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 일행은 오순절까지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기 위하여 에베소에는 들르지 않고, 드로아에서 배를 갈아타고 돌아갔습니다. 밀레도에 도착했을 때 바울은 에베소로 사람을 보내 교회 장로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의 사람들과 이제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지도자들인 장로들에게 마지막 말을 어떻게 해서라도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18절 이하의 바울의 말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에 3년 정도 체재하고 복음을 전하며 교회 사람들과 함께 보냈습니다. 3년은 바울이 한 군데에서 체재한 최장의 기간입니다. 그래서 에베소 사람들도 바울을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바울은 아무런 두려움 없이 자신의 마음, 자신의 신앙을 장로들에게 맡긴 것입니다.
여기에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바울은 에베소 사람들에게 올바르고 강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까지의 자신의 죄를 숨기지 않고 말하여 그런 자신이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21절)으로 그리스도로부터 은혜를 받아 구원받은 것을 솔직하게 증언한 것입니다.
바울은 시련 가운데에서도 태연하게 극복한 것이 아니라, 괴로워하고 또 매우 약해진 모습을 에베소 사람들에게 보인 것입니다. 이 약함 이야말로 바울의 강점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있는 사람의 강함 인 것입니다.
바울은 인간적인 강함이나 자신의 의지로 행동하고 있었던 게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성령의 인도하심에 자신을 맡겨서 하나님 뜻에 따르고자 했습니다. 물론, 자신은 아무것도 생각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명령만을 기다린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때 그때, 잘 생각하여 적절한 판단을 해서 행동하고 그 행동에 책임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 판단에 망설임이 생길 때, 또, 알 수 없어 주저할 때에 성령께 물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아무리 위험한 예루살렘이었다고 해도 성령께서 예루살렘으로 인도하신다면 나는 그것에 따른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자주 잘못을 범합니다. 성령께 묻지 않고 여러가지 일을 진행해 버립니다. 그것은 교회에서도 일어납니다. 반대로 성령께 인도받고 있다면, 바울처럼 분명히 곤란이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라도 또한 평안히 걸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걸음은 축복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크게 써 주시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루살렘행은 뜻밖의 형태로 바울을 최종적으로 로마로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자신의 인생을 맡긴다는 때, 그것을 어떤 운명이나 숙명이라는 식으로 파악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운명이나 숙명에 지배되고 있지는 않습니다. 사랑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으로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성령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축복의 길을 마련해 주십니다. 그래서 성령께 인도받는 다는 것은 현실 생활에는 확실히 싸움이 있고 곤란이 있습니다만, 진정한 의미로 평안과 기쁨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성령께 맡기지 않고 자신의 마음이나 생각대로 살아갈 때 또 성령으로 인도되어 결단을 하지 않을 때 그것은 일견 자유롭게 보이지만, 불안이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인도하심은 많은 경우, 우리가 걷는 최종목적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때 그때마다 이쪽으로 저쪽으로 인도받습니다. 그래서, 최종목적지를 향하여 효율적으로 걸어가지 못합니다. 우회할 때도 있고 장소에 따라서는 발이 묶이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회도 발이 묶일 때도 모든 것이 나중에 생각하면 은혜인 것입니다. 성령께 물으면서 걸어갈 때 인간적으로 보면 우회와 같이 생각되어도 쓸데없는 걸음은 한 걸음도 없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에베소 교회가 앞으로 경험할 곤란에 대해서 말합니다.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라고 29절에 쓰여 있습니다. 사나운 이리,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사람들을 갈라 놓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온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나운 이리였더라면 곧바로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만, 실은, 우리의 눈으로는 좀처럼 판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일견 올바르게 보이는 것 같은데 사랑에 기인하지 않은 판단이라던가, 신앙 깊은 듯이 사랑을 말하면서도 세속적인 생각을 가져온다든가, 복음이 아닌 것을 교회에 가져오려고 하는 사람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일깨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잠이 들면 용이하게 이리에게 농락당하는 것입니다. 잠에서 깨어 끊임없이 성령의 바람을 느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에 집중하지 않으면 복음이 아닌 것에 교회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도 간단하게 신앙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울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해 내도록 말합니다. 우리는 잠을 깨워 끊임없이 성령의 바람을 느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면서 또한 사람에게 주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받는 것보다 준다고 말하면 뭔가 자기희생의 정신과 같이 들립니다. 그러나 원래 줄 수 있다는 것은 줄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할 수 있습니다. 주는 것이 없으면 줄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 말은 누가복음 6장 38절의 예수님의 말씀으로부터 인용되고 있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누가복음 6:38) 이 말씀 이전에 예수님은 “사람을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누가복음 6:37) 라고 하셨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너희 죄인을 용서하고 많은 은혜를 주신다. 그러므로 남을 용서하고 또 남에게 많은 것을 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 같이 먼저 주어져 있기 때문에 즉 풍부하게 하나님께 받고 있기 때문에 이웃에게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자기만 꽉 쥐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즉 받은 것을 이웃에게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층 더 풍부하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이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복이 있다고 할 때, 주는 사람이 상대에 대해서 우위에 선 것 같은 기분이 되기 때문에 주고 싶다는 측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대로, 받는 것은 상대에게 뭔가 빚지는 것 같은 기분이 되어 싫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곤란한 사람을 돕는 것은 기꺼이 할 수 있어도 반대로 자기가 곤란할 때 남에게 도움을 받는 것에는 저항을 느끼는 사람이 많은 것입니다.
특히, 크리스천 중에는 받기를 잘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일견, 사양심이 많아 보입니다만, 실은 자신의 자존심이 상처받는 것 같아서 싫은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보다도 자기가 하나님께 많은 것을 받고 있는 존재인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가 보잘것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여기에 되돌아온다면, 우리는 진정한 의미로 남에게 줄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자신의 프라이드나 생각이 작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유로운 사람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 때, 진정한 의미로 주는 존재가 됩니다. 주는 것은 사랑이고 그리고 무엇보다 복음입니다. 크리스천이 그리고 교회가 주어야 하는 것은 복음인 것입니다. 성령께 인도받을 때, 우리는 정말로 복음을 주는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가 나를 위해서 무엇을 해 주느냐가 아니라, 나는 하나님과 교회를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언제나 유의하고 계시는 약한 자를 위하여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렇게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교회와 우리 앞날의 걸음을 풍부하게 축복해 주십니다. 아멘.
2021年7月25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시편(詩編) 126編 3, 5~6節
〇讃 頌 讃頌歌 488(1, 4節)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聖書奉読 使徒言行録 20章 17~38節
〇説 教 「받는 것보다 주자(受けるより与えよう)」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460(1, 2節)
〇献 金
〇報 告
〇感謝祈祷
〇頌 栄 讃頌歌 1
〇祝 祷
【 2021年 7月 25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
「受けるより与えよう」 使徒言行録 20章 17~38節
パウロたち一行は、五旬節までにエルサレムに戻るために、エフェソには立ち寄らず、トロアスから船を乗り継い帰っておりました。それがミレトスに着いたときに、パウロはエフェソに人をやって教会の長老たちを呼び寄せたのです。パウロはエフェソの人びとともう二度と会うことが出来ないと覚悟したからでしょう。パウロはエフェソ教会の指導者たちである長老たちに最後の言葉をどうしても伝えたかったのです。それが18節からのパウロの言葉です。
パウロはエフェソに3年ほど滞在し、福音を伝え、教会の人びとと過ごしました。3年というのは、パウロが一箇所に滞在した最長の期間です。ですから、エフェソの人びともパウロのことを良く理解しておりました。そのため、何も臆することなく、自分の思い、自分の信仰を長老たちに託したのです。
ここに「涙を流しながら」という言葉がありますが、パウロはエフェソの人々に正しく強い姿を見せていたわけではありません。むしろ、自分のこれまでの罪を包み隠さず語り、そんな自分が「神に対する悔い改めと、主イエスに対する信仰」(21節)によって、キリストから恵みを受け、救われてきたことを素直に証ししたのです。
パウロは試練の中でも平気で乗り切ったというわけではなく、苦しみ悩み、また弱り果てる姿をエフェソの人々に見せていたのです。この弱さこそが、パウロの強みでした。それは神さまにすべてを委ねている人の強さなのです。
パウロは人間的な強さ、自分の意志で動いていたわけではないのです。どこまでも聖霊の導きに自分を委ね、神さまの御旨に従おうとしました。勿論、自分は何も考えず、神さまの命令を待つということではありません。その時その時、よく考え、適切な判断をして行動し、その行動に責任を持たなければなりません。ただ、その判断に迷うとき、また、分からないとき、聖霊に聞く必要があるのです。パウロはいくら危険なエルサレムであったとしても、聖霊がエルサレムへと導かれるなら、私はそれに従いますと言っているのです。
私たちはこの点において、よく誤りを犯します。聖霊に聞くことなく、さまざまなことを進めてしまうのです。それは教会でもおこります。逆に聖霊に導かれているならば、パウロのように、明らかに困難が待ち構えているような状況でも、なお平安に歩むことができるのです。そして実際、その歩みは祝福されるのです。神さまが大きく用いてくださるのです。実際、エルサレム行きは、意外な形で、パウロを最終的にローマへと導くことになりました。
ところで、神さまに自分の人生を委ねるという時、それを何か運命とか、宿命という風に捉えてはなりません。私たちは運命や宿命というものに支配されているのではないのです。愛なる神さまが、私たちを愛によって導いて下さるのです。具体的には聖霊なる神さまが祝福の道を備えて下さるのです。ですから、聖霊に導かれるということは、現実生活には確かに戦いがあり、困難がありますが、本当の意味で平安と喜びを与えられることなのです。聖霊に委ねず、自分の思いや考えで生きていく時、また聖霊に導かれて決断をしない時、それは一見自由であるようで、不安が満ちているのです。
そして聖霊の導きは、多くの場合、私たちが歩む最終地は知らされないのです。その都度、こっちの方へ、あっちの方へと、導かれます。ですから、最終地に向かって効率よく歩むということは出来ないのです。回り道もあれば、場所によっては足止めをくらってしまうことをあります。しかし、回り道も足止めも、すべて後から考えると恵みなのです。聖霊に聞いて歩む時、人間的には回り道のように思えても、無駄な歩みは一歩たりともないのです。
それからパウロは、エフェソ教会がこの先、経験するであろう困難について語ります。「残忍な狼どもがあなたがたのところへ入り込んで来て群れを荒らす」と29節にあります。残忍な狼とありますが、それは神さまの恵みから人々を引き離そうとする者が教会に入ってくるといっているのです。「残忍な狼」ならばすぐに分かるような気もしますが、実は、私たちの目にはなかなか判断出来ないのです。例えば、一見正しく見えるようでも、愛に根ざしていない判断だとか、信仰深そうに、愛を語りながらも、世俗的な考えを持ち込んだりとか、福音ならざるものを教会に持ち込もうする者がやってくるというのです。 だからパウロは「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というのです。私たちは霊的に眠ってしまっていたら、容易に狼に翻弄されるのです。目を覚まし、絶えず、聖霊の風を感じ、御言葉に聞き、祈りに集中していなければ、福音ならざるものに、教会も、私たち一人一人も簡単に信仰を失ってしまうのです。
それから最後にパウロは、「受けるよりは与える方が幸いである」と言われたイエスさまの言葉を思い出すようにと言います。私たちは目を覚まして、絶えず、聖霊の風を感じ、御言葉に聞き、祈りながら、さらに、人に与えて、生きていくのです。
受けるより与える、というと何か自己犠牲の精神のように聞こえます。しかし、そもそも与えることが出来るということは、与えるものを持っているから出来るのです。与えるものがなければ、与えられないのです。
パウロのこの言葉はルカによる福音書の6章38節のイエスさまの言葉から引用されております。「与えなさい。そうすれば、あなたがたいも与えられる。」(ルカ 6:38) この言葉の前にイエスさまは「人を裁くな。そうすればなたがたも裁かれることがない」(ルカ 6:37)と言われております。
これらは、神さまがあなたがた罪人を赦し、多くの恵みを与えておられる。だから、人を赦し、また人に多くのものを与えなさいと言われているのです。
先ほども言いましたように、先に与えられているから、つまり豊かに神さまからいただいているがゆえ、隣人に与え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そもそも神さまからいただいたものを自分だけで握りしめていることは出来ないのです。神さまからいただいたものを、つまり受けたものを隣人へと与えるのです。そうするといっそう豊かにに与えられるのです。
しかし、気をつけないといけないことがあります。この受けるより与える方が幸いというとき、与える方が相手に対して優位に立ったような気分になるから与えたいという側面があると言うことです。そして、反対に、受けることは相手に何か借りを作るような気持ちになって嫌だ、と思うのです。それで、困った人を助けることは喜んでできても、逆に自分が困った時、人に助けてもらうことには抵抗を感じる人は多いのです。
特に、クリスチャンの中に、受けることが出来ない人が多いのです。一見、遠慮深そうに見えますが、実は自分の自尊心が傷つけられるようで嫌なのです。
私たちは、誰よりも自分が神さまに与えられている存在であることを忘れてはいけません。神さまの前に、自分が取るに足らない者であることを忘れてはいけないのです。いつもここに立ち帰るならば、私たちは本当の意味で、人に与えることのできる者にされます。自分のプライドや思いというのは小さなことだと知ります。そして自由な者とされるのです。
その時、本当の意味で与える存在になります。与えるのは愛であり、そして何より福音です。クリスチャンが、そして教会が与えるべきものは福音なのです。聖霊に導かれる時、私たちはまことに福音を与える者とされていきます。
皆さん、教会が私のために何をしてくれるかではなく、私は神さまと教会のために何が出来るだろうか、神さまがいつも心に掛けておられる弱い者のために、私は何をすることが出来るだろうか、とそう求めていくとき、神さまはは必ず教会と私たちの日ごとの歩みを、豊かに祝福して下さいます。アーメン。
【2021년 7월 25일 주일예배(요약판)】
“받는 것보다 주자” 사도행전 20장 17~38절
바울 일행은 오순절까지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기 위하여 에베소에는 들르지 않고, 드로아에서 배를 갈아타고 돌아갔습니다. 밀레도에 도착했을 때 바울은 에베소로 사람을 보내 교회 장로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의 사람들과 이제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지도자들인 장로들에게 마지막 말을 어떻게 해서라도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18절 이하의 바울의 말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에 3년 정도 체재하고 복음을 전하며 교회 사람들과 함께 보냈습니다. 3년은 바울이 한 군데에서 체재한 최장의 기간입니다. 그래서 에베소 사람들도 바울을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바울은 아무런 두려움 없이 자신의 마음, 자신의 신앙을 장로들에게 맡긴 것입니다.
여기에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바울은 에베소 사람들에게 올바르고 강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까지의 자신의 죄를 숨기지 않고 말하여 그런 자신이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21절)으로 그리스도로부터 은혜를 받아 구원받은 것을 솔직하게 증언한 것입니다.
바울은 시련 가운데에서도 태연하게 극복한 것이 아니라, 괴로워하고 또 매우 약해진 모습을 에베소 사람들에게 보인 것입니다. 이 약함 이야말로 바울의 강점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있는 사람의 강함 인 것입니다.
바울은 인간적인 강함이나 자신의 의지로 행동하고 있었던 게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성령의 인도하심에 자신을 맡겨서 하나님 뜻에 따르고자 했습니다. 물론, 자신은 아무것도 생각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명령만을 기다린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때 그때, 잘 생각하여 적절한 판단을 해서 행동하고 그 행동에 책임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 판단에 망설임이 생길 때, 또, 알 수 없어 주저할 때에 성령께 물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아무리 위험한 예루살렘이었다고 해도 성령께서 예루살렘으로 인도하신다면 나는 그것에 따른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자주 잘못을 범합니다. 성령께 묻지 않고 여러가지 일을 진행해 버립니다. 그것은 교회에서도 일어납니다. 반대로 성령께 인도받고 있다면, 바울처럼 분명히 곤란이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라도 또한 평안히 걸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걸음은 축복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크게 써 주시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루살렘행은 뜻밖의 형태로 바울을 최종적으로 로마로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자신의 인생을 맡긴다는 때, 그것을 어떤 운명이나 숙명이라는 식으로 파악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운명이나 숙명에 지배되고 있지는 않습니다. 사랑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으로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성령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축복의 길을 마련해 주십니다. 그래서 성령께 인도받는 다는 것은 현실 생활에는 확실히 싸움이 있고 곤란이 있습니다만, 진정한 의미로 평안과 기쁨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성령께 맡기지 않고 자신의 마음이나 생각대로 살아갈 때 또 성령으로 인도되어 결단을 하지 않을 때 그것은 일견 자유롭게 보이지만, 불안이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인도하심은 많은 경우, 우리가 걷는 최종목적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때 그때마다 이쪽으로 저쪽으로 인도받습니다. 그래서, 최종목적지를 향하여 효율적으로 걸어가지 못합니다. 우회할 때도 있고 장소에 따라서는 발이 묶이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회도 발이 묶일 때도 모든 것이 나중에 생각하면 은혜인 것입니다. 성령께 물으면서 걸어갈 때 인간적으로 보면 우회와 같이 생각되어도 쓸데없는 걸음은 한 걸음도 없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에베소 교회가 앞으로 경험할 곤란에 대해서 말합니다.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라고 29절에 쓰여 있습니다. 사나운 이리,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사람들을 갈라 놓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온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나운 이리였더라면 곧바로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만, 실은, 우리의 눈으로는 좀처럼 판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일견 올바르게 보이는 것 같은데 사랑에 기인하지 않은 판단이라던가, 신앙 깊은 듯이 사랑을 말하면서도 세속적인 생각을 가져온다든가, 복음이 아닌 것을 교회에 가져오려고 하는 사람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일깨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잠이 들면 용이하게 이리에게 농락당하는 것입니다. 잠에서 깨어 끊임없이 성령의 바람을 느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에 집중하지 않으면 복음이 아닌 것에 교회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도 간단하게 신앙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울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해 내도록 말합니다. 우리는 잠을 깨워 끊임없이 성령의 바람을 느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면서 또한 사람에게 주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받는 것보다 준다고 말하면 뭔가 자기희생의 정신과 같이 들립니다. 그러나 원래 줄 수 있다는 것은 줄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할 수 있습니다. 주는 것이 없으면 줄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 말은 누가복음 6장 38절의 예수님의 말씀으로부터 인용되고 있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누가복음 6:38) 이 말씀 이전에 예수님은 “사람을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누가복음 6:37) 라고 하셨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너희 죄인을 용서하고 많은 은혜를 주신다. 그러므로 남을 용서하고 또 남에게 많은 것을 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 같이 먼저 주어져 있기 때문에 즉 풍부하게 하나님께 받고 있기 때문에 이웃에게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자기만 꽉 쥐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즉 받은 것을 이웃에게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층 더 풍부하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이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복이 있다고 할 때, 주는 사람이 상대에 대해서 우위에 선 것 같은 기분이 되기 때문에 주고 싶다는 측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대로, 받는 것은 상대에게 뭔가 빚지는 것 같은 기분이 되어 싫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곤란한 사람을 돕는 것은 기꺼이 할 수 있어도 반대로 자기가 곤란할 때 남에게 도움을 받는 것에는 저항을 느끼는 사람이 많은 것입니다.
특히, 크리스천 중에는 받기를 잘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일견, 사양심이 많아 보입니다만, 실은 자신의 자존심이 상처받는 것 같아서 싫은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보다도 자기가 하나님께 많은 것을 받고 있는 존재인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가 보잘것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여기에 되돌아온다면, 우리는 진정한 의미로 남에게 줄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자신의 프라이드나 생각이 작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유로운 사람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 때, 진정한 의미로 주는 존재가 됩니다. 주는 것은 사랑이고 그리고 무엇보다 복음입니다. 크리스천이 그리고 교회가 주어야 하는 것은 복음인 것입니다. 성령께 인도받을 때, 우리는 정말로 복음을 주는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가 나를 위해서 무엇을 해 주느냐가 아니라, 나는 하나님과 교회를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언제나 유의하고 계시는 약한 자를 위하여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렇게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교회와 우리 앞날의 걸음을 풍부하게 축복해 주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