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3장~14장에는 바울(바나바)의 제1회 전도여행에 관해 쓰여 있습니다. 오늘의 성경말씀은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에 있는 회당에서 말했던 설교입니다. 16절에서 41절에 쓰여 있습니다만, 16절에서 25절까지에서 바울이 말한 것은 먼저 유대인들이 잘 알고 있는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출애굽의 일로부터 시작해서 이스라엘 왕국의 성립, 다윗 왕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루츠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거듭해서 세례 요한이 말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갑자기 나타나신 게 아니라 23절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라고 쓰여 있는 것처럼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계획으로서 구세주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 선택 받은 민족, 그 이스라엘의 역사 중에 나타나신다던 구세주가 비참하게 저 예루살렘 십자가 위에서 죽은 그 인물이라고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들의 루츠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던 그들의 자랑을 짓밟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런 이야기는 격려의 말도 위로의 말도 그 아무것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연거푸 말합니다. 27절,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그들 관리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 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라고. 즉 애당초 선지자들에 의해 주 예수님의 도래와 고난은 미리 예언되었던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구세주가 비참한 십자가형으로 죽으실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구약성서에서 말하고 있는 것을 사람들이 몰랐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듭 바울은 모두에게 권했습니다. 38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38-39절) 즉 예수 그리스도를 선지자들로 예언된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구세주라고 믿는 자는 모두 다 죄 사함을 얻고 구원 받는다는 것을 바울은 말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고 확실히 그것을 짊어져 왔습니다. 그리고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자기들은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인간에게는 율법을 지킬수 없었습니다 . 하나님을 따를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특별히 선택된 백성으로서의 루츠를 가지고 있다 하여도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에 의거하지 않으면 죄 사함을 받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 죄 사함을 얻는다, 그것은 믿기만 하면 된다는 아주 간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간단한 것이기 때문에 못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의 루츠를 고집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신앙이 근본에 깔려 있었고, 믿는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그위에 그들은 또한 율법에 구애되어 율법을 짊어져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것은 그들이 납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들도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뭔가 시시하며 어리석게 보입니다. 그냥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것은 거룩함도 그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구약성서 열왕기하 5장에 나아만이라는 아람 군대 장관이 나옵니다. 이 사람은 큰 용사였지만 나병에 걸려 있어서 이스라엘 선지자 엘리사에게 고침을 받으려고 갔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찾아온 나아만을 직접 만나려고 하지 않고 사자를 그에게 보내어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면 깨끗함을 얻으리라”라고 전했을 뿐이었습니다. 나아만은 노하여 떠나려고 했습니다만 그의 종들이 나아와서 말했습니다.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다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열하5:13) 라고. 그의 종들의 말을 듣고 나아만은 다시 생각해서 요단 강에 몸을 씻자 나병은 고침을 받아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인간은 이 종들이 말한 것 같이 “큰 일”을 소중히 생각합니다. 큰일을 한다는 자기의 행위에 가치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믿기만 하는 게 아니라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해야 한다는 편이 오히려 받아들이기가 쉬운 것입니다. 선행을 한다, 수행을 한다, 봉사를 한다, 그러한 거듭함이 중요하다라고 들어야 납득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기의 행위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율법을 지킨다는 자기의 행위에 가치를 찾아내고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죄의 깊음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그것은 깊이도 모르는 것 같은 깊은 우물 속에 있는 인간이 자기의 힘으로 이 우물에서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죄로 인하여 깊고 깊은 우물 밑바닥에 있습니다. 자기의 루츠에 대한 자부심이나 노력만으로는 이 우물에서 도저히 기어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 때문에 우리의 눈은 보이지 않습니다. 어둠 속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의 우물의 깊이도 우리에게는 전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 훈련해 하반신을 단련시키면 기어오를 수 있다, 지혜를 짜서 밖으로 나가기 위한 도구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물 밖으로 나가야 비로소 진실한 하나님의 빛을 알게 됩니다. 자기가 이 때까지 얼마나 어두운 곳에, 깊은 곳에 있었던가를 아는 것입니다.
41절에 말씀은 하박국의 말씀이 인용되어 있습니다. 너무 무서운 내용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믿지 않는 자에 대한 심판의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 때를 당하여 한 일을 행할 것이니” 라고.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의 시대에 결정적인 심판을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심판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것은 십자가 위에서 일어났습니다. 죄 없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즉 하나님 자신께서 십자가 위에서 심판받으신 것입니다. 이 심판으로 우리 죄는 용서 받았습니다.
그리고 심판은 심판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다윗이 썩음을 당하였다고 합니다.(36절)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썩음을 당하지 않으셨습니다. 지금도 살아 계십니다. 그리고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우리의 깊고 깊은 죄의 우물에도 구원의 손을 내밀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손에 자신을 맡기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손만으로는 부족하다, 인간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성실함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힘을 작게 파악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죽어 주시지 않았더라면 용서 받을 수 없던 자기의 죄를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떤 인간이라도, 그 어떤 루츠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어떤 죄를 범했다 해도 우리 시대에 확실히 그리스도의 구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또 동시에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 속에 우리도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지만 신앙에 있어서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루츠를 가진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이미 하나님의 자식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 은혜를 참으로 감사합시다.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하루 하루의 생활을 온 정성을 기울여 걸어갑시다.
【 2021年 1月 10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
「すでに神の救いが」 使徒言行録 13章 26~41節
使徒言行録13章~14章には、パウロ(バルナバ)の第一回伝道旅行について記されています。今日の聖書箇所は、パウロがピシディア州のアンティオケにある会堂で語った説教です。16節から41節に記されていますが、16節から25節まででパウロが語ったのは、まず、ユダヤ人たちが良く知っているイスラエルの歴史です。出エジプトの出来事から始まって、イスラエル王国の成立、ダビデ王の話をしました。それはイスラエルの人々のルーツの話です。そしてさらに洗礼者ヨハネによって語られていたイエス・キリストを語りました。イエス・キリストが突然現れたのではなく、23節に「神は約束に従って、このダビデの子孫からイスラエルに救い主イエスを送ってくださったのです」とあるように、イスラエルの歴史の中で神さまのご計画として救い主イエスさまが来られたことを語ったのです。
しかしまたそれは、この話を聞いている人々には理解しがたい話でもありました。神さまに選ばれた民イスラエルの歴史の中から出てこられる救い主が、彼らの記憶からしたらほんの少し前、みじめにエルサレムで十字架で殺された人物であるなどとは到底信じがたいことだったのです。なぜなら、それは自らのルーツに誇りを持っていた人々の誇りを踏みにじるものだったからです。彼らにとってそんな話は、励ましでも慰めでもあり得ませんでした。
しかし、パウロはたたみかけるように言うのです。27節「エルサレムに住む人々やその指導者たちは、イエスを認めず、また、安息日ごとに読まれる預言者の言葉を理解せず、イエスを罪と定め」と。つまり、そもそも預言者によって主イエスさまの到来と苦難はあらかじめ預言されていたのだと語りました。救い主がみじめな十字架刑で死ぬわけがないと思っているのはそもそも旧約聖書で語られていたことを人々が知らなかったからだというのです。そしてさらにパウロは皆に勧めます。「だから、兄弟たち、知っていただきたい」(38節)と。「信じる者は皆、この方によって義とされるのです」(39節)、つまりイエス・キリストを預言者によって預言され、神さまから来られた救い主だと信じる者は皆、罪赦され、救われることをパウロは語ったのです。
イスラエルの人々は神さまによって律法を与えられ、たしかにそれを担ってきました。そして、律法を守ることによって、自分たちは義とされると考えていました。しかし、神さまの前で罪人である人間には、そもそも律法を守ることはできなかったのです。神さまに従い得ないのです。神さまに特別に選ばれた民としてのルーツを持っていても、キリストを信じる信仰によらなければ、罪を赦されず、神さまの前に正しい者とはされないのです。
信じさえすれば救われる、罪赦される、それは信じさえすればいいという、とても簡単なことです。しかし、逆に簡単だからできないのです。イスラエルの人々は自分のルーツにこだわりました。それは、神さまに選ばれた民であるという、信仰がルーツにあり、信じるというのは前提にあることです。彼らはその上で律法にこだわり、律法を担ってきたのです。ですから、信じさえすればいいというのは、彼らが納得出来ることではないのです。そして、私たちにとっても、信じさえすれば良いというのは、普通に考えると、何かばかばかしいことのようにも思えます。「鰯の頭も信心から」という言葉もありますが、ただ信じれば良いというのは、有り難みも何もないように思えるのです。
旧約聖書の列王記にナアマン将軍というアラムの武将が出てきます。この人は重い皮膚病にかかっていて、イスラエルの預言者エリシャのもとに癒してもらいに行きました。しかし、エリシャは訪ねて来たナアマン将軍に直接会うこともせず、使いの者に「7回ヨルダン川に入って身を清めたら癒される」と伝えさせただけでした。ナアマン将軍は怒って帰ろうとしましたが、家来がとどめて言いました。「あなたはあの預言者が大変なことをあなたに命じたとしても、そのとおりなさったにちがいありません。あの預言者は『身を洗え、そうすれば清くなる』と言っただけではありませんか」と。その家来の言葉を聞いてナアマンは思いなおして、ヨルダン川で身を洗うと重い皮膚病は癒されました。
人間は、この家来が言ったように「大変なこと」の方を大事に思うのです。大変なことをするという自分の行為に価値を感じるからです。信じるだけではなく、あれもやり、これもやらねばならないということの方が受け入れやすいのです。善い行いをする、修行をする、奉仕をする、そういう積み重ねが大事だと言われる方が納得するのです。自分の行為に価値があると考えるからです。
イスラエルの人々が律法を守るという自らの行為に価値を見いだしていたのと同じです。しかしそれは自分の罪の深さを知らないからなのです。
たとえばそれは深さも分からないような深い井戸の中にいる人間が、自分の力でこの井戸から出ることができると考えているようなものです。私たちは罪によって深い深い井戸の底におります。自分のルーツへの誇りや努力ではこの井戸をよじ登ることは到底できないのです。そして、罪ゆえに私たちの目は見えておりません。闇の中におります。ですから、罪の井戸の深さも私たちにはまったく見えていないのです。だからちょっと訓練して足腰を鍛えたらよじ登っていける、知恵を働かせたら外に出るための道具を作ることができると考えたりするのです。しかし、実際は、キリストによって救い出されなければ、井戸の外には出ることができません。そして井戸の外に出たとき初めて本当の神さまの光を知ります。自分がこれまでどれだけ暗いところ深いところにいたのかが分かるのです。
41節の言葉は、ハバクク書の言葉が引用されています。かなり恐ろしい調子の言葉です。これは信じない者への裁きの言葉です。「わたしは、お前たちの時代に一つの事を行う」と。神さまはお前たちの時代に決定的な裁きを行うと語られています。
実際に、裁きは起こったのです。それは十字架の上で起こりました。罪なきイエス・キリストが裁かれました。神さまの御子が、つまり神さまご自身が、十字架の上で裁かれたのです。この裁きによって、私たちの罪が赦されました。
そして、裁きは裁きで終わりませんでした。キリストは復活したのです。パウロはダビデは朽ち果てたと語ります(36節)。しかし、キリストは朽ち果てられませんでした。今も生きておられます。そして、今の時代に生きる私たちの深い深い罪の井戸にも救いの手差し伸べられているのです。
私たちはその手に自分を委ねさえしたらいいのです。キリストの御手だけでは足りない、人間の努力が大事、そう考えるのは真面目でも何でもありません。それはキリストの力を小さくとらえているのです。神さまが死んでくださらなければ赦されなかった自分の罪を軽く考えているのです。私たち一人一人がどのような人間であろうとも、どんなルーツを持とうとも、どんな罪を重ねてきていようとも、私たちの時代に、確かにキリストの救いは届いたのです。
そしてまた同時に、それは、神さまの歴史のなかに私たちも入れられているということでもあります。私たちはイスラエル人ではありませんが、信仰においてアブラハムの子孫なのです。神の国にルーツを持つ、神の国の相続者なのです。私たちはキリストを信じることによって、もうすでに神さまの子どもとされているのです。
皆さん、この恵みを本当に感謝したいと思います。そして、主イエス・キリストが与えてくださる一日一日の生活を、心を込めて歩んで行きたいと願います。
【2021년 1월 10일 주일예배(요약판)】
“이미 하나님의 구원이” 사도행전 13장 26~41절
사도행전 13장~14장에는 바울(바나바)의 제1회 전도여행에 관해 쓰여 있습니다. 오늘의 성경말씀은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에 있는 회당에서 말했던 설교입니다. 16절에서 41절에 쓰여 있습니다만, 16절에서 25절까지에서 바울이 말한 것은 먼저 유대인들이 잘 알고 있는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출애굽의 일로부터 시작해서 이스라엘 왕국의 성립, 다윗 왕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루츠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거듭해서 세례 요한이 말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갑자기 나타나신 게 아니라 23절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라고 쓰여 있는 것처럼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계획으로서 구세주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 선택 받은 민족, 그 이스라엘의 역사 중에 나타나신다던 구세주가 비참하게 저 예루살렘 십자가 위에서 죽은 그 인물이라고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들의 루츠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던 그들의 자랑을 짓밟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런 이야기는 격려의 말도 위로의 말도 그 아무것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연거푸 말합니다. 27절,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그들 관리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 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라고. 즉 애당초 선지자들에 의해 주 예수님의 도래와 고난은 미리 예언되었던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구세주가 비참한 십자가형으로 죽으실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구약성서에서 말하고 있는 것을 사람들이 몰랐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듭 바울은 모두에게 권했습니다. 38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38-39절) 즉 예수 그리스도를 선지자들로 예언된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구세주라고 믿는 자는 모두 다 죄 사함을 얻고 구원 받는다는 것을 바울은 말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고 확실히 그것을 짊어져 왔습니다. 그리고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자기들은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인간에게는 율법을 지킬수 없었습니다 . 하나님을 따를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특별히 선택된 백성으로서의 루츠를 가지고 있다 하여도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에 의거하지 않으면 죄 사함을 받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 죄 사함을 얻는다, 그것은 믿기만 하면 된다는 아주 간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간단한 것이기 때문에 못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의 루츠를 고집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신앙이 근본에 깔려 있었고, 믿는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그위에 그들은 또한 율법에 구애되어 율법을 짊어져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것은 그들이 납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들도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뭔가 시시하며 어리석게 보입니다. 그냥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것은 거룩함도 그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구약성서 열왕기하 5장에 나아만이라는 아람 군대 장관이 나옵니다. 이 사람은 큰 용사였지만 나병에 걸려 있어서 이스라엘 선지자 엘리사에게 고침을 받으려고 갔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찾아온 나아만을 직접 만나려고 하지 않고 사자를 그에게 보내어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면 깨끗함을 얻으리라”라고 전했을 뿐이었습니다. 나아만은 노하여 떠나려고 했습니다만 그의 종들이 나아와서 말했습니다.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다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열하5:13) 라고. 그의 종들의 말을 듣고 나아만은 다시 생각해서 요단 강에 몸을 씻자 나병은 고침을 받아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인간은 이 종들이 말한 것 같이 “큰 일”을 소중히 생각합니다. 큰일을 한다는 자기의 행위에 가치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믿기만 하는 게 아니라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해야 한다는 편이 오히려 받아들이기가 쉬운 것입니다. 선행을 한다, 수행을 한다, 봉사를 한다, 그러한 거듭함이 중요하다라고 들어야 납득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기의 행위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율법을 지킨다는 자기의 행위에 가치를 찾아내고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죄의 깊음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그것은 깊이도 모르는 것 같은 깊은 우물 속에 있는 인간이 자기의 힘으로 이 우물에서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죄로 인하여 깊고 깊은 우물 밑바닥에 있습니다. 자기의 루츠에 대한 자부심이나 노력만으로는 이 우물에서 도저히 기어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 때문에 우리의 눈은 보이지 않습니다. 어둠 속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의 우물의 깊이도 우리에게는 전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 훈련해 하반신을 단련시키면 기어오를 수 있다, 지혜를 짜서 밖으로 나가기 위한 도구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물 밖으로 나가야 비로소 진실한 하나님의 빛을 알게 됩니다. 자기가 이 때까지 얼마나 어두운 곳에, 깊은 곳에 있었던가를 아는 것입니다.
41절에 말씀은 하박국의 말씀이 인용되어 있습니다. 너무 무서운 내용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믿지 않는 자에 대한 심판의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 때를 당하여 한 일을 행할 것이니” 라고.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의 시대에 결정적인 심판을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심판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것은 십자가 위에서 일어났습니다. 죄 없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즉 하나님 자신께서 십자가 위에서 심판받으신 것입니다. 이 심판으로 우리 죄는 용서 받았습니다.
그리고 심판은 심판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다윗이 썩음을 당하였다고 합니다.(36절)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썩음을 당하지 않으셨습니다. 지금도 살아 계십니다. 그리고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우리의 깊고 깊은 죄의 우물에도 구원의 손을 내밀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손에 자신을 맡기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손만으로는 부족하다, 인간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성실함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힘을 작게 파악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죽어 주시지 않았더라면 용서 받을 수 없던 자기의 죄를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떤 인간이라도, 그 어떤 루츠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어떤 죄를 범했다 해도 우리 시대에 확실히 그리스도의 구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또 동시에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 속에 우리도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지만 신앙에 있어서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루츠를 가진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이미 하나님의 자식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 은혜를 참으로 감사합시다.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하루 하루의 생활을 온 정성을 기울여 걸어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