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성경말씀은 이고니온에서 있었던 바울의 전도 이야기입니다. 이고니온은 비시디아주 안디옥에서 동쪽으로 120킬로 떨어진 곳에 있는 마을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여느 때처럼 먼저 이 마을에서 유대인들이 예배를 위해 모이는 회당으로 들어가 거기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결과, 많은 유대인들과 그리스인들이 신앙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 등장하는 그리스인은 유대인의 회당에 출입하는 사람들이므로 아마도 유대교로 개종한 그리스인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여기서도 역시 바울들의 복음 전도에 대해서 반대의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으려 하지 않는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다른 이방인들을 선동해서 바울이나 바나바들에게 악의을 품도록 했습니다. 바울들의 전도를 방해한 것입니다. 보통이라면, 바울들은 대립을 피하려 여기서의 전도는 체념하고 다음 전도지로 갈 터인데, 이 이고니온에서는 그러한 방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과 바나바는 여기서 담대히 복음을 계속 전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어떻게 되었느냐하면 “그 시내의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들을 따르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따르는 자도 있는지라”(4절) 라고 쓰여 있습니다. 유대인도 이방인도 관계없이 마을 사람들이 두 개의 무리로 갈라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리들이 두 사도를 모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들었다”(5절)고 쓰여 있습니다. 동네의 지도자들이 사도들을 반대하는 무리에 가담하여 바울과 바나바에게 난폭한 짓을 하며 돌을 던져서 그들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되자 이미 두 사람은 이 동네를 떠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바울과 바나바는 결국엔 이 이고니온 동네를 도망치게 됩니다만, 그들은 그 때까지 반대자들의 악의에 가득찬 방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래 동안 이 동네에 머무르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3절)
우리들은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을 때 아무래도 적극적으로 되지 않습니다. 내성적으로 되어 버립니다. 성경은 그런 우리들에게 억지로 적극적으로 되라고 가르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 즉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풍부한 가능성이 있는지를 깨달으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있으면 하나님께서는 거기에 풍부하게 역사하시고 큰 일을 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며 우리에게 맡겨진 일을 충실히 행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신뢰하며 담대히 복음을 전하는 바울과 바나바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통해서 표적과 기사를 행하셨습니다. “기사” 라는 것은 아마도 뭔가 기적적인 일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구체적인 것은 쓰여 있지 않습니다. 그 기적적인 일 그 자체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 “기사”를 통해서 사람들이 믿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바울들은 자기들이 말하고 있는 복음을 믿게 하기 위하여 기사를 행한 게 아닙니다. 그들이 복음을 말하면서 그 사람들과 관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손을 쓰셔서 뭔가 기사를 일으키시고 그 사람을 믿는 자로 바꿔 주셨다는 것입니다.
바울들의 “손으로” 라고 쓰여 있습니다만, 하나님의 역사는 복음을 믿는 사람들에게 직접 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에 “그들의 손으로” 라고 쓰여 있는 것은 바울들이 말한 은혜의 말씀이 진실하다는 것을 하나님 자신께서 증언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여러분께 말씀드리는 것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요. 그러나 제가 말하는 복음이 진실하다고 증명하는 것은 제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성경의 말씀을 충실히 전하는 사명입니다. 제가 성경의 말씀을 충실히 전하고 있으면 하나님 자신께서 그 말씀이 진실하다고 증언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기사”라는 말을 뭔가 특별한 기적이라든가 우리의 일상 생활과 동떨어진 것으로 생각해 버리면 안됩니다. 오히려 이 말은 우리에게 성경의 말씀을 받아들이게 하여 그것을 믿게 해 주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이 예배에 모여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를 구세주라고 고백하여 신앙 생활을 보내고 있는 우리는 누구나 반드시 이 “기사”를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역사가 없으면 아무도 하나님을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히로시마 교회는 매년 크리스마스때 맹인전도협의회에도 헌금을 하고 있습니다. 이곳에 왜 헌금을 하게 되었는가 하면 그건 제가 신학생 때에 조금 관련된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언젠가 시각장애우 크리스천들이 주최하는 집회에 참가하여 그분들과 서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거기서 만났던 많은 분들은 좋아하는 성경 말씀으로 요한복음 9장 3절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스 구절이 자기들이 신앙을 가지는 계기가 된 말씀이라고 하거나 위로를 받는 말씀이라고 하시는 겁니다.
요한복음 9장에는 태어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이 나와 예수님으로 고침을 받고 눈이 보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맹인이기 때문에 길가에 앉아서 구걸하면서 셍활을 하고 있는 사람을 제자들이 보고 예수님께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9:3)
이 말씀을 통해서 인생이 바뀌어졌다거나 구원을 받았다고 그분들이 입을 모아 말을 하지만, 요한복음 9장에 등장하는 태어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은 예수님의 “기사”를 체험하여 눈이 보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집회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전히 그들의 눈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모인 사람들은 누구도 그것에 대해서 불만을 말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기쁨을 가지고 말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의 눈은 열린다. 예수님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어둠에 갇혀 있었던 인생의 참된 빛이 주어졌다”라고.
틀림없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지금도 “기사”를 행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 버리는 것 같은 일이 지금 일어나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말할 때에 그것을 듣는 사람들의 인생 위에 주님의 기사가 실현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말하는 것으로 실제로 절망의 구렁에 빠진 사람들 위에 소망의 빛이 주어집니다. 죄의 노예로서 죽음으로 운명지어지게 된 사람들에게 풍부한 죄의 용서와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며 담대히 복음을 전한 바울과 바나바처럼 우리도 자신의 생활 속에서 주어진 기회를 통해서 복음을 말하고자 합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가 말하는 복음이 진실하다는 것을 하나님 자신께서 증명해 주실 것입니다.
【 2021年 1月 24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
「主に信頼して福音を語る」 使徒言行録 14章 1~7節
今日の聖書箇所は、イコニオンという町でのパウロの伝道物語です。イコニオンの町はピシディア州のアンティオキアの町から東に120キロほど離れた場所にあった町です。
パウロとバルナバはいつもの通り、まずこの町でユダヤ人が礼拝のために集まる会堂に入り、そこで福音を語りました。その結果、大勢のユダヤ人やギリシャ人が信仰に入ったと言われています。ここで登場する「ギリシャ人」はユダヤ人の会堂に出入りしている人たちですからユダヤ教に改宗したギリシャ人と考えられます。
そして、ここでもやはりパウロたちの福音伝道に対して、逆の反応を示す人々が登場しています。パウロが語るイエス・キリストについての福音を信じようとしないユダヤ人たちです。彼らは他の異邦人たちを扇動し、パウロやバルナバたちに悪意を抱かせます。パウロたちの伝道を妨害するわけです。通常ですと、パウロたちは対立を避け、ここでの伝道を諦めて、次の伝道地へと向かうところなのですが、このイコニオンの町ではそのような妨害があったにも関わらず、パウロとバルナバはこの町で大胆に福音を語り続けたのです。
そうするとどうなったのか言いますと、「町の人々は分裂し、ある者はユダヤ人の側に、ある者は使徒の側についた」(4節)と語られています。ユダヤ人も異邦人も関係なく、町中の人々が二つのグループに分かれてしまうのです。
そして、「異邦人とユダヤ人が、指導者と一緒になって二人に乱暴を働き、石を投げつけようとした」(5節)と続けて語られています。指導者たちが使徒たちに反対するグループに加わり、パウロとバルナバに乱暴を働き、石を投げつけて彼らを殺そうとしたのです。そうなると、もう二人はこの町を離れざる終えませんでした。
このようにパウロとバルナバは最後にはこのイコニオンの町を逃げ出すことになりますが、彼らはそれまで反対者たちの悪意に満ちた妨害にも関わらず、かなりの長い期間にわたってこの町にとどまり続け、キリストの福音を伝えました。
3節、「それでも、二人はそこに長くとどまり、主を頼みとして勇敢に語った。主は彼らの手を通してしるしと不思議な業を行い、その恵みの言葉を証しされたのである。」(3節)
私たちは自分に自信がない時というのは、どうしても積極的になれません。臆病になってしまいます。聖書はそんな私たちに無理をしてでも積極的になれと教えているのではありません。聖書は神さまを信頼しなさいと教えているのです。そして、神さまが私たちに与えてくださったこと、つまり私たちに出来ることにどんなに豊かな可能性があるかと言うことに気づきなさいと教えるのです。
神さまに信頼して、私たちが自分で出来ることをするなら、神さまがそこで豊かに働かれ、大きな業をなしてくださるのです。ですから、大切なのは私たちが神さまに信頼して、私たちに委ねられた業を忠実にすることなのです。
そのように神さまを信頼して、勇敢に福音を伝えるパウロとバルナバに対して、神さまは、彼らの手を通してしるしと不思議な業を行なわれました。「不思議な業」というのは、恐らく何らかな奇跡的なことが起こったのでしょう。具体的なことは記されていません。その奇跡的な業そのものはそんなに大した問題ではないからです。むしろ、この「不思議な業」を通して、人々が信じることが重要なのです。
パウロたちは自分たちが語っている福音を信じさせるために不思議な業を行ったのではありません。彼らが福音を語り、その人々に関わって行く中で、神さまがその人に働きかけ何らかの不思議な業を起こし、その人を信じる者に変えてくださったということです。
パウロたちの「手を通して」とありますが、神さまの御業は、福音を信じる人々に直接なされているのです。聖書に「彼らの手を通して」と記されているのは、パウロたちが語った恵みの言葉が真実であることを神さま御自身が証ししておられるということです。
私が今、皆さんに語っていることも、信じる人もいれば、信じない人もおられるでしょう。でも、私が語る福音が真実であることを証しするのは、私自身ではなく、神さま御自身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
ですから、私にとって大切なことのは、聖書の言葉を忠実に伝える使命です。私が聖書の言葉を忠実に伝えるならば、神さまご自身がその言葉が真実であるという証しをしてくださるからです。
それから、この「不思議な業」という言葉を何か特別な奇跡とか、私たちの日常生活からかけ離れたものであると考えてしまってはいけません。むしろ、この言葉は私たちに聖書の言葉を受入れさせ、それを信じさせてくださる神さまの御業を語っているのです。つまり、この礼拝に集まって、神さまを信じ、キリストを救い主と告白して信仰生活を送ることが出来ている私たちは誰でも必ずこの「不思議な業」を体験しているのです。なぜなら、神さまの働きがなければ誰も神さまを信じることは出来ないからです。
クリスマス献金として、毎年のように盲人伝道協議会へ献金しております。なぜ、献金しているのかと言いますと、神学生時代に少し関わりをもったことがあったからです。ある時、目の不自由なキリスト者が主催する集会に参加し、多くの目の不自由な人と出会い、お話する機会がありました。そこで出会った人たちの多くが、好きな聖書箇所として、ヨハネによる福音書9章3節を上げるんですね。そして、自分が信仰に入るきっかけとなった御言葉だとか、慰められる御言葉だと言います。
ヨハネによる福音書9章には、生まれつき目の不自由な人が出て来て、イエスさまによって癒やされ目が見えるようになったという話しがあります。目が不自由なために道ばたに座り、物乞いをして生活していた人を弟子たちが見て、イエスさまに「この人が生まれつき目が見えないのは、だれが罪を犯したからですか。本人ですか。それとも、両親ですか」と尋ねました。すると、イエスさまはこう答えたのです。「本人が罪を犯したからでも、両親が罪を犯したからでもない。神の業がこの人に現れるためである。」(ヨハネ9:3)
この御言葉を通して、人生が変えられたとか、救われたと目の不自由な方々が口をそろえたように言うのですが、ヨハネによる福音書9章に登場する生まれつき目が不自由な人は、ここでイエスさまの「不思議な業」を体験することになり、目が見えるようにされました。しかし、その集会に集まっている人たちはそうではありません。依然として彼らの目は不自由なままなのです。しかしそこに集まった人々はそのことについて不満を漏らす人はいません。そして喜びを持って語るのです。「私の心の目は開かれた。イエスさまを見ることができるようにされた。闇に閉ざされていた人生に本当の光が与えられた」と。
確かに、主イエス・キリストは御言葉を通して私たちの上に今でも「不思議な業」をなされているのです。私たちにの人生を全く変えてしまうような業が今、起っています。主の言葉が語られる時に、それを聞く人々の人生の上に主の不思議な御業が実現するからです。
ここに私たちが神さまの御言葉を大胆に語ることが重要である理由があるのです。私たちが神さまの御言葉を大胆に語ることで、実際に絶望の淵に立たされた人々の上に、希望の光が与えれます。罪の奴隷として死に運命づけられた人々に、豊かな罪の赦しと、永遠の命が与えられるのです。
皆さん、ただ神さまを信頼して、大胆に福音を宣べ伝えたパウロとバルナバのように、私たちも自分の生活の中で与えられた機会を通して、福音を語っていきたいと思います。そうすれば、神さまは、必ず私たちの語る福音が真実であることを神さま御自身が証明してくださるのです。
【2021년 1월 24일 주일예배(요약판)】
“주를 신뢰하며 복음을 말한다” 사도행전 14장 1~7절
오늘의 성경말씀은 이고니온에서 있었던 바울의 전도 이야기입니다. 이고니온은 비시디아주 안디옥에서 동쪽으로 120킬로 떨어진 곳에 있는 마을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여느 때처럼 먼저 이 마을에서 유대인들이 예배를 위해 모이는 회당으로 들어가 거기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결과, 많은 유대인들과 그리스인들이 신앙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 등장하는 그리스인은 유대인의 회당에 출입하는 사람들이므로 아마도 유대교로 개종한 그리스인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여기서도 역시 바울들의 복음 전도에 대해서 반대의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으려 하지 않는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다른 이방인들을 선동해서 바울이나 바나바들에게 악의을 품도록 했습니다. 바울들의 전도를 방해한 것입니다. 보통이라면, 바울들은 대립을 피하려 여기서의 전도는 체념하고 다음 전도지로 갈 터인데, 이 이고니온에서는 그러한 방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과 바나바는 여기서 담대히 복음을 계속 전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어떻게 되었느냐하면 “그 시내의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들을 따르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따르는 자도 있는지라”(4절) 라고 쓰여 있습니다. 유대인도 이방인도 관계없이 마을 사람들이 두 개의 무리로 갈라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리들이 두 사도를 모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들었다”(5절)고 쓰여 있습니다. 동네의 지도자들이 사도들을 반대하는 무리에 가담하여 바울과 바나바에게 난폭한 짓을 하며 돌을 던져서 그들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되자 이미 두 사람은 이 동네를 떠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바울과 바나바는 결국엔 이 이고니온 동네를 도망치게 됩니다만, 그들은 그 때까지 반대자들의 악의에 가득찬 방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래 동안 이 동네에 머무르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3절)
우리들은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을 때 아무래도 적극적으로 되지 않습니다. 내성적으로 되어 버립니다. 성경은 그런 우리들에게 억지로 적극적으로 되라고 가르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 즉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풍부한 가능성이 있는지를 깨달으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있으면 하나님께서는 거기에 풍부하게 역사하시고 큰 일을 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며 우리에게 맡겨진 일을 충실히 행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신뢰하며 담대히 복음을 전하는 바울과 바나바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통해서 표적과 기사를 행하셨습니다. “기사” 라는 것은 아마도 뭔가 기적적인 일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구체적인 것은 쓰여 있지 않습니다. 그 기적적인 일 그 자체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 “기사”를 통해서 사람들이 믿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바울들은 자기들이 말하고 있는 복음을 믿게 하기 위하여 기사를 행한 게 아닙니다. 그들이 복음을 말하면서 그 사람들과 관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손을 쓰셔서 뭔가 기사를 일으키시고 그 사람을 믿는 자로 바꿔 주셨다는 것입니다.
바울들의 “손으로” 라고 쓰여 있습니다만, 하나님의 역사는 복음을 믿는 사람들에게 직접 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에 “그들의 손으로” 라고 쓰여 있는 것은 바울들이 말한 은혜의 말씀이 진실하다는 것을 하나님 자신께서 증언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여러분께 말씀드리는 것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요. 그러나 제가 말하는 복음이 진실하다고 증명하는 것은 제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성경의 말씀을 충실히 전하는 사명입니다. 제가 성경의 말씀을 충실히 전하고 있으면 하나님 자신께서 그 말씀이 진실하다고 증언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기사”라는 말을 뭔가 특별한 기적이라든가 우리의 일상 생활과 동떨어진 것으로 생각해 버리면 안됩니다. 오히려 이 말은 우리에게 성경의 말씀을 받아들이게 하여 그것을 믿게 해 주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이 예배에 모여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를 구세주라고 고백하여 신앙 생활을 보내고 있는 우리는 누구나 반드시 이 “기사”를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역사가 없으면 아무도 하나님을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히로시마 교회는 매년 크리스마스때 맹인전도협의회에도 헌금을 하고 있습니다. 이곳에 왜 헌금을 하게 되었는가 하면 그건 제가 신학생 때에 조금 관련된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언젠가 시각장애우 크리스천들이 주최하는 집회에 참가하여 그분들과 서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거기서 만났던 많은 분들은 좋아하는 성경 말씀으로 요한복음 9장 3절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스 구절이 자기들이 신앙을 가지는 계기가 된 말씀이라고 하거나 위로를 받는 말씀이라고 하시는 겁니다.
요한복음 9장에는 태어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이 나와 예수님으로 고침을 받고 눈이 보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맹인이기 때문에 길가에 앉아서 구걸하면서 셍활을 하고 있는 사람을 제자들이 보고 예수님께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9:3)
이 말씀을 통해서 인생이 바뀌어졌다거나 구원을 받았다고 그분들이 입을 모아 말을 하지만, 요한복음 9장에 등장하는 태어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은 예수님의 “기사”를 체험하여 눈이 보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집회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전히 그들의 눈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모인 사람들은 누구도 그것에 대해서 불만을 말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기쁨을 가지고 말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의 눈은 열린다. 예수님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어둠에 갇혀 있었던 인생의 참된 빛이 주어졌다”라고.
틀림없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지금도 “기사”를 행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 버리는 것 같은 일이 지금 일어나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말할 때에 그것을 듣는 사람들의 인생 위에 주님의 기사가 실현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말하는 것으로 실제로 절망의 구렁에 빠진 사람들 위에 소망의 빛이 주어집니다. 죄의 노예로서 죽음으로 운명지어지게 된 사람들에게 풍부한 죄의 용서와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며 담대히 복음을 전한 바울과 바나바처럼 우리도 자신의 생활 속에서 주어진 기회를 통해서 복음을 말하고자 합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가 말하는 복음이 진실하다는 것을 하나님 자신께서 증명해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