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드디어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여기서 예루살렘의 크리스천들에게 바울 일행이 환영받은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그곳에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바울에 대한 박해가 아니라 바울에 대한 오해였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율법을 경시하여 유대인의 관습을 따르고 있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 회의에서 이미 해결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교회에는 이 문제가 계속 응어리로 남아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는 율법이나 유대인의 관습을 중요시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유대인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물론, 이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지만, 예루살렘 교회에는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던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바울은 결코 율법을 경시하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유대인으로서는 바리새인과 똑같이 율법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단지 구원에 관해서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 절대의 조건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에 의해서만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해 나가기를 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오해를 풀기 위해서 예루살렘 교회의 리더적 존재였던 야고보가 하나의 제안을 했습니다. 그것이 23절의 말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그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23-24절)
여기에 등장하는 “서원”이라고 하는 것은 구약 시대부터 전해지고 있는 유대인의 관습입니다. 이 관습을 지켜 바울이 서원을 하는 사람들을 돌보고 그 비용을 부담하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이면 이 오해를 풀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저로서는 납득이 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유대인들로부터 목숨을 위협받고 있었던 것은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이방인 교회의 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루살렘 교회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의식을 거행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을 기꺼이 맞이했다고 하고 있습니다만, 사실은 아무도 바울을 사랑으로 맞이하여 바울의 생명을 제일 우선으로 지키려고는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오늘의 성경 말씀 후반에는 바울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체포되는 장면이 있습니다만, 거기서 예루살렘 교회의 사람들이 바울을 지키려고 한 흔적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잠자코 이 야고보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죽음을 각오하고 예루살렘에 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힘이나 오해에 대한 우려 등은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바울이 생각하고 있는 것은 주 예수를 위해서 그리고 교회의 일치를 위해서 라는 것입니다. 즉 바울은 자신의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공동체의 일치를 위하여 사랑의 배려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바울의 사랑의 배려는 바울 자신의 체포라는 보답 받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원래 서원의 의식 기간이 7일간이라는 것 자체가 예루살렘에서의 체류 기간이 늘어난다는 것이므로 그만큼 생명을 위협받는 바울에게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성전 출입이라는 눈에 띄는 행위를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아니나다를까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바울을 보고 붙잡았습니다. 성전에는 이방인도 들어갈 수 있는 곳과 유대인만 들어갈 수 있는 장소가 있는데, 유대인들은 바울이 본래 이방인이 들어가면 안 되는 장소에 이방인을 들어가게 했다고 착각해서 큰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30절에 백성들이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어냈다고 되어 있습니다만, 이것은 분명히 그들이 처음부터 바울에게 살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하는 행동입니다. 성전에서 사람을 죽이면 성전을 더럽히게 되므로 그들은 바울을 성전에서 끌어냈습니다. 그리고 폭행을 가했습니다. 사실 소동을 듣고 달려온 로마 천부장의 도착이 조금이라도 더 늦었더라면 바울은 살해당하고 말았을 겁니다.
성경에는 그 때 예루살렘 교회의 사람들이 구하러 왔다든가, 바울을 위해서 기도를 했다든가 하는 내용은 쓰여 있지 않습니다. 바울은 결국 예루살렘 교회의 도움을 받는 일 없이 혼자 이 상황에 맞섰습니다. 바울은 바로 이 때 고독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성경 말씀의 마지막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35절입니다. “바울이 층대에 이를 때에 무리의 폭행으로 말미암아 군사들에게 들려가니 이는 백성의 무리가 그를 없이하자고 외치며 따라 감이러라” (35-36절)
많은 사람들이 “없애라” 고 외치는 장면을 우리는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걸리실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여러 가지의 구원의 역사를 기뻐하여 예루살렘 입성에 열광한 사람들이 일전하여 예수님을 향해 “죽여라”, “십자가에 못박아라” 고 외치던 수난주의 사건입니다.
바울은 바로 십자가의 주 예수님과 똑같이 사람들의 욕설을 받고 살의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다리로 걷는 게 아니라, 로마 군사들에게 묶인채 자유를 잃고 있습니다. 참으로 비참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확실히 지금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쫓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주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루살렘 교회나 야고보의 탓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바울을 이끄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따라 걸어 가다가 이렇게 끔찍한 일을 당한다면 하나님을 따르는 의미는 없을까요? 틀림없이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바울은 전혀 보답을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하나님의 시각에서 생각하면 전혀 다른 것이 보입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이 바울의 보답 받지 못하는 헌신이 나중에 큰 결실을 남깁니다. 교회는 이윽고 바울의 행보를 돌이켜보면서 거기에 분명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사도행전이 기록되었을 무렵 이미 예루살렘은 로마에 의해 파괴되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끌려 나온 성전도 폐허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도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바울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신앙의 토대로 하여 복음은 전 세계로 퍼져 나갔습니다. 이것은 바울이라는 뛰어난 특별한 전도자이기 때문에 할 수 있던 것이 아닙니다. 아니, 바울 자신도 자기가 행한 일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몰랐습니다. 오직 우직하게 하나님을 따라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걸어갈 때 거기에 하나님께서 큰 일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또 성령의 인도를 받아 걸어갈 때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들을 반드시 볼 것입니다. 하나님을 따라 걸어 갈 때 보답 받지 못하는 노고는 없는 것입니다. 일분 일초, 작은 한걸음 한걸음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풍부한 결실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아멘.
2021年8月8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로마서(ローマ) 8章 3, 5~6節
〇讃 頌 讃頌歌 325(1, 3節)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聖書奉読 使徒言行録 21章 17~36節
〇説 教 「오해를 극복하기 위하여(誤解を乗り越えるために)」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465(1, 3節)
〇献 金
〇報 告
〇感謝祈祷
〇頌 栄 讃頌歌 1
〇祝 祷
【 2021年 8月 8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
「誤解を乗り越えるために」 使徒言行録 21章 17~36節
パウロはいよいよエルサレムに到着しました。ここでエルサレムのクリスチャンたちにパウロ一行が歓迎されたことが記されておりますが、そこで待っていたのは、パウロに対する迫害ではなく、パウロに対する誤解であったのです。
それは、パウロが律法を軽んじ、ユダヤ人の慣習に従っていないというものでした。そのことはエルサレム会議において解決済みのことであったにも関わらず、エルサレム教会において、この問題がずっとくすぶっていたのです。エルサレム教会には律法やユダヤ人の慣習を重んじている人が多くおりました。救いのためには、ユダヤ人になって、イエス・キリストを受け入れる必要があると考えていたわけです。勿論、この考えは間違った考えであったわけですが、エルサレム教会にはそのような考えの人が多くいたのも現実であったのです。
パウロは決して律法を軽んじていたわけではなく、ユダヤ人としてはファリサイ派の人と同じように律法を守っておりました。ただ、救いに関しては、律法を守ることが絶対の条件ではなく、主イエス・キリストの贖いによってのみ、人間は救われるのだと主張しました。そして、救われた者は、イエス・キリストの愛を実践していくことを勧めていたのです。
その誤解を解くために、エルサレム教会のリーダー的存在であったヤコブが一つの提案をしました。それが23節の言葉です。「だから、わたしたちの言うとおりにしてください。わたしたちの中に誓願を立てた者が四人います。この人たちを連れて行って一緒に身を清めてもらい、彼らのために頭をそる費用を出してください。そうすれば、あなたについて聞かされていることが根も葉もなく、あなたは律法を守って正しく生活している、ということがみんなに分かります。」(23-24節)
ここに登場する「誓願」と言うのは旧約聖書の時代から伝わっているユダヤ人の習慣です。この慣習を守り、パウロが誓願をする人々の面倒を見て、その費用を負担する姿を人々に示せば、この誤解を解くことが出来ると考えたのです。
でも、これは私からすれば、納得のいかない話です。パウロがユダヤ人たちから命を狙われていたのは知っていたはずです。パウロは自分の命をかけて、異邦人教会の献金を携えてエルサレム教会を訪問しているわけです。それなのに、エルサレム教会の人びとはエルサレム神殿に行って儀式を執り行えと言っているのです。パウロを喜んで迎えたとありますけども、本当のところ、誰もパウロのことを愛をもって迎え、パウロの命を第一に守ろうとしていないように思うのです。今日の御言葉の後半には、パウロがエルサレム神殿で逮捕される場面がありますが、そこでエルサレム教会の人びとがパウロを守ろうとした形跡はありません。
それなのに、パウロは黙ってこのヤコブの提案を受け入れました。それはパウロが死ぬことすら覚悟してエルサレムに来ていたからです。人間的な力や誤解に対する恐れなどはないのです。ここでもパウロが考えていることは、主イエスのために、そして、教会の一致のためにということです。つまり、パウロは自分の命の危険を冒しても共同体の一致のために愛の配慮をしたのです。
しかし、このパウロの愛の配慮は、パウロ自身の逮捕という報われない結果をもたらしました。そもそも誓願の儀式の清めの期間が7日間にもおよぶということ自体、エルサレムでの滞在期間が延びるということで、命を狙われているパウロにとって危険この上ないことでした。しかも、神殿に出入りするという目立つ行為をしなくてはなりません。案の定、アジア州から来たユダヤ人がパウロを見かけ、捕らえました。神殿には異邦人も入れるところと、ユダヤ人しか入れない場所があるのですが、ユダヤ人たちはパウロが、本来、異邦人を入れてはならない場所へ異邦人を入れたと勘違いして、大きな騒動となったのです。
30節に民衆がパウロを境内から引きずり出したとありますが、これは明らかに彼らが最初からパウロに対して殺意を持っていたゆえの行動です。神殿で人を殺すと神殿を汚すことになるので、彼らはパウロを神殿から引きずり出したのです。そして暴行を加えました。実際のところ、騒ぎを聞き、駆けつけたローマの千人隊長が到着するのがもう少し遅かったら、パウロは殺されていたでしょう。
聖書には、この時、エルサレム教会の人びとが助に来たとか、パウロのために祈りを捧げたとか記されていません。パウロは結局、エルサレム教会の助けを受けることなく、一人でこの状況に立ち向かいました。パウロはまさにこの時、孤独の中にいたのです。
しかし、今日の聖書箇所の最後にこのような言葉があります。35節です。「パウロが階段にさしかかったとき、群衆の暴行を避けるために、兵士たちは彼を担いで行か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大勢の群衆が、『その男を殺してしまえ』と叫びながらついて来たからである。」 (35-36節)
大勢の群衆が「殺せ」と叫ぶ場面を私たちは聖書の別の箇所で読んだことがあると思います。そうです、イエスさまが十字架にかかられる時です。イエスさまがなさった数々の救いの業を喜び、エルサレム入城に熱狂した人々が一転して、イエスさまに対して「殺せ」「十字架につけろ」と叫んだ受難週の出来事です。
パウロはまさに、十字架の主イエスさまと同じように人々の罵りを受け、殺意のなかにあるのです。さらに自分の足で歩くのではなく、ローマ兵に担がれ、自由を失っています。みじめで悲惨な状況です。しかし、まさに今、パウロはイエス・キリストの足跡を追っているのです。十字架の主イエスさまに従っているのです。それはエルサレム教会やヤコブのせいではなく、神さまがそのようにパウロを導いておられるのです。
神さまに従って歩んで来て、こんな散々な目に遭うのなら、神さまに従う意味はないのでしょうか? 確かに人間的な目で見たら、パウロは全く報われておりません。しかし、これも神さまの視点から考えたら全く別のことが見えて来るのです。
教会の歴史を見るならば、このパウロの報われない献身が、後に大きな実りの残すのです。教会はやがてパウロの歩みを振り返る時、そこに確かに神さまの御業があったことを知るのです。
この使徒言行録が記された頃、すでにエルサレムはローマによって破壊されていました。パウロが引きずり出された神殿も廃墟となっていました。そして、エルサレム教会も無くなっていたのです。しかし、パウロを通して神さまの業は為されたのです。イスラエルを信仰の土台として、福音は全世界に広がりました。これはパウロという優れた特別な伝道者だから為し得たことではありません。いえパウロ自身、自分の働きがどのような結果をもたらすかは分かっていなかったのです。ただただ愚直に神さまに従って、聖霊に導かれて歩んでいく時、そこに神さまが大きなことを為して下さるのです。私たちもまた聖霊に導かれ歩む時、神さまの為さる業を必ず見ます。神さまに従い歩む時、報われない労苦はないのです。一分一秒、小さな一歩一歩が、神さまによって豊かな実りをもたらすものとされるのです。アーメン。
【2021년 8월 8일 주일예배(요약판)】
“오해를 극복하기 위하여” 사도행전 21장 17~36절
바울은 드디어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여기서 예루살렘의 크리스천들에게 바울 일행이 환영받은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그곳에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바울에 대한 박해가 아니라 바울에 대한 오해였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율법을 경시하여 유대인의 관습을 따르고 있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 회의에서 이미 해결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교회에는 이 문제가 계속 응어리로 남아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는 율법이나 유대인의 관습을 중요시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유대인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물론, 이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지만, 예루살렘 교회에는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던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바울은 결코 율법을 경시하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유대인으로서는 바리새인과 똑같이 율법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단지 구원에 관해서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 절대의 조건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에 의해서만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해 나가기를 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오해를 풀기 위해서 예루살렘 교회의 리더적 존재였던 야고보가 하나의 제안을 했습니다. 그것이 23절의 말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그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23-24절)
여기에 등장하는 “서원”이라고 하는 것은 구약 시대부터 전해지고 있는 유대인의 관습입니다. 이 관습을 지켜 바울이 서원을 하는 사람들을 돌보고 그 비용을 부담하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이면 이 오해를 풀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저로서는 납득이 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유대인들로부터 목숨을 위협받고 있었던 것은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이방인 교회의 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루살렘 교회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의식을 거행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을 기꺼이 맞이했다고 하고 있습니다만, 사실은 아무도 바울을 사랑으로 맞이하여 바울의 생명을 제일 우선으로 지키려고는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오늘의 성경 말씀 후반에는 바울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체포되는 장면이 있습니다만, 거기서 예루살렘 교회의 사람들이 바울을 지키려고 한 흔적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잠자코 이 야고보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죽음을 각오하고 예루살렘에 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힘이나 오해에 대한 우려 등은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바울이 생각하고 있는 것은 주 예수를 위해서 그리고 교회의 일치를 위해서 라는 것입니다. 즉 바울은 자신의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공동체의 일치를 위하여 사랑의 배려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바울의 사랑의 배려는 바울 자신의 체포라는 보답 받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원래 서원의 의식 기간이 7일간이라는 것 자체가 예루살렘에서의 체류 기간이 늘어난다는 것이므로 그만큼 생명을 위협받는 바울에게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성전 출입이라는 눈에 띄는 행위를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아니나다를까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바울을 보고 붙잡았습니다. 성전에는 이방인도 들어갈 수 있는 곳과 유대인만 들어갈 수 있는 장소가 있는데, 유대인들은 바울이 본래 이방인이 들어가면 안 되는 장소에 이방인을 들어가게 했다고 착각해서 큰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30절에 백성들이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어냈다고 되어 있습니다만, 이것은 분명히 그들이 처음부터 바울에게 살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하는 행동입니다. 성전에서 사람을 죽이면 성전을 더럽히게 되므로 그들은 바울을 성전에서 끌어냈습니다. 그리고 폭행을 가했습니다. 사실 소동을 듣고 달려온 로마 천부장의 도착이 조금이라도 더 늦었더라면 바울은 살해당하고 말았을 겁니다.
성경에는 그 때 예루살렘 교회의 사람들이 구하러 왔다든가, 바울을 위해서 기도를 했다든가 하는 내용은 쓰여 있지 않습니다. 바울은 결국 예루살렘 교회의 도움을 받는 일 없이 혼자 이 상황에 맞섰습니다. 바울은 바로 이 때 고독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성경 말씀의 마지막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35절입니다. “바울이 층대에 이를 때에 무리의 폭행으로 말미암아 군사들에게 들려가니 이는 백성의 무리가 그를 없이하자고 외치며 따라 감이러라” (35-36절)
많은 사람들이 “없애라” 고 외치는 장면을 우리는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걸리실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여러 가지의 구원의 역사를 기뻐하여 예루살렘 입성에 열광한 사람들이 일전하여 예수님을 향해 “죽여라”, “십자가에 못박아라” 고 외치던 수난주의 사건입니다.
바울은 바로 십자가의 주 예수님과 똑같이 사람들의 욕설을 받고 살의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다리로 걷는 게 아니라, 로마 군사들에게 묶인채 자유를 잃고 있습니다. 참으로 비참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확실히 지금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쫓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주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루살렘 교회나 야고보의 탓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바울을 이끄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따라 걸어 가다가 이렇게 끔찍한 일을 당한다면 하나님을 따르는 의미는 없을까요? 틀림없이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바울은 전혀 보답을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하나님의 시각에서 생각하면 전혀 다른 것이 보입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이 바울의 보답 받지 못하는 헌신이 나중에 큰 결실을 남깁니다. 교회는 이윽고 바울의 행보를 돌이켜보면서 거기에 분명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사도행전이 기록되었을 무렵 이미 예루살렘은 로마에 의해 파괴되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끌려 나온 성전도 폐허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도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바울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신앙의 토대로 하여 복음은 전 세계로 퍼져 나갔습니다. 이것은 바울이라는 뛰어난 특별한 전도자이기 때문에 할 수 있던 것이 아닙니다. 아니, 바울 자신도 자기가 행한 일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몰랐습니다. 오직 우직하게 하나님을 따라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걸어갈 때 거기에 하나님께서 큰 일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또 성령의 인도를 받아 걸어갈 때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들을 반드시 볼 것입니다. 하나님을 따라 걸어 갈 때 보답 받지 못하는 노고는 없는 것입니다. 일분 일초, 작은 한걸음 한걸음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풍부한 결실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