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은 제2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 교회에서 전도 보고를 한 후, 안디옥 교회로 돌아갔습니다만, 서둘러서 다시 제3차 전도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다시 에베소로 돌아왔습니다.
오늘의 성경 말씀은 바울이 에베소에 오기 전에 일어났던 사건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 때, 에베소에서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교회를 위하여 일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아볼로가 온 것입니다.
아볼로는 애굽에 있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학문의 수련을 쌓은 언변과 학식이 뛰어난 웅변가였습니다. 그는 예수에 대해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자로, 지성과 감성을 겸비한 설교자로서의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아볼로의 활동으로 많은 신자들이 생겼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런 아볼로를 만나면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한 가지 알게 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볼로가 구약성경에 능통하고, 율법을 가장 잘 알며,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그의 뛰어난 언변으로 증명하며 유대인들의 무지를 깨우칠 정도로 열정이 대단한 인물이었지만 아직은 성령의 일을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구약적 전통에 기반했으므로 아직은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라는 것입니다.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여기서 요한의 세례라는 것은 회개의 세례를 의미합니다만, 도대체 이 요한의 세례란 무엇일까요?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서 공적인 활동을 시작하시기 전에 메시아(구세주)의 도래에 앞서서 사람들을 인도한 사람입니다. 구세주가 오시니 자기들의 생활을 돌아보고 하나님의 구원에 합당하게 회개하여 하나님을 향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회개의 의식으로 요단 강에서 세례를 베푼 것입니다. 그것이 요한의 세례의 세례였습니다. 그 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태복음 3장 7~9절)
사람들에 있어서 이 요한의 가르침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유대 사람들은 유대인이라는 것만으로 당연히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자기들은 하나님께 선택받은 특별한 백성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즉 혈통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은 구원에 있어서 아무 의미도 없다, 혈통으로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해도 임박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기 위해서는 죄를 회개하여 하나님을 향해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감명을 받아 요한에서게 회개의 세례 즉 물로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요한 자신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마태복음 3장 11절)
즉 세례 요한 자신이 자기의 세례와 이후에 오시는 이의 세례는 다르다고 말한 것입니다. 뒤에 오시는 이란 물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라고 요한은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성경 말씀인 사도행전에서 문제가 되는 것도 요한이 말한 “물의 세례”와 “성령과 불의 세례”의 차이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 차이가 무엇인가하면, 구원의 시간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세례는 메시아가 오실 때에 인간이 심판받아야 하는데 그 심판을 받기 전에 우리가 멸망하지 않기 위하여 회개하고 하나님께 마음을 향하는 세례였습니다. 말하자면, 그 세례는 미래에 향한 대비였습니다.
그에 반해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는 그 순간부터 구원 속으로 우리를 들어가게 해주는 세례인 것입니다. 구원은 미래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물론 세계 전체의 구원이 완성되는 것은 계시록에 있듯이 장래의 일입니다. 그러나 세례를 받은 한 사람 한사람의 구원은 이미 세례를 받은 그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지금 교회에서 행하는 세례식에서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물”뿐입니다. 육안으로 “성령과 불”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겉보기에는 요한의 세례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베풀어집니다. 그러므로 육안으로 보이지 않아도 그것은 “성령과 불”에 의한 세례인 것입니다. 거기에는 성령이 쏟아지고 또 불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하나님의 힘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회당에서 아볼로의 설교를 들었을 때에 뭔가가 부족하다고 여겼습니다. 그것은 “기쁨”입니다. 장래의 것이 아니라 지금 구원받았다고 실감하는 신앙에는 참 기쁨이 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아볼로에게 그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아볼로는 이 신앙의 기쁨을 손에 넣게 된 후 아마도 더 힘차게 설교를 했을 것입니다.
아볼로가 아가야에서 전도하고자 함으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고린도 교회에 소개장을 써 주었습니다. 아볼로는 고린도에 가서 바울이 일으킨 교회를 더 성장하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아볼로가 고린도에 가 있을 때 바울이 에베소에 돌아왔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 와서 열두 사람의 제자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의 신앙에 “기쁨”이 느껴지지 않았는지 바울은 그들에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19:2),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19:3)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성령의 존재도 모르고 “요한의 세례니라”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시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했더니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했다고 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서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기에 들어 있는 것들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소위 “성령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을 받아들이고 성령을 신뢰해서 걷는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이 성령의 역사를 믿지 못하는 사람이 의지할 거라고는 오로지 자기의 힘뿐 그 이외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즉 그런 사람들의 신앙 생활은 자기의 힘으로 신앙을 얻고, 자기의 힘으로 힘껏 노력해야만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거기에는 결코 기쁨이 없습니다.
바울이 만났던 열두 사람의 제자들은 외면적으로는 열정적인 신앙 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성령의 열매는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요한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따르고 싶다면 그가 가리킨 구세주 예수님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그 때의 제자들이 열두 사람이었다는 것도 상징적인 것입니다. 열두 사람의 사도들이 펜테코스트 때에 성령을 받아 새 신앙 생활을 시작하여 교회가 탄생했습니다. 그 때와 같은 일이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했을 때에 일어난 것입니다. 그들은 성령의 역사를 받아들이고 성령을 신뢰하여 걷기 시작했습니다. 방언이나 예언을 하는 등, 성령의 역사가 보이는 형태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도 새 교회가 탄생한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정확하게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즉 성령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더욱더 성령의 역사를 신뢰하여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구태의연한 신앙 생활은 버리고, 새로운 신앙 생활로 성령의 열매를 풍부하게 맺는 신앙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2021年6月27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갈라디아서(ガラテヤ) 5章 22~23, 25節
〇讃 頌 讃頌歌 282(1, 4, 6節)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聖書奉読 使徒言行録 18章 24節 ~ 19章 10節
〇説 教 「새 신앙 생활로(神の御心ならば)」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436(1, 4節)
〇献 金
〇報 告
〇感謝祈祷
〇頌 栄 讃頌歌 1
〇主 祈 祷
21.06.27主日(要約版)「新しい信仰生活へ」使徒言行録 18章24節~19章10節
パウロは第二回伝道旅行を終えて、エルサレム教会で伝道報告をした後、アンティオキア教会へ戻りましたが、慌ただしく、また第三回目の伝道旅行へと旅立ちました。そして、パウロはエフェソへとまた戻って来たのです。
今日の聖書箇所は、パウロがエフェソに来るまでに起こった事柄から始まっています。その時、エフェソの町ではプリスキラとアキラの夫婦が教会のために働いておりました。そこにアポロがやって来たのです。
アポロは、本名がアポロニオスと言いますが、エジプトにある町アレクサンドリアで生まれ育ち、学問の修練を積み、そして、雄弁家でした。説教者としては優れた賜物を持っていたようです。このアポロの働きで多くの信仰者が与えられたようです。ただ、プリスキラとアキラの夫婦がこのアポロと出会って一つ気づいたことがありました。
それはアポロがイエスさまのことを雄弁に語ってはいるけれども、まだ聖霊の働きを知らないということでした。それが「ヨハネの洗礼しか知らなかった」ということです。
「ヨハネの洗礼しか知らなかった。」 ヨハネの洗礼というのは、悔い改めの洗礼のことですが、そもそもヨハネの洗礼とはなんでしょうか?
洗礼者ヨハネは、イエスさまが公の活動を始められる前、メシア(救い主)の到来に先立って、人々を導いた人物です。救い主が来られるから、自分たちの生き方を見直し、神さまの救いにふさわしく悔い改め、神さまの方を向こうと語りました。そして、その悔い改めの儀式としてヨルダン川で洗礼を授けたのです。それがヨハネの洗礼でした。そのヨハネは言いました。「蝮の子らよ、差し迫った神の怒りを免れると、だれが教えたのか。悔い改めにふさわしい実を結べ。『我々の父はアブラハムだ』などと思っても見るな。言っておくが、神はこんな石からでも、アブラハムの子たちを造り出すことがおできになる。」(マタイ3章7~9節)
人々にとって、ヨハネの教えは衝撃的でした。ユダヤの人々はユダヤ人であるということで、当然のように神の救いに与れると考えていたのです。自分たちは神さまに選ばれた特別な民だと思っていたからです。しかし、洗礼者ヨハネは、「『我々の父はアブラハムだ』などという考えを起こすな」、つまり、血筋としてアブラハムの子孫だということは救いにとって何の意味もない、血筋としてアブラハムの子孫だからと言って差し迫った神さまの怒りを免れることはできないと語りました。神さまの怒りを免れるためには、罪を悔い改めて神さまの方を向かなければならないと説きました。そして、その言葉を聞いた人々は、心打たれて、ヨハネから悔い改めの洗礼、つまり水の洗礼を受けたのです。
しかし、そのヨハネ自身が、こういうことも語っています。「わたしは、悔い改めに導くために、あなたたちに水で洗礼を授けているが、わたしの後から来る方は、わたしよりも優れておられる。わたしは、その履物をお脱がせする値打ちもない。その方は、聖霊と火であなたたちに洗礼をお授けになる。」(マタイ 3章11節)
つまり洗礼者ヨハネ自身が、自分の洗礼と、やがて後から来られる方の洗礼は違うのだと語っていたのです。後から来られる方は、もちろんイエス・キリストです。イエス・キリストが「聖霊と火」で洗礼をお授けになるとヨハネは語ったのです。
そして、今日の聖書箇所である使徒言行録で問題になっていることも、ヨハネがいうところの「水の洗礼」と「聖霊と火の洗礼」の違いから来るものでした。
その違いが何なのかと言いますと、救いの時間が異なるということです。洗礼者ヨハネの水の洗礼は、メシアが来られた時に人間は裁かれるわけですが、その裁きを前に、私たちが滅びないために悔い改め、神さまに向かって心を向ける洗礼でした。言ってみれば、その洗礼は、未来に向かっての備えでした。
それに対して、イエス・キリストの洗礼は、その瞬間から、救いの中に私たちが入れられる洗礼なのです。救いは未来ではなく、今この瞬間に起こるのです。もちろん世界全体の救いの完成は黙示録にあるように将来のことです。しかし、洗礼を受けた一人一人の救いはすでに洗礼を受けたその瞬間から始まっているのです。
今、教会で行われている洗礼式で、私たちの目に見えるものは「水」だけです。肉眼で「聖霊と火」は通常は見えません。ですから、見た目には、ヨハネの洗礼となんら変わりはありません。しかし、今、私たちが行っている洗礼は、イエス・キリストの名において授けられます。ですから、肉眼には見えなくても、それは「聖霊と火」による洗礼なのです。そこには聖霊が注がれ、また火という言葉で表される神さまの力が働くのです。
プリスキラとアキラが会堂でアポロの説教を聞いたときに、何かが足らないと思ったのです。それは「喜び」です。将来のことではなく、今、救われたと実感する信仰には、真の喜びがあります。将来の救いを語っているアポロの説教には、その喜びが感じ取れなかったのでしょう。プリスキラとアキラはアポロにそれを教えてあげました。この信仰の喜びを手に入れたアポロは、さらい力強く説教したことでしょう。
アポロがアカイア州で伝道したいと望んだので、プリスキラとアキラはコリント教会に紹介の手紙を書きました。アポロはコリントに行き、パウロの立ち上げた教会をさらに成長させたのです。
そして、アポロがコリントにいた時に、パウロがエフェソに戻って来ました。パウロがエフェソに来て、12人の弟子たちに会いました。彼らの信仰に「喜び」が感じられなかったのか、パウロは彼らに「信仰に入ったとき、聖霊を受けましたか」(19:2)、「どんな洗礼を受けたのですか」(19:3)と尋ねました。すると、彼らは聖霊の存在も知らず、「ヨハネの洗礼」を受けたと答えました。
そこでパウロは、改めて彼らにイエス・キリストの名による洗礼を授けました。パウロが彼らの上に手を置くと、聖霊が降り、彼らは異言を話したり、預言をしたりしたと言うのです。
パウロはガラテヤの信徒への手紙5章22節で「霊の結ぶ実は愛であり、喜び、平和、寛容、親切、善意、誠実、柔和、節制です」と教えています。ここで挙げられていることは、聖霊の働きとして私たちに与えられるものです。いわゆる「聖霊の賜物」というものです。聖霊の働きを受け入れ、聖霊に信頼して歩む信仰者に与えられる賜物だからです。
この聖霊の働きを信じられない人にとって頼るべきものは自分の力以外にはありえません。つまり、そのような人々の信仰生活は、自分の力で信仰を得て、自分の力で信仰を懸命になって維持することになってしまう訳です。そこには決して喜びはありません。
パウロが出会った12人の弟子たちは、外面的には熱心な信仰生活を送っているように見えながらも、彼らにはこの御霊の実が感じられないとパウロには見えたのかもしれません。そこでパウロはあなたがたがヨハネの教えに正しく従いたいならば、彼が指し示した救い主イエスさまを受け入れるべきだと教えたのです。
この時の弟子たちが12人であったというのも象徴的なことです。12人の使徒たちが、ペンテコステの日に聖霊を受けて、新しい信仰生活を始め、教会が誕生しました。その時と同じようなことが、パウロが彼らの上に手を置いた時に起こったのです。彼らは聖霊の働きを受け入れ、聖霊に信頼して歩み始めました。異言を語る、預言する、という聖霊の働きが見える形として現れたのです。そして、ここにも新たな教会が誕生したのです。
皆さん、皆さんも主イエス・キリストの名によって洗礼を受けました。正確には、神と御子と聖霊の名によって洗礼を受けました。聖霊を受けているのです。ですから、もっと聖霊の働きを信頼して、歩んでください。古い信仰生活を捨てて、新しい信仰生活へと、聖霊の実が豊かに実る信仰を持ちましょう。
21.06.27주일(요약판) “새 신앙 생활로” 사도행전 18장 24절~19장 10절
사도 바울은 제2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 교회에서 전도 보고를 한 후, 안디옥 교회로 돌아갔습니다만, 서둘러서 다시 제3차 전도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다시 에베소로 돌아왔습니다.
오늘의 성경 말씀은 바울이 에베소에 오기 전에 일어났던 사건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 때, 에베소에서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교회를 위하여 일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아볼로가 온 것입니다.
아볼로는 애굽에 있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학문의 수련을 쌓은 언변과 학식이 뛰어난 웅변가였습니다. 그는 예수에 대해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자로, 지성과 감성을 겸비한 설교자로서의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아볼로의 활동으로 많은 신자들이 생겼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런 아볼로를 만나면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한 가지 알게 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볼로가 구약성경에 능통하고, 율법을 가장 잘 알며,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그의 뛰어난 언변으로 증명하며 유대인들의 무지를 깨우칠 정도로 열정이 대단한 인물이었지만 아직은 성령의 일을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구약적 전통에 기반했으므로 아직은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라는 것입니다.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여기서 요한의 세례라는 것은 회개의 세례를 의미합니다만, 도대체 이 요한의 세례란 무엇일까요?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서 공적인 활동을 시작하시기 전에 메시아(구세주)의 도래에 앞서서 사람들을 인도한 사람입니다. 구세주가 오시니 자기들의 생활을 돌아보고 하나님의 구원에 합당하게 회개하여 하나님을 향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회개의 의식으로 요단 강에서 세례를 베푼 것입니다. 그것이 요한의 세례의 세례였습니다. 그 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태복음 3장 7~9절)
사람들에 있어서 이 요한의 가르침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유대 사람들은 유대인이라는 것만으로 당연히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자기들은 하나님께 선택받은 특별한 백성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즉 혈통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은 구원에 있어서 아무 의미도 없다, 혈통으로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해도 임박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기 위해서는 죄를 회개하여 하나님을 향해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감명을 받아 요한에서게 회개의 세례 즉 물로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요한 자신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마태복음 3장 11절)
즉 세례 요한 자신이 자기의 세례와 이후에 오시는 이의 세례는 다르다고 말한 것입니다. 뒤에 오시는 이란 물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라고 요한은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성경 말씀인 사도행전에서 문제가 되는 것도 요한이 말한 “물의 세례”와 “성령과 불의 세례”의 차이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 차이가 무엇인가하면, 구원의 시간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세례는 메시아가 오실 때에 인간이 심판받아야 하는데 그 심판을 받기 전에 우리가 멸망하지 않기 위하여 회개하고 하나님께 마음을 향하는 세례였습니다. 말하자면, 그 세례는 미래에 향한 대비였습니다.
그에 반해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는 그 순간부터 구원 속으로 우리를 들어가게 해주는 세례인 것입니다. 구원은 미래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물론 세계 전체의 구원이 완성되는 것은 계시록에 있듯이 장래의 일입니다. 그러나 세례를 받은 한 사람 한사람의 구원은 이미 세례를 받은 그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지금 교회에서 행하는 세례식에서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물”뿐입니다. 육안으로 “성령과 불”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겉보기에는 요한의 세례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베풀어집니다. 그러므로 육안으로 보이지 않아도 그것은 “성령과 불”에 의한 세례인 것입니다. 거기에는 성령이 쏟아지고 또 불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하나님의 힘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회당에서 아볼로의 설교를 들었을 때에 뭔가가 부족하다고 여겼습니다. 그것은 “기쁨”입니다. 장래의 것이 아니라 지금 구원받았다고 실감하는 신앙에는 참 기쁨이 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아볼로에게 그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아볼로는 이 신앙의 기쁨을 손에 넣게 된 후 아마도 더 힘차게 설교를 했을 것입니다.
아볼로가 아가야에서 전도하고자 함으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고린도 교회에 소개장을 써 주었습니다. 아볼로는 고린도에 가서 바울이 일으킨 교회를 더 성장하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아볼로가 고린도에 가 있을 때 바울이 에베소에 돌아왔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 와서 열두 사람의 제자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의 신앙에 “기쁨”이 느껴지지 않았는지 바울은 그들에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19:2),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19:3)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성령의 존재도 모르고 “요한의 세례니라”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시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했더니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했다고 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서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기에 들어 있는 것들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소위 “성령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을 받아들이고 성령을 신뢰해서 걷는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이 성령의 역사를 믿지 못하는 사람이 의지할 거라고는 오로지 자기의 힘뿐 그 이외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즉 그런 사람들의 신앙 생활은 자기의 힘으로 신앙을 얻고, 자기의 힘으로 힘껏 노력해야만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거기에는 결코 기쁨이 없습니다.
바울이 만났던 열두 사람의 제자들은 외면적으로는 열정적인 신앙 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성령의 열매는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요한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따르고 싶다면 그가 가리킨 구세주 예수님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그 때의 제자들이 열두 사람이었다는 것도 상징적인 것입니다. 열두 사람의 사도들이 펜테코스트 때에 성령을 받아 새 신앙 생활을 시작하여 교회가 탄생했습니다. 그 때와 같은 일이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했을 때에 일어난 것입니다. 그들은 성령의 역사를 받아들이고 성령을 신뢰하여 걷기 시작했습니다. 방언이나 예언을 하는 등, 성령의 역사가 보이는 형태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도 새 교회가 탄생한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정확하게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즉 성령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더욱더 성령의 역사를 신뢰하여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구태의연한 신앙 생활은 버리고, 새로운 신앙 생활로 성령의 열매를 풍부하게 맺는 신앙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