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총독으로 부임한 베스도 아래에서 다시 바울의 재판이 열렸습니다. 베스도와 유대인 지도자들의 인간적인 속셈 가운데 다시 바울은 농락당하지만, 바울이 로마 황제에게 상소를 올리는 바람에 로마로 압송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을 황제에게 상소하려면 그것에 걸맞은 죄상을 쓴 것을 미리 보내야 하는데 바울에게는 로마 법으로 사형죄에 해당하는 죄목이 없기 때문에 쓸 수가 없습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유대의 아그립바 왕이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가이사랴에 왔습니다. 아그립바 왕의 조부는 어린 예수님을 죽이려고 베들레헴의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학살한 악명 높은 헤롯 대왕이고, 부친은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죽인 헤롯 아그립바 1세입니다. 또한 이 아그립바 자신도 부도덕하기로 소문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베스도는 유대의 종교나 성전의 사정에도 정통하고 로마의 궁정에서 자라서 로마 황제 네로와도 친하게 지내고 있었던 아그립바 왕에게 로마 황제의 주선을 부탁하고자 아그립바 왕을 정중하게 대접했습니다. 또한 아그립바도 이전부터 바울과 기독교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로 다음 날 바울은 아그립바 왕 앞으로 끌려 나갔습니다. 23절에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크게 위엄을 갖추고 와서 천부장들과 시중의 높은 사람들과 함께 그곳에 들어오고 있었다고 쓰여 있습니다. 모인 사람들에게는 좀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보는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권력과 악행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실제로 죄가 없는 불쌍한 사람을 죄수로 내려다보고 있는 상황이니까요. 이 세상의 힘관계로 따지면 바울은 무력합니다. 이전의 주 예수님도 또한 그랬습니다. 아그립바의 백부 안티파스도 잡히신 주 예수님을 데려왔을 때 흥미 위주로 바라보았습니다. 주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바울도 이제 로마로 호송됩니다. 권력자의 입장에서 보면 하찮은 인물에 불과할 뿐, 단지 한때 무슨 재미있는 것이라도 들을 수 있을까 해서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끌려 나온 바울은 당당히 변명을 시작했습니다. 눈앞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고 싶다고 바라고 있는 사람들도 아니고 단지 권력과 부도덕에 빠져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바울 자신도 잘 알고 있었겠지요. 그러나 바울은 이 추악한 자리 또한 예수를 증거하기 위해 하나님께 주신 자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먼저 바울은 자기가 회심한 경위를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은 아그립바 왕이 경건한 유대인이라는 것을 전제로 자기 자신의 바리새인로서의 행보, 지금도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에게 주신 약속의 실현에 소망을 걸고 있음을 강력하게 증명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시작되는 구약의 시대부터 유대인들이 믿고 있었던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자신도 믿고 있다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종말에 그 약속을 완전히 완수하시는 그 소망에 살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것은 원래 유대인에게 주어진 약속이며 그 약속을 믿는다고 해서 자신이 고발당하는 것은 이상하다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물론 바울이 믿고 있는 것은 유대인이 원래 믿고 있었던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이미 성취되었다는 점에서 당시의 유대인들과 달랐습니다. 유대인들은 계속 구세주 메시아의 도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구세주가 예수 그리스도로서 도래했다는 점, 그리고 그것이 그리스도 자신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밝혀졌다는 것을 믿는 점이 바울들, 그리스도인들과 유대인들의 차이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던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가 메시아이신 것, 부활하신 것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메시아가 십자가에 못박혀 죄인으로서 비참하게 죽었다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당시의 유대인들이 이상했던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당연한 감각입니다. 어째서 죽은 사람이 살아나거나 하는 걸까요? 게다가 바울의 시대의 사람들은 실제로 예루살렘에서 예수라는 인간이 십자가에 못박힌 사건을 알고 있습니다. 그 예수가 부활했다느니, 어느 모로 보나 인간이었던 남자를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느니, 하나님의 아들이라느니 하는 것을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떨까요? 우리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비판 없이 믿고 있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머리 속에서는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것은 믿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어쨌든 잘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있습니다. 부활의 주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믿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서 바울도 자기와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와의 만남, 즉 회심의 사건을 말합니다. 바울의 회심의 장면은 9장과 22장에도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으로 세번째입니다. 그 중에는 바울이 교회를 박해하고 성도들을 옥에 가두며 사형까지 시켰다고 분명히 고백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이 회심했다는 것에 주목합니다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비록 회심했다고는 해도 바울은 교회의 적이었던 것입니다. 앞서 바울이 로마의 법률로 사형죄에 해당하는 곳은 없다고 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교회를 박해하고 무고한 사람을 사형시킨 것은 큰 죄입니다. 이것은 지울 수 없습니다. 총독이 무죄의 선언을 내렸다고 해도 그는 유죄인 셈입니다. 바울은 사실 자신의 변명 중 그것을 명확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변명이 아니라 죄의 고백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바울은 자신의 잘못을 고백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용서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믿어 주었으면 싶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지금 십자가의 주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하기 위해서 과거의 자신의 죄를 고백한 것입니다. 과거에 속죄할 수 없는 대죄를 범한 내가 십자가로 말미암아 용서받았다, 그 뿐만 아니라 부활의 생명 안에 살게 되었다, 이것을 믿어 주었으면 싶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기를 “죄인 중에서 내가 괴수니라”(딤전1:15)라고 했습니다. “헤롯이나 베스도에 비하면 내 죄는 나은 편이다” 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자기가 죄인인 것을 강렬하게 계속 자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나도 구원받았으니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이 사실을 의심하지 않고 전도를 계속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전도인 것입니다.
바울은 무엇보다도 죄인이었던 내가 구원받았다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용서받은 기쁨 앞에 과거의 오점 따위는 큰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죄를 부끄럽게 생각하기 보다는 그것을 씻어 주시고 용서해 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칭송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신앙의 증거가 됩니다.
지금 전도가 부진한 것은 성도들이 세상 사람보다는 자기가 더 낫다고 마음 속 어딘가에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정말로 죄에 시달리는 사람은 그 정도는 간단하게 간파합니다. 죄인이 올바른 사람의 집회에 어떻게 갈 수 있을까요? 교회는 올바른 사람의 모임이 아니라,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용서받은 죄인의 무리입니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마음속 깊이 “죄인 중에서 내가 괴수니라” 라는 자각으로 구원받은 기쁨에 가득 차 있다면 그것이 그대로 전도가 될 것입니다.
2021年9月26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テモテ一(디모데전서) 1章 15~16節
〇讃 頌 讃頌歌 93(1, 4節)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聖書奉読 使徒言行録(사도행전) 25章13節~26章18節
〇説 教 「救われた喜びに満たされるならば(구원받은 기쁨에 채워지면)」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288(1, 3節)
〇献 金
〇報 告
〇感謝祈祷
〇頌 栄 讃頌歌 1
〇祝 祷
【 2021年 9月 26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
「救われた喜びに満たされるならば」使徒言行録25章13節~26章18節
新しく総督として赴任したフェストゥスの下で、再びパウロの裁判が行われました。フェストゥスやユダヤ人指導者たちの人間的な思惑の中で、またしてもパウロは翻弄されましたが、パウロがローマ皇帝に上訴したために、ローマへ送られることになりました。しかし、パウロを皇帝に上訴させるためには、それにふさわしい罪状書きを皇帝の元に書き送らなければならなのですが、パウロにはローマの法律で死罪に当たるところがありませんから、書きようがないのです。
それから数日後、ユダヤのアグリッパ王が表敬訪問にやって来ました。アグリッパ王の祖父は、幼子のイエスさまを殺そうとしてベツレヘムの二歳以下の子供たちを虐殺した悪名高いヘロデ大王であり、父親がヨハネの兄弟ヤコブを殺したヘロデ・アグリッパ1世です。また、このアグリッパ自身も不道徳で評判の人でした。しかし、フェストゥスにとっては、ユダヤの宗教や神殿の事情にも詳しく、ローマの宮廷育ちで、皇帝ネロとも親しくしていたアグリッパ王にローマ皇帝の仲立ちをしてもらおうと、アグリッパ王を丁重にもてなしました。また、アグリッパもかねてからパウロやキリスト教について関心を持っていたようです。
早速、翌日には、パウロはアグリッパ王の前に引き出されました。23節に、アグリッパ王とベルニケは盛装して到着して、千人隊長をはじめ、町のおもだった人々がいたとあります。集まった人々にとっては、ちょっとおもしろい見世物を観るような気分であったでしょう。権力と不品行に溺れている人々が、実際のところは罪のない人物を、哀れな囚人として上から目線で見下ろしているのです。この世の力関係で言えば、パウロは無力です。かつての主イエスさまもまたそうでした。アグリッパのおじのアンティパスも捕らえられた主イエスさまが連れてこられた時、興味本位で眺めたのです。主イエスさまは十字架にかけられ、パウロもこれからローマへ護送されます。権力者から見たら取るに足らない人物に過ぎず、ただの一時、何か面白いことでも聞けるかと思って眺めているのです。
しかし、引き出されたパウロは堂々と弁明を始めました。目の前にいる人々は神さまのことを知りたいと願っている人々でもなく、ただ権力と不道徳に溺れているような人々です。それはパウロ自身にもよくわかっていたでしょう。しかしパウロは、この醜い場もまた、キリストを証しするために神さまから与えられた場であると考えました。そこでまずパウロは、自分が回心した経緯を語り始めました。
パウロはまず、アグリッパ王が敬虔なユダヤ人であることを前提に自分自身のファリサイ派としての歩み、今なお、神さまが彼らの先祖にお与えになった約束の実現に、望みをかけていることを力強く証しします。アブラハムに始まる旧約の時代から、ユダヤ人たちが信じていた神の救いの約束を自分も信じているとパウロは語りました。そして、神さまが終わりの日にその約束を完全に果たされるその希望に生きているのだと主張しました。それはそもそもユダヤ人に与えられた約束であって、その約束を信じているからと言って自分が訴えられているのはおかしいとパウロは語ったのです。
もちろん、パウロが信じていることはユダヤ人がもともと信じていた約束がイエス・キリストの十字架と復活によってすでに成就したという点において、当時のユダヤ人たちと違っていました。ユダヤ人たちは、ずっと救い主メシアの到来を待っていました。その救い主がイエス・キリストとして到来したこと、そしてそのことがキリスト自身の十字架と復活において明らかにされたことを信じる点がパウロたちキリスト者とユダヤ人たちの違いでした。キリスト者を迫害していたユダヤ人たちはキリストがメシアであること、復活なさったことを信じていなかったのです。神さまから来られたメシアが十字架で罪人としてみじめに死んだなどということは到底受け入れられなかったのです。
これは当時のユダヤ人たちがおかしかったのではなく、人間として当たり前の感覚です。どうして、死者が生き返ったりするでしょうか? しかも、パウロの時代の人々は実際にエルサレムでイエスという人間が十字架にかかった事件を知っています。あのイエスが復活しただの、どこからどう見ても人間であった男を神さまから来ただの、神の子だなどということは許しがたい神への冒涜と感じる方が当たり前だったのです。
それでは、私たちはどうでしょうか? 私たちは聖書に書いてあることを無批判に信じて込んでいるんでしょうか? そうじゃないと思います。勿論、頭の中では、イエスさまの復活というのは、信じがたいところがあります。何せ上手く説明出来ません。それでも、私たちはイエス・キリストと出会っています。復活の主イエスさまと出会ったがゆえに信じているのです。
そこで、パウロもまた、自分とキリストとの出会いを語ります。キリストとの出会い、すなわち回心の出来事を語ります。パウロの回心の場面は9章と22章にも記されていました。これで三度目です。その中には、パウロが教会を迫害し、聖なる者たちを牢に入れ、死刑にまでした、とはっきりと告白されています。私たちはパウロが回心したことにに注目しますが、よくよく考えますと、回心したとは言え、パウロは教会の敵であったわけです。先ほど、パウロがローマの法律で死罪に当たるところはないと言いましたが、厳密に言えば、教会を迫害し、無罪の人間を死刑にしたことは、大きな罪です。これは消しようがありません。総督が無罪の宣言を下したとしても、彼は有罪であるのです。パウロは、実は自分の弁明の中でそれを明確に語っているのです。ですから、これは弁明ではなく、罪の告白であるのです。
ではどうして、パウロは自らの過ちを告白したのでしょうか。それは、神さまによって赦されたからです。そして、信じてほしいからなのです。パウロは今、十字架の主イエスさまの復活を信じてもらうために、過去の自分の罪を告白したのです。過去に償いきれない大罪を犯したこの私が十字架によって赦された、そればかりか、復活の命に生かされている、これを信じてほしいからです。
パウロは自分のことを「罪人の中で最たる者」(Ⅰテモテ1:15)と言っています。パウロは、ヘロデやフェストゥスよりも、私の方がまだましだ、なんてことは心の隅にもなかったのです。彼は、死の時まで、自分が罪人であることを強烈に自覚し続けたのです。そして、その私さえ救われたのだから、救われない者は一人もいない、このことを疑わずに伝道を続けたのです。これがパウロの伝道なのです。
パウロは何よりも、罪人であった自分が救われたという喜びがありました。赦された喜びの前に過去の汚点など大した問題ではないのです。私たちは自らの罪を恥じることよりも、それを洗い流し、赦して下さったキリストの十字架を讃えるべきです。それが私たちの信仰の証となります。
今、伝道が不振であるのは、信徒が世の人よりはましだ、と心のどこかで思っているからではないでしょうか。あの人よりはましだ、と。本当に罪に苦しんでいる方は、それくらいのことは簡単に見抜きます。罪人が、正しい人の集会にどうして行けるでしょうか? 教会は正しい人の集まりではなく、十字架の血によって罪赦された罪人の群れです。
信徒一人一人が心底「私は罪人の中で最たる者である」という自覚に立って、救われた喜びに満たされていれば、それがそのまま伝道となるはずです。
【2021년 9월 26일 주일예배(요약판)】
“구원받은 기쁨에 채워지면” 사도행전 25장 13절 ~ 26장 18절
새롭게 총독으로서 부임한 베스도 아래에서
새로 총독으로 부임한 베스도 아래에서 다시 바울의 재판이 열렸습니다. 베스도와 유대인 지도자들의 인간적인 속셈 가운데 다시 바울은 농락당하지만, 바울이 로마 황제에게 상소를 올리는 바람에 로마로 압송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을 황제에게 상소하려면 그것에 걸맞은 죄상을 쓴 것을 미리 보내야 하는데 바울에게는 로마 법으로 사형죄에 해당하는 죄목이 없기 때문에 쓸 수가 없습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유대의 아그립바 왕이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가이사랴에 왔습니다. 아그립바 왕의 조부는 어린 예수님을 죽이려고 베들레헴의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학살한 악명 높은 헤롯 대왕이고, 부친은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죽인 헤롯 아그립바 1세입니다. 또한 이 아그립바 자신도 부도덕하기로 소문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베스도는 유대의 종교나 성전의 사정에도 정통하고 로마의 궁정에서 자라서 로마 황제 네로와도 친하게 지내고 있었던 아그립바 왕에게 로마 황제의 주선을 부탁하고자 아그립바 왕을 정중하게 대접했습니다. 또한 아그립바도 이전부터 바울과 기독교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로 다음 날 바울은 아그립바 왕 앞으로 끌려 나갔습니다. 23절에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크게 위엄을 갖추고 와서 천부장들과 시중의 높은 사람들과 함께 그곳에 들어오고 있었다고 쓰여 있습니다. 모인 사람들에게는 좀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보는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권력과 악행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실제로 죄가 없는 불쌍한 사람을 죄수로 내려다보고 있는 상황이니까요. 이 세상의 힘관계로 따지면 바울은 무력합니다. 이전의 주 예수님도 또한 그랬습니다. 아그립바의 백부 안티파스도 잡히신 주 예수님을 데려왔을 때 흥미 위주로 바라보았습니다. 주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바울도 이제 로마로 호송됩니다. 권력자의 입장에서 보면 하찮은 인물에 불과할 뿐, 단지 한때 무슨 재미있는 것이라도 들을 수 있을까 해서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끌려 나온 바울은 당당히 변명을 시작했습니다. 눈앞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고 싶다고 바라고 있는 사람들도 아니고 단지 권력과 부도덕에 빠져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바울 자신도 잘 알고 있었겠지요. 그러나 바울은 이 추악한 자리 또한 예수를 증거하기 위해 하나님께 주신 자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먼저 바울은 자기가 회심한 경위를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은 아그립바 왕이 경건한 유대인이라는 것을 전제로 자기 자신의 바리새인로서의 행보, 지금도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에게 주신 약속의 실현에 소망을 걸고 있음을 강력하게 증명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시작되는 구약의 시대부터 유대인들이 믿고 있었던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자신도 믿고 있다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종말에 그 약속을 완전히 완수하시는 그 소망에 살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것은 원래 유대인에게 주어진 약속이며 그 약속을 믿는다고 해서 자신이 고발당하는 것은 이상하다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물론 바울이 믿고 있는 것은 유대인이 원래 믿고 있었던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이미 성취되었다는 점에서 당시의 유대인들과 달랐습니다. 유대인들은 계속 구세주 메시아의 도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구세주가 예수 그리스도로서 도래했다는 점, 그리고 그것이 그리스도 자신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밝혀졌다는 것을 믿는 점이 바울들, 그리스도인들과 유대인들의 차이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던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가 메시아이신 것, 부활하신 것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메시아가 십자가에 못박혀 죄인으로서 비참하게 죽었다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당시의 유대인들이 이상했던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당연한 감각입니다. 어째서 죽은 사람이 살아나거나 하는 걸까요? 게다가 바울의 시대의 사람들은 실제로 예루살렘에서 예수라는 인간이 십자가에 못박힌 사건을 알고 있습니다. 그 예수가 부활했다느니, 어느 모로 보나 인간이었던 남자를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느니, 하나님의 아들이라느니 하는 것을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떨까요? 우리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비판 없이 믿고 있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머리 속에서는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것은 믿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어쨌든 잘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있습니다. 부활의 주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믿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서 바울도 자기와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와의 만남, 즉 회심의 사건을 말합니다. 바울의 회심의 장면은 9장과 22장에도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으로 세번째입니다. 그 중에는 바울이 교회를 박해하고 성도들을 옥에 가두며 사형까지 시켰다고 분명히 고백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이 회심했다는 것에 주목합니다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비록 회심했다고는 해도 바울은 교회의 적이었던 것입니다. 앞서 바울이 로마의 법률로 사형죄에 해당하는 곳은 없다고 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교회를 박해하고 무고한 사람을 사형시킨 것은 큰 죄입니다. 이것은 지울 수 없습니다. 총독이 무죄의 선언을 내렸다고 해도 그는 유죄인 셈입니다. 바울은 사실 자신의 변명 중 그것을 명확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변명이 아니라 죄의 고백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바울은 자신의 잘못을 고백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용서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믿어 주었으면 싶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지금 십자가의 주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하기 위해서 과거의 자신의 죄를 고백한 것입니다. 과거에 속죄할 수 없는 대죄를 범한 내가 십자가로 말미암아 용서받았다, 그 뿐만 아니라 부활의 생명 안에 살게 되었다, 이것을 믿어 주었으면 싶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기를 “죄인 중에서 내가 괴수니라”(딤전1:15)라고 했습니다. “헤롯이나 베스도에 비하면 내 죄는 나은 편이다” 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자기가 죄인인 것을 강렬하게 계속 자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나도 구원받았으니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이 사실을 의심하지 않고 전도를 계속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전도인 것입니다.
바울은 무엇보다도 죄인이었던 내가 구원받았다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용서받은 기쁨 앞에 과거의 오점 따위는 큰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죄를 부끄럽게 생각하기 보다는 그것을 씻어 주시고 용서해 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칭송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신앙의 증거가 됩니다.
지금 전도가 부진한 것은 성도들이 세상 사람보다는 자기가 더 낫다고 마음 속 어딘가에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정말로 죄에 시달리는 사람은 그 정도는 간단하게 간파합니다. 죄인이 올바른 사람의 집회에 어떻게 갈 수 있을까요? 교회는 올바른 사람의 모임이 아니라,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용서받은 죄인의 무리입니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마음속 깊이 “죄인 중에서 내가 괴수니라” 라는 자각으로 구원받은 기쁨에 가득 차 있다면 그것이 그대로 전도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