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의 성경말씀 마지막 부분인 사도행전 26장 18절입니다.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18절)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즉 모든 사람이 죄사함을 받고 기업을 얻게 하기 위하여 바울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전도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업을 얻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좋을 때도 나쁠 때도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시고 하나님과 함께 걷는다는 것입니다. 기쁠 때에도 시련이 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풍부한 것으로 하시는 것입니다. 건강할 때도 병든 때도 젊을 때도 늙을 때도 그 날들에 하나님의 배려가 가득 차 있다는 것입니다. 우회하는 것 같은 뭔가 잘 풀리지 않는 그런 때에도 하나님의 풍부한 인도하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오늘의 성경말씀에서 그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과 회개에 대해서 자기가 말해 온 내용에 있어서 선지자들이나 모세가 반드시 일어난다고 말한 것 외에는 말하지 않고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과 조금도 모순되지 않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왕인 아그립바 왕을 의식해서 말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아그립바 왕은 유대교를 열심히 믿는 성도가 아닙니다. 그러나 유대의 왕으로서 일단 유대의 율법이나 전통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가 유대의 율법이나 전통에서 벗어난 일을 하고 있지 않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메시아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23절) 라고,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바울의 말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총독 베스도는 참지 못하고 말했습니다.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24절)
구약 성경의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당연한 반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구약 성경을 믿고 있는 아그립바 왕은 다릅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그립바 왕을 향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26절입니다.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이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쪽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니이다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26-27절)
지난 주 말씀드렸듯이 “죄인의 괴수”인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바울은 그 구원받은 기쁨을 어떻게든 전하려고 구약 성경을 알고 있는 아그립바 왕에게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아그립바 왕은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28절) 라고 반발했던 것입니다.
결국 바울의 말은 꾸며 차려 입고 구경을 나온 권력자들에게는 통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끈질지게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어 달라고 호소했지만, 사람들은 일어나서 말을 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아그립바 왕은 말했습니다.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상소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석방될 수 있을 뻔하였다.”(32절) 라고.
아그립바 왕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은 통하지 않았습니다만, 바울이 결백하다는 것은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바울이 어리석은 남자, 비참한 존재로 보였습니다. 하긴 그들에게 있어서 바울은 뻔히 석방되는 기회를 놓쳐 버린 어리석은 바보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셨을 때, 그 모습은 전혀 다릅니다. 쇠사슬에 묶여 이제부터 로마로 호송될 죄수 바울은 진정한 생명에 살아 숨쉬는 귀중한 존재였던 것입니다. 잘 차려 입은 유복하고 힘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눈에는 어리석고 무지한 존재인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처럼 살 수도 있고 아그립바 왕들처럼 살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있습니다. 한 번 선택을 해도 인간은 흔들리기 쉽고 어느 쪽으로든 흔들리는 것입니다.
바울은 주 예수님을 만나서 회심한 후, 시종 일관하여 진정한 생명에 사는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바울의 이러한 행보가 가능했던 것은 “죄인의 괴수”인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았다는 기쁨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쁨을 전하는 자로서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사명을 부여받았다는 것이 힘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의 소망을 하나님의 약속에 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약속”이란 약속한 쌍방이 그것을 지키는 의지가 있는 한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과의 사이에서의 약속은 반드시 어느 한쪽 혹은 동시에 양쪽의 당사자가 그 약속을 포기할 때 무효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약속은 이러한 사람들 사이에서 행해지는 약속과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어떤 의미에서 일방적인 약속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은 그 상대인 우리 인간이 바뀌어 변하여도 무효는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맹세코 이 약속을 우리 인간 위에 성취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선지자들이 전했고, 이스라엘의 선조들이 믿었던 약속이란 그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지는 소망은 이 하나님의 확실함 위에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동안 신종 코로나19의 감염 확대가 시작된 지난해 봄부터 매주 사도행전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벌써 1년 반이 지났습니다. 어쩌면 코로나 상태의 어려운 시기였기 때문에 사도행전의 메시지를 더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도행전은 부활의 주님께서 하늘로 올려 지시는 주님의 승천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주님의 승천일부터 10일 후가 펜테코스테 (성령강림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올라가시고 성령이 내려오시기까지의 9일간 제자들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성령강림이 어떤 것인지 제자들은 확실히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실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무르라는 주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제자들은 기도하면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인생 여정 중에 기도하면서 기다려야하는 그런 때를 보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일인가를 일으키시기 전의 그 시간을 기대하면서 기다립니다. 어떤 때에는 앞날이 보이지 않고, 아무리 기도해도 대답이 없어 어찌할 바를 모를 때, 마음이 꺾일 것 같을 때, 전혀 움직이지 않는 현실 가운데, 그리스도의 뜻을 알 수 없는 가운데 기다립니다.
오늘의 사도행전 부분에서 바울은 감금되어 있습니다. 몇 번이나 심판 자리에 끌려 나가 명확한 죄목이 정해지지도 않은 채 죄수로 갇혀 있습니다. 주 예수님으로부터 로마에서 선교하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전혀 나아갈 길이 보이지 않는 로마로 향하는 길 가운데 하나님께서 드디어 일을 일으키시는 그 때를 바울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1년 반은 주님의 승천일부터 성령강림을 기다리는 것 같은 길고 긴 기도의 1년 반이었다고도 생각됩니다. 거듭 말씀드린 것 같이 사도행전은 성령언행록입니다. 제자들의 활약이나 초대 교회의 발전상을 대단하다고 느끼며 읽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인도하신 성령의 역사를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사도행전(성령언행록)도 이제 2장을 남겨 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이 세계에 팬데믹을 가져오셨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이 팬데믹의 1년 반을 사도행전을 읽으면서 걸어 온 것은 은혜였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우리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히로시마 교회에 그리고 이 세계의 그리스도인에게 희망을 가지고 계십니다. 베드로나 바울이 특별했기 때문에 보호하신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모든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주시고 각자의 로마로 인도하십니다.
성령의 바람이 불 때, 거기에는 실망이 아니며, 막다른 곳도 아니고, 반드시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는 것을 우리는 사도행전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주위 사람들로부터 어리석은 바보로 간주되어 사슬에 묶여 로마로 향합니다. 그러나 그 걸음은 하나님께 인도받고, 하나님께 소중한 것으로 되어 하나님의 말씀(약속의 말씀)과 함께 지켜지는 것입니다. 우리도 로마로 향합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의 귀중한 자로 되어서 각자의 로마를 향해 걸어가는 것입니다.
2021年10月3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イザヤ書(이사야) 42章 6~7節
〇讃 頌 讃頌歌 262(1, 3, 5節)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聖書奉読 使徒言行録(사도행전) 26章19~32節
〇説 教 「人間には愚かでも神には貴いこと
(인간에게는 어리석으나 하나님께는 소중한 것)」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370(1, 4節)
〇献 金
〇報 告
〇感謝祈祷
〇頌 栄 讃頌歌 1
〇祝 祷
【 2021年 10月 3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
「人間には愚かでも神には貴いこと」 使徒言行録26章19~32節
先週の聖書箇所の最後、使徒言行録26章18節にこうありました。「こうして彼らがわたしへの信仰によって、罪の赦しを得、聖なる者とされた人々と共に恵みの分け前にあずかるようになるためである。」(18節)
ここに彼らとありますが、彼らとはユダヤ人と異邦人、つまりすべての人です。そのすべての人が罪赦され、恵みの分け前にあずかるようになるために、パウロがキリストによって伝道者にされたということです。また、恵みというのは、神さまと共に生きることを意味します。良き時も悪しき時も、神さまが共にいてくださり、神さまと共に歩むということですね。喜びの時も試練の時も、神さまと共にあって、そのすべてのことが豊かなものとされるのです。健康な時も病の時も、若い時も年老いた時も、その日々に神さまの配慮が満ち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回り道のようなうまくいかない時期でさえ、神さまの豊かな導きがあるのです。
そして、パウロは今日の聖書箇所では、そのイエス・キリストの救いと悔い改めについて自分が語ってきた内容において、預言者やモーセが必ず起こると語ったこと以外は語っておらず、旧約聖書に記されていることとなんら矛盾をしないことを語っております。
これは、イスラエルの王であるアグリッパ王を意識して語っていと思われます。アグリッパ王はユダヤ教の熱心な信徒ではありません。しかし、ユダヤの王として、一応はユダヤの律法や伝統はよく知っておりました。それでパウロは自分がユダヤの律法や伝統から外れたことをしているのではないと強調しているのです。しかし、「メシアが苦しみを受け、また、死者の中から最初に復活して、民にも異邦人にも光を語り告げることになる」(23節)と、人間の理解を超えていることをパウロが語るものですから、この言葉を受け入れることが出来ません。そのため、総督フェストゥスは我慢できずに言葉を挟みました。「お前は頭がおかしい。学問のしすぎで、おかしくなったのだ。」(24節)
旧約聖書の神の救いについて知らない人にとっては、当然の反応かと思います。しかし、旧約聖書を信じているアグリッパ王は別です。だからパウロはアグリッパ王に向かってこう語りかけました。26節です。「王はこれらのことについてよくご存じですので、はっきりと申し上げます。このことは、どこかの片隅で起こったのではありません。ですから、一つとしてご存じないものはないと、確信しております。アグリッパ王よ、預言者たちを信じておられますか。信じておられることと思います。」(26~27節)
先週、お話ししたように、「罪人の中で最たる者」である自分が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救われたパウロは、その救われた喜びを何とか伝えようと、旧約聖書を知っているアグリッパ王に訴えかけました。しかし、アグリッパ王は「短い時間でわたしを説き伏せて、キリスト信者にしてしまうつもりか」(28節)と、反発したのです。
結局、パウロの言葉は、着飾って見物に集まった権力者たちには届きませんでした。パウロは粘り強くキリストの死と復活を信じてほしいと訴えましたが、人々は立ち上がって話を打ち切ってしまいます。そして、アグリッパ王は言いました。「あの男は皇帝に上訴さえしていなければ、釈放してもらえただろうに」(32節)と。
アグリッパ王たちに、キリストの福音の言葉は届きませんでしたが、パウロが無実であることは分かったのです。彼らには、パウロが愚かな男、惨めな存在に見えました。確かに、彼らにとってパウロはみすみす釈放されるチャンスを逃した馬鹿な奴でしかなかったのです。
しかし、神さまからご覧になったとき、その姿はまるで違います。鎖につながれ、これからローマへと護送される囚人のパウロは真の命に生きる貴い存在であったのです。着飾った裕福で力ある人々は、神さまの目には愚かな無知な存在なのです。私たちはパウロのようにも生きることができますし、アグリッパ王たちのように生きることもできます。私たちには選択の自由があります。一度選択しても、人間は揺れやすく、どちら側にでも振れるものです。
パウロは主イエスさまと出会い回心した後、終始一貫して、真の命に生きる歩みを続けております。パウロのこのような歩みが出来たのは、「罪人の中で最たる者」である自分が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救われたという喜びからでした。そして、その喜びを伝える者として、主イエス・キリストから使命を与えられたということが、力となっておりました。それから、パウロは自らの希望を神さまの約束においていたからなのです。
私たちが考える「約束」は約束した双方の側にそれを守る意志がある限り有効であると考えます。ですから、人間の間での約束は必ずどちらか一方、あるいは同時に両方の当事者がその約束を放棄することで無効となってしまうのです。しかし、聖書の語る約束はこのような人間の間で行われる約束とは違います。神さまの約束はある意味で一方的な約束です。ですから、神さまの約束はその相手である私たち人間が変わってしまっても無効にはならないのです。そして、神さまは自らに誓ってこの約束を私たち人間の上に成就することを明らかにしてくださったのです。預言者たちが伝え、イスラエルの先祖たちが信じ続けた約束とはそのようなものです。ですから、私たちのもつ希望は、この神さまの確かさの上にあることを覚えたいと思います。
ところで、新型コロナ感染症の感染拡大が始まった昨年の春から使徒言行録を読み始めました。もう一年半が経ちます。コロナ禍の困難な時だからこそ、使徒言行録のメッセージがリアルに聞けたかと思うのです。
使徒言行録は、復活の主が天にあげられる、主の昇天から始まります。そして、その主の昇天日から10日後がペンテコステ(聖霊降臨日)ですね。キリストが天に昇られ、聖霊が降ってくるまでの間の9日間、弟子たちは待っていました。聖霊降臨がどのようなものかは、弟子たちにははっきりとは分からなかったでしょう。しかし、聖霊が注がれるまでエルサレムにとどまるようにという主イエスさまの言葉に従って、弟子たちは祈りながら待っていたのです。
皆さん、私たちもまた、祈りつつ待つという時を人生において過ごします。神さまが何事かを起こされるその前の時、期待しながら待ちます。ある時はこれから先の展望が見えない、祈っても祈っても答えがなく途方に暮れている時、心折れそうになる時、まったく動きのない現実の中で、キリストの思いが分からない中、待ちます。
今日の使徒言行録の箇所ではパウロは監禁されています。何度も裁きの場へ引き出され明確な罪を指摘されないまま囚人とされています。主イエスさまからローマで宣教せよとご指示を受けながら、一向に進まないローマへの道のりの中、神さまがいよいよ事を起こされるその時を、パウロも待っています。
ここまでの一年半は、主の昇天日から聖霊降臨を待つような、長い長い祈りの一年半であったとも思います。繰り返し申してきましたように、使徒言行録は、聖霊言行録です。弟子たちの活躍や初代教会の発展ぶりを、すごいねと読むのではなく、それを導いておられた聖霊の働きを読むべきものでした。この使徒言行録(聖霊言行録)も、残り二章で読み終えます。神さまがどのような意図をもってこの世界にパンデミックをもたらされたのかは分かりません。しかしながら、このパンデミックの一年半を、聖霊言行録を読みながら歩んできたことは恵みであったと思います。神さまの御旨は、私たちはよく分かりませんが、しかしなお神さまは広島教会に、そしてこの世界のキリスト者に希望を持っておられます。ペトロやパウロが特別だったから守られたのではなく、神さまが愛しておられるすべての民に、神さまは聖霊を注ぎ、それぞれのローマへと導かれます。
聖霊の風が吹き渡る時、そこには失望ではなく、行き止まりでもなく、必ず神さまの新しい世界が開けることを私たちは聖霊言行録によって知らされてきました。パウロは、周りの人々からは愚か者とみなされ鎖につながれローマへと向かいます。しかし、その歩みは神さまに導かれ、神さまに貴いものとされ、神さまの御言葉(約束の言葉)と共に守られるのです。私たちもローマへ向かいます。聖霊に導かれ、神さまの御言葉を聞き、神さまに貴い者とされて歩んで行くのです。
【2021년 10월 3일 주일예배(요약판)】
“인간에게는 어리석으나 하나님께는 소중한 것” 사도행전 26장 19~32절
지난 주의 성경말씀 마지막 부분인 사도행전 26장 18절입니다.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18절)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즉 모든 사람이 죄사함을 받고 기업을 얻게 하기 위하여 바울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전도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업을 얻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좋을 때도 나쁠 때도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시고 하나님과 함께 걷는다는 것입니다. 기쁠 때에도 시련이 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풍부한 것으로 하시는 것입니다. 건강할 때도 병든 때도 젊을 때도 늙을 때도 그 날들에 하나님의 배려가 가득 차 있다는 것입니다. 우회하는 것 같은 뭔가 잘 풀리지 않는 그런 때에도 하나님의 풍부한 인도하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오늘의 성경말씀에서 그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과 회개에 대해서 자기가 말해 온 내용에 있어서 선지자들이나 모세가 반드시 일어난다고 말한 것 외에는 말하지 않고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과 조금도 모순되지 않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왕인 아그립바 왕을 의식해서 말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아그립바 왕은 유대교를 열심히 믿는 성도가 아닙니다. 그러나 유대의 왕으로서 일단 유대의 율법이나 전통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가 유대의 율법이나 전통에서 벗어난 일을 하고 있지 않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메시아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23절) 라고,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바울의 말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총독 베스도는 참지 못하고 말했습니다.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24절)
구약 성경의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당연한 반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구약 성경을 믿고 있는 아그립바 왕은 다릅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그립바 왕을 향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26절입니다.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이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쪽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니이다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26-27절)
지난 주 말씀드렸듯이 “죄인의 괴수”인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바울은 그 구원받은 기쁨을 어떻게든 전하려고 구약 성경을 알고 있는 아그립바 왕에게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아그립바 왕은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28절) 라고 반발했던 것입니다.
결국 바울의 말은 꾸며 차려 입고 구경을 나온 권력자들에게는 통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끈질지게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어 달라고 호소했지만, 사람들은 일어나서 말을 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아그립바 왕은 말했습니다.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상소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석방될 수 있을 뻔하였다.”(32절) 라고.
아그립바 왕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은 통하지 않았습니다만, 바울이 결백하다는 것은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바울이 어리석은 남자, 비참한 존재로 보였습니다. 하긴 그들에게 있어서 바울은 뻔히 석방되는 기회를 놓쳐 버린 어리석은 바보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셨을 때, 그 모습은 전혀 다릅니다. 쇠사슬에 묶여 이제부터 로마로 호송될 죄수 바울은 진정한 생명에 살아 숨쉬는 귀중한 존재였던 것입니다. 잘 차려 입은 유복하고 힘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눈에는 어리석고 무지한 존재인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처럼 살 수도 있고 아그립바 왕들처럼 살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있습니다. 한 번 선택을 해도 인간은 흔들리기 쉽고 어느 쪽으로든 흔들리는 것입니다.
바울은 주 예수님을 만나서 회심한 후, 시종 일관하여 진정한 생명에 사는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바울의 이러한 행보가 가능했던 것은 “죄인의 괴수”인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았다는 기쁨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쁨을 전하는 자로서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사명을 부여받았다는 것이 힘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의 소망을 하나님의 약속에 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약속”이란 약속한 쌍방이 그것을 지키는 의지가 있는 한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과의 사이에서의 약속은 반드시 어느 한쪽 혹은 동시에 양쪽의 당사자가 그 약속을 포기할 때 무효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약속은 이러한 사람들 사이에서 행해지는 약속과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어떤 의미에서 일방적인 약속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은 그 상대인 우리 인간이 바뀌어 변하여도 무효는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맹세코 이 약속을 우리 인간 위에 성취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선지자들이 전했고, 이스라엘의 선조들이 믿었던 약속이란 그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지는 소망은 이 하나님의 확실함 위에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동안 신종 코로나19의 감염 확대가 시작된 지난해 봄부터 매주 사도행전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벌써 1년 반이 지났습니다. 어쩌면 코로나 상태의 어려운 시기였기 때문에 사도행전의 메시지를 더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도행전은 부활의 주님께서 하늘로 올려 지시는 주님의 승천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주님의 승천일부터 10일 후가 펜테코스테 (성령강림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올라가시고 성령이 내려오시기까지의 9일간 제자들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성령강림이 어떤 것인지 제자들은 확실히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실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무르라는 주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제자들은 기도하면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인생 여정 중에 기도하면서 기다려야하는 그런 때를 보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일인가를 일으키시기 전의 그 시간을 기대하면서 기다립니다. 어떤 때에는 앞날이 보이지 않고, 아무리 기도해도 대답이 없어 어찌할 바를 모를 때, 마음이 꺾일 것 같을 때, 전혀 움직이지 않는 현실 가운데, 그리스도의 뜻을 알 수 없는 가운데 기다립니다.
오늘의 사도행전 부분에서 바울은 감금되어 있습니다. 몇 번이나 심판 자리에 끌려 나가 명확한 죄목이 정해지지도 않은 채 죄수로 갇혀 있습니다. 주 예수님으로부터 로마에서 선교하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전혀 나아갈 길이 보이지 않는 로마로 향하는 길 가운데 하나님께서 드디어 일을 일으키시는 그 때를 바울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1년 반은 주님의 승천일부터 성령강림을 기다리는 것 같은 길고 긴 기도의 1년 반이었다고도 생각됩니다. 거듭 말씀드린 것 같이 사도행전은 성령언행록입니다. 제자들의 활약이나 초대 교회의 발전상을 대단하다고 느끼며 읽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인도하신 성령의 역사를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사도행전(성령언행록)도 이제 2장을 남겨 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이 세계에 팬데믹을 가져오셨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이 팬데믹의 1년 반을 사도행전을 읽으면서 걸어 온 것은 은혜였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우리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히로시마 교회에 그리고 이 세계의 그리스도인에게 희망을 가지고 계십니다. 베드로나 바울이 특별했기 때문에 보호하신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모든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주시고 각자의 로마로 인도하십니다.
성령의 바람이 불 때, 거기에는 실망이 아니며, 막다른 곳도 아니고, 반드시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는 것을 우리는 사도행전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주위 사람들로부터 어리석은 바보로 간주되어 사슬에 묶여 로마로 향합니다. 그러나 그 걸음은 하나님께 인도받고, 하나님께 소중한 것으로 되어 하나님의 말씀(약속의 말씀)과 함께 지켜지는 것입니다. 우리도 로마로 향합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의 귀중한 자로 되어서 각자의 로마를 향해 걸어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