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성경말씀 가운데 이 빌립보서를 쓴 바울은 뒤에 있는 것을 잊어 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기 위해 전력질주하기를 권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신앙 생활을 “푯대를 향하여 상을 위하여 달려가는” 마라톤 같은 장거리 경주에 견주고 있습니다.
마라톤이라는 것은 먼 거리를 오직 골을 향하여 달리는 경주입니다. “앞으로” 한 보라도 앞에 나아가지 않으면 골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먼 거리를 달리고 있을 때는 몸의 미묘한 변화를 알아차립니다. 쾌적하게 달릴 수 있어서 이대로 계속해서 달릴 수 있을 것 같고 골에 빨리 당도할 수 있을거라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똑같이 달리고 있는데 갑자기 호흡이 곤란하게 되거나 배나 다리가 아프게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골을 향하여 달려야 합니다.
또 우리는 달리면서 여러 가지를 생각합니다. 괴로울 때에는 완주해서 골에 뛰어드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스스로 자기 자신을 격려하면서 앞을 향하여 계속 달립니다.
그것은 신앙 생활과도 비슷합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은 전진 아니면 후퇴 그 어느쪽밖에 없습니다. 같은 곳에 머물러 있는 경우는 없습니다. 전진하지 않으면 신앙은 반드시 후퇴해 갑니다. 그러므로 “앞으로”가 중요한 것입니다.
바울은 “오직 하나 즉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상을 위하여 달려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 말씀은 분명히 “오직 하나”, “앞으로”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금방 멈추어 서거나 뒤돌아보거나 뒤돌아가려고 합니다. 또는 도망치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은 “앞으로”인 것입니다. 그러나 어째서 “앞으로”일까요?
그것은 마라톤에도 그리고 신앙 생활에도 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골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 “앞으로”인 것입니다. 무릇 골이 있지 않으면 어느 쪽이 앞인지 모릅니다. 골이 있으니까 골을 향한 삶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에도 전력을 다해 향해야 하는 골이 있습니다. 그리고 골에 다달아야만 받는 상이 있습니다. 우리는 거기를 향하여 헤매지 않고 오직 달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골에 도달한 사람에게 주어질 상이란 어떤 것일까요?
이 세상 사람들은 거의 이 세상에서 성공 하는 것이나 풍족한 생활을 보내는 것이 골에 도달한 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구하여 나아가는 것이 “앞으로” 전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말씀은 신앙자에게 있어서의 골이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이라고 합니다. “위”란 하나님께서 계시는 곳입니다.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시는 곳입니다.
거기를 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골을 향하는 것은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 골에는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향하여 달리는 것이 골을 향하여 달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응시하는 것이 골을 응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께서 위로 우리를 불러 주시는 것입니다. 자기 곁에 우리를 불러 주시는 그것을 바로 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 푹 덮어 싸여 그리스도의 사랑에 잠겨 그리스도의 사랑에 녹아들어 버린다. 그렇게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기를 바울은 간절히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 그것이 우리 크리스천의 궁극의 골이 아닐까요?
바울은 자기가 벌써 골에 도달 했다고는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바울 자신도 그것을 간절히 구하고 있습니다. 잡으려고 오직 달려가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는 상을 얻기 위하여 앞을 향해 오직 달리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 필요한 것은 되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모처럼 나아갔는데 되돌아가 버리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뒤에 있는 것을 좀처럼 잊어버리지 못합니다. 잊어버리지 못하기는커녕 뒤에 있는 것에 늘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리고 과거에 붙잡혀 거기서부터 빠져 나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는 반대로 아름다운 과거나 즐거웠던 추억에 언제까지나 매달려 거기에 돌아가는 것만 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좀처럼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도 과거에 매달려 새로운 길에 내디디지 못하면 신앙의 걸음은 멈추어 버립니다. 새 포도주가 주어져도 그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게 되어 버립니다.
바울은 오직 앞을 향하여 달리는 것을 필사적으로 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어째서 이렇게 필사적으로 달릴 수 있을까요? 그것은 지금 자기가 그리스도 예수님께 잡혀 있기 때문이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잡으려고 하는 자기가 실은 먼저 잡혀 있다. 그 사실이 오직 달릴 수 있는 근거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활의 주 예수님께서 우리를 지금 꼭 붙잡아 지탱해 주신다. 나아가는 방향까지 정하여 붙잡아 주신다. 우리는 자기의 힘으로가 아니라 이 붙잡아 주시는 예수님의 힘으로 달릴수 있는 것입니다.예수님께서 함께 달려 주신다. 우리 신앙의 싸움이란 그런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경주에 있어서 달리는 코스는 미리 결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에 있어서는 달리는 코스는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습니다. 적어도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느 것이 진실한 행복의 이르는 길인지 우리로서는 모릅니다. 그럴 때, 가장 좋은 것은 앞쪽에서 불러 주는 것입니다. 골쪽에서 “이봐, 이쪽이야. 이리로 와” 라고 누군가가 불러 주면 어느 방향에 나아가면 좋은지 금방 압니다. 우리 인생의 골에 계시는 분이신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불러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 목소리를 들으면서 또 그 목소리에 격려되면서 달려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앞으로 앞으로” 라고 계속 들으면 피로를 느껴 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늘 앞을 향하여 온몸을 계속 뻗쳐서 나아가기만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저 먼 곳의 골을 보는 게 아니라 일보 앞, 아니면 눈 앞을 보도록 하면 어떨까요?
우리는 저 먼쪽의 앞, 또 그 앞의 앞을 보려고 해서 걱정이나 불안을 더 높여 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눈 앞의 일보를 확실하게 걷는 것에 마음을 기울여 가면 저쪽의 그 앞은 저절로 열려 올지도 모릅니다.
새롭게 주어진 2021년, 코로나화가 계속되는 아주 어려운 일년이 되리라 예상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이럴 때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에 확실히 서서 골에서 불러 주시는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한 걸음 또 한 걸음 앞을 향하여 걸어갑시다.
【 2021年 1月 3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
「前に向かって進もう」 フィリピの信徒への手紙 3章 12~14節
今日の御言葉の中で、このフィリピの信徒への手紙を書いたパウロが、後ろのものを忘れ、前のものに全身を向けながら、ひたすらに走ることを、勧めています。パウロは、信仰生活を「目標を目指してひたすら走る」、マラソンのような長距離競走になぞらえています。
マラソンというのは、長い距離をひたすらゴールに向かって走る競技です。「前へ」と一歩でも前へ進まなければゴールすることは出来ません。長距離を走っていると、体の微妙な変化に気づきます。とても快適に走れて、このままずっと走れるような気がして、ゴールに早くたどり着けるように思う時もあります。でも、同じように走っているのに、突然、息が苦しくなったり、お腹や足が痛くなったりするときもあります。それでも、ゴールを目指して走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
また、私たちは、走りながら色々なことを考えます。苦しい時には、自分が完走してゴールに飛び込む自分の姿を想像して、自分自身を励ましたりして、前へ向かって走り続けます。
確かに、それは信仰生活と似ています。私たちの信仰生活には、前進か後退か、のいずれしかありません。同じ所に留まっている、ということはないのです。前進していなければ、必ず信仰は後退していきます。ですから、「前へ」が、大切なのです。
パウロは言っています。「なすべきことはただ一つ、後ろのものを忘れ、前のものに全身を向けつつ、…… 目標を目指してひたすら走る」ことである、と。御言葉は、はっきりと、「なすべきことはただ一つ」、「前へ」、と言っているのです。それなのに、私たちは、すぐに立ち止まったり、振り返ったり、逆戻りしようとします。或いは、逃げ出そうとします。しかし、聖書が語っていることは、「前へ」なのです。しかし、なぜ「前へ」なのでしょう?
それは、マラソンにも、そして信仰生活にも、ゴールがあるからです。そのゴールを目指して進むことが、「前へ」なのです。そもそも、ゴールがなければ、どちらが前なのかも、分かりません。ゴールがあるので、ゴールを目指した生き方が、求められてくるのです。
信仰生活にも、全身を向けるべき、ゴールがあります。そして、ゴールして頂く賞があります。私たちはそこに向かって、迷わず、ひたすら走って行か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 では、ゴールした者に、与えられる賞とは、どのようなものなのでしょうか。
世の中の、殆どの人は、この世で成功することや、豊かな暮らしを送ることが、ゴールでの賞であると、考えています。そして、それを求めて進むことが、「前へ」進むことである、と思っています。
しかし、御言葉は、信仰者にとってのゴールとは、「神がキリスト・イエスによって、上へ召して」くださることである、と言っています。「上」とは、神さまがおられるところです。もっと詳しく言えば、キリストが、父なる神さまの右に座しておられるところです。
そこが、ゴールだというのです。目指すのは、キリストなのです。そのゴールには、キリストがおられる。ですから、キリストを目指して走ることが、ゴールを目指して走ることなのです。
キリストを見つめることが、ゴールを見つめることなのです。そして、そのキリストが、上へと、私たちを召してくださる。ご自分の御許へと、私たちを召してくださる。それが、賞だというのです。
キリストにすっぽりと覆い包まれ、キリストの愛に浸り切り、キリストの愛に溶け込んでしまう。そのように、キリストと一つとされることを、パウロは、切に願っているのです。キリストと一つとされる。それは、私たちクリスチャンの、究極のゴールではないでしょうか。
パウロは、自分はすでにゴールしたとは言っていません。パウロ自身もそれを切に求めています。捕らえようとして、ひたすらに努めている、と言っています。「キリストと一つとなる」という賞を得るために、前のものに全身を向けて、ひたすらに走っている、と言っているのです。その時、必要なことは、後戻りしない、ということです。せっかく進んできたのに、後戻りしてしまっては、元も子もありません。
ただ、実際には、私たちは、後ろのものを、なかなか忘れられません。忘れられないどころか、後ろのものに、いつも捕われてしまっています。そして、過去に縛られて、そこから抜け出すことが、出来ずにいるのです。或いは逆に、麗しい過去や、楽しかった思い出に、いつまでもしがみついて、そこに帰ることばかり、考えてしまうのです。そのため、私たちは、なかなか前向きになれないのです。
しかし、私たちも過去にしがみ付いて、新しい道に歩み出すことが、出来ずにいるなら、信仰の歩みは止まってしまいます。新しいぶどう酒が与えられても、そのぶどう酒を古い革袋に入れることになってしまいます。
パウロは、ひたすらに前に向かって走ることを、熱心に勧めています。でも、パウロは、どうしてこんなに、必死になって、走ることが、できるのでしょうか。それは、今、自分が、キリスト・イエスに、捕えられているからだ、とパウロは言っています。捕えようとしている自分の方が、実は、先に捕えられている。その事が、ひたすらに走ることが出来る、根拠だというのです。
復活の主イエスが、私たちを、今、しっかりと捕え、支えてくださっている。進む方向まで決めて、私たちを、掴まえていてくださる。私たちは、自分の力によってではなく、この掴まえていてくださる、お方の力によって、走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イエスさまが一緒に走っていてくださる。私たちの信仰の戦いとは、そういうものだ、というのです。
競走においては、走るコースは、予め決まっています。しかし、人生においては、走るコースは、何も決まっていません。少なくとも、私たちには、見えません。ですから、どれが、まことの幸いに至る道か、私たちには分かりません。そんな時、一番いいのは、前の方から、呼んでくれることです。ゴールの方から、「おーい、こっちだよ。こっちにいらっしゃい」と、誰かが呼んでくれたなら、どの方角に進めば良いか、すぐに分かります。私たちの人生のゴールにおられるお方である、イエスさまは、そのように呼んでくださるお方です。私たちは、その声を聞きながら、その声に励まされながら、走って行くのです。
しかし、私たちは、「前へ、前へ」と言われ続けると、疲れを覚えてしまうことがあります。そんなに、いつも、前に向かって、全身を伸ばし続けることはできない、という思いになります。そんな時、遠くのゴールを見るのではなく、一歩先、もしくは目の前を見るようにしたらどうでしょうか?
私たちは、その先、またその先を見ようとして、心配や不安を高めてしまうことがあります。しかし、目の前の一歩をしっかり歩むことに、心を傾けていけば、その先は自ずと開けて来るのかもしれません。
新しく与えられた2021年。コロナ禍が続く、とても困難な一年になることが予想されます。しかし、皆さん、私たちは、このような時だからこそ、御言葉にしっかりと立ち、ゴールから呼び掛けてくださる主の御声を確かに聞きつつ、ひと足、また、ひと足と、前に向かって歩んで行きたいと思います。
【2021년 1월 3일 주일예배(요약판)】
“앞을 향하여 나아가자” 빌립보서 3장 12~14절
오늘의 성경말씀 가운데 이 빌립보서를 쓴 바울은 뒤에 있는 것을 잊어 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기 위해 전력질주하기를 권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신앙 생활을 “푯대를 향하여 상을 위하여 달려가는” 마라톤 같은 장거리 경주에 견주고 있습니다.
마라톤이라는 것은 먼 거리를 오직 골을 향하여 달리는 경주입니다. “앞으로” 한 보라도 앞에 나아가지 않으면 골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먼 거리를 달리고 있을 때는 몸의 미묘한 변화를 알아차립니다. 쾌적하게 달릴 수 있어서 이대로 계속해서 달릴 수 있을 것 같고 골에 빨리 당도할 수 있을거라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똑같이 달리고 있는데 갑자기 호흡이 곤란하게 되거나 배나 다리가 아프게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골을 향하여 달려야 합니다.
또 우리는 달리면서 여러 가지를 생각합니다. 괴로울 때에는 완주해서 골에 뛰어드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스스로 자기 자신을 격려하면서 앞을 향하여 계속 달립니다.
그것은 신앙 생활과도 비슷합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은 전진 아니면 후퇴 그 어느쪽밖에 없습니다. 같은 곳에 머물러 있는 경우는 없습니다. 전진하지 않으면 신앙은 반드시 후퇴해 갑니다. 그러므로 “앞으로”가 중요한 것입니다.
바울은 “오직 하나 즉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상을 위하여 달려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 말씀은 분명히 “오직 하나”, “앞으로”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금방 멈추어 서거나 뒤돌아보거나 뒤돌아가려고 합니다. 또는 도망치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은 “앞으로”인 것입니다. 그러나 어째서 “앞으로”일까요?
그것은 마라톤에도 그리고 신앙 생활에도 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골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 “앞으로”인 것입니다. 무릇 골이 있지 않으면 어느 쪽이 앞인지 모릅니다. 골이 있으니까 골을 향한 삶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에도 전력을 다해 향해야 하는 골이 있습니다. 그리고 골에 다달아야만 받는 상이 있습니다. 우리는 거기를 향하여 헤매지 않고 오직 달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골에 도달한 사람에게 주어질 상이란 어떤 것일까요?
이 세상 사람들은 거의 이 세상에서 성공 하는 것이나 풍족한 생활을 보내는 것이 골에 도달한 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구하여 나아가는 것이 “앞으로” 전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말씀은 신앙자에게 있어서의 골이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이라고 합니다. “위”란 하나님께서 계시는 곳입니다.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시는 곳입니다.
거기를 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골을 향하는 것은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 골에는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향하여 달리는 것이 골을 향하여 달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응시하는 것이 골을 응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께서 위로 우리를 불러 주시는 것입니다. 자기 곁에 우리를 불러 주시는 그것을 바로 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 푹 덮어 싸여 그리스도의 사랑에 잠겨 그리스도의 사랑에 녹아들어 버린다. 그렇게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기를 바울은 간절히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 그것이 우리 크리스천의 궁극의 골이 아닐까요?
바울은 자기가 벌써 골에 도달 했다고는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바울 자신도 그것을 간절히 구하고 있습니다. 잡으려고 오직 달려가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는 상을 얻기 위하여 앞을 향해 오직 달리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 필요한 것은 되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모처럼 나아갔는데 되돌아가 버리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뒤에 있는 것을 좀처럼 잊어버리지 못합니다. 잊어버리지 못하기는커녕 뒤에 있는 것에 늘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리고 과거에 붙잡혀 거기서부터 빠져 나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는 반대로 아름다운 과거나 즐거웠던 추억에 언제까지나 매달려 거기에 돌아가는 것만 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좀처럼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도 과거에 매달려 새로운 길에 내디디지 못하면 신앙의 걸음은 멈추어 버립니다. 새 포도주가 주어져도 그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게 되어 버립니다.
바울은 오직 앞을 향하여 달리는 것을 필사적으로 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어째서 이렇게 필사적으로 달릴 수 있을까요? 그것은 지금 자기가 그리스도 예수님께 잡혀 있기 때문이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잡으려고 하는 자기가 실은 먼저 잡혀 있다. 그 사실이 오직 달릴 수 있는 근거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활의 주 예수님께서 우리를 지금 꼭 붙잡아 지탱해 주신다. 나아가는 방향까지 정하여 붙잡아 주신다. 우리는 자기의 힘으로가 아니라 이 붙잡아 주시는 예수님의 힘으로 달릴수 있는 것입니다.예수님께서 함께 달려 주신다. 우리 신앙의 싸움이란 그런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경주에 있어서 달리는 코스는 미리 결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에 있어서는 달리는 코스는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습니다. 적어도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느 것이 진실한 행복의 이르는 길인지 우리로서는 모릅니다. 그럴 때, 가장 좋은 것은 앞쪽에서 불러 주는 것입니다. 골쪽에서 “이봐, 이쪽이야. 이리로 와” 라고 누군가가 불러 주면 어느 방향에 나아가면 좋은지 금방 압니다. 우리 인생의 골에 계시는 분이신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불러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 목소리를 들으면서 또 그 목소리에 격려되면서 달려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앞으로 앞으로” 라고 계속 들으면 피로를 느껴 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늘 앞을 향하여 온몸을 계속 뻗쳐서 나아가기만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저 먼 곳의 골을 보는 게 아니라 일보 앞, 아니면 눈 앞을 보도록 하면 어떨까요?
우리는 저 먼쪽의 앞, 또 그 앞의 앞을 보려고 해서 걱정이나 불안을 더 높여 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눈 앞의 일보를 확실하게 걷는 것에 마음을 기울여 가면 저쪽의 그 앞은 저절로 열려 올지도 모릅니다.
새롭게 주어진 2021년, 코로나화가 계속되는 아주 어려운 일년이 되리라 예상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이럴 때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에 확실히 서서 골에서 불러 주시는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한 걸음 또 한 걸음 앞을 향하여 걸어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