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에서 일어난 소동도 수습된 후, 바울은 에베소를 떠나 마게도냐로 향해 여행을 떠났습니다. 당초의 여행 계획으로는 마게도냐를 거쳐 그리스로 가서 오순절에 늦지 않도록 거기서 배를 타고 수리아로 가서 다시 육로를 이용해 예루살렘에 가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리스에서 배를 타기 위해 기다리고 있을 때 바울을 살해하려고 하는 유대인의 음모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해 오순절까지 예루살렘에 가는 것은 단념하고, 한 번 더 마게도냐로 돌아가서 거기서부터 아시아로 건너 가는, 말하자면 온 길을 반대로 다시 되짚어 가기로 한 것입니다.
4절을 보면 바울과 동행한 7명의 이름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각각 출신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한편으로 이것은 교회 이름이기도 합니다. 즉 각각 교회의 대표자로서 바울과 함께 그 교회의 헌금을 가지고 간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당시 그리스도인으로서 또 교회의 대표자로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바울과 똑같이 목숨이 표적이 된다 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헌금을 보내는 것뿐 만이라면 바울에게 맡기면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도 굳이 바울과 동행을 한 것은 바울을 지켜 예루살렘 교회의 사람들과 직접 만나겠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사람과 사람 만이 아니라 교회와 교회의 영적인 교제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같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서는 사람으로서 기도하고 서로 의지한다, 그리고 하나의 교회인 것, 교회 일치를 목표로 한 것입니다.
그 때, 바울에게는 많은 신앙의 친구, 형제 자매, 가족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목숨을 건 지원이나 기도, 즉 사랑의 교제에 의해 지탱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위대한 전도자로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사랑의 교제를 가질 수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 들에게도 필요할 때 필요한 교제를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불러 모은 사람들에게는 사랑의 교제가 준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쉽게 손에 들어오는 것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다양한 인간적인 충돌이 있거나 복잡한 상황이 있거나 해서 마음대로 잘 안 되는 경우도 있겠지요. 그러나 함께 마음을 열고 기도하면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사랑의 교제가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랑의 교제로 말미암아 사람은 바꿔질 수 있습니다. 고독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진정한 친구, 가족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신 많은 사람 들과의 교제 가운데 여행을 계속해 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드로아에서 이렛날을 머무르고, 출발을 앞두던 전날 밤이었습니다. 일동이 떡을 떼어 먹기 위해 모였습니다. 그것은 “주간의 첫날” 이라고 했으니 주일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거기서 마지막 설교를 한 것입니다. 드로아의 성도들은 이제 두 번 다시는 바울의 설교를 들을 수 없을 거라는 마음으로 모였습니다. 바울도 마지막 설교를 유언으로써 말한 것입니다. 말해도 말해도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장시간의 예배가 되어 버렸습니다.
거기에 유두고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3층의 창가 난간에 앉아 바울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그는 예배 중에 잠이 들어 3층에서 1층으로 떨어져 죽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큰 일입니다. 예배 중에 사람이 죽다니 있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드로아 교회는 생긴지 얼마 안 되는데 이런 일이 생기면 교회로서는 큰 차질을 빚게 됩니다. 바울은 곧 바로 달려 가서 유두고를 껴안고 기도했지요. 그 자세한 상황은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므로 잘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이 유두고를 껴안았을 때 살아난 것입니다.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10절) 바울의 손을 통해 여기서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사도행전에는 이 기적에 대한 설명이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죽은 유두고가 살아난 것이 당연한 것처럼 쓰여 있고, 기적 그 자체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이 다음 교회의 집회가 그 전과 똑같이 계속되었다고 쓰여 있는 것입니다. 다시 떡을 떼어 먹고 바울은 복음을 말했습니다.
여기서 사도행전이 우리에게 전하려고 하는 것은 단순히 죽은 자의 부활의 사건을 전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죽은 자가 살아났다는 사실 그 자체를 전하고 싶었다면 바울이 “유두고야 일어나라” 말하며 손을 잡아 일어서게 하는 그 순간을 반드시 쓸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쓰여 있지 않았다는 것은 사도행전이 우리에게 전하려고 하는 내용이 다른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찬식을 하고 있는 그 예배 가운데 산 생명이 있다, 부활의 그리스도께서 리얼하게 살아 계시고 우리와 함께 계신다, 새 생명으로 활기차게 해 주신다는 그것을 이 사건을 통해서 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12절에 “사람들이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가서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더라”(12절) 라고 쓰여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기적을 예배 중에 체험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전에 병으로 죽은 나사로라는 남자를 살리신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미 무덤에 넣어지고 나흘이 지났는데 나사로는 살아났습니다. 죽은 사람을 감싸는 천을 붙인 채로 무덤에서 나오는 장면은 가히 충격적입니다. 오늘의 성경 구절의 유두고의 소생은 나사로처럼 충격적인 묘사는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리고 바울이 커다란 생명의 위기가 다가오고 있는 상황에서 인간의 생명의 부활이라는 점에서는 나사로의 경우와 유두고의 경우는 비슷합니다.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표시”인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육체의 죽음으로는 끝나지 않는다는 “표시”인 것입니다. 그 “표시”는 놓여져 있는 상황이 어려웠던 그 가운데 “위로”로서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향하신 것 같이 이제부터 바울에게도 고난이 다가옵니다.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고 실망으로 끝나지 않는 소망으로 인도받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유두고라는 청년을 쓰셔서 “표시”로서 주셨던 것입니다.
“유두고”라는 이름은 “행복한 자”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죽었는데 하나님에 의해 되살아났기 때문에 행복한 자일까요? 물론 그것도 있습니다만, 오히려 이 청년의 이름이 하나님의 은혜의 표시로서 하나님께 쓰였기 때문입니다.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유두고는 우리에게 생명의 소망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 에게도 일상의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명에는 고난도 죽음도 지울 수 없는 빛이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유두고인 것입니다. 약하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잠이 들어 버립니다. 유두고가 3층에서 1층으로 떨어진 것처럼 하나님의 길에서 굴러 떨어져 버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생명이 그에게 있다”(10절)라고 그렇게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두고라는 청년을 쓰셔서 오늘도 우리를 격려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소생의 기적은 예배라는 장소에서 일어났습니다. 지금은 유두고처럼 이 자리에서 죽은 사람이 되살아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또한 예배는 생명을 새롭게 만드는 장소입니다. 성경에 있어서 위로라는 것은 힘을 주는 것입니다. 예배에서 우리는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진정한 생명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부활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 되어 진정한 생명으로 초대받은 “행복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여기서부터 내딛어 나아갑시다.
2021年7月11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시편(詩編) 126編 3, 5~6節
〇讃 頌 讃頌歌 267(1, 3, 5節)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聖書奉読 使徒言行録 20章 1~2節
〇説 教 「행복한 자(幸いな者)」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291(1, 3節)
〇献 金
〇報 告
〇感謝祈祷
〇頌 栄 讃頌歌 1
〇祝 祷
【 2021年 7月 18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
「幸いな者」 使徒言行録 20章 1~12節
エフェソで起こった騒動も収まった後、パウロはエフェソを離れ、マケドニア州やアカイヤ州に向けて旅立ちました。パウロの当初の旅行計画は、マケドニア州を経て、アカイヤ州(ギリシャ)に渡り、五旬節(ペンテコステ)に間に合うように、そこから船に乗って、シリア州(アンティオキア)に至り、そこからさらに陸路を使ってエルサレムに至るというものであったようです。ところが、ギリシャで船出を持っている間にパウロの元に、彼を殺害しようとするユダヤ人の陰謀があることが伝えられました。それで、その年の五旬節までにエルサレムに行くことは諦めて、もう一度マケドニア州に戻り、さらにはそこからアジア州に渡るという、来た道を逆戻りして帰ることにしました。
ところで、4節にパウロと同行した7名の人たちの名前が列挙されています。それぞれ出身地が記されていますが、それは教会名でもあるのです。すなわち、それぞれの教会の代表者として、パウロと共にその教会の献金を携えて行った人たちです。でも、当時、キリスト者として、また、教会を代表としてエルサレムに向かうということは、大変危険なことでした。パウロと同じように命を狙われてもおかしくありません。献金を送るだけなら、パウロに預ければ済む話です。それでも、パウロと同行したのは、パウロを支え、エルサレム教会の人びとと直接会うという目的がありました。人と人だけではなく、教会と教会の霊的な交わりを確認したかったのです。同じキリストの福音に立つ者として、祈り支え合う。そして、一つの教会であること、教会一致を目指したのです。
この時、パウロにはたくさんの信仰の友、兄弟姉妹、家族がおりました。パウロは彼らの命をかけた支援や祈り、すなわち愛の交わりによって支えられていたのです。
パウロは偉大な伝道者で影響力のある人だったから、このような愛の交わりを持つことが出来たのでしょうか。そうではありません。パウロがそうであったように、私たちも必ず必要な時に必要な交わりを与えて下さいます。イエス・キリストを中心に呼び集められた者たちには、愛の交わりが用意されているのです。勿論、それは安易に手に入るものではないかもしれません。様々な人間的な衝突があったり、複雑な状況があったりして、上手く行かない場合もあるでしょう。でも、共に心を開いて祈るならば、そこには、神さまが用意された愛の交わりがあるのです。その愛の交わりによって人は変えられます。孤独だと思っていた人が真の友、家族を持つことが出来るのです。パウロは神さまに与えられた多くの人々との交わりの中、旅を続けて行ったのです。
さて、パウロがトロアスに7日間滞在し、明日は出発という晩のことでした。一同がパンを裂くために集まりました。それは「週の初めの日」とありますから、主日の礼拝ということになります。パウロはそこで最後の説教をしたのです。トロアスの信徒たちは、もう二度とパウロの説教は聞けないという思いで集まりました。パウロは最後の説教、遺言として御言葉を語ったのです。話しても話しても話し足りません。それで長時間の礼拝になってしまいました。
そこにエウティコという青年がおりました。彼は3階の窓辺に座り、パウロの話を聞いておりました。しかし、彼は礼拝中に眠ってしまい、3階から1階に落ちて死んでしまったのです。これは大変なことです。礼拝中に人が死ぬなんて、あってはならないことです。トロアスの教会がまで出来たばかりなのに、教会にとっては大きな躓きです。パウロはすぐさま駆けつけ、エウティコを抱きかかえて祈ったことでしょう。このあたりの詳細についても聖書に記されていませんので良く分かりません。でも、パウロがエウティコを抱きかかえた時に、生き返ったのです。「騒ぐな、まだ生きている。」(10節) パウロの手を通してここで死人が甦るという奇跡が起こったのです。
使徒言行録にはこの奇跡について全くと言って良い程説明がありません。むしろ、死んだエウティコが生き返ったことは、当然のことのように記されていて、奇跡そのものにはあまり興味がないようです。
むしろ、ここで興味深いのはこの後、教会の集会はそれまでと同じように続けられた、と記されているところです。改めて、パンを裂いて食べ、パウロは福音を語りました。
ここで、使徒言行録が私たちに伝えようとしていることは、単なる死者の復活の出来事を伝えようとしているのではない、ということです。もし、死者の復活の事実そのものを伝えたいのならば、「エウティコよ、起きなさい」とパウロが言い、手を取られて起き上がるような、その瞬間を必ず書くはずです。ところが、それが書かれていないというのは、使徒言行録が私たちに伝えようとしていることが、別のところにあるからです。それは、神さまの言葉を聴き、聖餐を行っている、その礼拝のただ中で、生きた命がある。復活のキリストがリアルに生きて共にいてくださる、新しい命で活気づけてくださるのだ、そのことを、この出来事を通して伝えたかったのです。
12節に「人びとは生き返った青年を連れて帰り、大いに慰められた」(12節)とあります。人々はこの奇跡を礼拝の最中に体験したのです。
ヨハネによる福音書11章には、イエスさまが十字架にお架かりになる前、病気で亡くなったラザロという男性をイエスさまが生き返らされた話が記されています。すでに墓に入れられて四日も経っていたのにラザロは蘇りました。死者を巻く布をつけたまま、墓から出てきた場面は衝撃的です。今日の聖書箇所のエウティコの蘇りは、ラザロの時のように衝撃的な記述はされていません。しかし、イエスさまや、そしてまたパウロの大いなる命の危機が迫っている状況での、人間の命の蘇りという点においてはラザロの場合とエウティコの場合は似ています。
いずれも、神さまが与えてくださった「しるし」なのです。私たちのすべてが肉体の死では終わらないという「しるし」なのです。その「しるし」は置かれている状況が厳しかったその中で、「慰め」として与えてくださったのです。イエスさまが十字架に向かわれたように、これからパウロにも苦難がきます。そしてまた、残されることになる教会の人々にも苦難が来るのです。しかしなお、神さまが共にいて下さり、失望で終わらない希望へと導かれることを、神さまはエウティコという青年を用いて「しるし」として与えて下さったのです。
「エウティコ」という名は、「幸いな者」という意味を持ちます。死んだのに神さまによって生き返らされたから幸いな者なのでしょうか。勿論、それもありますが、むしろ、この青年の名が神さまの恵みのしるしとして、神さまに用いられたからです。
死では終わらない、エウティコは私たちに命の希望を伝える者とされました。私たちにも日々の苦難があります。しかし、私たちの命には、苦難も死も消すことのできない輝きを与えられているのです。そしてまた、私たちもエウティコなのです。弱くて心ならずも居眠りをしてしまうのです。エウティコが3階から1階に落ちたように、神の道から転げ落ちてしまう者なのです。しかし、「まだ生きている」、そう言って頂けるのです。
そうです。神さまはエウティコという青年を用いて、今日も私たちを力づけて下さるのです。そしてまた、この蘇りの奇跡は礼拝という場で起きました。今はエウティコのようにこの場で死んだ人が生き返ることは、現実的にないのかもしれません。しかし、なお礼拝は命を新しく生み出す場です。聖書において慰めとは力を与えることです。礼拝において私たちは力を得ることが出来ます。真の命を頂くことが出来るのです。
皆さん、私たちが甦りの主イエス・キリストに伴われ、真の命へと招かれている、「幸いな者」であることを覚えて、ここから歩み出して行きましょう。
【2021년 7월 18일 주일예배(요약판)】
“행복한 자” 사도행전 20장 1~12절
에베소에서 일어난 소동도 수습된 후, 바울은 에베소를 떠나 마게도냐로 향해 여행을 떠났습니다. 당초의 여행 계획으로는 마게도냐를 거쳐 그리스로 가서 오순절에 늦지 않도록 거기서 배를 타고 수리아로 가서 다시 육로를 이용해 예루살렘에 가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리스에서 배를 타기 위해 기다리고 있을 때 바울을 살해하려고 하는 유대인의 음모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해 오순절까지 예루살렘에 가는 것은 단념하고, 한 번 더 마게도냐로 돌아가서 거기서부터 아시아로 건너 가는, 말하자면 온 길을 반대로 다시 되짚어 가기로 한 것입니다.
4절을 보면 바울과 동행한 7명의 이름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각각 출신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한편으로 이것은 교회 이름이기도 합니다. 즉 각각 교회의 대표자로서 바울과 함께 그 교회의 헌금을 가지고 간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당시 그리스도인으로서 또 교회의 대표자로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바울과 똑같이 목숨이 표적이 된다 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헌금을 보내는 것뿐 만이라면 바울에게 맡기면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도 굳이 바울과 동행을 한 것은 바울을 지켜 예루살렘 교회의 사람들과 직접 만나겠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사람과 사람 만이 아니라 교회와 교회의 영적인 교제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같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서는 사람으로서 기도하고 서로 의지한다, 그리고 하나의 교회인 것, 교회 일치를 목표로 한 것입니다.
그 때, 바울에게는 많은 신앙의 친구, 형제 자매, 가족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목숨을 건 지원이나 기도, 즉 사랑의 교제에 의해 지탱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위대한 전도자로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사랑의 교제를 가질 수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 들에게도 필요할 때 필요한 교제를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불러 모은 사람들에게는 사랑의 교제가 준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쉽게 손에 들어오는 것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다양한 인간적인 충돌이 있거나 복잡한 상황이 있거나 해서 마음대로 잘 안 되는 경우도 있겠지요. 그러나 함께 마음을 열고 기도하면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사랑의 교제가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랑의 교제로 말미암아 사람은 바꿔질 수 있습니다. 고독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진정한 친구, 가족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신 많은 사람 들과의 교제 가운데 여행을 계속해 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드로아에서 이렛날을 머무르고, 출발을 앞두던 전날 밤이었습니다. 일동이 떡을 떼어 먹기 위해 모였습니다. 그것은 “주간의 첫날” 이라고 했으니 주일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거기서 마지막 설교를 한 것입니다. 드로아의 성도들은 이제 두 번 다시는 바울의 설교를 들을 수 없을 거라는 마음으로 모였습니다. 바울도 마지막 설교를 유언으로써 말한 것입니다. 말해도 말해도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장시간의 예배가 되어 버렸습니다.
거기에 유두고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3층의 창가 난간에 앉아 바울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그는 예배 중에 잠이 들어 3층에서 1층으로 떨어져 죽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큰 일입니다. 예배 중에 사람이 죽다니 있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드로아 교회는 생긴지 얼마 안 되는데 이런 일이 생기면 교회로서는 큰 차질을 빚게 됩니다. 바울은 곧 바로 달려 가서 유두고를 껴안고 기도했지요. 그 자세한 상황은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므로 잘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이 유두고를 껴안았을 때 살아난 것입니다.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10절) 바울의 손을 통해 여기서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사도행전에는 이 기적에 대한 설명이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죽은 유두고가 살아난 것이 당연한 것처럼 쓰여 있고, 기적 그 자체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이 다음 교회의 집회가 그 전과 똑같이 계속되었다고 쓰여 있는 것입니다. 다시 떡을 떼어 먹고 바울은 복음을 말했습니다.
여기서 사도행전이 우리에게 전하려고 하는 것은 단순히 죽은 자의 부활의 사건을 전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죽은 자가 살아났다는 사실 그 자체를 전하고 싶었다면 바울이 “유두고야 일어나라” 말하며 손을 잡아 일어서게 하는 그 순간을 반드시 쓸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쓰여 있지 않았다는 것은 사도행전이 우리에게 전하려고 하는 내용이 다른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찬식을 하고 있는 그 예배 가운데 산 생명이 있다, 부활의 그리스도께서 리얼하게 살아 계시고 우리와 함께 계신다, 새 생명으로 활기차게 해 주신다는 그것을 이 사건을 통해서 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12절에 “사람들이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가서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더라”(12절) 라고 쓰여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기적을 예배 중에 체험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전에 병으로 죽은 나사로라는 남자를 살리신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미 무덤에 넣어지고 나흘이 지났는데 나사로는 살아났습니다. 죽은 사람을 감싸는 천을 붙인 채로 무덤에서 나오는 장면은 가히 충격적입니다. 오늘의 성경 구절의 유두고의 소생은 나사로처럼 충격적인 묘사는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리고 바울이 커다란 생명의 위기가 다가오고 있는 상황에서 인간의 생명의 부활이라는 점에서는 나사로의 경우와 유두고의 경우는 비슷합니다.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표시”인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육체의 죽음으로는 끝나지 않는다는 “표시”인 것입니다. 그 “표시”는 놓여져 있는 상황이 어려웠던 그 가운데 “위로”로서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향하신 것 같이 이제부터 바울에게도 고난이 다가옵니다.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고 실망으로 끝나지 않는 소망으로 인도받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유두고라는 청년을 쓰셔서 “표시”로서 주셨던 것입니다.
“유두고”라는 이름은 “행복한 자”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죽었는데 하나님에 의해 되살아났기 때문에 행복한 자일까요? 물론 그것도 있습니다만, 오히려 이 청년의 이름이 하나님의 은혜의 표시로서 하나님께 쓰였기 때문입니다.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유두고는 우리에게 생명의 소망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 에게도 일상의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명에는 고난도 죽음도 지울 수 없는 빛이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유두고인 것입니다. 약하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잠이 들어 버립니다. 유두고가 3층에서 1층으로 떨어진 것처럼 하나님의 길에서 굴러 떨어져 버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생명이 그에게 있다”(10절)라고 그렇게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두고라는 청년을 쓰셔서 오늘도 우리를 격려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소생의 기적은 예배라는 장소에서 일어났습니다. 지금은 유두고처럼 이 자리에서 죽은 사람이 되살아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또한 예배는 생명을 새롭게 만드는 장소입니다. 성경에 있어서 위로라는 것은 힘을 주는 것입니다. 예배에서 우리는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진정한 생명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부활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 되어 진정한 생명으로 초대받은 “행복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여기서부터 내딛어 나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