのような多くの苦しみを経て、パウロはローマの着いたのです。パウロは人ごとのように励ましているのではないのです。自分自身にこれから起こるであろう苦しみを重ねているのです。パウロはこの人たちと二度と会えないかもしれない、その苦しみは違うかもしれない、それでもパウロは、「わたしたち」がと言って、互いに励まそうとしているのです。ですから、この「励ます(パラカレオー)」という言葉は、教会を包括する言葉であるのです。
これは私たちも同じです。私たちの苦しみというのは、それぞれ違い、場所も違います。それでも、誰かの苦しみというのは、私たちの苦しみであり、教会の苦しみであるわけです。私たちは教会の誰かの苦しみ、悲しみというものを、どれほど担っているでしょうか。ここに現在の教会の弱さがあ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パウロは、すでにこの2年以上前にローマに向けて手紙を書いていました。それがローマの信徒への手紙です。そして、そのローマの信徒への手紙の冒頭に、「パラカレオー」が使われているのです。「あなたがたのところで、あなたがたとわたしが互いに持っている信仰によって、励まし合いたいのです。」(ローマ1:12)
この励まし合いたいという言葉が「パラカレオー」です。パウロはローマの信徒への手紙のあいさつで、まず「パラカレオー」である真の信徒の交わりを求めているのです。そして、パウロは、ローマの地に「パラカレオー」を求めて、ここまで歩んできたのです。さらにローマの地を踏んだそのパウロの最初の姿に、「パラカレオー」が使われているのです。なんと気の利いた御言葉の演出ではないでしょうか。
「請われるままに七日間滞在した」、訳し変えて見ても「七日間滞在することで、私たちは慰められた」と、ここでは淡々と記録されています。しかし、ここにどれだけの喜びがあったでしょうか。今パウロには、万感の思いがあったはずです。
いつかは行きたいと願いながらも、何度も足止めを食らい、妨害され、死ぬ思いを何度も超えて、たどり着いたこのローマの地で、パウロは「パラカレオー」によって愛する兄弟姉妹に招かれたのです。その喜びは、如何ほどであったでしょう。
そして百人隊長や兵士たちは、この七日の間、「パラカレオー」である信徒の交わりを、少なくとも黙認したのです。
それからさらに、ローマの中心部から、信徒たちがやってきます。「ローマからは、兄弟たちがわたしたちのことを聞き伝えて、アピイフォルムとトレス・タベルネまで迎えに来てくれた。パウロは彼らを見て、神に感謝し、勇気づけられた。」(15節)
ここには、先ほどの「パラカレオー」に続いて、もう一つ教会の姿を象徴する大切な言葉があります。それは「パウロは彼らを見て、神に感謝し」、この「感謝し」という言葉です。これは、主の晩餐の御言葉で、イエスさまがパンを裂くときに使われている非常に大切な言葉です。私たちの教会の聖餐式の御言葉でもあります。
そして、実は、この言葉は、あの嵐の海の場面のクライマックス部分で使われているのです。「こう言ってパウロは、一同の前でパンを取って神に感謝の祈りをささげてから、それを裂いて食べ始めた。」(使27:35) この「感謝の祈り」という言葉です。
実は、ここに教会が建っていたのです。この嵐の海の中で。276名のうちおそらく信徒は、パウロとルカとアリスタルコだけでした。しかし、それでもなお、そこは、「二人または三人がイエスの名によって集まるところ」(マタイ18:20)であったのです。立派な教会です。
まさに、そこで、この嵐の中の教会で、「パウロは、一同の前でパンを取って神に感謝の祈りをささげてから、それを裂いて食べ始めた」のです。
そして大切なのは、実に、この嵐の海が、最初期の教会の置かれた状況そのものであった、ということです。彼らは、迫害や窮乏に囲まれて、いつ死んでもおかしくない状況で伝道をしていたからです。
最初にこの使徒言行録の御言葉を与えられた教会にとって、この嵐の海の暗闇の中でのパン裂きは、他ならぬ当時の教会のパン裂き(聖餐式)の姿そのものであったのです。
この使徒言行録の御言葉一つで、どれだけの慰めと勇気が教会全体に与えられたでしょうか。それを思いめぐらしていただきたいのです。彼らにとってこの使徒言行録の一つ一つの御言葉は、まさに命の言葉そのものであったはずです。
私たちはどうでしょうか。今まで与えられてきた御言葉が本当に私たちにとって命の言葉になっていますでしょうか。
私たちは、多くのものを与えられ、豊かな環境で福音宣教に仕えることが許されています。非常に感謝すべきことです。しかし、それがなくなっても、教会は倒れません。突然、その一つ一つが奪われたり、失われたりすることもあります。今もコロナ感染症に脅かされ、活動が制限されています。この先また、厳しい状況に立たされるかもしれません。
しかし、私たちは、今や、使徒言行録全体を教えられました。私たちは、今、この使徒言行録の御言葉を持っております。今こそ、この御言葉に立とうではありませんか。
彼らには、主なる神様と御言葉にしか、よりどころがありませんでした。だから、御言葉だけに頼ったのです。だから祈って、祈って、祈り続けたのです。その結果、キリストの福音は、十字架の言葉は、地の果てまで宣べ伝えられました。
今、伝道が上手く行かないというのは、これがかけているだけかもしれません。御言葉だけに頼って祈り続けること、そして、慰めの交わりを持ち続けること。皆さん、これを取り戻そうではありませんか。
【2021년 10월 31일 주일예배(요약판)】
“교회의 모습이 여기에” 사도행전 28장 11~15절
이번 주부터 드디어 이 사도행전의 종결 부분으로 들어갑니다.
바울 일행은 멜리데 섬을 출항하여 수라구사, 레기온, 보디올로 가고, 보디올에서는 육로를 통해 로마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확실한 인도하심 가운데 무사히 목적지인 로마에 도착했습니다.
오늘의 성경말씀은 단지 그 내용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냥 무심코 읽고 지나쳐 버립니다만, 주의 깊게 읽어보면 사실 여기에는 이상한 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14절의 내용입니다. “거기서 형제들을 만나 그들의 청함을 받아 이레를 함께 머무니라 그래서 우리는 이와 같이 로마로 가니라”(14절)
바울의 이때의 입장이란 어디까지나 죄수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밖에도 다른 죄수들이 있어서 로마 황제 밑에서 재판을 받기 위해 백부장 율리오가 로마까지 호송하고 있는 도중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여기에서는 “그들의 청함을 받아 이레를 함께 머무니라” 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느새 로마의 성도들과 바울의 사정으로 이 로마로의 죄수 호송이 중단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청함을 받아 이레를 머무니라” 라고 번역된 말은 그리스어 본문으로는 조금 뉘앙스가 다릅니다. 이 부분을 직역하면 “이레를 머물면서 우리는 위로를 받았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위로하다” “위로받았다”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파라칼레오(παρακαλέω)” 라고 합니다. 이 “파라칼레오” 라는 말이 성경적으로 아주 중요한 말이고, 그리고 이것이 사도행전의 종결 부분에 나오는 것이 바로 포인트입니다.
사실 이 “파라칼레오” 라는 말은 사도행전에 있어서 신도들의 주고받는 교제의 본질을 잘 나타내는 중요한 말입니다.
사도행전 14장 22절에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사14:22) 라고 쓰여 있습니다. 여기에 있는 “마음을 굳게하여(격려했다)” 라는 것이 “파라칼레오”이고 바울은 제1차 전도 여행 말미에 전도 여행 중에 주어진 신도들을 격려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라는 것은 이 이후의 바울의 모습 그대로가 아니었을까요?
제2차 전도 여행, 제3차 전도 여행, 그리고 이번 로마로의 여행에서 실로 바울은 정말 많은 환난을 맛보았습니다. 투옥되거나, 폭동이나 폭풍우를 만나거나, 병으로 쓰러지거나 하는 그런 많은 괴로움을 거쳐 바울은 로마에 도착한 것입니다. 바울은 남의 일처럼 여기며 격려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자기 자신에게 이제부터 일어날 괴로움을 생각해서 말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 사람들과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 괴로움은 다를지도 모른다, 그래도 바울은 “우리가” 라고 말하면서 서로 격려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격려한다(파라칼레오)” 라는 말은 교회를 포괄하는 말인 것입니다.
이것은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괴로움은 각각 다르고 장소도 다릅니다. 그래도 누군가의 괴로움은 우리의 괴로움이며 교회의 괴로움인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의 누군가의 괴로움이나 슬픔이라는 것을 얼마나 담당하고 있을까요? 여기에 현재의 교회의 약함이 있는 것이 아닐까요?
바울은 이미 이 2년 이상 전에 로마를 향하여 편지를 쓰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로마서입니다. 그리고 그 로마서의 서두에 “파라칼레오”가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회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로마1:12)
이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라는 말이 “파라칼레오”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편지의 인사로서 우선 “파라칼레오”인 진정한 성도의 교제를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로마 땅에서 “파라칼레오”를 찾아 여기까지 걸어온 것입니다. 또한 로마 땅을 밟은 그 바울의 최초 모습에 “파라칼레오”가 사용된 것입니다. 이 얼마나 재치 있는 말씀의 연출입니까?
“그들의 청함을 받아 이레를 함께 머무니라” 는 바꾸어 번역을 해봐도 “이레를 머무는 것으로 우리는 위로를 받았다” 라고 여기에서는 담담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얼마나 큰 기쁨이 있었을까요? 바울에게는 만감이 교차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언젠가는 가고 싶다고 바라면서도 몇 번이나 발이 묶여 방해를 받고 죽을 고비를 몇번이나 넘기고 겨우 당도한 이 로마 땅에서 바울은 “파라칼레오”로 말미암아 사랑하는 형제 자매에게 초대를 받은 것입니다. 그 기쁨은 얼마나 큰 것이었을까요?
그리고 백부장이나 병사들은 이 이레동안 “파라칼레오”인 성도의 교제를 적어도 묵인한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로마 중심부에서 성도들이 찾아왔습니다. “그 곳 형제들이 우리 소식을 듣고 입비오 광장과 트레이스 타베르네까지 맞으러 오니 바울이 그들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으니라”(15절)
여기에는 조금 전의 “파라칼레오”에 이어 하나 더 교회의 모습을 상징하는 중요한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그들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이 “감사한다”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주의 만찬의 말씀으로, 예수님께서 떡을 뗄 때에 사용되고 있는 매우 중요한 말입니다. 우리 교회의 성찬식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실은 이 말은 저 폭풍의 바다 장면의 클라이맥스 부분에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때어 먹기를 시작하매”(사 27:35) 이 “축사” 라는 말입니다.
실은 여기에 교회가 세워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 폭풍의 바다 가운데 말입니다. 276명 중 아마 성도는 바울과 누가와 아리스다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데도 불구하고 거기는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마18:20)이었습니다. 훌륭한 교회입니다.
바로 거기에서 이 폭풍우 가운데의 교회에서 바울은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때어 먹기를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실로 이 폭풍우 바다가 초기 교회가 처한 상황 그 자체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박해나 궁핍에 둘러싸여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서 전도를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최초로 이 사도행전의 말씀이 주어진 교회에 있어서 이 폭풍속 바다의 어둠 가운데서의 떡 뗌(성찬식)의 모습 그대로였던 것입니다.
이 사도행전의 말씀 하나로 얼마나 많은 위로와 용기가 교회 전체에 주었을까요? 그것을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 사도행전의 하나 하나의 말씀은 바로 생명의 말씀 그대로였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떨까요? 지금까지 주어진 말씀이 정말로 우리에게 있어서 생명의 말씀이 되어 있을까요?
우리는 많은 것이 주어져 있는 풍요로운 환경에서 복음 선교를 섬기는 것이 허락되고 있습니다. 너무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없어져도 교회는 쓰러지지 않습니다. 돌연 그 하나 하나가 빼앗기거나 없어지거나 하는 일도 있습니다. 지금도 코로나 때문에 활동이 제한되고 있습니다. 앞으로 또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사도행전 전체를 배웠습니다. 우리는 이제 이 사도행전의 말씀을 갖고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이 말씀을 따라가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들에게는 주님이신 하나님과 말씀 밖에 의지할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늘 말씀만을 의지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기도하고 계속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그리스도의 복음은, 십자가의 말씀은 땅 끝까지 전파된 것입니다.
지금 전도가 잘 안된다는 것은 이것이 결여되어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말씀만을 의지하고 계속 기도하는 것, 그리고 위로의 교제를 계속 가지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을 회복시킵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