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하는 것까지 그들이 듣다가 소리 질러 이르되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애 버리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 하여”(22장22절)
바울은 십자가의 주 예수님과 똑같이 사람들의 욕설을 받고 살의가 가득한 가운데에 있었습니다. 지금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주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 바울의 모습은 신앙인으로서 매우 용기 있는 행동이자 힘찬 전도자의 모습인 줄 압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다지 강한 사람은 아닙니다. 괴로움 속에서 눈물을 흘리고, 두려움 속에서 고민하고, 기도밖에 할 수 없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에게는 예수님을 만나고 하나님에 의해 변화된 자로서 그 기쁨과 감사를 말하지 않을 수 없는 뜨거운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로마서 14장 8절에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로마 14:8) 라고 고백하고 있듯이, 바울은 오직 십자가의 주 예수님의 발자취를 계속 쫓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주 예수그리스도를 보고 있을까요? 물론 우리는 주 예수님을 보고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다정한 그리스도, 빛나는 그리스도, 너희는 그대로여도 좋다고 말씀하시는 그리스도, 영광의 그리스도만이 아닐까요? 이들도 물론 그리스도의 진실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보고 있었던 그리스도는 그뿐만이 아닙니다. 바울은 사람들의 욕설 가운데 홀로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골고다의 언덕을 오르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도 보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바울은 자기가 그 그리스도를 욕하고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자각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보았던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에 따라갈 때, 우리 자신 또한 영광 속에서만 걷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신앙이기 때문에, 우리도 또한 어리석은 사람으로서 사람들의 시선을 받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미움이나 분노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쫓는 사람으로서 사람들의 미움과 분노의 화살을 맞았지만, 담대하게 증거했습니다. 이에 바울을 둘러싼 사람들은 다양한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먼저 바울을 사로잡은 천부장입니다만, 사람들이 왜 그렇게 바울에게 큰소리로 외치는지를 조사하기 위해 바울을 채찍으로 치고, 즉 고문한 일을 자백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반대로 겁을 먹고 맙니다. 자기는 고액의 돈을 지불해서 로마의 시민권을 얻었는데 바울이 타고난 시민권자라는 것은 고귀한 출신이라 자기와는 다른 바울을 두려워한 것입니다. 당시의 사회에서 로마 시민인지 아닌지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 로마 시민인 바울을 자신의 판단으로 고문하고 처벌하려고 한 것은 반대로 자기가 처벌받게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부장은 유대의 제사장들과 공회의 멤버를 모아 유대의 권력자들 밑에서 사정청취를 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의 권력자들은 처음부터 제대로 바울의 심판을 실시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대제사장 아나니아의 지시로 바울은 입을 다물었습니다. 다짜고짜 위협해 온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체포된 예수님께서 대제사장 앞으로 끌려가셨을 때 역시 대제사장의 지시로 맞으신 것과 똑같습니다. 지금 바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걸어가신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대제사장에게 기죽지 않고 “회칠한 담이여”(23:3) 라고 단언했습니다. “희칠한 담”이란 외관만을 꾸미는 겉치레의 “위선자”를 가리키는 말이고 저주의 말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후의 바울의 언행입니다. 바울은 공회의 멤버가 사두개인의 멤버와 바리새인 멤버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알고 새로운 작전을 이곳에서 세우고 발언하기 시작합니다. 23장 6절입니다. “바울이 그 중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다른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23:6)
사두개인들은 “사자의 부활”을 믿지 않고 “그런 것을 성경은 가르치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한편, 바리새인들은 “사자의 부활”을 믿고 있어서 그것 때문에 이들은 신앙 이해에서 종종 충돌했던 것입니다. 그것을 아는 바울이 일부러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 라고 바리새인들에게 자기의 생각이 유대의 전통적인 생각과 달랐던 것은 아님을 보여주며 사두개인들과의 갈등을 부추겼습니다. 그 바울의 계획대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사이에서 논쟁이 벌어졌고 이로 인해 결국 바울은 살아났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폭도에게 둘러싸인 이래로 바울에게 일어나고 있는 것은 분명 엄청난 시련이기는 하지만, 불가사의하게도 바울은 폭도의 린치에 의한 죽음에서도, 채찍질로부터도, 공회에서의 재판에서도 살아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계셨고, 바울은 구원된 것입니다. 한편, 그의 주위에는 혼란이나 불안 등이 생기고 있습니다. 로마의 천부장만 하더라도 바울을 모함하려는 유대인들 사이에도 평온은 없습니다. 오직 한 사람, 사람들의 화살에 그리스도처럼 고통을 당하면서도 바울만이 흔들리지 않고 서 있는 것입니다. 아니, 바울은 자신의 힘으로 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힘으로 서 있었던 것입니다.
그 바울에게 그날 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23장 11절입니다.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하여야 하리라”(23:11)
이 “담대하라” 라는 말에는 “힘내라.” 라든가 “정신 차려라.” 라는 의미가 있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셨을 때, 혹은 오랜 세월 혈루증을 앓던 여성을 고치셨을 때에 하시던 말과 같습니다. 아픈 사람이든, 잡혀 있는 바울이든, 그 상황에서 용기를 내라든가, 힘을 내라든가, 정신차리라고 하는 그런 것은 보통 생각하면 터무니 없는 말처럼도 들립니다. 단지, 바울이나 중풍병자나 오랫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성이 각각 혼자 있었다면 당치않는 일이지만,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계셨던 것입니다. 오늘의 성경 말씀에도 바울 곁에 그리스도께서 서 계시며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담대하게 그 화살과 당당히 맞섰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울이 용감했기 때문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것입니다. 그날 밤, 아마 바울은 지치고 불안에 사로잡혀 있었을 것입니다. 공회에서 용감하였더라도 혼자 있는 밤에는 바울이라도 나약해졌을 것입니다. 사도행전이나 바울의 서간을 읽으면 반복해서 바울이 두려워한 것, 불안하게 생각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옆에 서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담대하라” 고요.
그리고 더 예수님께서는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까지도 힘들었는데, 아직도 갈 길이 있습니까?” 라고도 생각되는 말입니다만, 로마행은 오히려 바울이 원하고 있던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주님께서 자신의 소원을 받아들여 주신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용기를 받고 그것에 응하여 용기를 내고 걸은 사람에게는 또 다른 길이 제시됩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아무리 그것이 어둡고 험난한 길일지라도 그 길을 걸으면 걸을수록 목표가 분명해지고 경치가 펼쳐지며 기쁨의 발걸음이 되는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지상에서의 생애의 마지막 수난 때 채찍을 맞으면서 골고다 언덕을 걸어가셨습니다. 사람들의 욕설과 흙먼지 속을 로마병의 채찍을 맞으며 걸었습니다. 그 걸음 뒤에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절망의 길을 주 예수님께서 걸어 주셨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와 함께 걷는 자의 걸음은 기쁨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은 자는 때로는 어둡고 험한 길을 걸어야 할지라도 그 앞에 반드시 희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십니다. 부활의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십니다. 그러므로 결코 실망으로는 끝나지 않는 것입니다.
코로나화 속에서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아직도 전혀 예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그리스도로부터 용기를 얻고 걸음을 옮깁니다. 이 걸음이 결코 실망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의 모습 앞에 부활의 소망이 있습니다. 그 소망에 살 때, 참된 용기가 주어집니다.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용기를 주시는 것입니다. 아멘.
2021年8月29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ローマ(로마서) 14章 8~9節
〇讃 頌 讃頌歌 325(1, 4節)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聖書奉読 使徒言行録(사도행전) 22章22節~23章11節
〇説 教 「勇気を出しなさい(담대하라)」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435(1, 3節)
〇献 金
〇報 告
〇感謝祈祷
〇頌 栄 讃頌歌 1
〇祝 祷
【 2021年 8月 29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
「勇気を出しなさい」 使徒言行録 22章22節~23章11節
「パウロの話をここまで聞いた人々が、声を張り上げて言った。『こんな男は、地上から除いてしまえ。生かしてはおけない。』」(22章22節)
パウロは十字架の主イエスさまと同じように人々の罵りを受け、殺意の中にありました。今、パウロはイエス・キリストの足跡を追っているのです。十字架の主イエスさまに従っているのです。このパウロの姿は、信仰者としてとても勇気ある行動であり、力強い伝道者の姿かと思います。でも、パウロはそれほど強い人間ではありません。苦しみの中で涙を流し、恐れの中で悩み、祈ることしか出来ない私たちと同じような人間でした。しかし、パウロにはイエスさまと出会い、神さまによって変えられた者として、その喜びと感謝を語らずにはおれない熱い思いがあったのです。ローマの信徒への手紙14章8節で「わたしたちは、生きるとすれば主のために生き、死ぬとすれば主のために死ぬのです。従って、生きる伸しても、死ぬにしても、わたしたちは主のものです」(ローマ14:8)と告白しているように、パウロはひたすら十字架の主イエスさまの御跡を追い続けているのです。
皆さん、私たちは主イエス・キリストを見ているでしょうか? 勿論、私たちは主イエスさまを見ているでしょう。でも、それは優しいキリスト、光り輝くキリスト、あなたはそのままでいいんだとおっしゃってくださるキリスト、栄光のキリストばかりではないでしょうか? これらも勿論キリストの真実の姿です。でも、パウロが見ていたキリストはそればかりではありません。パウロは人々の罵りの中、独り十字架を背負い、ゴルゴダの丘を登られ、十字架に架けられたキリストをも見ておりました。しかも、パウロは自分がそのキリストを罵り、十字架に架けたという自覚をもって、キリストを見ていたのです。 このキリストに従って歩む時、私たち自身もまた栄光の中ばかりを歩むのではありません。キリストのゆえに、信仰のゆえに、私たちもまた、愚かな者として、人々の視線を浴びることもあるのです。人々の憎しみや怒りの矢面に立たされることもあるのです。
パウロは、このようにキリストの御跡を追う者として、人々の憎しみや怒りの矢面に立たされましたが、堂々と証しをしました。これに対し、パウロを取り巻く人々は様々な態度を取っております。
まず、パウロを捕らえた千人隊長ですが、人々がどうしてこれほどパウロに対してわめき立てるのかを調べるために、パウロを鞭で打って、つまり拷問してやったことを白状させようとしました。しかし、パウロがローマの市民権を持った人間だと知って、逆に怯えてしまうのです。自分は多額のお金を支払ってローマの市民権を得たのに、パウロが生まれながらの市民権を持っているということは、生まれも育ちも自分とは違うパウロを恐れたのです。当時の社会において、ローマ市民であるか否かというのは、その扱いに天と地ほどの開きがありました。そのローマ市民であるパウロを自分の判断で拷問し処罰しようとしたことは、逆に自分が処罰されることになってしまうからです。
そこで、千人隊長はユダヤの祭司長たちと最高法院のメンバーを招集し、ユダヤの権力者たちのもとでされ、事情聴取をすることにしました。
しかし、ユダヤの権力者たちは最初からまともにパウロの裁きを行うつもりはありませんでした。大祭司アナニアの指示でパウロは口を打たれます。いきなり威嚇してきたのです。これはまさに、逮捕されたイエスさまが大祭司の前に連れて行かれた時、やはり大祭司の指示で打たれたことと重なります。今まさにパウロはキリストの歩まれた道を歩んでいるのです。
そして、パウロは大祭司に対して、怯むことなく「白く塗った壁よ」(23:3)と言い放ちました。「白く塗った壁」というのは、うわべだけを取り繕う「偽善者」を指す言葉で、呪いの言葉です。
興味深いのはこの後のパウロの言動です。パウロは最高法院の議会のメンバーがサドカイ派のメンバーとファリサイ派のメンバーで構成されているのを知り、新たな作戦をここで立て発言し始めるのです。6節です。「パウロは、議員の一部がサドカイ派、一部がファリサイ派であることを知って、議場で声を高めて言った。『兄弟たち、わたしは生まれながらのファリサイ派です。死者が復活するという望みを抱いていることで、わたしは裁判にかけられているのです。』」(6節)
サドカイ派は「死者の復活」を信じず、「そんなことを聖書は教えていない」と主張しました。一方、ファリサイ派は「死者の復活」を信じており、それで、この両者は信仰理解で度々衝突していたのです。それを知るパウロが、敢えて「死者が復活するという望みを抱いていることで、わたしは裁判にかけられているのです」と、ファリサイ派の人々に対して、自分の考えがユダヤの伝統的な考えと異なったものではないことを示し、サドカイ派との対立を煽りました。そのパウロの目論見通り、ファリサイ派とサドカイ派の間で論争が起こり、このことで、結局、パウロは助けられました。
エルサレム神殿で暴徒に囲まれて以来、パウロの身に起こっていることは確かに大変な試練ではありますが、不思議なことにパウロは暴徒のリンチによる死からも、鞭打ちからも、最高法院での裁判においても、助け出されています。神さまが共におられパウロは救い出されたのです。一方で、彼の周りには混乱や不安が生じています。ローマの千人隊長にしても、パウロを陥れたいユダヤ人の間にも、平穏はありません。ただ一人、人々の矢面で、キリストのように苦しみに遭いながらも、パウロだけが揺るぎなく立っているのです。いえ、パウロは自分の力で立っているのではありません。神さまの力によって立たせていただいているのです。
そのパウロに、その夜、主がおっしゃいました。23章11節です。「勇気を出せ。エルサレムでわたしのことを力強く証ししたように、ローマでも証しをしなければならない。」(23:11)
この「勇気を出せ」という言葉には、「元気を出しなさい」とか「しっかりしなさい」という意味がある言葉です。イエスさまが中風の人を癒す時、あるいは長年出血のあった女性を癒す時に、かけられた言葉と同じです。病の人であれ、捕らえられているパウロであれ、その状況で、勇気を出せ、とか、元気を出せ、とか、しっかりしろ、というのは、普通に考えると無茶な言葉のようにも聞こえます。ただ、パウロや中風の人や長い間出血している女性がそれぞれ一人でいるのなら無茶なことではありますが、そこにはキリストがおられたのです。今日の聖書箇所においても、パウロの側にキリストは立っておっしゃったのです。
パウロは堂々と矢面に立ちました。しかし、それはパウロが勇敢だったからではありません。キリストが立たせて下さったのです。その夜、おそらくパウロは疲れ、不安にとらわれていたことでしょう。最高法院で勇敢であっても、一人の夜にはパウロとて弱きになったと思われます。使徒言行録やパウロの書簡を読むと、繰り返しパウロが恐れたこと、不安に思ったことが記されています。だからこそ、イエスさまがそばに立っておっしゃったのです、「勇気を出せ」と。
そして、さらにイエスさまは「ローマでも証しを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おっしゃっています。これまでも大変だったのに、まだ先があるのですか?とも思える言葉ですが、ローマ行きは、むしろパウロが願っていたことです。ここに来て、パウロは主が自分の願いを聞き届けてくださったことを知らされたのです。キリストに勇気を与えられ、それに応えて勇気を出して歩んだ者には、さらなる道が示されます。これはまさに恵みです。いかにそれが暗く険しい道であったとして、その道を歩めば歩むほど、目標がクリアになり、景色が広がっていき、喜びの歩みとなるのです。
主イエス・キリストは、その地上での生涯の最後、受難の時、十字架を背負ってゴルゴダの丘へと歩まれました。人々の罵声と土埃の中を、ローマ兵に鞭打たれながら歩まれました。その歩みの先に待つのは死だけでありました。その絶望の道を主イエスさまが歩んでくださったゆえに、キリストを信じ、キリストと共に歩む者の歩みは喜びの道となるのです。キリストの十字架のゆえに罪赦された者は、時に暗く険しい道を歩まなければならなくとも、その先に必ず希望があります。だから勇気を出すのです。キリストが共におられます。復活のキリストが共におられます。だからこそ、決して失望では終わらないのです。
コロナ禍の中、今後、どのようになるのかまったく未だに予想がつきません。しかし、なお私たちはキリストから勇気をいただいて歩みます。この歩みが失望に終わらないことを知っています。主イエス・キリストの受難の姿の先に復活の希望があります。その希望に生きるとき、まことの勇気が与えられます。主が私たち一人一人に勇気を与えて下さるのです。アーメン。
【2021년 8월 29일 주일예배(요약판)】
“담대하라” 사도행전 22장 22절~ 23장 11절“
“이 말하는 것까지 그들이 듣다가 소리 질러 이르되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애 버리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 하여”(22장22절)
바울은 십자가의 주 예수님과 똑같이 사람들의 욕설을 받고 살의가 가득한 가운데에 있었습니다. 지금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주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 바울의 모습은 신앙인으로서 매우 용기 있는 행동이자 힘찬 전도자의 모습인 줄 압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다지 강한 사람은 아닙니다. 괴로움 속에서 눈물을 흘리고, 두려움 속에서 고민하고, 기도밖에 할 수 없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에게는 예수님을 만나고 하나님에 의해 변화된 자로서 그 기쁨과 감사를 말하지 않을 수 없는 뜨거운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로마서 14장 8절에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로마 14:8) 라고 고백하고 있듯이, 바울은 오직 십자가의 주 예수님의 발자취를 계속 쫓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주 예수그리스도를 보고 있을까요? 물론 우리는 주 예수님을 보고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다정한 그리스도, 빛나는 그리스도, 너희는 그대로여도 좋다고 말씀하시는 그리스도, 영광의 그리스도만이 아닐까요? 이들도 물론 그리스도의 진실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보고 있었던 그리스도는 그뿐만이 아닙니다. 바울은 사람들의 욕설 가운데 홀로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골고다의 언덕을 오르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도 보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바울은 자기가 그 그리스도를 욕하고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자각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보았던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에 따라갈 때, 우리 자신 또한 영광 속에서만 걷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신앙이기 때문에, 우리도 또한 어리석은 사람으로서 사람들의 시선을 받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미움이나 분노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쫓는 사람으로서 사람들의 미움과 분노의 화살을 맞았지만, 담대하게 증거했습니다. 이에 바울을 둘러싼 사람들은 다양한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먼저 바울을 사로잡은 천부장입니다만, 사람들이 왜 그렇게 바울에게 큰소리로 외치는지를 조사하기 위해 바울을 채찍으로 치고, 즉 고문한 일을 자백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반대로 겁을 먹고 맙니다. 자기는 고액의 돈을 지불해서 로마의 시민권을 얻었는데 바울이 타고난 시민권자라는 것은 고귀한 출신이라 자기와는 다른 바울을 두려워한 것입니다. 당시의 사회에서 로마 시민인지 아닌지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 로마 시민인 바울을 자신의 판단으로 고문하고 처벌하려고 한 것은 반대로 자기가 처벌받게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부장은 유대의 제사장들과 공회의 멤버를 모아 유대의 권력자들 밑에서 사정청취를 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의 권력자들은 처음부터 제대로 바울의 심판을 실시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대제사장 아나니아의 지시로 바울은 입을 다물었습니다. 다짜고짜 위협해 온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체포된 예수님께서 대제사장 앞으로 끌려가셨을 때 역시 대제사장의 지시로 맞으신 것과 똑같습니다. 지금 바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걸어가신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대제사장에게 기죽지 않고 “회칠한 담이여”(23:3) 라고 단언했습니다. “희칠한 담”이란 외관만을 꾸미는 겉치레의 “위선자”를 가리키는 말이고 저주의 말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후의 바울의 언행입니다. 바울은 공회의 멤버가 사두개인의 멤버와 바리새인 멤버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알고 새로운 작전을 이곳에서 세우고 발언하기 시작합니다. 23장 6절입니다. “바울이 그 중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다른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23:6)
사두개인들은 “사자의 부활”을 믿지 않고 “그런 것을 성경은 가르치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한편, 바리새인들은 “사자의 부활”을 믿고 있어서 그것 때문에 이들은 신앙 이해에서 종종 충돌했던 것입니다. 그것을 아는 바울이 일부러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 라고 바리새인들에게 자기의 생각이 유대의 전통적인 생각과 달랐던 것은 아님을 보여주며 사두개인들과의 갈등을 부추겼습니다. 그 바울의 계획대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사이에서 논쟁이 벌어졌고 이로 인해 결국 바울은 살아났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폭도에게 둘러싸인 이래로 바울에게 일어나고 있는 것은 분명 엄청난 시련이기는 하지만, 불가사의하게도 바울은 폭도의 린치에 의한 죽음에서도, 채찍질로부터도, 공회에서의 재판에서도 살아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계셨고, 바울은 구원된 것입니다. 한편, 그의 주위에는 혼란이나 불안 등이 생기고 있습니다. 로마의 천부장만 하더라도 바울을 모함하려는 유대인들 사이에도 평온은 없습니다. 오직 한 사람, 사람들의 화살에 그리스도처럼 고통을 당하면서도 바울만이 흔들리지 않고 서 있는 것입니다. 아니, 바울은 자신의 힘으로 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힘으로 서 있었던 것입니다.
그 바울에게 그날 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23장 11절입니다.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하여야 하리라”(23:11)
이 “담대하라” 라는 말에는 “힘내라.” 라든가 “정신 차려라.” 라는 의미가 있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셨을 때, 혹은 오랜 세월 혈루증을 앓던 여성을 고치셨을 때에 하시던 말과 같습니다. 아픈 사람이든, 잡혀 있는 바울이든, 그 상황에서 용기를 내라든가, 힘을 내라든가, 정신차리라고 하는 그런 것은 보통 생각하면 터무니 없는 말처럼도 들립니다. 단지, 바울이나 중풍병자나 오랫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성이 각각 혼자 있었다면 당치않는 일이지만,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계셨던 것입니다. 오늘의 성경 말씀에도 바울 곁에 그리스도께서 서 계시며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담대하게 그 화살과 당당히 맞섰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울이 용감했기 때문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것입니다. 그날 밤, 아마 바울은 지치고 불안에 사로잡혀 있었을 것입니다. 공회에서 용감하였더라도 혼자 있는 밤에는 바울이라도 나약해졌을 것입니다. 사도행전이나 바울의 서간을 읽으면 반복해서 바울이 두려워한 것, 불안하게 생각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옆에 서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담대하라” 고요.
그리고 더 예수님께서는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까지도 힘들었는데, 아직도 갈 길이 있습니까?” 라고도 생각되는 말입니다만, 로마행은 오히려 바울이 원하고 있던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주님께서 자신의 소원을 받아들여 주신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용기를 받고 그것에 응하여 용기를 내고 걸은 사람에게는 또 다른 길이 제시됩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아무리 그것이 어둡고 험난한 길일지라도 그 길을 걸으면 걸을수록 목표가 분명해지고 경치가 펼쳐지며 기쁨의 발걸음이 되는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지상에서의 생애의 마지막 수난 때 채찍을 맞으면서 골고다 언덕을 걸어가셨습니다. 사람들의 욕설과 흙먼지 속을 로마병의 채찍을 맞으며 걸었습니다. 그 걸음 뒤에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절망의 길을 주 예수님께서 걸어 주셨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와 함께 걷는 자의 걸음은 기쁨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은 자는 때로는 어둡고 험한 길을 걸어야 할지라도 그 앞에 반드시 희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십니다. 부활의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십니다. 그러므로 결코 실망으로는 끝나지 않는 것입니다.
코로나화 속에서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아직도 전혀 예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그리스도로부터 용기를 얻고 걸음을 옮깁니다. 이 걸음이 결코 실망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의 모습 앞에 부활의 소망이 있습니다. 그 소망에 살 때, 참된 용기가 주어집니다.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용기를 주시는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