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과 바나바는 박해하는 자들로부터 도망쳐 이고니온에서 루스드라라는 마을로 왔습니다. 이 루스드라에서 바울은 태어날 때부터 걷지를 못해 길가에 앉아 구걸을 하며 살아가는 남자를 만났습니다.
이 남자는 바울이 하는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이 남자를 알아채고 그를 주목하여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았다고 말합니다.(9절)
이 말씀으로 “구원 받기”위해서는 그것에 걸맞는 신앙이 요구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그런데 그 “구원 받기에 걸맞는 신앙”의 내용에 대해서 여기에는 아무 설명도 없습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태어날 때부터 다리에 장애가 있어서 한 번도 걸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즉 그가 안고 있었던 문제는 인간이 제공하는 그 어떤 수단이나 자기의 어떤 노력으로도 전혀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남자가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즉 지금까지 자기 인생에 어떤 가능성도 희망도 찾아낼 수 없는 채 살아온 사람이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깊은 관심을 갖고 귀를 기울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신앙을 꿰뚫어 본 바울은 그를 향하여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10절)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마치 바울이 한 말에 응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바로 일어나서 걷기 시작했다고 합니다.(10절)
그리고 이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신의 화신으로 오해하여 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마을 밖에 있었던 제우스의 신전에서도 제사장들이 찾아와 둘에게 예배를 올리고 제물을 바치려고 했습니다.
제우스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올림포스 신들의 주신이며 그 아들인 헤르메스는 언어의 신으로서 사람들이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연장인 바나바를 제우스라고 생각하고 웅변으로 말하는 바울은 헤르메스의 화신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진실한 하나님을 전하여 거짓 신들을 받들어 모시는 우상숭배로부터 벗어나라고 설득을 하기 위해 온 바울과 바나바가 오히려 여기에서 사람들의 우상이 되어 버린것입니다. 그것을 깨닫게 된 둘은 옷을 찢어 보이며 거기에 강하게 항의를 한 것입니다.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15절)
그리고 바울은 진실한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15절후반부터입니다.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으로 자기들의 길들을 가게 방임하셨으나 그러나 자기를 증언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15~17절)
진실한 하나님이시야말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라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는 지나간 시대에는 사람들을 자기 뜻대로 살아가도록 내버려 두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인간에게 무관심하지 않고 끊임없이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자신의 존재를 계속 증언해 주셨다고 합니다. 17절,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
우리가 이 지상의 생활을 평온 하게 살며 또 즐길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이 은혜의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바울은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 하나님의 은혜를 올바르게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죄에 빠진 인간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우리에게 주시고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제공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즉 성령의 도우심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라고 믿는 자는 성경뿐만 아니라 은혜의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통해서 그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 수 있도록 해 주시는 것입니다.
바울의 설교를 듣고 사람들이 그의 주장을 어디까지 이해했는지 여기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바울의 이야기를 듣고 바울과 바나바에게 제물을 바치는 것을 그제서야 그만두었습니다.
시편 135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열국의 우상은 은금이요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그들의 입에는 아무 호흡도 없나니 그것을 만든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것과 같으리로다”(시135:15-18)
루스드라의 사람들은 우상을 만들어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상처럼 되고 싶다는 것입니다. 우상은 사람과 마음을 통할 수가 없습니다. 입이나 눈이나 귀가 있어도 기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리를 쓰지 못하는 사람이 길가에 않아 있어도 아무도 보고 있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그의 목소리를 듣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가 보였습니다. 그의 목소리를 듣고자 하였습니다. 그것이 우상을 의지하는 사람과 진실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지금 시대에도 우상이 많이 있습니다. 신사나 불각 같은 그런 것만이 우상은 아닙니다. 때로는 재물을 우상으로 삼기도 하고 자기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우상으로 여기기도 하는 등, 여러 가지 우상이 있습니다. 그 우상을 의지하게되면 그 밖의 것에 눈을 돌리거나 귀를 기울이거나 하지 않게 되어 갑니다. 남에게 눈을 향하지 않게 된다.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된다. 사람을 만들어 가는 말을 말하지 않게 된다. 그렇게 우상이 넘치게 되면 이 세상이 이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진실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우상화하려는 게 아닙니다. 사람을 일어서게 해 주십니다. 만약 인간이 넘어져 버렸을지라도 그 사람을 다시 일어서게 하십니다. 그것이 진실한 하나님이십니다.
오늘의 성경말씀에서도 다리를 쓰지 못하는 사람을 일어서게 해 주셨습니다. 또 안디옥이나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에 의해 박해를 당했던 바울은 죽은 것처럼 쓰러져 마을 밖으로 끌려 내쳐지게 되었습니다만, 거기서 다시 일어섰습니다. 진실한 하나님께서 일어서게 해 주신 것입니다.
바울은 살아 계신 진실한 하나님을 루스드라 사람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고 음식과 기쁨으로 우리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신다, 즉 우리의 생활을 지탱해 주시고 살아가기에 필요한 것을 주시며 사는 기쁨을 주신다, 그것이야말로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선한 일이라고 바울은 말한 것입니다. 생명이 없고 공허한 우상의 신들을 떠나 이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되돌아오도록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바울은 전했습니다.
여러분, 주 예수 그리스도가 부여된 지금, 사람은 더이상 자기의 마음대로 생각대하는 대로 제각각의 길을 걸을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길, 살아 계시는 하나님 곁으로 되돌아가는 길은 분명히 제시되어져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 하나님께서 파견해 주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다리를 쓰지 못하는 남자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해도,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오직 이 예수님께서 자기를 구원해 주신다는 복음을 들었다면 그것을 받아들이고 이 예수님께 구하여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들은 괴로움이나 연약함이나 소망이 없는 곳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일어서게 되고, 부활하셔서 살아 계신 예수님과 함께 걷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 예수님 안에서 이 세상의 그 어떤 괴로움도 어려움도 죽음 조차도 극복하여 소망과 기쁨 가운데 새롭게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천지를 만드시고 우리를 사랑하사 은혜와 기쁨을 주시려고 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가리켜 주신 길입니다. 우리는 이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로 되돌아가서 이 은혜의 부르심을 받아들여 하나님과 함께 걸어갑시다. 우리는 그 때, 진실한 하나님께 응답하는 존재로서 하나님만을 예배하여 찬미하면서 더 인간답게 활기차게 하나님과 함께 하는 기쁨 안에서 사는 자로 되는 것입니다.
【 2021年 1月 31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
「恵みの神に立ち返れ」 使徒言行録 14章 8~20節
パウロとバルナバは、迫害する者たちから逃れて、イコニオンからリストラの町へとやって来ました。このリストラでパウロたちは生まれつき足の不自由なために、道ばたに座って物乞いをしていた男と出会います。
この男はこのパウロの話に関心を持ち耳を傾けていました。そしてパウロはこの男に気づき、じっと彼を見つめて観察し、彼に「いやされるにふさわしい信仰があるのを認め」(9節)たと言うのです。
この言葉から「いやし」にはそれにふさわしい信仰が求められるということが分かります。ところがその「癒されるにふさわしい信仰」の内容については、ここでは何も説明がされていません。ここからわかることは彼が生まれた時から足が不自由で、まだ一度も歩いたことがない人物であったと言うことです。つまり、彼の抱えていた問題は人間の提供する何らかの手段や、ましてや自分の努力では全く解決することが出来ないものであったことです。その彼がパウロの語るキリストの福音の言葉に熱心に耳を傾けていました。つまり、今まで自分の人生に何の可能性も希望も見いだせないままに生きていた人物が、パウロの語るキリストの福音に深い関心を抱いて耳を傾けていたのです。
そして、その彼の信仰を見抜いたパウロは彼に向かって「自分の足でまっすぐに立ちなさい」(10節)と語りかけました。すると、彼はパウロの語った言葉に応えるかのように「躍り上がって歩きだした」(10節)と言います。
そして、話はこれで終わり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町の人々は、パウロとバルナバを神の化身と勘違いして、大騒ぎになります。町の外にあったゼウスの神殿からも祭司たちがやって来て、二人に礼拝し、いけにえを献げようとしました。
ゼウスはギリシャ神話に登場するオリンポスの神々の主神であり、その子どもであるヘルメスは言葉の神として人々に信じられていました。ですから人々は年上のバルナバをゼウスと考え、雄弁に説教を語るパウロをヘルメスの化身と考えたのでしょう。
人々に真の神さまを伝え、偽りの神々を祭る偶像崇拝から離れるようにと説得するためにやってきたパウロたちが、ここで人々によって偶像にされようとしてしまいました。そのことに気づいた二人は、服を裂き、そのことに強く抗議したのです。「皆さん、なぜ、こんなことをするのですか。わたしたちもあなたがたと同じ人間にすぎません。」(15節)
そして、パウロたちは真の神さまについて語り始めました。15節後半からです。「あなたがたが、このような偶像を離れて、生ける神に立ち帰るように、わたしたちは福音を告げ知らせているのです。この神こそ、天と地と海と、そしてその中にあるすべてのものを造られた方です。神は過ぎ去った時代には、すべての国の人が思い思いの道を行くままにしておかれました。しかし、神は御自分のことを証ししないでおられたわけではありません。恵みをくださり、天からの雨を降らせて実りの季節を与え、食物を施して、あなたがたの心を喜びで満たしてくださっているのです。」(15節後半~17節)
真の神さまこそ天地万物を創造された方であるとパウロは語りました。そして、その神さまは過ぎ去った時代、人々を思い思いの道に行くままにさせていたと言うのです。しかし、神さまはだからと言って人間に無関心であったわけではなく、絶えず彼らに恵みを施し、ご自身の存在を証しし続けてくださったと言います。17節、「恵みをくださり、天からの雨を降らせて実りの季節を与え、食物を施して、あなたがたの心を喜びで満たしてくださっているのです。」(17節)
私たちがこの地上の生活を平穏に生き、また楽しむことができるのは皆、この恵みの神さまの御業であるとパウロは語ったのです。
ところが、人間はこの神さまの恵みを正しく理解することが出来ません。それが聖書の言う、罪に陥った人間の姿なのです。だからこそ、神さまは聖書を私たちに与え、正しく理解できる別の方法を提供されたのです。それがイエス・キリストです。つまり、聖霊の助けの中で、イエス・キリストを救い主と信じる者は、聖書だけではなく、神さまの恵みの御業を通じて、その神さまを正しく知ることが出来るようにされるのです。
パウロの説教を聞いて、人々が彼の主張のどこまでを理解したのかは、ここでは分かりません。しかし、彼らはこのパウロの話を聞いてパウロとバルナバにいけにえを献げることをようやく止めました。
詩編135編にこのような御言葉があります。「国々の偶像は金や銀にすぎず、人間の手が造ったもの。口があっても話せず、目があっても見えない。耳があっても聞こえず、鼻と口には息が通わない。偶像を造り、それに依り頼む者は、皆、偶像と同じようになる。」(詩135:15-18)
リストラの人々は偶像を造り、依り頼んでおりました。それは偶像のようになっていたいうことです。偶像は人と心を通い合わせることができません。口や目や耳があっても機能しないからです。
足の不自由な人が道ばたに座っていたとしても誰も見ておりません。誰も彼の声を聞こうともしません。一方、パウロは彼が見えておりました。彼の声を聞こうとしました。それが偶像に依り頼んでいる人と真の神さまに依り頼んでいる人の違いなのです。
今の時代においても偶像がたくさんあります。神社とか仏閣とかそういうものだけが偶像ではありません。財産を偶像にしてみたり、自分の大切なものを偶像にしてみたり、いろいろな偶像があります。その偶像により頼むと、それ以外に目を向けたり、耳を傾けたりすることがなくなっていきます。人に目を向けなくなる。人の言葉に耳を傾けなくなる。人を造り上げる言葉を語れなくなる。そのように偶像が満ちあふれ、世界がおかしくなるのです。
真の神さまは、人を偶像化するのではありません。人を立ち上がらせることができます。もし人間が倒れてしまったとしても、その者を立ち上がらせることができる。それが真の神さまなのです。
今日の御言葉においても、足の不自由な人が立ち上がることが出来ました。また、アンティオケやイコニオンから来たユダヤ人たちによって迫害を受けてしまったパウロは、死んだように倒れてしまい、町の外へと引きずり出されましたが、そこからまた立ち上がりました。真の神さまが立ち上がらせて下さったのです。
パウロは生ける真の神さまをリストラの人々に示しました。雨を降らせ、実りの季節を与え、食物を施して、私たちの心を喜びで満たして下さる、即ち私たちの生活が支えられ、生きていくのに必要なものが与えられ、生きる喜びが与えられている、それは、生けるまことの神さまの恵みの御業なのだ、とパウロは語ったのです。命のない、虚しい偶像の神々を離れ、この生ける真の神さまに立ち帰るようにと、主イエス・キリストの福音をパウロは告げ知らせました。
皆さん、主イエス・キリストが与えられた今、人はもう思い思いの道を歩むことはできません。イエスさまによって、神さまの御心を知る道、生ける神さまのもとに立ち帰る道は、はっきりと示されたのです。それは、この神さまが下さる恵みの言葉を受け入れること、神さまが遣わして下さった救い主、イエス・キリストを信じることです。
足の不自由な男のように、何も出来なくても、何も持っていなくても良いのです。ただ、この方が自分を救って下さるという福音を聞いたなら、そのことを受け入れ、この方に救いを求め、依り頼むのです。その時、わたしたちは苦しみや、弱さや、希望のない所から、主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立ち上がらされ、復活し生きておられるイエスさまと共に歩み出すことができます。この方にあって、世のどんな苦しみも、困難も、死をも乗り越える、希望と喜びの中を、新しく歩んでいくことが出来るのです。
それが、天地を造られ、わたしたちを愛し、恵みと喜びを与えようとして下さる、生ける神さまが示して下さっている道なのです。わたしたちは、この生ける神にこそ立ち帰り、この恵みへの招きを受け入れ、神さまと共に歩んで行きましょう。私たちは、その時、真の神さまに応答する存在として、神さまのみを礼拝し、賛美し、もっとも人間らしく、活き活きと、神さまと共に在る喜びに生きる者とされるのです。
【2021년 1월 31일 주일예배(요약판)】
“은혜의 하나님께로 되돌아오라” 사도행전 14장 8~20절
바울과 바나바는 박해하는 자들로부터 도망쳐 이고니온에서 루스드라라는 마을로 왔습니다. 이 루스드라에서 바울은 태어날 때부터 걷지를 못해 길가에 앉아 구걸을 하며 살아가는 남자를 만났습니다.
이 남자는 바울이 하는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이 남자를 알아채고 그를 주목하여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았다고 말합니다.(9절)
이 말씀으로 “구원 받기”위해서는 그것에 걸맞는 신앙이 요구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그런데 그 “구원 받기에 걸맞는 신앙”의 내용에 대해서 여기에는 아무 설명도 없습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태어날 때부터 다리에 장애가 있어서 한 번도 걸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즉 그가 안고 있었던 문제는 인간이 제공하는 그 어떤 수단이나 자기의 어떤 노력으로도 전혀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남자가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즉 지금까지 자기 인생에 어떤 가능성도 희망도 찾아낼 수 없는 채 살아온 사람이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깊은 관심을 갖고 귀를 기울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신앙을 꿰뚫어 본 바울은 그를 향하여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10절)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마치 바울이 한 말에 응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바로 일어나서 걷기 시작했다고 합니다.(10절)
그리고 이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신의 화신으로 오해하여 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마을 밖에 있었던 제우스의 신전에서도 제사장들이 찾아와 둘에게 예배를 올리고 제물을 바치려고 했습니다.
제우스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올림포스 신들의 주신이며 그 아들인 헤르메스는 언어의 신으로서 사람들이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연장인 바나바를 제우스라고 생각하고 웅변으로 말하는 바울은 헤르메스의 화신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진실한 하나님을 전하여 거짓 신들을 받들어 모시는 우상숭배로부터 벗어나라고 설득을 하기 위해 온 바울과 바나바가 오히려 여기에서 사람들의 우상이 되어 버린것입니다. 그것을 깨닫게 된 둘은 옷을 찢어 보이며 거기에 강하게 항의를 한 것입니다.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15절)
그리고 바울은 진실한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15절후반부터입니다.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으로 자기들의 길들을 가게 방임하셨으나 그러나 자기를 증언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15~17절)
진실한 하나님이시야말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라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는 지나간 시대에는 사람들을 자기 뜻대로 살아가도록 내버려 두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인간에게 무관심하지 않고 끊임없이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자신의 존재를 계속 증언해 주셨다고 합니다. 17절,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
우리가 이 지상의 생활을 평온 하게 살며 또 즐길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이 은혜의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바울은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 하나님의 은혜를 올바르게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죄에 빠진 인간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우리에게 주시고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제공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즉 성령의 도우심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라고 믿는 자는 성경뿐만 아니라 은혜의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통해서 그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 수 있도록 해 주시는 것입니다.
바울의 설교를 듣고 사람들이 그의 주장을 어디까지 이해했는지 여기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바울의 이야기를 듣고 바울과 바나바에게 제물을 바치는 것을 그제서야 그만두었습니다.
시편 135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열국의 우상은 은금이요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그들의 입에는 아무 호흡도 없나니 그것을 만든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것과 같으리로다”(시135:15-18)
루스드라의 사람들은 우상을 만들어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상처럼 되고 싶다는 것입니다. 우상은 사람과 마음을 통할 수가 없습니다. 입이나 눈이나 귀가 있어도 기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리를 쓰지 못하는 사람이 길가에 않아 있어도 아무도 보고 있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그의 목소리를 듣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가 보였습니다. 그의 목소리를 듣고자 하였습니다. 그것이 우상을 의지하는 사람과 진실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지금 시대에도 우상이 많이 있습니다. 신사나 불각 같은 그런 것만이 우상은 아닙니다. 때로는 재물을 우상으로 삼기도 하고 자기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우상으로 여기기도 하는 등, 여러 가지 우상이 있습니다. 그 우상을 의지하게되면 그 밖의 것에 눈을 돌리거나 귀를 기울이거나 하지 않게 되어 갑니다. 남에게 눈을 향하지 않게 된다.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된다. 사람을 만들어 가는 말을 말하지 않게 된다. 그렇게 우상이 넘치게 되면 이 세상이 이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진실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우상화하려는 게 아닙니다. 사람을 일어서게 해 주십니다. 만약 인간이 넘어져 버렸을지라도 그 사람을 다시 일어서게 하십니다. 그것이 진실한 하나님이십니다.
오늘의 성경말씀에서도 다리를 쓰지 못하는 사람을 일어서게 해 주셨습니다. 또 안디옥이나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에 의해 박해를 당했던 바울은 죽은 것처럼 쓰러져 마을 밖으로 끌려 내쳐지게 되었습니다만, 거기서 다시 일어섰습니다. 진실한 하나님께서 일어서게 해 주신 것입니다.
바울은 살아 계신 진실한 하나님을 루스드라 사람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고 음식과 기쁨으로 우리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신다, 즉 우리의 생활을 지탱해 주시고 살아가기에 필요한 것을 주시며 사는 기쁨을 주신다, 그것이야말로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선한 일이라고 바울은 말한 것입니다. 생명이 없고 공허한 우상의 신들을 떠나 이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되돌아오도록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바울은 전했습니다.
여러분, 주 예수 그리스도가 부여된 지금, 사람은 더이상 자기의 마음대로 생각대하는 대로 제각각의 길을 걸을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길, 살아 계시는 하나님 곁으로 되돌아가는 길은 분명히 제시되어져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 하나님께서 파견해 주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다리를 쓰지 못하는 남자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해도,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오직 이 예수님께서 자기를 구원해 주신다는 복음을 들었다면 그것을 받아들이고 이 예수님께 구하여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들은 괴로움이나 연약함이나 소망이 없는 곳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일어서게 되고, 부활하셔서 살아 계신 예수님과 함께 걷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 예수님 안에서 이 세상의 그 어떤 괴로움도 어려움도 죽음 조차도 극복하여 소망과 기쁨 가운데 새롭게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천지를 만드시고 우리를 사랑하사 은혜와 기쁨을 주시려고 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가리켜 주신 길입니다. 우리는 이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로 되돌아가서 이 은혜의 부르심을 받아들여 하나님과 함께 걸어갑시다. 우리는 그 때, 진실한 하나님께 응답하는 존재로서 하나님만을 예배하여 찬미하면서 더 인간답게 활기차게 하나님과 함께 하는 기쁨 안에서 사는 자로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