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에 함께 읽었듯이 바울은 가이사랴에서 2년간, 감금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로마 총독이 벨릭스에서 베스도로 바뀌자 바울의 상황이 크게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후임자인 베스도는 이전 총독이었던 벨릭스와는 달리 상당히 성실한 관리였던 것 같습니다. 그는 부임한지 삼일후에 가이사랴에서 일부러 예루살렘으로 찾아가서 유대인의 지도자들과 면담을 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유대인 지도자들은 즉시 바울을 고소하기 시작했습니다. 2년이나 지났어도 그들은 한결같이 바울의 존재를 잊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이번에야말로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총독 베스도 밑에서 다시 한번 바울의 재판이 시작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바울에 대해서 이런저런 죄상을 늘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역시 그의 죄상을 입증할 수는 없었습니다. 총독 베스도는 바울의 변명을 들은 후, 다음과 같은 제안을 바울에게 말했습니다.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심문을 받으려느냐”(9절)
총독은 유대인들의 바울에 대한 호소가 로마법이 재판해야 하는 죄의 문제가 아니라 유대인의 종교를 둘러싼 문제임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내가 가이사께 상소하노라”(11절) 라고 총독의 제안을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당시 로마 시민은 황제에게 호소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기에 로마의 시민권자인 바울 역시 로마 전도를 위해 이 권리를 사용한 것입니다.그래서 베스도는 이 제의를 받고 협의한 결과, 그를 로마 황제 밑에 출두 시키기로 결정하게 됩니다.
이것은 바울에게 있어서도 생사를 건 승부였습니다. 어떤 의미로는 궁지에 몰린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의 심판을 원했고, 베스도도 그것을 제안했습니다. 결국 그도 전임 총독들과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고자 한 것입니다. 바울은 정치나 권력의 힘 앞에 무력하게 농락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설령 바울이 “내가 가이사께 상소하노라”라고 말한다 해도 실제로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신앙에 입각해서 로마 황제에게 상소하는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이 황제에게 상소한다는 결단으로 길이 열렸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말씀하신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라는 약속이 더욱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까 로마로의 길이 열렸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하나님이 이곳에서 무언가 직접 관여하셨다는 것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바울의 이 2년간의 감금 상태는 육체적으로 보다 정신적으로 더 큰 고통이었고 신앙적인 괴로움이었습니다. “로마에서 증언하여야 하리라” 라는 예수님의 그 약속은 어떻게 되어 버렸는지, 하나님께서는 왜 이 사태를 타개하기 위해 아무것도 해 주시지 않는지, 그런 생각이 든다 해도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괴로움은 단지 바울만의 것이 아닙니다. 신앙인으로서 이 세상을 살아 가는 우리들 모두 다 이러한 괴로움을 느끼고 있지는 않을까요? 신앙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은혜의 실현을 기다리며 산다는 것입니다. 그 신앙에 있어서의 걸음이 인간의 다양한 생각이나 형편에 의해 방해받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으며 걷고 있는 길이 여러가지 이 세상의 힘이나 인간의 이기적인 생각으로 좌절되고 마는 일이 있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신앙의 괴로움, 또 좌절을 느낍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계를, 우리의 인생을 지배하시고 이끌어 주고 계시는데 왜 이러한 방해가 일어나는지, 왜 하나님께서는 수수 방관하시며 아무것도 해 주지 않으시는지, 하나님께서는 정말로 계시는지… 그런 의심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입니다. 가이사랴에서의 이 2년간의 바울의 옥중 생활을 생각해 볼 때, 만약 그게 우리였다면 이 2년이 1년, 아니 불과 몇달일지라도 금방 그러한 좌절과 함께, 하나님께서 나를 내버려 두고 있다는 불평 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바울은 이 괴로움 속에서도 신앙으로 계속 설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바울의 신앙이, 단순히 괴로운 일이 있어도 예수님께서 도와주실거라는 그런 신앙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신앙은 자기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새로운 생명에 관여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께서 나를 사랑해 주신다. 그것 때문에 두려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고통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고 그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듯 살았던 것입니다.
바울 자신은 어떤 때는 의식적으로 또 어떤 때는 알게 모르게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체포되어 감금되고 재판받음으로써 받는 괴로움은 주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로의 행보에서 이미 겪었던 괴로움이며, 바울은 주 예수님의 괴로움을 뒤따르듯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의 괴로움을 바울도 겪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님이시라고 고백하고 그 제자로서 스승이신 예수님의 뒤를 따라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간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우리도 따라가듯이 걸어 가는 것입니다.
물론,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는 그것만으로 다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인 본연의 자세에는 그런 면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과 나는 전혀 다르다고 하며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일이 전혀 없다면, 우리는 정말로 주 예수님의 제자, 즉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고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가신 길을 우리도 뒤따르듯이 걸어 간다는 것을 특별하고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바울도 그 때, 자기가 예수님을 따라, 그 발자취를 쫓아 걸어 간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는 원래 교회를 박해하고 있었다가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이야말로 그리스도 즉 구세주라고 믿는 자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도하는 사람으로서 파견되었습니다. 바울은 그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걷고 있는 것입니다. 주어진 신앙을 소중히 여기고, 주어진 사명에 충실히 살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 그의 행보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의 행보에 겹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걸음으로 되고 있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하는 일대 결심을 하지 않아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믿고 하나님께 인도되어 주어진 사명, 임무, 역할을 제대로 완수하고자 한다면 그런 우리의 행보는 반드시 예수님의 행보와 겹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을 가지고 사는 가운데 체험하는 괴로움은 모두 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괴로움과 맞닿아 있습니다. 우리는 이 괴로움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쫓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괴로움을 맛보는 것입니다. 본래 인간은 괴로움을 피하고 싶어 하는 법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괴로움 속에서 그리스도와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하나님의 자애로움을 보다 깊이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괴로움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괴로운 것을 억지로 태연한 체 참아낼 필요도 없습니다.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오직 하나님만을 구하며 살 때, 우리는 저절로 그리스도께서 걸으신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더 깊이 알게 되는 걸음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의 길이 주님의 사랑이 넘치는 은혜의 길로 되는 것입니다. 아멘.
2021年9月19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詩編(시편) 16編 10~11節
〇讃 頌 讃頌歌 75(1, 3, 5節)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聖書奉読 使徒言行録(사도행전) 25章1~12節
〇説 教 「苦難の歩みの中でも(고난의 걸음 속에서도)」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380(1, 3節)
〇献 金
〇報 告
〇感謝祈祷
〇頌 栄 讃頌歌 1
〇祝 祷
【 2021年 9月 19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
「苦難の歩みの中でも」 使徒言行録25章1~12節
先週、御一緒に読みましたように、パウロはカイサリアで二年間、監禁状態となりました。それがローマ総督がフェリクスからフェストゥスに代わって、パウロの状況が大きく変わり始めます。
後任のフェストゥスは、フェリクスと違ってかなりまじめな役人であったようです。彼はカイサリアに着任して三日後にはわざわざエルサレムに赴き、ユダヤ人の指導者たちと面談しています。その席で、ユダヤ人の指導者たちはフェストゥスに早速、パウロのことを訴え出ました。二年もたっていても、彼らはパウロの存在を忘れてはいませんでした。むしろ今度こそパウロを亡き者にしようとしていたのです。
総督フェストゥスの下、もう一度カイサリアでパウロの裁判が始まりました。ユダヤ人たちは前回と同じようにパウロに対し思い罪状をあれこれ言い立てました。でも、やはりそれを立証することが出来ません。総督フェストゥスは、パウロの弁明を聞いた後、次のような提案をパウロに語っています。「お前は、エルサレムに上って、そこでこれらのことについて、わたしの前で裁判を受けたいと思うか。」(9節)
これは、ユダヤ人たちのパウロに対する訴えが、ローマ法が裁くべき罪の問題ではなく、ユダヤ人の宗教を巡っての問題であると言うことを理解していたからです。しかし、パウロは「私は皇帝に上訴します」(11節)と、総督の提案をきっぱりと拒否しました。ローマの市民権を持つパウロにはその権利がありました。そこでフェストゥスはこの申し出を受け、協議の結果、彼をローマの皇帝のもとに出頭させることを決定するのです。
これはパウロにとってもイチかバチかの駆けでした。ある意味、追い込まれたとも言えます。ユダヤ人たちはエルサレムでの裁きを望み、フェストゥスもそれを提案しました。結局、彼は前任の総督同様、「ユダヤ人たちに気に入られようと」したのです。パウロは政治や権力の力の前で無力に翻弄されていました。そのような中で、パウロが「私は皇帝に上訴します」と言っても、実際にこの先どうなるのか、全く分かりません。それでも、パウロは信仰に立ち、皇帝に上訴する手段を選んだのです。この皇帝への上訴という決断によって道が拓けました。結果、イエスさまがパウロに語られた「ローマでも証しを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言う約束がさらに現実のものとなっていくのです。
ところで、先程ローマへの道が拓けたと言いましたが、神さまがここで何か直接に関わったと言うことは記されておりません。だからこそ、パウロのこの二年間の監禁状態というのは、肉体的よりも精神的に大きな苦痛でありましたし、信仰的な苦しみであったのです。「ローマでも証しを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イエスさまのあの約束はどうなってしまったのか、神さまはなぜこの事態を打開するために何もして下さらないのか、そういう思いが起ってきても当然だと思います。
このような苦しみはパウロだけのものではありません。信仰者としてこの世を生きていく私たちは皆、このような苦しみを覚え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信仰に生きるとは、神さまの約束を信じて、御心に従い、恵みの実現を待ち望みつつ生きることです。その信仰における歩みが、人間の様々な思いや都合によって妨げられてしまうということがしばしばあります。これこそが神さまの御心だ、と信じて歩んでいる道が、様々なこの世の力や人間の利己的な思いによって、挫折させられてしまうことがあるのです。その時、私たちは信仰における苦しみ、またつまずきを覚えます。神さまがこの世界を、私たちの人生を支配し、導いて下さっているはずではないのか、それなのに何故このような妨げが起るのか、どうして神さまは手をこまねいて見ているだけで何もして下さらないのか、神さまは本当におられるのだろうか…、そのような疑いの思いが私たちの心をとらえるのです。カイサリアでの2年間のパウロの獄中生活を思う時、私たちだったら、この二年がたとえ一年でも、いや数カ月であっても、すぐにそういうつまずき、神さまが自分のことをほったらかしにしている、という不平不満に満たされていってしまうことは確実だろうと思わずにはおれないのです。
それでは、なぜ、パウロはこの苦しみの中でも信仰に立ち続けることが出来たのでしょうか。それはパウロの信仰が、単純に苦しいことがあっても、イエスさまが助けてくださると言うような信仰ではなかったからです。パウロの信仰は、自分が主イエス・キリストの死と新しい命に与っている、と言うものでした。十字架と復活の主が愛しておられる。そのことのゆえに恐れることがないのです。そして、今の苦しみの中にイエス・キリストを見ており、そのイエスさまの御跡を追うように生きていたのです。
パウロ自身は、ある時は意識的に、ある時は、知らぬうちに、イエスさまの御跡を追っていました。パウロが逮捕され、監禁され、裁かれることによって受けている苦しみは、主イエス・キリストが、十字架への歩みにおいて既に味わわれた苦しみであり、パウロは、主イエスの苦しみを、後を追うように体験しているのです。主イエスの苦しみにパウロもあずかっているのです。私たちの信仰は、イエス・キリストを自分の主と告白し、その弟子として、師であるイエスさまの後に従っていくことです。イエスさまに従っていくとは、イエスさまの歩まれた道を私たちも後を追うように歩んでいくことです。
勿論、主イエス・キリストと私たちの関係はそれだけで言い尽くせるものではありません。しかし、信仰者のあり方にはそのような面もあることを私たちは忘れてはなりません。もしも私たちが、イエスさまと私は全然違うんだから、と言ってキリストの御跡を追い求めることが全くないならば、私たちは、本当に主イエスの弟子、信仰者であろうとしているのか、と問われなければなりません。
皆さん、イエスさまの歩まれた道を私たちも後を追うように歩んでいくということを、特別な、大それたことと考える必要はありません。パウロだってこの時、自分はイエスさまに従い、その御跡を追って歩んでいくのだなどと思っていたわけではないでしょう。彼は、もともと教会を迫害していたのが、イエスさまと出会い、イエスさまこそキリスト、救い主と信じる者へと変えられました。そして、キリストの福音を宣べ伝える者として遣わされたのです。パウロはその神さまの導きのままに歩んでいるのです。与えられた信仰を大切にして、与えられた使命に忠実に生きようとしているのです。そのような彼の歩みは、知らず知らずの内に、イエス・キリストの歩みに重なり合い、キリストに従う歩みとなっているのです。つまり、キリストに従うという一大決心をしなくても、主イエス・キリストを心から信じて、神さまに導かれて与えられた使命、務め、役割をしっかり果たそうとしていくなら、その私たちの歩みは必ず、イエスさまの歩みと重なり合ってくるのです。
皆さん、私たちが信仰を持って生きることの中で体験する苦しみは全て、主イエス・キリストの苦しみと重なり合っています。私たちはこの苦しみにおいて、主イエス・キリストの御跡に従って歩んでいるのです。
キリストの御跡を追うということは、キリストの十字架のお苦しみを味わうことでもあります。本来、人間は苦しみは避けたいものです。しかし、パウロはその苦しみの中でキリストと出会ったのです。キリストの愛、神の慈しみをより深く知ったのです。ですから私たちは苦しみをも恐れる必要はないのです。もちろん苦しいことをやせ我慢する必要もありません。ただ良き時も悪しき時も、神さまを求めて生きる時、私たちはおのずからキリストの歩んだ道を歩ませていただいているのです。それは、神さまの愛をいっそう深く知る歩みです。だからこそ、苦難の道が、主の愛に溢れた恵みの道となるのです。アーメン。
【2021년 9월 19일 주일예배(요약판)】
“고난의 걸음 속에서도” 사도행전 25장 1~12절
지난 주에 함께 읽었듯이 바울은 가이사랴에서 2년간, 감금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로마 총독이 벨릭스에서 베스도로 바뀌자 바울의 상황이 크게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후임자인 베스도는 이전 총독이었던 벨릭스와는 달리 상당히 성실한 관리였던 것 같습니다. 그는 부임한지 삼일후에 가이사랴에서 일부러 예루살렘으로 찾아가서 유대인의 지도자들과 면담을 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유대인 지도자들은 즉시 바울을 고소하기 시작했습니다. 2년이나 지났어도 그들은 한결같이 바울의 존재를 잊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이번에야말로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총독 베스도 밑에서 다시 한번 바울의 재판이 시작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바울에 대해서 이런저런 죄상을 늘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역시 그의 죄상을 입증할 수는 없었습니다. 총독 베스도는 바울의 변명을 들은 후, 다음과 같은 제안을 바울에게 말했습니다.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심문을 받으려느냐”(9절)
총독은 유대인들의 바울에 대한 호소가 로마법이 재판해야 하는 죄의 문제가 아니라 유대인의 종교를 둘러싼 문제임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내가 가이사께 상소하노라”(11절) 라고 총독의 제안을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당시 로마 시민은 황제에게 호소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기에 로마의 시민권자인 바울 역시 로마 전도를 위해 이 권리를 사용한 것입니다.그래서 베스도는 이 제의를 받고 협의한 결과, 그를 로마 황제 밑에 출두 시키기로 결정하게 됩니다.
이것은 바울에게 있어서도 생사를 건 승부였습니다. 어떤 의미로는 궁지에 몰린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의 심판을 원했고, 베스도도 그것을 제안했습니다. 결국 그도 전임 총독들과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고자 한 것입니다. 바울은 정치나 권력의 힘 앞에 무력하게 농락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설령 바울이 “내가 가이사께 상소하노라”라고 말한다 해도 실제로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신앙에 입각해서 로마 황제에게 상소하는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이 황제에게 상소한다는 결단으로 길이 열렸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말씀하신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라는 약속이 더욱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까 로마로의 길이 열렸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하나님이 이곳에서 무언가 직접 관여하셨다는 것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바울의 이 2년간의 감금 상태는 육체적으로 보다 정신적으로 더 큰 고통이었고 신앙적인 괴로움이었습니다. “로마에서 증언하여야 하리라” 라는 예수님의 그 약속은 어떻게 되어 버렸는지, 하나님께서는 왜 이 사태를 타개하기 위해 아무것도 해 주시지 않는지, 그런 생각이 든다 해도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괴로움은 단지 바울만의 것이 아닙니다. 신앙인으로서 이 세상을 살아 가는 우리들 모두 다 이러한 괴로움을 느끼고 있지는 않을까요? 신앙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은혜의 실현을 기다리며 산다는 것입니다. 그 신앙에 있어서의 걸음이 인간의 다양한 생각이나 형편에 의해 방해받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으며 걷고 있는 길이 여러가지 이 세상의 힘이나 인간의 이기적인 생각으로 좌절되고 마는 일이 있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신앙의 괴로움, 또 좌절을 느낍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계를, 우리의 인생을 지배하시고 이끌어 주고 계시는데 왜 이러한 방해가 일어나는지, 왜 하나님께서는 수수 방관하시며 아무것도 해 주지 않으시는지, 하나님께서는 정말로 계시는지… 그런 의심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입니다. 가이사랴에서의 이 2년간의 바울의 옥중 생활을 생각해 볼 때, 만약 그게 우리였다면 이 2년이 1년, 아니 불과 몇달일지라도 금방 그러한 좌절과 함께, 하나님께서 나를 내버려 두고 있다는 불평 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바울은 이 괴로움 속에서도 신앙으로 계속 설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바울의 신앙이, 단순히 괴로운 일이 있어도 예수님께서 도와주실거라는 그런 신앙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신앙은 자기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새로운 생명에 관여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께서 나를 사랑해 주신다. 그것 때문에 두려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고통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고 그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듯 살았던 것입니다.
바울 자신은 어떤 때는 의식적으로 또 어떤 때는 알게 모르게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체포되어 감금되고 재판받음으로써 받는 괴로움은 주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로의 행보에서 이미 겪었던 괴로움이며, 바울은 주 예수님의 괴로움을 뒤따르듯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의 괴로움을 바울도 겪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님이시라고 고백하고 그 제자로서 스승이신 예수님의 뒤를 따라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간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우리도 따라가듯이 걸어 가는 것입니다.
물론,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는 그것만으로 다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인 본연의 자세에는 그런 면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과 나는 전혀 다르다고 하며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일이 전혀 없다면, 우리는 정말로 주 예수님의 제자, 즉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고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가신 길을 우리도 뒤따르듯이 걸어 간다는 것을 특별하고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바울도 그 때, 자기가 예수님을 따라, 그 발자취를 쫓아 걸어 간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는 원래 교회를 박해하고 있었다가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이야말로 그리스도 즉 구세주라고 믿는 자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도하는 사람으로서 파견되었습니다. 바울은 그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걷고 있는 것입니다. 주어진 신앙을 소중히 여기고, 주어진 사명에 충실히 살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 그의 행보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의 행보에 겹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걸음으로 되고 있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하는 일대 결심을 하지 않아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믿고 하나님께 인도되어 주어진 사명, 임무, 역할을 제대로 완수하고자 한다면 그런 우리의 행보는 반드시 예수님의 행보와 겹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을 가지고 사는 가운데 체험하는 괴로움은 모두 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괴로움과 맞닿아 있습니다. 우리는 이 괴로움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쫓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괴로움을 맛보는 것입니다. 본래 인간은 괴로움을 피하고 싶어 하는 법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괴로움 속에서 그리스도와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하나님의 자애로움을 보다 깊이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괴로움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괴로운 것을 억지로 태연한 체 참아낼 필요도 없습니다.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오직 하나님만을 구하며 살 때, 우리는 저절로 그리스도께서 걸으신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더 깊이 알게 되는 걸음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의 길이 주님의 사랑이 넘치는 은혜의 길로 되는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