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을 폭풍의 바다 속에서 표류하던 바울 일행은 드디어 멜리데 섬까지 흘러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대로 276명 전원이 무사히 상륙할 수 있었습니다. 배도 짐도 모든 것을 잃어버린 그들이었습니다만, 섬 주민들이 아주 친절하게 대해 주었습니다.
28장 2절에 “비가 오고 날이 차매 원주민들이 우리에게 특별한 동정을 하여 불을 피워 우리를 다 영접하더라”(28:2) 라고 쓰여 있습니다. 섬의 주민들은 276명의 조난자를 위하여 모닥불을 피워 주었습니다. 이것은 힘든 노동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도 매우 바울다운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28장 3절입니다. “바울이 나무 한 묶음을 거두어 불에 넣으니 뜨거움으로 말미암아 독사가 나와 그 손을 물고 있는지라”(3절)
바울은 그때 이미 60세 정도로 체력적으로도 쇠약해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주일 이상을 저 폭풍의 바다에서 보내고 기진맥진했겠지요. 그 이상으로 바울은 저 폭풍의 어둠 속에서 삶의 소망을 잃은 사람들을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며 모두를 살리기 위해 일한 제일의 공로자입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쉴 틈조차 없이 불을 피우기 위해 마른 가지를 모으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여기에서도 열심히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관념적인 것이 아닙니다. 사상이나 마음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눈 앞의 현실 속에서 일어서는 것입니다. 신앙자는 주어진 장소에서 눈 앞의 필요를 감지하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열심히 봉사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황당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바울이 독사에 물려 버린 것입니다. 섬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바울이 살인자였기 때문에 천벌이 내린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몇 분 후에는 바울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손바닥을 뒤집듯 “그를 신이라”고 말했습니다. (28:5-6)
그런데 오늘의 말씀 속에서 바울은 한마디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단지 묵묵히 일하고 있을 뿐입니다. 일본어와 한국어의 성경을 보는 한 여기에는 아버지 하나님도 예수 그리스도도 성령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마치 하나님과는 관계없이 시간이 흐르는 것처럼 담담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이것은 실로 현대의 우리가 처한 상황과 아주 흡사합니다. 우리의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밖에 의지할 곳이 없는 신앙인 일수록 마치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은 현실에 괴로워할 때가 있습니다. “주여, 어디에 계십니까?” 라고 말입니다.
실은 여기에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27장 44절의 “사람들이 다 상륙하여 구조되니라” 라고 하는 말과, 28장 1절의 “우리가 구조된 후에”라는 말입니다. “구원받았다”와 “구원한다”라는 말이 수동태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다 구원받았다”, “우리가 구원받은 후”라고 되는 것입니다만, 배에 있던 276명 전원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이신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성경은 눈에 보이지 않는 그 하나님의 구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전혀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야말로, 주님이신 하나님의 구원이 실현되고 있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리인 것입니다.
크리스천일지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눈앞이 캄캄해지는 듯한 심정이 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악물고 살아 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이를 악물어도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구원받고 있다는 사실은 조금도 바뀌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철저하게 수동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약속을,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 그 자체로 우리는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성경 말씀에는 멜리데 섬에서의 바울의 모습에 대해서 한 가지 더 흥미로운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열병과 이질로 몸져 누워 있었던 멜리데 섬에서 가장 높은 사람 보블리오의 부친을 바울이 고쳤습니다. 그 사실이 섬 전체에 전해지고 온 섬의 병자들이 바울 곁으로 치료받으러 왔고 바울은 그들의 병을 고쳐 주었습니다. 섬 사람들은 그것에 감사해 하며 3개월 후 출범할 때에는 필요한 것을 준비해 주었다고 합니다.
멜리데 섬에서 바울이 복음을 전했다든가, 그 밖에 뭔가 활동을 했다든가에 관해 성경에는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마 바울이니까 반드시 복음을 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멜리데 섬에서의 사건, 또 바울의 활동으로서 기록되어 있는 것은 바울이 독사에 물려도 아무렇지 않았던 것과 병을 치료하는 것 뿐입니다.
어느 쪽도 놀랄 만한 일이며 기적입니다만, 이것을 통하여 성경은 우리에게 도대체 무엇을 가르치고자 하는 것일까요?
당시 독사에 물린다는 것은 그야말로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또, 의료가 발달하지 않은 당시에는 병에 걸리는 것 역시 죽음과 직결되어 있었습니다.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던 폭풍우 속에서 무사히 멜리데 섬에 표착한 바울은 그야말로 죽음을 뛰어넘어 온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의 노력이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 하나님의 구원으로 죽음을 뛰어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은 죽음을 능가하는 구원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6장에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열한 명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과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 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막16:17-18)
바울은 바로 이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의 약속대로의 일을 체험한 것입니다. 이 약속은 믿는 사람 모두에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라고 믿는다면 이 약속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울이기 때문에 할 수 있었고 우리들이 도저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우리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확실히 우리는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한 “힘”이 주어진다고는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표적”이 주어진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표적”이란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십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 어떠한 기적이나 구원이라는 것을 구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뭔가를 할 수 있는 게 아닌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려고 하는 사탄의 유혹이나, 자기 자신의 죄뿐입니다. 그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은혜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고 새로운 생명이 주어집니다. 이제 우리 안에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고 계십니다. 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힘에 의하여 믿는 사람은 독사를 불에 떨어 뜨리는 것입니다. 독사는 사탄의 상징입니다. 죄를 만드는 사탄의 기능을 멸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가운데 살아 갑니다. 그것이 오늘의 성경 말씀에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요구되고 있는 것은 이러한 표적을 행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 약속을 정말로 믿는 것입니다. 이 약속을 해 주신 예수님께서 반드시 함께 계셔서 우리에게도 이러한 표적을 따르게 해 주신다는 것을 믿고 구해 가야만 합니다.
바울의 전도 여행, 그 여로에 함께 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우리 삶의 여로에도 함께 계십니다. 아멘.
2021年10月24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マルコ(마가복음) 16章 15, 17~18節
〇讃 頌 讃頌歌 543(1, 4節)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聖書奉読 使徒言行録(사도행전) 27章39節~28章10節
〇説 教 「主は共におられる(주님께서는 함께 계신다)」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391(1, 3節)
〇献 金
〇報 告
〇感謝祈祷
〇頌 栄 讃頌歌 1
〇祝 祷
【 2021年 10月 24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
「主は共におられる」 使徒言行録 27章39節~28章10節
何日も嵐の海の中、漂流したパウロたちは、ついにマルタ島まで流れ着き、神さまの約束の言葉通り、276名全員が無事に上陸することが出来ました。船も荷物もすべてなくした彼らでしたが、島の住民たちが大変親切にしてくれました。
28章2節に、「島の住民は大変親切にしてくれた。降る雨と寒さをしのぐためにたき火をたいて、わたしたち一同をもてなしてくれたのである」(28:2)とあります。島の住民は、276名もの遭難者のために、たき火をたいてくれました。これは大変な労働です。そして、ここでもパウロのとても彼らしい姿が描かれています。28章3節です。「パウロが一束の枯れ枝を集めて火にくべると、一匹の蝮が熱気のために出て来て、その手に絡みついた。」(3節)
パウロは、この時もう60歳くらいになっており、体力的にも衰えていたはずです。ただでさえ2週間以上、嵐の海で過ごして、くたくたであったでしょう。それ以上に、パウロは、あの嵐の海の暗闇の中で、生きる希望を失った人々を励まし、勇気づけ、全員が助かるために働いた一番の功労者です。しかし、彼は、今、休む暇さえ忘れて、火をおこすための枯れ枝を集めているのです。パウロはここでも必死になって奉仕をしているのです。これがキリスト教信仰の姿です。
私たちの信仰は観念的なものではありません。思想や心の問題ではないのです。そうではなくて、目の前の現実の中で立ち上がるものです。信仰者は、遣わされた場所で目の前の必要を感じ取って、自分の出来ることを見つけ、一生懸命に奉仕をするのです。
ところが、ここでとんでもないトラブルが発生しました。パウロが蝮に噛まれてしまったのです。島の人々はそれを見て、パウロが人殺しで、天罰が下ったのだと思いました。しかし、その数分後には、パウロになにも起こらないことを見ると、人々は手の平を返すかのように、「この人は神様だ」と思ったのです。(28:5-6)
ところで、今日の御言葉の中で、パウロは一言も語っていません。ただ黙々と働いているだけです。日本語と韓国語の聖書を見る限り、ここには父なる神さまもイエス・キリストも、聖霊も登場いたしません。まるで神さまと無関係に、淡々と時が流れているかのように描かれております。これは、実に現代の私たちが置かれている状況とよく似ています。私たちの神さまは目に見えないからです。神さまにしかよりどころがない信仰者ほど、まるで神さまがおられないような現実に苦しめられることがあるのです。「主よ、どこにおられるのですか」、と。
実は、ギリシャ語本文を見ますと、ここに神さまの導きが確認出来るのです。それは、27章44節の「全員が無事に上陸した」という言葉と、28章1節の「わたしたちが助かったとき」という言葉です。ここにギリシャ語本文では「救われた」と、「救う」という言葉が受け身形で使われています。ですから、「全員が無事に救われた」「わたしたちが救われたとき」となるわけですが、船にいた276名全員が、神さまによって救われたということです。主なる神さまは目に見えません。しかし、ここでも聖書は、目に見えないその神さまの救いを雄弁に語っているのです。全く神さまがおられないと思われる時にこそ、主なる神の救いが実現されている、これが聖書の語る真理なのです。
キリスト者でありましても、ほとんどの人が、目の前が真っ暗になるような思いをして、それでも歯を食いしばって生きています。それでも、歯を食いしばってもどうにもならないことは、いくらでもあります。しかし、それでもなお救われている、という事実は何ら変わらないのです。私たちの救いは、徹底的に受け身だからです。ですから、わたしたちはただ神さまの約束を、神さまの御言葉を信じる、それだけで私たちは救われるということなのです。
さて、今日の聖書箇所には、マルタ島でのパウロの様子についてもう一つ興味深いことが記されています。
熱病と下痢で寝込んでいたマルタ島の長官であったプブリウスの父親をパウロが癒やしました。それが島民全体に伝わり、島中の病人たちがパウロの元を癒しを求めて来たので、パウロは彼らの病を癒やしました。島民はそれに感謝し、3ヶ月後、船出する時には、必要なものを用意してくれたと言います。
マルタ島でパウロが福音を語ったとか、他に何か活動をしたとか、聖書には詳しく記されていません。恐らく、パウロのことですから、きっと福音を語ったのでしょう。でも、聖書には、マルタ島での出来事、また、パウロの活動として取り上げているのは、パウロが蝮に噛まれても何ともなかった事と病の癒やしのことだけです。
どちらも驚くべき業であり、奇跡ではあるのですが、このことを通して、聖書は私たちに一体何を教えようとしているのでしょうか。
当時、蝮に噛まれるというのは、それこそ死を意味していました。また、病も医療が発達していない当時、病気になることは死と直結していました。
死んでもおかしくなかった嵐の中、無事にマルタ島に漂着したパウロは、それこそ死を乗り越えてきたわけですね。それはパウロの努力、能力ではなく、神さまの恵みによって救われたからです。パウロはその神さまの救いによって、死を乗り越えたということです。神さまの約束、神さまの御言葉を信じる者は、死を乗り越える救いが与えられるのです。
マルコによる福音書16章には、復活されたイエスさまが11人の弟子たちに語った、次のような言葉が記されています。「信じる者には次のようなしるしが伴う。彼らはわたしの名によって悪霊を追い出し、新しい言葉を語る。手で蛇をつかみ、また、毒を飲んでも決して害を受けず、病人に手を置けば治る。」(マルコ16:17-18)
パウロはまさにこのイエスさまの言葉、イエスさまの約束通りのことを体験したのです。この約束は、信じる者全てに与えられています。私たちも、主イエス・キリストを神の子、救い主と信じるなら、この約束が与えられるのです。
でも、それはパウロだから出来たのであって、私たちには到底出来ることではない、現実ばなれしている、と思うかも知れません。確かに、私たちには出来そうにありません。でも、イエスさまは、「信じる者にはこのようなしるしが伴う」と言っておられるのです。そういう「力」が与えられるとは言っておられません。「このようなしるし」が与えられると言われたのです。その「しるし」とは、主イエス・キリスト御自身です。
皆さん、私たちの中に、何かの奇跡や救いというものを求めてはいけません。私たちが何か出来るということではないのです。私たちの中にあるのは、神さまの恵みから離れようとするサタンの働きであったり、自分自身の罪のみです。それが主イエス・キリストの十字架と復活の恵みにより、罪赦され、新しい命が与えられたのです。今や、私たちの中に主イエス・キリストが生きておられます。この私たちと共にいて下さる主イエス・キリストの力によって、信じる者は蛇を火の中に振り落とすのです。蛇というのは、サタンの象徴です。罪を生み出すサタンの働きを滅ぼした私たちは、神さまの救いの恵みの中で生かされていくのです。それが今日の御言葉に示されていることなのです。
皆さん、私たち求められていることは、これらのしるしを行うことができるように努力することではありません。主イエス・キリストのこの約束を本当に信じることです。この約束をして下さったイエスさまが必ず共にいて下さり、私たちにもこれらのしるしを伴わせて下さることを信じて求めていくことです。
パウロの伝道旅行のその旅路に共におられた主イエス・キリストは、私たちの人生の旅路にも共にいて下さるのです。アーメン。
【2021년 10월 24일 주일예배(요약판)】
“주님께서는 함께 계신다” 사도행전 27장 39절~28장 10절
며칠을 폭풍의 바다 속에서 표류하던 바울 일행은 드디어 멜리데 섬까지 흘러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대로 276명 전원이 무사히 상륙할 수 있었습니다. 배도 짐도 모든 것을 잃어버린 그들이었습니다만, 섬 주민들이 아주 친절하게 대해 주었습니다.
28장 2절에 “비가 오고 날이 차매 원주민들이 우리에게 특별한 동정을 하여 불을 피워 우리를 다 영접하더라”(28:2) 라고 쓰여 있습니다. 섬의 주민들은 276명의 조난자를 위하여 모닥불을 피워 주었습니다. 이것은 힘든 노동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도 매우 바울다운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28장 3절입니다. “바울이 나무 한 묶음을 거두어 불에 넣으니 뜨거움으로 말미암아 독사가 나와 그 손을 물고 있는지라”(3절)
바울은 그때 이미 60세 정도로 체력적으로도 쇠약해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주일 이상을 저 폭풍의 바다에서 보내고 기진맥진했겠지요. 그 이상으로 바울은 저 폭풍의 어둠 속에서 삶의 소망을 잃은 사람들을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며 모두를 살리기 위해 일한 제일의 공로자입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쉴 틈조차 없이 불을 피우기 위해 마른 가지를 모으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여기에서도 열심히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관념적인 것이 아닙니다. 사상이나 마음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눈 앞의 현실 속에서 일어서는 것입니다. 신앙자는 주어진 장소에서 눈 앞의 필요를 감지하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열심히 봉사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황당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바울이 독사에 물려 버린 것입니다. 섬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바울이 살인자였기 때문에 천벌이 내린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몇 분 후에는 바울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손바닥을 뒤집듯 “그를 신이라”고 말했습니다. (28:5-6)
그런데 오늘의 말씀 속에서 바울은 한마디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단지 묵묵히 일하고 있을 뿐입니다. 일본어와 한국어의 성경을 보는 한 여기에는 아버지 하나님도 예수 그리스도도 성령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마치 하나님과는 관계없이 시간이 흐르는 것처럼 담담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이것은 실로 현대의 우리가 처한 상황과 아주 흡사합니다. 우리의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밖에 의지할 곳이 없는 신앙인 일수록 마치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은 현실에 괴로워할 때가 있습니다. “주여, 어디에 계십니까?” 라고 말입니다.
실은 여기에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27장 44절의 “사람들이 다 상륙하여 구조되니라” 라고 하는 말과, 28장 1절의 “우리가 구조된 후에”라는 말입니다. “구원받았다”와 “구원한다”라는 말이 수동태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다 구원받았다”, “우리가 구원받은 후”라고 되는 것입니다만, 배에 있던 276명 전원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이신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성경은 눈에 보이지 않는 그 하나님의 구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전혀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야말로, 주님이신 하나님의 구원이 실현되고 있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리인 것입니다.
크리스천일지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눈앞이 캄캄해지는 듯한 심정이 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악물고 살아 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이를 악물어도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구원받고 있다는 사실은 조금도 바뀌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철저하게 수동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약속을,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 그 자체로 우리는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성경 말씀에는 멜리데 섬에서의 바울의 모습에 대해서 한 가지 더 흥미로운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열병과 이질로 몸져 누워 있었던 멜리데 섬에서 가장 높은 사람 보블리오의 부친을 바울이 고쳤습니다. 그 사실이 섬 전체에 전해지고 온 섬의 병자들이 바울 곁으로 치료받으러 왔고 바울은 그들의 병을 고쳐 주었습니다. 섬 사람들은 그것에 감사해 하며 3개월 후 출범할 때에는 필요한 것을 준비해 주었다고 합니다.
멜리데 섬에서 바울이 복음을 전했다든가, 그 밖에 뭔가 활동을 했다든가에 관해 성경에는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마 바울이니까 반드시 복음을 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멜리데 섬에서의 사건, 또 바울의 활동으로서 기록되어 있는 것은 바울이 독사에 물려도 아무렇지 않았던 것과 병을 치료하는 것 뿐입니다.
어느 쪽도 놀랄 만한 일이며 기적입니다만, 이것을 통하여 성경은 우리에게 도대체 무엇을 가르치고자 하는 것일까요?
당시 독사에 물린다는 것은 그야말로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또, 의료가 발달하지 않은 당시에는 병에 걸리는 것 역시 죽음과 직결되어 있었습니다.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던 폭풍우 속에서 무사히 멜리데 섬에 표착한 바울은 그야말로 죽음을 뛰어넘어 온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의 노력이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 하나님의 구원으로 죽음을 뛰어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은 죽음을 능가하는 구원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6장에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열한 명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과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 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막16:17-18)
바울은 바로 이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의 약속대로의 일을 체험한 것입니다. 이 약속은 믿는 사람 모두에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라고 믿는다면 이 약속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울이기 때문에 할 수 있었고 우리들이 도저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우리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확실히 우리는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한 “힘”이 주어진다고는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표적”이 주어진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표적”이란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십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 어떠한 기적이나 구원이라는 것을 구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뭔가를 할 수 있는 게 아닌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려고 하는 사탄의 유혹이나, 자기 자신의 죄뿐입니다. 그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은혜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고 새로운 생명이 주어집니다. 이제 우리 안에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고 계십니다. 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힘에 의하여 믿는 사람은 독사를 불에 떨어 뜨리는 것입니다. 독사는 사탄의 상징입니다. 죄를 만드는 사탄의 기능을 멸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가운데 살아 갑니다. 그것이 오늘의 성경 말씀에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요구되고 있는 것은 이러한 표적을 행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 약속을 정말로 믿는 것입니다. 이 약속을 해 주신 예수님께서 반드시 함께 계셔서 우리에게도 이러한 표적을 따르게 해 주신다는 것을 믿고 구해 가야만 합니다.
바울의 전도 여행, 그 여로에 함께 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우리 삶의 여로에도 함께 계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