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성경 말씀은 예루살렘의 유대인 권력자들이“변호사 더둘로”를 데리고 바울을 총독 벨릭스에게 고발하기 위해서 가이사랴까지 찾아온 장면입니다.
먼저 변호사 더둘로가 로마 총독 벨릭스에게 바울을 고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내용이 2~8절에 기록되어 있는데, 바울이“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그가 또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 우리가 잡았사오니 ”라는 것이었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 공회에서 거론된 죄상 중 하나가“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 동안에 지으리라”(마가복음 14장 58절) 라는 것이었습니다. 바울 또한 예수님과 똑같이 예루살렘 성전의 문제로 고소를 당하고 있습니다. 또,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죄에 빠뜨리기 위하여 그 때의 총독 빌라도에게 “그가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하게 하나이다”(누가복음 23장 5절) 라고 호소했습니다. 이것도 또한 이때의 바울에 대한 죄상과 매우 비슷합니다.
이 더둘로의 고소장에 대해서 바울은 아주 논리적으로 대답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자신은 여러 해 만에 예루살렘에 들어온 지 아직 열이틀밖에 안 되었다는 것, 그 짧은 시간 안에 소동을 일으킬 수도 없고, 소동을 일으킨 것을 본 사람도 없다고 반박하며, 유대인들의 호소에는 증거가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는 점인데, 바울은 자기의 신앙을 “이 도”라는 말로 표현한 뒤 자신들의 조상들이 예배한 하나님을 예배하고 구약성서의 말씀을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열심히 믿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점에 관하여 자기는“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도록 노력하고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즉, 그는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 사람들로부터 비난받을 점은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셋째로,“성전을 더럽혔다”는 점인데, 자신이 예루살렘에 온 것은 자기 동포에게 구원금을 건네기 위해서이며, 그 때마다 성전에서 정결한 의식에 참여하여 제물을 바쳤을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성전을 더럽히는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물론 우수한 두뇌를 가지고 있었던 인물입니다. 그러나 로마 총독 그리고 유대인의 권력자들을 앞에서 이렇게 주눅 들지 않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바울이 우수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보호가 있었고 성령이 함께 계셔서 할 말을 나타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예수님께서 머지않아 제자들이 박해를 받게 될 것을 알고 계셔서 그 때를 대비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마태복음 10장 18~20절)
바울 또한 주 예수님의“아버지의 성령”에 의해 변론의 말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논전은 바울에게 유리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게다가 총독 자신이 “이 도” 즉 기독교에 대해서“더 자세히 아는 고로”라고 했기 때문에 기독교가 유대인들이 말하는 것과 같은 소동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총독은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총독은 바울을 이대로 가이사랴에서 감금했습니다. 총독은 올바른 판단과 심판을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기에게 유리하게 일을 진행하고 싶을 뿐이었습니다. 바울을 무죄 방면시킨다면 유대인들의 미움을 사게 될 것입니다. 또 무슨 짓을 해도 유대인들은 바울을 죽일 것입니다 로마 시민권을 가진 바울이 살해당하거나 소동이 벌어지면 자신의 책임이 됩니다. 그러나 또 로마 시민권을 가지는 바울을 증거 불충분한 상태로 유죄로 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기분을 해치지 않도록 결론을 미룬 것입니다. 이 기간은 결국 총독이 교체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조직 안에서는 이런 일이 때때로 일어납니다. 어떠한 의도 때문에 문제의 해결이 보류되어 버리는 일이 있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로 옮겨지면서 여기서부터 단번에 로마로 발길이 옮겨지는가 했더니 바울은 가이사랴에서 무려 이2년 동안이나 발이 묶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발이 묶인 일도 또 이제부터 바울을 덮칠 재난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 때 그 자리에서 최적의 상태에서 우리 인간이 일을 해낼 수 있도록 배려한 것입니다.
바울의 옥중 서간이라고 불리는 편지가 있습니다. 그 집필 시기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리는데, 저는 이 편지를 이때의 2년동안 바울이 썼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헛되이 여겨지는 이 2년간이 없었다면 아마도 바울의 편지의 반절은 성경에 남아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발이 묶이는 것도 재난도 모두 다 그때 그 자리에 최선의 배려를 가지고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배려 가운데 바울은 총독 벨릭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여기에 흥미로운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5절입니다.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25절).
벨릭스는 두려움을 느꼈다고 합니다. 바울은 특별히 벨릭스 자신의 죄를 말한 게 아니라 지극히 평범하게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심판을 말했을 뿐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바울의 이야기는 벨릭스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와 닿았던 것입니다.
이 두려움으로부터 신앙으로 들어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성령강림 날에“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것은 너희들이다”라는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린” 사람들이 삼천명이나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그 죄를 추궁당한 사람들이 반발이나 두려움을 넘어 마음에 감동을 받고 예수님을 믿고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벨릭스는 두려움을 느껴 마음이 움직여도 거기에 머물러 버린 것입니다. 자기 자신 속에 내려 놓지 못하는 욕망이 크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고 두려움은 느껴도 그냥 자신의 욕망 속에 머무르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흔히 “이 도”라고 적고 있습니다. 오늘의 성경말씀 14절과 22절에 나와 있습니다.
이 도라고 말할 때 그리스어의 “도(길)”라는 말은 바로 사람이 걷는 길 그 자체입니다. 일본어에는 무도나 다도가 있듯이 “이 도”라고 말하면 뭔가 한가지 일을 정신면을 포함하여 단련하고 연마해 가는 〇〇도라는 뉘앙스를 포함하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가리키는“이 도”는 단련하고 뭔가를 깊이 연구한다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걷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이 길”이라는 것은 정신적 수행이라든지 노력하고 궁구해 간다는 것과는 다릅니다. 때때로 우리는 길이 없는 길을 스스로 개척하면서 걸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때조차 길을 터 열어 주시는 것은 사실 주 예수님인 것입니다. “나는 길이요” 라고 말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걸을 때, 길은 열리고 닦여져 가는 것입니다. 정녕 우리는 그렇게 만들어진 길을 걷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길”은 믿고 세례를 받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거기서부터 쭉 이어지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을 믿고 걷는 길은 하나님 나라까지 가는 길입니다. 시련도 고생도 있는 길입니다만, 혼자가 아닌 길입니다. 걷고 있는 그 때는 정신없이 걸어 가느라 알 수 없지만, 뒤돌아보면 그때도 이때도 늘 우리 주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고 인도해 주셨음을 알 수 있는 길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우리는 미래를 향해 그 길을 걸어 갑시다. 아멘.
2021年9月12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箴言(잠언) 14章 8~9節
〇讃 頌 讃頌歌 67(1, 4節)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聖書奉読 使徒言行録(사도행전) 24章1~27節
〇説 教 「主と共にこの道を歩もう(주와 함께 이 길을 걷자)」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384(1, 3節)
〇献 金
〇報 告
〇感謝祈祷
〇頌 栄 讃頌歌 1
〇祝 祷
【 2021年 9月 12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
「主と共にこの道を歩もう」 使徒言行録24章1~27節
今日の聖書箇所は、エルサレムのユダヤ人権力者たちが「弁護士テルティロ」を連れてパウロを総督フェリクスに訴えるためにカイサリアまでやって来た場面です。
まず、弁護士テルティロがローマ総督フェリクスに告発を始めました。その内容が2~8節に記されていますが、パウロが「世界中のユダヤ人の間に騒動を引き起こして」おり、「ナザレ人の分派の主謀者」で、「神殿さえも汚そうとしたので逮捕しました」というものです。
主イエスさまが、十字架にかけられる際に最高法院で取り上げられた罪状の一つは「神殿を打ち倒して、三日あれば、手で造らない別の神殿を建ててみせる」(マルコ14章58節)というものでした。パウロもまたイエスさまと同じようにエルサレム神殿の問題で訴えられております。また、ユダヤ人たちはイエスさまを罪に陥れるために、時の総督ピラトに対して「この男は、ガリラヤから始めてこの都に至るまで、ユダヤ全土で教えながら、民衆を扇動しているのです」(ルカ23章5節)と訴えました。これもまたこの時のパウロに対する罪状とよく似ています。
このテルティロの訴状に対して、パウロは、とても論理的に答えています。まず第一に、自分は数年ぶりにエルサレムに入ってからまだ12日しかたっていないこと。その短い期間で、騒動を起こすなどできないし、騒動を起こしたことを見た者はいないと反論し、ユダヤ人たちの訴えには証拠がないというのです。
それから第二に、「ナザレ人の分派」の首謀者だと言う点ですが、パウロは自分の信仰を「この道」と言う言葉で表現した上で、自分たちの先祖たちが礼拝した神を礼拝し、旧約聖書の言葉をイエスさまが教えてくださったように熱心に信じていると語りました。そして、その点に関して自分は「神に対しても人に対しても、責められることのない良心を絶えず保つように努めています」と語ったのです。つまり、彼は自分の信仰のことで人々から責められる点は何もないと主張しました。
そして第三に、「神殿を汚した」と言う点ですが、自分がエルサレムにやって来たのは同胞に救援金を渡すためであり、その折、神殿で清めの儀式に参加して供え物を献げただけであると語りました。神殿を汚すようなことは何もしていないのです。
パウロはもちろん優秀な頭脳を持っていた人物です。しかし、ローマ総督、そしてまたユダヤ人の権力者たちを前にこれほどにたじろがずに語れたのは、単にパウロが優秀だったからではありません。そこに神さまの守りがあり、聖霊によって語るべきことを示されたからです。かつて、イエスさまが、やがて弟子たちが迫害を受けることになることを知っておられ、その時に備え、こうおっしゃいました。「引き渡されたときは、何をどう言おうかと心配してはならない。そのときには、言うべきことは教えられる。実は、話すのはあなたがたではなく、あなたがたの中で語ってくださる、父の霊である。」(マタイ10章18~20節) パウロもまた、主イエスさまの「父の霊」によって弁明の言葉を与えられたのです。
さて、この論戦はパウロに有利に進みました。しかも、総督自身、「この道」つまりキリスト教のことについて「かなり詳しく知っていた」とありますから、キリスト教がユダヤ人たちの言うような騒動を引き起こすものではないことを総督は分かっていたのです。しかし、結局、総督はパウロをこのままカイサリアで監禁します。総督は正しい判断、裁きをしようとしたのではなく、あくまでも自分に有利に事を進めたいだけでした。パウロを無罪放免にしたら、ユダヤ人たちの憎しみを買います。また、どのようなことをしてもユダヤ人たちはパウロを殺すでしょう。ローマ市民権を持っているパウロが殺されたり、騒動が起こると自分の責任になります。しかしまたローマ市民権を持っているパウロを証拠不十分な状態で有罪とするわけにもいきません。ですから、ユダヤ人たちの機嫌を損ねないように結論を先送りにしたのです。この期間は、結局、総督の交代の時まで続きました。組織の中ではこういうことが時々起こります。なんらかの思惑のため、敢えて、問題の解決が先送りにされてしまうようなことがあります。
パウロがエルサレムからカイサリアに移され、ここから一気にローマへの歩みが進むのかと思っていたら、パウロはカイサリアで実に二年間も足止めを食うこととなりました。しかし、この足止めのようなことも、また、これからパウロを襲う災難も、神さまによって、その場、その時、最適な状態で人間が、事を為すことが出来るように配慮されているのです。
パウロの獄中書簡と呼ばれる手紙がありますが、その執筆時期については意見が分かれておりますが、私はこの二年間に獄中書簡と呼ばれる手紙をパウロが書いたと考えております。ですから、この無駄に思える二年間がなければ、パウロの手紙の半分は、聖書に残されていないのです。神さまは、足止めのようなことも、災難のようなことも、すべてその場その時に最善の配慮をもって私たちを導かれるということです。
そのような神さまの配慮の中で、パウロは総督フェリクスに対して、イエス・キリストを信じる信仰について語りました。ここで興味深いことが記されています。25節です。「しかし、パウロが正義や節制や来るべき裁きについて話すと、フェリクスは恐ろしくなり、『今回はこれで帰ってよろしい。また適当な機会に呼び出すことにする』と言った。」(25節)
フェリクスは恐れを抱いたと言います。パウロは別にフェリクス自身の罪を語ったわけではなく、ごく普通に、人間の罪と、神の裁きを語っただけだと思われます。しかし、パウロの話は、フェリクスの心に神の言葉として響いたのです。
この恐れから、信仰へと入ってくる人々もいます。ペンテコステの日、「イエス・キリストを殺したのはあなたがただ」というペトロの説教を聞いて「大いに心を打たれた」人々が三千人洗礼を受けました。キリストを十字架につけた、その罪を問われた人々が、反発や恐れを越えて、心動かされてイエスさまを信じて生きる者とされました。
しかし、フェリクスは、恐れを感じ、心が動かされても、そこにとどまってしまったのです。自分自身の中に手放せない欲望が大きいために、神の言葉に触れ、恐れは感じても自分の欲望の中にとどまってしまうのです。
ところで、使徒言行録は、イエス・キリストを信じる信仰のことをよく「この道」と記しています。今日の聖書箇所では14節と22節にあります。この道というときのギリシャ語の「道」という言葉は、まさに人が歩く道そのものです。日本語には、武道とか茶道とかありますように、「この道」と言いますと、何か一つのことを精神面を含めて、鍛錬して極めていく、〇〇道というようなニュアンスを含むような気がします。でも、キリストを信じることを指す「この道」は鍛錬して何事か極めるというあり方とは違います。ごく素朴にイエス・キリストと共に歩む道ということです。
皆さん、私たちの信仰「この道」というのは、精神的修行とか、努力して極めていくということとは違います。私たちは道なき道を自分で切り拓きながら歩むような時もあります。でも、そのような時ですら、道を拓いてくださるのは実のところは主イエスさまなのです。「わたしは道である」とおっしゃるイエス・キリストと共に歩む時、道は拓け、道は整えられていくのです。私たちはその作られた道を歩むのです。
そして、その「道」は、信じて洗礼を受けておしまいではなく、そこからずっと続いていくのです。主イエスさまを信じて歩む道は、神の国まで続く道です。試練も苦労もある道ですが、一人ではない道です。歩いているその時は夢中で歩んでいてわからないのですが、振り返ると、あの時もこの時も主イエスさまが共におられ、導いてくださっていたことがわかる道です。皆さん、今日もその道を私たちは未来に向かって歩んで行きましょう。
【2021년 9월 12일 주일예배(요약판)】
“주와 함께 이 길을 걷자” 사도행전 24장 1~27절
오늘의 성경 말씀은 예루살렘의 유대인 권력자들이“변호사 더둘로”를 데리고 바울을 총독 벨릭스에게 고발하기 위해서 가이사랴까지 찾아온 장면입니다.
먼저 변호사 더둘로가 로마 총독 벨릭스에게 바울을 고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내용이 2~8절에 기록되어 있는데, 바울이“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그가 또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 우리가 잡았사오니 ”라는 것이었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 공회에서 거론된 죄상 중 하나가“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 동안에 지으리라”(마가복음 14장 58절) 라는 것이었습니다. 바울 또한 예수님과 똑같이 예루살렘 성전의 문제로 고소를 당하고 있습니다. 또,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죄에 빠뜨리기 위하여 그 때의 총독 빌라도에게 “그가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하게 하나이다”(누가복음 23장 5절) 라고 호소했습니다. 이것도 또한 이때의 바울에 대한 죄상과 매우 비슷합니다.
이 더둘로의 고소장에 대해서 바울은 아주 논리적으로 대답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자신은 여러 해 만에 예루살렘에 들어온 지 아직 열이틀밖에 안 되었다는 것, 그 짧은 시간 안에 소동을 일으킬 수도 없고, 소동을 일으킨 것을 본 사람도 없다고 반박하며, 유대인들의 호소에는 증거가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는 점인데, 바울은 자기의 신앙을 “이 도”라는 말로 표현한 뒤 자신들의 조상들이 예배한 하나님을 예배하고 구약성서의 말씀을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열심히 믿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점에 관하여 자기는“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도록 노력하고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즉, 그는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 사람들로부터 비난받을 점은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셋째로,“성전을 더럽혔다”는 점인데, 자신이 예루살렘에 온 것은 자기 동포에게 구원금을 건네기 위해서이며, 그 때마다 성전에서 정결한 의식에 참여하여 제물을 바쳤을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성전을 더럽히는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물론 우수한 두뇌를 가지고 있었던 인물입니다. 그러나 로마 총독 그리고 유대인의 권력자들을 앞에서 이렇게 주눅 들지 않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바울이 우수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보호가 있었고 성령이 함께 계셔서 할 말을 나타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예수님께서 머지않아 제자들이 박해를 받게 될 것을 알고 계셔서 그 때를 대비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마태복음 10장 18~20절)
바울 또한 주 예수님의“아버지의 성령”에 의해 변론의 말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논전은 바울에게 유리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게다가 총독 자신이 “이 도” 즉 기독교에 대해서“더 자세히 아는 고로”라고 했기 때문에 기독교가 유대인들이 말하는 것과 같은 소동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총독은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총독은 바울을 이대로 가이사랴에서 감금했습니다. 총독은 올바른 판단과 심판을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기에게 유리하게 일을 진행하고 싶을 뿐이었습니다. 바울을 무죄 방면시킨다면 유대인들의 미움을 사게 될 것입니다. 또 무슨 짓을 해도 유대인들은 바울을 죽일 것입니다 로마 시민권을 가진 바울이 살해당하거나 소동이 벌어지면 자신의 책임이 됩니다. 그러나 또 로마 시민권을 가지는 바울을 증거 불충분한 상태로 유죄로 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기분을 해치지 않도록 결론을 미룬 것입니다. 이 기간은 결국 총독이 교체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조직 안에서는 이런 일이 때때로 일어납니다. 어떠한 의도 때문에 문제의 해결이 보류되어 버리는 일이 있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로 옮겨지면서 여기서부터 단번에 로마로 발길이 옮겨지는가 했더니 바울은 가이사랴에서 무려 이2년 동안이나 발이 묶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발이 묶인 일도 또 이제부터 바울을 덮칠 재난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 때 그 자리에서 최적의 상태에서 우리 인간이 일을 해낼 수 있도록 배려한 것입니다.
바울의 옥중 서간이라고 불리는 편지가 있습니다. 그 집필 시기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리는데, 저는 이 편지를 이때의 2년동안 바울이 썼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헛되이 여겨지는 이 2년간이 없었다면 아마도 바울의 편지의 반절은 성경에 남아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발이 묶이는 것도 재난도 모두 다 그때 그 자리에 최선의 배려를 가지고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배려 가운데 바울은 총독 벨릭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여기에 흥미로운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5절입니다.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25절).
벨릭스는 두려움을 느꼈다고 합니다. 바울은 특별히 벨릭스 자신의 죄를 말한 게 아니라 지극히 평범하게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심판을 말했을 뿐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바울의 이야기는 벨릭스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와 닿았던 것입니다.
이 두려움으로부터 신앙으로 들어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성령강림 날에“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것은 너희들이다”라는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린” 사람들이 삼천명이나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그 죄를 추궁당한 사람들이 반발이나 두려움을 넘어 마음에 감동을 받고 예수님을 믿고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벨릭스는 두려움을 느껴 마음이 움직여도 거기에 머물러 버린 것입니다. 자기 자신 속에 내려 놓지 못하는 욕망이 크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고 두려움은 느껴도 그냥 자신의 욕망 속에 머무르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흔히 “이 도”라고 적고 있습니다. 오늘의 성경말씀 14절과 22절에 나와 있습니다.
이 도라고 말할 때 그리스어의 “도(길)”라는 말은 바로 사람이 걷는 길 그 자체입니다. 일본어에는 무도나 다도가 있듯이 “이 도”라고 말하면 뭔가 한가지 일을 정신면을 포함하여 단련하고 연마해 가는 〇〇도라는 뉘앙스를 포함하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가리키는“이 도”는 단련하고 뭔가를 깊이 연구한다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걷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이 길”이라는 것은 정신적 수행이라든지 노력하고 궁구해 간다는 것과는 다릅니다. 때때로 우리는 길이 없는 길을 스스로 개척하면서 걸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때조차 길을 터 열어 주시는 것은 사실 주 예수님인 것입니다. “나는 길이요” 라고 말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걸을 때, 길은 열리고 닦여져 가는 것입니다. 정녕 우리는 그렇게 만들어진 길을 걷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길”은 믿고 세례를 받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거기서부터 쭉 이어지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을 믿고 걷는 길은 하나님 나라까지 가는 길입니다. 시련도 고생도 있는 길입니다만, 혼자가 아닌 길입니다. 걷고 있는 그 때는 정신없이 걸어 가느라 알 수 없지만, 뒤돌아보면 그때도 이때도 늘 우리 주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고 인도해 주셨음을 알 수 있는 길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우리는 미래를 향해 그 길을 걸어 갑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