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절에 “이 도로 말미암아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으니”(23절) 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 도(길)” 라는 것은 신앙을 의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가려고 하는 길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길을 걷고자 할 때에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거기에는 문제도 따르게 됩니다. 오늘의 성경 말씀에도 그 문제가 일어난 내용이 쓰여 있습니다.
바울은 2년이상 에베소에 체재하면서 복음을 계속 전했습니다. “이 길”을 계속 걷는 바울을 하나님께서는 축복하셔서 바울을 통해서 에베소의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데메드리오라는 사람을 발기인으로 하는 은장색 (은세공 장인)들에 의해 바울은 고소를 당하게 되어버립니다.
은장색들은 아데미의 신상이나 신전 모형을 만들어 장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데미의 신전은 호화 찬란한 것으로 에베소의 종교와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에베소는 이 신전에 관한 여러 제례를 중심으로 성립된 도시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제례가 있을 때에는 많은 순례자나 관광객이 찾아오게 되므로 그로 인해 에베소에 큰 경제적 번영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신전 주변에는 여러 가게가 즐비하게 늘어서게 되었고, 그 중에서도 아데미의 신상이나 신전 모형은 기념품으로 많이 판매되어 일대 관광지의 명산품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에베소의 많은 사람들은 아데미 신전과의 깊은 유대 속에서 생활을 유지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에베소에 바울 일행이 와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고 말하자 많은 사람들은 진실한 하나님에게로 되돌아가게 되었고, 그로 인해 아데미의 신상 모형 따위는 더이상 필요없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것을 팔아 장사를 하던 데메드리오는 매상이 떨어지게 되자 동업자들을 불러 바울 일햏을 고소한 것입니다. 아마 그는 이 조합의 리더적인 존재였다고 생각됩니다.
그들이 바울의 가르침은 여신 아데미를 모독하고 있다, 신전을 업신여기고 있다라고 하니 어찌 보면 그리스의 신들을 소중히 여기는 신앙적인 내용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자기들의 장사에 악영향을 미치는 바울을 쫓아내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데메드리오가 의도한 대로 이를 들은 사람들은 분노하여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라고 외쳤습니다. 온 시내가 혼란스러워지고 바울 일행들이 붙잡히 되자 사라들을 연극장으로 몰려 들어갔습니다. 이 극장은 시내의 중심에 있는 약 2만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넓은 장소로 단순한 극장의 기능뿐만이 아니라 정치를 행하는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이는 바울이 말하는 복음을 정치적으로 판단하려고 하는 행동이기도 했습니다. 이 소란은 폭동이 일어난 것 같은 상황이 되어 버렸기에 바울은 이 소란을 수습하려고 백성 가운데로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제자들이 그것을 말린 것입니다.
그렇다해도 이 소란은 이상한 양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28, 34절) 라고 외치기 시작한 사람들은 두 시간이나 계속 외쳤다고 합니다. 뭔가에 홀린듯이 사람들이 열광하여 계속 외친 것입니다. 이것은 실체없는 우상을 숭배할 때 악한 것의 힘이 들어오고 이상한 열광에 사람들이 휩싸여 있는 상태라고 생각됩니다. “~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32절) 라고 쓰여 있습니다. 우스꽝스럽게도 왜 모였는지 이유도 모른 체 몰려든 사람들로 인해 무질서한 폭동은 점점 커져 갔습니다.
우리는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라고 외치는 일은 없을지도 모릅니다만, 시대의 파도 가운데 또는 압도적인 동조 압력 가운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터무니없는 것을 외치게 될 가능성이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그런 열광이나 암묵의 압력 가운데 세계가 위험한 상태로 되는 일들은 되풀이되어 왔습니다. 바로 코로나 팬데믹 가운데 앞이 보이지 않는 불안 때문인지 스케이프고트처럼 누군가를 공격한다, 자숙 경찰이라든가 코로나에 감염된 가족이 배싱을 받아 그 동네에서 생활을 할 수 없게 되는 일도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그 배싱이 때로는 예상치 못하게 어떠한 경위로 우리 자신을 향하는 일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과 생활이 위협받을 수 있는 그런 일들이 용이하게 일어날 수 있는 사회입니다. 그리고 또 어떤 때에는 자기도 의식하지 못한 채로 배싱하는 군중 중에서 소리치고 있는다거나, 뭐가 뭔지 영문도 모르면서 극장 안 군중속의 한명처럼 될지도 모릅니다.
그런 만큼 우리는 정말로 올바른 분, 단지 한 사람의 하나님을 의지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큰 시대의 폭풍우 속에서 우리 개인은 홍수와 같은 시련 가운데 떠밀려 우리 자신을 잃어 버리게 될 것입니다.
다행히 이 소동은 현영하게 그 자리를 수습하는 서기장에 의해 해산되었습니다. 이 인물은 아데미를 부정하지도 않고, 능수능란한 말로 여신을 추앙하는 사람들의 기분을 맞춰주면서 어디까지나 법적 질서를 지켜달라고 호소했습니다. 바울들이 직접 신전을 망치거나 여신을 모독한 것은 아니라는 점, 호소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추후 법적인 절차에 따라 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 소동을 무질서한 집회라고 단죄하며 경고를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안에는 이렇게 크리스천이 아닌 사람들, 그것도 별반 크리스천이나 성서에 호감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에 의하여 사도들이 도움을 받는 장면이 지금까지도 여러번 있었습니다. 이것 또한 상징적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을 지키실 때 다양한 방법을 이용하십니다. 때로는 논크리스천인 이웃도 이용하시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우리는 이 일본 사회에서는 소수파입니다. 게다가 재일 외국인이기 때문에 일본인의 도움이나 이해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일상 생활이 시시하게 되어 버립니다. 당연히 우리는 논크리스천의 일본인에 대해서도 경의를 표하고, 그들과 더불어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크리스천인 것을 새삼스럽게 자랑하거나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주위의 사람들을 내려다 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일본 사회 속에서 오히려 겸손히 조신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뭔가 있을 때에 도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나날의 생활은 자연스럽게 조신하게 살아갈 때 저절로 그리스도를 증명하는 생활 태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생활 태도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에베소에서의 바울처럼 도움을 받게 될지 어떨지는 모릅니다. 오히려 그렇지 않는 경우도 있겠지요.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이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불공평과 모순으로 가득 찬 세계입니다. 그 속에서 여전히 성실하게 살아 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크리스천답게 휼륭하게 살아가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훌륭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겸손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러러보면서 그리스도께서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립보서 2장 7-8절) 빌립보서에 있는 것 같이 우리도 하나님께 순종하며 따라 걷는 것입니다. 그 걸음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짊어지는 걸음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걷고자 하는 “이 길”은 결코 평탄치 않고 어쩌면 많은 장애가 가로 놓여 있는 길일지도 모릅니다만, 비록 그것이 어떤 길일지라도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하나님을 신뢰하여 나아가면 반드시 하나님께서는 해결책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제일로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에 더해 모든 것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께서는 위대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이 길을 한 걸음 한 걸음씩 나아갑시다.
【 2021年 7月 11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
「この道を歩もう」 使徒言行録19章21〜40節
23節に「この道のことでただならぬ騒動が起こった」(23節)とあります。「この道」というのは、信仰のことを意味しており、イエス・キリストに従って歩もうとする道のことです。ただ、この道を歩もうとする時には、必ずと言って良い程そこに問題も起こって来るのです。今日の聖書箇所にも、その問題が起こったことが記されております。
パウロは2年以上もエフェソに滞在しながら福音を語り続けました。「この道」を歩み続けるパウロを神さまは祝福され、パウロを通してエフェソの多くの人が救われて行きました。
それがある日突然、デメトリオという人を発起人とする銀細工の職人たちによってパウロは訴えられてしまったのです。
銀細工の職人たちはアルテミス神殿の模型を造って商売をしておりました。アルテミス神殿は、実に絢爛豪華なもので、エフェソの宗教と経済に大きな影響を及ぼしていました。エフェソの町はこの神殿に関わる様々な祭儀を中心に成り立った町であると言われていたほどです。祭りの時期には多くの巡礼者や観光客が訪れ、それはエフェソに大きな経済的繁栄をもたらすものでした。神殿の回りには様々な店が建ち並び、中でもアルテミス神殿の模型はお土産品として多く売られており、一大観光地の名産品となっていたようです。そのようにしてエフェソの多くの人々がアルテミス神殿とのつながりの中で生活を成り立たせていたのです。
それがエフェソにパウロがやって来て、「手で作ったものなどは神ではない」と言ったので、多くの人たちが真の神さまに立ち返り、そんなアルテミス神殿の模型など必要なくなりました。それでそれを売って商売していたデメトリオは、売り上げが非常に落ち込んでいるのに気づき、同業の人たちを召集してパウロを訴えたのです。おそらく彼は、この組合のボス的存在だったのではないかと思われます。
彼らはパウロの教えは女神アルテミスを冒涜している、神殿をないがしろにしていると一見、ギリシアの神々を大切にする信仰的なことを語っているように見えますが、結局は自分たちの商売に悪影響を及ぼすパウロを追い出したかったのです。
デメトリオの意図したとおり、これを聞いた人々は腹を立て、「エフェソ人のアルテミスは偉い方」と叫び出しました。町中が混乱し、パウロの同労者が捕らえられ、野外劇場へとなだれこんでいきました。この劇場は町の中心にあって、2万人くらいが収容できる大きなもので、それは単なる劇場ではなく、政治を行う場所でもありました。パウロの語る福音を政治的に判断しようとする行動でもあったのです。その騒ぎは暴動のような状況になってしまったので、パウロはこの騒ぎをおさめようと群衆の中へ入っていこうとしました。しかし、他の弟子たちがそれを止めていたのです。
それにしてもこの騒ぎは不思議な様相を呈しています。「エフェソ人のアルテミスは偉い方」(28, 34節)と叫び出した人々は、二時間も叫び続けたというのです。何かに憑かれたかのように人々が熱狂し叫び続けたのです。これは実体のない偶像を拝む時、悪しきものの力が入り込んできて、異様な熱狂に人々が包まれている状態だと思います。「大多数の者は何のために集まったのかさえ分からなかった」(32節)とあります。滑稽にすら感じますが、何だか分からずに集まる人々によって無秩序な暴動は膨れ上がっていったのです。
私たちは「アルテミスは偉い方」と叫ぶことはないかもしれませんが、時代の波の中で、あるいは圧倒的な同調圧力の中で、気がつかないうちに、とんでもないことを叫ぶようになる可能性がないとはいえません。歴史的に見て、そのような熱狂や暗黙の圧力の内に世の中が危険な状態になることは繰り返されてきました。まさにコロナのパンデミックの中で、先の見えない不安からか、スケープゴードのように誰かを攻撃する、自粛警察だとかコロナに感染した家族がバッシングを受け、その町で生活が出来なくなってしまうということが実際に起こりました。そのバッシングは、何かのはずみで自分に向けられることもあるのです。私たちの生活や命などつぶされてしまう、そのようなことが容易に起こる社会なのです。そしてまた、逆に気がついたら自分がバッシングする群衆の中で叫んでいるかもしれませんし、何が何だか分からないままに野外劇場の中にいるかもしれません。
だからこそ、私たちは本当に正しいお方、ただお一人の神に依り頼まなければなりません。そうでなければ、大きな時代の嵐のようなもの、あるいは個人を押し流す大水のような試練のなかで、私たちは自分を見失ってしまいます。
幸い、この騒動は、冷静にその場を治める町の書記官によって解散されました。この人物は、アルテミスを否定したわけではなく、むしろ言葉巧みに人々の女神を思う気持ちを持ち上げながら、あくまでも法的秩序を守ることを訴えました。パウロたちが直接に神殿を荒らしたり、女神を冒涜したわけではないこと、訴えたいことがあるなら法的なプロセスに則って訴えることを語りました。そしてこの騒動を無秩序な集会として断罪し、警告を与えています。
使徒言行録の中で、このようにクリスチャンでない人々、それも別段、クリスチャンや聖書に好感を持っているわけではない人々によって、使徒たちが助けられる場面がこれまでもありました。これもまた象徴的なことです。神さまはご自身の弟子たちを守られる時、様々な方法を用いられます。ノンクリスチャンである隣人をも用いられるのです。逆に言いますと、私たちはこの日本社会においては、マイノリティーです。しかも、在日外国人でありますから、日本人の助けや理解が必要です。そうでなければ、日常の生活がつまらないものになってしまいます。当然ながら、私たちはノンクリスチャンの日本人に対しても敬意を払って共に生きていかなければなりません。クリスチャンであることをことさらに誇ったり、神さまを知らない人々と周囲の人を見下ろしてはならないのです。
私たちはこの日本の社会の中で、むしろ謙遜に慎ましく生きるのです。それは何かのとき助けてもらうためではありません。しかし、私たちの日々のあり方は、自然に慎ましく生きていくとき、おのずとキリストを証しする生き方になるのです。隣人を愛する生き方になっていくのです。エフェソでのパウロのように助けてもらえるかはわかりません。そうではない逆の場合もあるでしょう。しかしなお、私たちはこの社会で生きております。不公平で矛盾に満ちた世界です。その中で、なお私たちは誠実に生きていくのです。それはクリスチャンらしく立派に生きましょうということではありません。立派などではなくてもいいのです。
しかし、ただ謙遜に生きていくのです。神さまを見上げながら。キリストが「人間の姿で現れ、へりくだって、死に至るまで、それも十字架の死に至るまで従順でした」(フィリピ2:7-8)とフィリピの信徒への手紙で言われるように、私たちも神さまに従順に歩むのです。その歩みこそがキリストの十字架を担う歩みなのです。
皆さん、私たちの歩もうとしている「この道」は決して平坦なものではなく、多くの障害が横たわっているような道かもしれませんが、たとえそれがどんな道であろうとも、神さまに祈り、神さまに信頼して進むなら、必ず神さまが解決を与えて下さるのです。神の国とその義とを第一にするなら、神さまは、それに加えてすべてのものを与えて下さるからです。私たちの信じている神さまは、偉大な神だからです。ですから、この神さまに信頼して、この道を一歩一歩、歩んで行きましょう。
【2021년 7월 11일 주일예배(요약판)】
“이 길을 걸어가자” 사도행전 19장 21~41절
23절에 “이 도로 말미암아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으니”(23절) 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 도(길)” 라는 것은 신앙을 의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가려고 하는 길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길을 걷고자 할 때에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거기에는 문제도 따르게 됩니다. 오늘의 성경 말씀에도 그 문제가 일어난 내용이 쓰여 있습니다.
바울은 2년이상 에베소에 체재하면서 복음을 계속 전했습니다. “이 길”을 계속 걷는 바울을 하나님께서는 축복하셔서 바울을 통해서 에베소의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데메드리오라는 사람을 발기인으로 하는 은장색 (은세공 장인)들에 의해 바울은 고소를 당하게 되어버립니다.
은장색들은 아데미의 신상이나 신전 모형을 만들어 장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데미의 신전은 호화 찬란한 것으로 에베소의 종교와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에베소는 이 신전에 관한 여러 제례를 중심으로 성립된 도시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제례가 있을 때에는 많은 순례자나 관광객이 찾아오게 되므로 그로 인해 에베소에 큰 경제적 번영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신전 주변에는 여러 가게가 즐비하게 늘어서게 되었고, 그 중에서도 아데미의 신상이나 신전 모형은 기념품으로 많이 판매되어 일대 관광지의 명산품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에베소의 많은 사람들은 아데미 신전과의 깊은 유대 속에서 생활을 유지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에베소에 바울 일행이 와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고 말하자 많은 사람들은 진실한 하나님에게로 되돌아가게 되었고, 그로 인해 아데미의 신상 모형 따위는 더이상 필요없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것을 팔아 장사를 하던 데메드리오는 매상이 떨어지게 되자 동업자들을 불러 바울 일햏을 고소한 것입니다. 아마 그는 이 조합의 리더적인 존재였다고 생각됩니다.
그들이 바울의 가르침은 여신 아데미를 모독하고 있다, 신전을 업신여기고 있다라고 하니 어찌 보면 그리스의 신들을 소중히 여기는 신앙적인 내용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자기들의 장사에 악영향을 미치는 바울을 쫓아내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데메드리오가 의도한 대로 이를 들은 사람들은 분노하여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라고 외쳤습니다. 온 시내가 혼란스러워지고 바울 일행들이 붙잡히 되자 사라들을 연극장으로 몰려 들어갔습니다. 이 극장은 시내의 중심에 있는 약 2만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넓은 장소로 단순한 극장의 기능뿐만이 아니라 정치를 행하는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이는 바울이 말하는 복음을 정치적으로 판단하려고 하는 행동이기도 했습니다. 이 소란은 폭동이 일어난 것 같은 상황이 되어 버렸기에 바울은 이 소란을 수습하려고 백성 가운데로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제자들이 그것을 말린 것입니다.
그렇다해도 이 소란은 이상한 양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28, 34절) 라고 외치기 시작한 사람들은 두 시간이나 계속 외쳤다고 합니다. 뭔가에 홀린듯이 사람들이 열광하여 계속 외친 것입니다. 이것은 실체없는 우상을 숭배할 때 악한 것의 힘이 들어오고 이상한 열광에 사람들이 휩싸여 있는 상태라고 생각됩니다. “~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32절) 라고 쓰여 있습니다. 우스꽝스럽게도 왜 모였는지 이유도 모른 체 몰려든 사람들로 인해 무질서한 폭동은 점점 커져 갔습니다.
우리는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라고 외치는 일은 없을지도 모릅니다만, 시대의 파도 가운데 또는 압도적인 동조 압력 가운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터무니없는 것을 외치게 될 가능성이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그런 열광이나 암묵의 압력 가운데 세계가 위험한 상태로 되는 일들은 되풀이되어 왔습니다. 바로 코로나 팬데믹 가운데 앞이 보이지 않는 불안 때문인지 스케이프고트처럼 누군가를 공격한다, 자숙 경찰이라든가 코로나에 감염된 가족이 배싱을 받아 그 동네에서 생활을 할 수 없게 되는 일도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그 배싱이 때로는 예상치 못하게 어떠한 경위로 우리 자신을 향하는 일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과 생활이 위협받을 수 있는 그런 일들이 용이하게 일어날 수 있는 사회입니다. 그리고 또 어떤 때에는 자기도 의식하지 못한 채로 배싱하는 군중 중에서 소리치고 있는다거나, 뭐가 뭔지 영문도 모르면서 극장 안 군중속의 한명처럼 될지도 모릅니다.
그런 만큼 우리는 정말로 올바른 분, 단지 한 사람의 하나님을 의지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큰 시대의 폭풍우 속에서 우리 개인은 홍수와 같은 시련 가운데 떠밀려 우리 자신을 잃어 버리게 될 것입니다.
다행히 이 소동은 현영하게 그 자리를 수습하는 서기장에 의해 해산되었습니다. 이 인물은 아데미를 부정하지도 않고, 능수능란한 말로 여신을 추앙하는 사람들의 기분을 맞춰주면서 어디까지나 법적 질서를 지켜달라고 호소했습니다. 바울들이 직접 신전을 망치거나 여신을 모독한 것은 아니라는 점, 호소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추후 법적인 절차에 따라 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 소동을 무질서한 집회라고 단죄하며 경고를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안에는 이렇게 크리스천이 아닌 사람들, 그것도 별반 크리스천이나 성서에 호감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에 의하여 사도들이 도움을 받는 장면이 지금까지도 여러번 있었습니다. 이것 또한 상징적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을 지키실 때 다양한 방법을 이용하십니다. 때로는 논크리스천인 이웃도 이용하시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우리는 이 일본 사회에서는 소수파입니다. 게다가 재일 외국인이기 때문에 일본인의 도움이나 이해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일상 생활이 시시하게 되어 버립니다. 당연히 우리는 논크리스천의 일본인에 대해서도 경의를 표하고, 그들과 더불어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크리스천인 것을 새삼스럽게 자랑하거나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주위의 사람들을 내려다 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일본 사회 속에서 오히려 겸손히 조신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뭔가 있을 때에 도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나날의 생활은 자연스럽게 조신하게 살아갈 때 저절로 그리스도를 증명하는 생활 태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생활 태도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에베소에서의 바울처럼 도움을 받게 될지 어떨지는 모릅니다. 오히려 그렇지 않는 경우도 있겠지요.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이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불공평과 모순으로 가득 찬 세계입니다. 그 속에서 여전히 성실하게 살아 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크리스천답게 휼륭하게 살아가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훌륭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겸손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러러보면서 그리스도께서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립보서 2장 7-8절) 빌립보서에 있는 것 같이 우리도 하나님께 순종하며 따라 걷는 것입니다. 그 걸음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짊어지는 걸음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걷고자 하는 “이 길”은 결코 평탄치 않고 어쩌면 많은 장애가 가로 놓여 있는 길일지도 모릅니다만, 비록 그것이 어떤 길일지라도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하나님을 신뢰하여 나아가면 반드시 하나님께서는 해결책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제일로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에 더해 모든 것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께서는 위대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이 길을 한 걸음 한 걸음씩 나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