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사랴에서 2년 동안이나 감금 상태에 있었던 바울은 드디어 로마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로마로 가는 길이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드디어 열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 로마로의 선박 여행도 고난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만 바울이 탄 배가 폭풍우에 휘말려 버린 것입니다.
전도 여행을 여러 해 동안 다녀온 바울은 배 여행도 여러 번 경험했기 때문에 이 시기의 항해가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 위험을 사람들에게 충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바울의 충고를 듣지 않고 자기들의 판단, 물론 그것은 전문가의 판단이기도 했지만, 그 판단에 따라 목적했던 항구로 가고자 했습니다.
그 결과, 항해 중에 폭풍이 바다에 휘몰아쳐 배는 떠내려가 버렸습니다. 실은 짐을 바다에 버리고 그리고 마침내 선구도 버려야 할 정도였습니다. 20절에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 라고 나와 있듯이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의 성경 말씀 26절까지의 상황입니다.
흔히 사람의 인생을 항해에 비유하곤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발걸음도 항해와 같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오늘의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 그 항해는 신앙인이라고 해서 갑자기 순풍이 불어 순풍 만범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해서 모든 것이 순조롭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둘째, 이 항해는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극히 상식적인 근거를 가지고 항해를 계속하는 위험성을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말은 옳았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우선시한 대다수의 의견에 묻혀 그들과 함께 폭풍우의 바다 속으로 휩쓸려 갔습니다.
옳은 길을 걷고 싶은데 결코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닐까요? 평안한 항해를 하고 싶은데 거칠고 광활한 바다를 항해하는 것은 바울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터무니없이 불똥이 튀거나 생각지도 못한 일에 휘말려들거나 혹은 배신당하거나 하는 우리의 삶은 그런 고난의 연속이며 우리의 신앙은 늘 그 안에서 시험받는 것입니다.
바울과 배에 있었던 모든 사람은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20절) 라는 상황에 몰렸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소망을 잃지 않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어둠에 지배되었을 때, 그 어둠에서 빛을 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어둠도 천지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손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배 부름 말씀으로 시편 139편 9~12절을 읽었습니다. 그 가운데 확고 부동한 신앙자의 말이 있었습니다.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시 139:11-12)
이 구약 시인이 노래한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시편 139:12),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신앙입니다.
이 세상은 “한치 앞은 어둠”이라고 합니다. 확실히 그럴 것입니다. 몇 시간 후 어떤 일을 당할지조차 모릅니다. 우리에게는 미래를 보는 눈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생은 항해라고 할 때, 앞일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이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것은 눈이 보이지 않는 나의 손을 이끌어 주시는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주 예수님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이끌어 주십니다. 마치 눈이 보이지 않는 주자의 손을 이끄는 반주자처럼 우리가 발을 헛디디지 않도록 이끌어 주시는 분이 바로 우리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그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혀 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입니다.
이 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한치 앞은 어둠”이 “한치 앞은 빛”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우리는 확실한 항해를 바랍니다. 그러나 안전하지 못한 항해에 휘말려 들거나 사나운 바다에 내던져지는 것뿐입니다. 그런데도 그 거칠고 광활한 바다를 “확실한 항해”로 만들어 주시는 것이 우리의 주 예수님이십니다.
어떤 고난과 어둠이 닥치더라도 그곳에서 주 예수님의 빛을 본다. 이것이 “산다”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어둠 속에서 주 예수님의 빛을 본 사람은 스스로 빛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22절입니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너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그런즉 우리가 반드시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22-26절)
바울이 믿는 하나님을 누가나 아리스다르고 이외는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그것이 믿을 만한 것일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신앙의 확신에 서서 힘차게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너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그런즉 우리가 반드시 한 섬에 걸리리라” 라고 말했을 때, 그 바울의 모습은 빛나게 보였을 것입니다. 절망 속에 있는 그들에게는 바울의 말이 소망의 빛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의 신앙이 강했기 때문에 빛날 수 있었던 것이었을까요? 신앙이 약한 우리는 빛날 수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강하다든가 약하다든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또, 지금의 상황이 어떤가라는 것도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신앙이 약한 우리가 그리스도 앞에 서 있는지 아닌지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빛에 비추어지고 빛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어디까지나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려고 했습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이라” 하는 자기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은 그 기쁨 속에 서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 그리스도께 기쁨의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로서 로마에 파견된 그리스도의 사명 속에 서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노라”, 바울의 이 말 속에 모든 것이 응축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결코 강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신앙도 항상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계속 서고자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서 이 예배를 마치고 나면 각각의 장소로 보내지게 됩니다. 그 보내진 곳이 광폭한 바다일지라도, 또 어둠일지라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를 받아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보내진 장소에는 죽음의 그림자를 걷는 소중한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의 폭풍우로 고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 부디 그 어두운 세상에 그리스도의 빛을 빛낼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2021年10月10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詩編(시편) 139編 9~12節
〇讃 頌 讃頌歌 524(1, 3節)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聖書奉読 使徒言行録(사도행전) 27章1~26節
〇説 教 「キリストの光に照らされて(그리스도의 빛에 비취어서)」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382(1, 4節)
〇献 金
〇報 告
〇感謝祈祷
〇頌 栄 讃頌歌 1
〇祝 祷
【 2021年 10月 10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
「キリストに照らされて」 使徒言行録27章1~26節
カイサリアで二年もの間、監禁状態であったパウロは、いよいよローマへ向かうこととなりました。ローマへ道が神さまの導きの中でついに開かれたのです。しかし、今回のローマへの船旅も苦難が待ち受けておりました。それはパウロが乗った船が嵐に巻き込まれたのです。
伝道旅行を何年にも渡って行ってきたパウロは、船旅も何度も経験し、この時期の航海がとても危険であることを理解しておりました。その危険を人々に忠告もしました。でも、人々は、パウロの忠告にも聞かず、自分たちの判断、勿論、それは専門家の判断でもありましたが、その判断に従い、目的の港に行こうとしました。
その結果、航海中に暴風が海に吹き荒れ、船は流されてしまったのです。積み荷を海に捨て、そして、ついには船具も捨てなければならないほどでした。20節に「幾日もの間、太陽も星も見えず、暴風が激しく吹きすさぶので、ついに助かる望みは全く消えうせようとしていた」とありますように、まさに、絶体絶命の状況であったわけですが、それが今日の聖書箇所26節までの状況です。
よく人の人生を航海に例えることがあります。私たちキリスト者の歩みも航海のようなものかもしれません。このことについて、今日の御言葉から2つことが教えられます。
まず1つ目は、その航海は、信仰者だからといって、急に追い風が吹いて順風満帆に進むわけではないと言うことです。キリスト者になったからといって、すべてが順調に生きていける、というわけではないのです。
そして2つ目、この航海は、思い通りにならない、ということです。パウロは、極めて常識的な根拠に立って、航海を続ける危険性を指摘しました。そして、彼の言うことは正しかったのです。しかし、この世の事情を優先した大多数の意見にかき消されて、彼らと共に嵐の海の中に巻き込まれていきました。
正しい道を歩みたいのに、決して思い通りにはならない、ということです。「生きていく」というのは、そういうことではないでしょうか。平安な航海をしたいのに、荒れ狂う海を航海する、それはパウロだけの話ではありません。とんでもないとばっちりを受けたり、思いもよらぬことに巻き込まれたり、或いは裏切られたり、私たちの人生は、そのような困難の連続であり、私たちの信仰はその中で試されるのです。
パウロと船にいた全ての人は、「ついに助かる望みは全く消えうせようとしていた」(20節)と、このような事態に追い込まれました。
しかし、そこで希望を失わないのがキリスト者です。「幾日もの間、太陽も星も見えず」、暗闇に支配された時、その暗闇に光を見るからキリスト者なのです。それは、その暗闇も、天地の創り主であられる神さまの御手の中にあるからです。
今日、礼拝の招きの言葉として、詩編139編9~12節をお読みしました。その中には、揺るぎない信仰者の言葉がありました。「わたしは言う、闇の中でも主はわたしを見ておられる。夜も光がわたしを照らし出す。闇もあなたに比べれば闇とは言えない。夜も昼も共に光を放ち、闇も、光も、変わるところがない。」(詩139:11-12)
この旧約詩人が謳いました「闇も、光も、変わるところがない」(詩編139:12)、これが真の信仰です。
この世は「一寸先は闇」と言います。確かにそうでしょう。数時間後、どのような目に会うかさえわかりません。私たちには、未来を見る目がないからです。ですから、人生は航海である、と言う時、先のことは何も見えない、わからないということなのです。
しかし、それでも見えるのがキリスト者なのです。それは目の見えない私の手を引いてくださる方がおられるからです。それが主イエスさまです。御言葉を通して、イエスさまは私たちを導いてくださっているのです。まるで目の見えないランナーの手を引く伴走者のように、私が踏み外すことのないように導いてくださる、それが私たちのイエスさまなのです。そして、私たちを導くイエスさまは、十字架にかかるほどに私たちを愛してくださった方です。
この主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私たちの「一寸先は闇」が「一寸先は光」に変わるのです。
私たちは、確かな航海を望みます。しかし、安全でない航海に巻き込まれたり、荒れ狂う海に投げ込まれることばかりです。それでも、その荒れ狂う海を「確かな航海」にしてくださるのが、私たちの主イエスさまです。
どのような苦難や暗闇に立たされても、そこに主イエスの光を見る。これが「生きる」、ということではないでしょうか。
そして、暗闇の中で、主イエスの光を見た者は、自らが光となるのです。パウロは、この絶望的な状況の中で、こう言っています。22節です。「しかし今、あなたがたに勧めます。元気を出しなさい。船は失うが、皆さんのうちだれ一人として命を失う者はないのです。わたしが仕え、礼拝している神からの天使が昨夜わたしのそばに立って、こう言われました。『パウロ、恐れるな。あなたは皇帝の前に出頭しなければならない。神は、一緒に航海しているすべての者を、あなたに任せてくださったのだ。』ですから、皆さん、元気を出しなさい。わたしは神を信じています。わたしに告げられたことは、そのとおりになります。わたしたちは、必ずどこかの島に打ち上げられるはずです。」(22~26節)
パウロが信じる神なんて、ルカやアリスタルコ以外、誰も知らないでしょう。それが信じるに価するのかどうかも分かりません。でも、パウロが自らの信仰の確信に立って、力強く「皆さん、元気を出しなさい。わたしは神を信じています。わたしに告げられたことは、そのとおりになります。わたしたちは、必ずどこかの島に打ち上げられるはずです」と語った時、そのパウロの姿は光輝いて見えたでしょう。絶望の中にある彼らには、パウロの言葉が希望の光となったはずです。
それはパウロの信仰が強かったから光輝くことが出来たのでしょうか? 信仰の弱い私たちは光輝くことが出来ないのでしょうか?
そうではありません。私たちの信仰が強いとか弱いとか問題ではありません。また、今の状況がどうであるのかということも問題ではないのです。問題なのは、信仰の弱い私たちが、キリストの前に立っているのか、どうなのか、なのです。パウロはキリストの光に照らされて光輝いていたのです。パウロはどこまでも、イエス・キリストの前に立とうとしておりました。「罪人の中で最たる者」である自分が、主イエス・キリストの十字架と復活よって、罪赦されたその喜びの中に立っておりました。しかも、そのキリストに喜びの福音を伝える伝道者として、ローマへと遣わされている、そのキリストの使命の中にたっておりました。「わたしは神を信じています」、パウロのこの言葉の中に全てが凝縮されております。パウロは決して強い者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パウロの信仰も常に揺れ動いておりました。それでも、パウロは主イエス・キリストの前に立ち続けようとしたのです。
皆さん、私たちもイエス・キリストを信じる者として、この礼拝からそれぞれの場所に遣わされます。その遣わされた場所が、荒れ狂う海であろうが、暗闇であろうが、主イエス・キリストに導かれて、御言葉によって生きる者になりたいと思うのです。
そして、その遣わされた場所には死の影を歩む大切な人がおります。嵐に悩む人がおります。その暗き世に、キリストの光を輝かせる者でありたいと願います。アーメン。
【2021년 10월 10일 주일예배(요약판)】
“그리스도의 빛에 비취어서” 사도행전 27장 1~26절
가이사랴에서 2년 동안이나 감금 상태에 있었던 바울은 드디어 로마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로마로 가는 길이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드디어 열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 로마로의 선박 여행도 고난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만 바울이 탄 배가 폭풍우에 휘말려 버린 것입니다.
전도 여행을 여러 해 동안 다녀온 바울은 배 여행도 여러 번 경험했기 때문에 이 시기의 항해가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 위험을 사람들에게 충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바울의 충고를 듣지 않고 자기들의 판단, 물론 그것은 전문가의 판단이기도 했지만, 그 판단에 따라 목적했던 항구로 가고자 했습니다.
그 결과, 항해 중에 폭풍이 바다에 휘몰아쳐 배는 떠내려가 버렸습니다. 실은 짐을 바다에 버리고 그리고 마침내 선구도 버려야 할 정도였습니다. 20절에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 라고 나와 있듯이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의 성경 말씀 26절까지의 상황입니다.
흔히 사람의 인생을 항해에 비유하곤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발걸음도 항해와 같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오늘의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 그 항해는 신앙인이라고 해서 갑자기 순풍이 불어 순풍 만범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해서 모든 것이 순조롭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둘째, 이 항해는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극히 상식적인 근거를 가지고 항해를 계속하는 위험성을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말은 옳았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우선시한 대다수의 의견에 묻혀 그들과 함께 폭풍우의 바다 속으로 휩쓸려 갔습니다.
옳은 길을 걷고 싶은데 결코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닐까요? 평안한 항해를 하고 싶은데 거칠고 광활한 바다를 항해하는 것은 바울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터무니없이 불똥이 튀거나 생각지도 못한 일에 휘말려들거나 혹은 배신당하거나 하는 우리의 삶은 그런 고난의 연속이며 우리의 신앙은 늘 그 안에서 시험받는 것입니다.
바울과 배에 있었던 모든 사람은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20절) 라는 상황에 몰렸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소망을 잃지 않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어둠에 지배되었을 때, 그 어둠에서 빛을 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어둠도 천지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손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배 부름 말씀으로 시편 139편 9~12절을 읽었습니다. 그 가운데 확고 부동한 신앙자의 말이 있었습니다.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시 139:11-12)
이 구약 시인이 노래한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시편 139:12),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신앙입니다.
이 세상은 “한치 앞은 어둠”이라고 합니다. 확실히 그럴 것입니다. 몇 시간 후 어떤 일을 당할지조차 모릅니다. 우리에게는 미래를 보는 눈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생은 항해라고 할 때, 앞일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이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것은 눈이 보이지 않는 나의 손을 이끌어 주시는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주 예수님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이끌어 주십니다. 마치 눈이 보이지 않는 주자의 손을 이끄는 반주자처럼 우리가 발을 헛디디지 않도록 이끌어 주시는 분이 바로 우리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그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혀 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입니다.
이 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한치 앞은 어둠”이 “한치 앞은 빛”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우리는 확실한 항해를 바랍니다. 그러나 안전하지 못한 항해에 휘말려 들거나 사나운 바다에 내던져지는 것뿐입니다. 그런데도 그 거칠고 광활한 바다를 “확실한 항해”로 만들어 주시는 것이 우리의 주 예수님이십니다.
어떤 고난과 어둠이 닥치더라도 그곳에서 주 예수님의 빛을 본다. 이것이 “산다”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어둠 속에서 주 예수님의 빛을 본 사람은 스스로 빛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22절입니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너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그런즉 우리가 반드시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22-26절)
바울이 믿는 하나님을 누가나 아리스다르고 이외는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그것이 믿을 만한 것일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신앙의 확신에 서서 힘차게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너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그런즉 우리가 반드시 한 섬에 걸리리라” 라고 말했을 때, 그 바울의 모습은 빛나게 보였을 것입니다. 절망 속에 있는 그들에게는 바울의 말이 소망의 빛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의 신앙이 강했기 때문에 빛날 수 있었던 것이었을까요? 신앙이 약한 우리는 빛날 수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강하다든가 약하다든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또, 지금의 상황이 어떤가라는 것도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신앙이 약한 우리가 그리스도 앞에 서 있는지 아닌지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빛에 비추어지고 빛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어디까지나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려고 했습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이라” 하는 자기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은 그 기쁨 속에 서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 그리스도께 기쁨의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로서 로마에 파견된 그리스도의 사명 속에 서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노라”, 바울의 이 말 속에 모든 것이 응축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결코 강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신앙도 항상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계속 서고자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서 이 예배를 마치고 나면 각각의 장소로 보내지게 됩니다. 그 보내진 곳이 광폭한 바다일지라도, 또 어둠일지라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를 받아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보내진 장소에는 죽음의 그림자를 걷는 소중한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의 폭풍우로 고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 부디 그 어두운 세상에 그리스도의 빛을 빛낼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