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일을 맞이한 이 날, 하나님 앞에 모일 수 있는 것을 감사합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흘만에 부활하시고 자기가 살아 계시는 것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부활부터 쉰 번째 날에 역속하신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시고 여러 가지 은사를 주십니다. 제자들은 성령으로 힘을 얻고 담대하게 선교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사도들은 성령으로 여러 언어로 복음을 말하여 힘이 있는 일을 이룩했습니다. 그리고 이 시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백성들이 성령의 위로와 격려를 받아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잔증해 왔습니다. 성령께서는 교회를 성장시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을 연결시키는 주님의 유대입니다.
하나님, 혼미하는 이 시대와 세계에 성령을 풍부하게 부어 주시옵소서. 성령으로 우리 마음을 비추사 확신을 가지고 이 신앙의 길을 나아가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성령에 채워지고 우리가 말해야 하는 말을 말하고 해야 하는 일을 다하여 기도하는 기도를 드릴 수 있게 하옵소서.
이 코로나 사태 가운데 괴로워하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돌보아 주시옵소서. 부디 하나님의 자비와 힘을 깨달아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오늘 여기에 모이지 못했던 자매 형제 위에도 우리와 같은 축복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특히 병상에 누워 있는 사람, 늙은이들, 아이들을 축복해 주시옵소서.
오늘의 성경 말씀에는 먼저 점을 치는 여종이 나옵니다. 여기서 “점치는 귀신 들린 여성”이 “노예”였다는 것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노예는 주인에게 지배되며 주인의 마음대로 쓰여지고 소용이 없어지면 버려집니다. 그녀의 주인들은 그녀에게 점을 치게 하고서 그것으로 많은 이익을 얻고 있었습니다. 그녀에게 들린 점치는 귀신은 그 주인들이 돈벌이를 하기에 용이한 계시나 탁선을 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점치는 귀신, 악령의 일입니다. 악령이라고 하면 인간에게 악한 것을 할거라는 생각은 하지만,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 점치는 귀신은 인간의 노예가 되어 섬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실은 사람들이 참 하나님을 따르는 게 하는게 아니라 자기가 주인, 지배자가 되어서 하나님마저도 노예로 삼는 죄로 끌어들여서 그것으로 사람을 죄의 노예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악령의 목적은 늘 거기에 있습니다. 그것을 인간에게 괴로움을 주는 방법으로 하던지, 또는 마치 인간에게 봉사는 것 처럼 보이는 방법으로 하는지의 차이입니다.
그런데, 이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이 바울 일행에게 착 달라붙어서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점치는 귀신이 그렇게 그녀에게 소리 지르게 했습니다. 틀림없이 그녀의 말은 옳은 것입니다. 그리고 고명한 점쟁이인 그녀가 그렇게 소리 지르는 것은 전도에는 좋은 선전이 되었지요. 그녀가 소리 지르는 것을 듣고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바울 일행의 주위에 모여 와서 그 이야기를 듣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녀에게서 그 점치는 귀신을 몰아내었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했을까요?
바울은 어떻게든 사람이 모이면 그것이 전도의 기회가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무엇으로 뭐 때문에 모이는지가 문제인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과 점의 세계와의 차이, 즉 성령의 일과 악령의 일의 구별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점쟁이의 말로 모이는 것은 만약 그 말이 형식적으로는 옳다고 해도 거기에 생기는 세계는 자기가 주인이 되어 하나님마저도 노예로 이용하려고 하는 세계입니다. 자기가 바꿔지는게 아니라 주위를 바꾸는 것으로 운명을 호전시키려고 하는 세계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라는 말에 속지 않고 악령의 일을 물리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여성에게서 점치는 귀신을 몰아냈다고 해서 투옥되어 버립니다. 관리들은 바울 일행을 제대로 취조하지도 않고 매로 치고 족쇄를 채워서 깊은 감옥에 가둔 것입니다.
바울 일행은 이렇게 부당한 괴로움을 받았는데 이 괴로움 속에서도 그들이 하고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찬송하고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른 것입니다. 찬양하면서 기도하는 그들의 모습에는 불가사의한 평안이 있습니다. 캄캄한 감옥 안 거기에서도 빛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평안과 빛은 그들 안에만 있었던 게 아니라 이 감옥에 붙잡혔던 모든 사람들에게도 전해져 갔습니다. 25절에 “죄수들이 듣더라” 라고 쓰여 있는 그대로입니다.
그랬더니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옥문들이 다 열리고 죄수들을 매었던 쇠사슬도 벗겨져 버리고 도망칠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죄수들은 누구 한 사람도 그곳에서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그곳에서 도망치는 것보다는 바울과 실라 곁에 그대로 남아 있고 싶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바울 일행의 찬송과 기도는 다른 죄수들의 마음을 그만큼 깊이 사로잡아 그들에게 평안과 빛을 가져다준 것입니다.
이 찬송과 기도, 거기에 있는 평안과 밝음, 그것을 가져다 준 것이야말로 성령입니다. 옥중이라는 괴로움 속에 있었지만 평안과 밝음을 주시는 성령의 역사와 은혜가 빌립보의 옥중 안에 흘러 넘쳤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한 사람과 그 가족 전원이 구원을 얻게되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사람이 바로 이 감옥의 간수입니다. 그는 큰 지진으로 옥문이 다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쳤을거라 생각했습니다. 죄수가 도망치면 모든 책임을 간수가 지고 벌을 받아야 합니다. 가족들까지도 그 죄를 짊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그는 절망에 빠져 자결하려고 했습니다.
그 때, 바울은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라고 크게 외쳤습니다. 바울 일행의 찬송과 기도가 가져다준 평안 가운데 죄수들은 단 한 사람도 도망치지 않고 그곳에 그대로 다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이제는 죽을 수 밖에 없다는 절망 가운데 있었던 간수에게는 바로 기적과도 같은 구원의 선언이었습니다.
그는 단순히 기적적인 구원을 체험했을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것으로 감옥 속에 있는 바울이나 실라야말로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또 반대로 옥 밖에서 그 망을 보고 있던 자기야말로 실은 자유롭지 못한 붙잡혀 있는 자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살아 계신 참 하나님의 지배를 바라보고 그것에 몸을 맡겨 사는 것이야말로 참된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그러한 참된 자유를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바울 일행의 참된 자유과 거기에 비해 오히려 자기의 붙잡혀 있는 자유롭지 못한 모습에 깜짝 놀란 이 간수는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려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해야만 구원을 받으리이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구원을 받아야 하는 자라고 깨닫고 구원을 간절히 바랐던 것입니다. 바울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기에 필요한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참 구세주이시며 참 하나님이심을 믿고 그 예수님께 자신의 인생을 맡기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괴로움이 없어지는 것도 목숨을 건지는 것도 아닙니다. 구원이란 참으로 몸을 바치며 맡길 만한 참 주인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이 분 밑에서는 괴로움 속에 있더라도 찬송하고 기도할 수 있다, 그러한 참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몸을 맡기는 것이야말로 구원인 것입니다.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이 구원은 믿는 우리들에게만 주어지는 게 아니라 우리 가족에도 이르게 됩니다. 그것은 한 사람이 믿으면 가족도 자동적으로 구원받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 몸을 맡긴다는 것은 자기가 가장 소중한 것을 맡긴다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가장 소중한 것, 거기에는 사랑하는 아내나 남편, 자식들, 가족이 당연히 포함됩니다. 가장 소중한 가족을 예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거기에 성령께서 일하시고 역사해 주실 것을 기도하여 구하는 것입니다.
이 간수가 한 것도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는 한밤중임에도 불구하고 바울 일행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가족들 모두가 바울이 말하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세례를 받아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성령의 역사, 은혜는 우리에게도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고 참된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물론 일상에서 여러 가지 제약을 받고 있습니다. 지금은 특히 코로나 상태 속에서 우리의 일상은 제약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가장 중요한 자유를 얻고 있는 것입니다. 그 자유 속에서 기뻐하면서 걸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디 하나님 앞에서 더 자유롭게 하나님의 자녀로서 걸어가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年5月23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黙祷をもって礼拝を始めます。
〇招 詞 요엘(ヨエル書) 2章 28~30節(3章 1~3節)
2:28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2:29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2:30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3:1 その後/わたしはすべての人にわが霊を注ぐ。あなたたちの息子や娘は預言し/老人は夢を
見、若者は幻を見る。
3:2 その日、わたしは/奴隷となっている男女にもわが霊を注ぐ。
3:3 天と地に、しるしを示す。それは、血と火と煙の柱である。
〇讃 頌 讃頌歌 190(1, 4節)
〇祈 祷 お祈りいたします。
天にいまし、いつも私たちと共にいて下さる神さま。
聖霊降臨日を迎えたこの日、あなたの御前に集まることが出来たことを感謝いたします。十字架に架かって死なれた御子イエス・キリストは、三日目に復活し、御自分が生きておられることを示されました。そして、復活から50日の後、約束された聖霊を送って下さいました。
聖霊は、あなたの真理を教え、さまざまな賜物を与えて下さいます。弟子たちは聖霊によって力を受け、大胆に宣教する者となりました。使徒たちは聖霊によってさまざまな言葉で福音を語り、力ある業を成し遂げました。そしてこの時代に至るまで、数知れぬ多くの民が、聖霊の慰めと励ましを受けて、主イエス・キリストの福音を証しして来ました。聖霊は教会を成長させ、私たちすべてのキリスト者を結び合わせる主の絆です。
神さま、混迷するこの時代と世界に、あなたの聖霊を豊かに注いで下さい。聖霊によって私たちの心を照らし、確信をもってこの信仰の道を歩む者として下さい。聖霊に満たされて、私たちが語るべき言葉を語り、なすべき業を果たし、祈るべき祈りをささげることが出来ますように。
このコロナ禍の中にあって苦しみ、助けを必要としている人々をかえりみて下さい。どうか、あなたの慈しみと力が示され、皆があなたの愛を信じて生きることが出来ますように。
今日、ここに集えなかった姉妹兄弟の上にも、私たちと同じ祝福が降り注がれますように。特に、病の中にある方、年老いた方、子どもたちを祝福して下さい。
それぞれが祈りを携え、ここに集いましたから、どうか、すべての祈りをこの祈りと共に聴き上げて下さい。
すべての祈りと併せて、このお祈りを、主イエス・キリストの御名によって祈ります。アーメン。
하늘에 계시고 늘 우리와 함께 해 주시는 하나님.
성령강림일을 맞이한 이 날, 하나님 앞에 모일 수 있는 것을 감사합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흘만에 부활하시고 자기가 살아 계시는 것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부활부터 쉰 번째 날에 역속하신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시고 여러 가지 은사를 주십니다. 제자들은 성령으로 힘을 얻고 담대하게 선교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사도들은 성령으로 여러 언어로 복음을 말하여 힘이 있는 일을 이룩했습니다. 그리고 이 시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백성들이 성령의 위로와 격려를 받아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잔증해 왔습니다. 성령께서는 교회를 성장시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을 연결시키는 주님의 유대입니다.
하나님, 혼미하는 이 시대와 세계에 성령을 풍부하게 부어 주시옵소서. 성령으로 우리 마음을 비추사 확신을 가지고 이 신앙의 길을 나아가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성령에 채워지고 우리가 말해야 하는 말을 말하고 해야 하는 일을 다하여 기도하는 기도를 드릴 수 있게 하옵소서.
이 코로나 사태 가운데 괴로워하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돌보아 주시옵소서. 부디 하나님의 자비와 힘을 깨달아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오늘 여기에 모이지 못했던 자매 형제 위에도 우리와 같은 축복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특히 병상에 누워 있는 사람, 늙은이들, 아이들을 축복해 주시옵소서.
각자가 기도를 들고 여기에 모렸으니 부디 모든 기도를 이 기도와 함께 들어 주시옵소서.
모든 기도와 함께 이 기도를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〇聖書奉読 使徒言行録 2章 1~21節
2:1 五旬祭の日が来て、一同が一つになって集まっていると、
2:2 突然、激しい風が吹いて来るような音が天から聞こえ、彼らが座っていた家中に響いた。
2:3 そして、炎のような舌が分かれ分かれに現れ、一人一人の上にとどまった。
2:4 すると、一同は聖霊に満たされ、“霊”が語らせるままに、ほかの国々の言葉で話しだした。
2:5 さて、エルサレムには天下のあらゆる国から帰って来た、信心深いユダヤ人が住んでいたが、
2:6 この物音に大勢の人が集まって来た。そして、だれもかれも、自分の故郷の言葉が話されているのを聞いて、あっけにとられてしまった。
2:7 人々は驚き怪しんで言った。「話をしているこの人たちは、皆ガリラヤの人ではないか。
2:8 どうしてわたしたちは、めいめいが生まれた故郷の言葉を聞くのだろうか。
2:9 わたしたちの中には、パルティア、メディア、エラムからの者がおり、また、メソポタミア、ユダヤ、カパドキア、ポントス、アジア、
2:10 フリギア、パンフィリア、エジプト、キレネに接するリビア地方などに住む者もいる。また、ローマから来て滞在中の者、
2:11 ユダヤ人もいれば、ユダヤ教への改宗者もおり、クレタ、アラビアから来た者もいるのに、彼らがわたしたちの言葉で神の偉大な業を語っているのを聞こうとは。」
2:12 人々は皆驚き、とまどい、「いったい、これはどういうことなのか」と互いに言った。
2:13 しかし、「あの人たちは、新しいぶどう酒に酔っているのだ」と言って、あざける者もいた。
2:14 すると、ペトロは十一人と共に立って、声を張り上げ、話し始めた。「ユダヤの方々、またエルサレムに住むすべての人たち、知っていただきたいことがあります。わたしの言葉に耳を傾けてください。
2:15 今は朝の九時ですから、この人たちは、あなたがたが考えているように、酒に酔っているのではありません。
2:16 そうではなく、これこそ預言者ヨエルを通して言われていたことなのです。
2:17 『神は言われる。終わりの時に、/わたしの霊をすべての人に注ぐ。すると、あなたたちの息子と娘は預言し、/若者は幻を見、老人は夢を見る。
2:18 わたしの僕やはしためにも、/そのときには、わたしの霊を注ぐ。すると、彼らは預言する。
2:19 上では、天に不思議な業を、/下では、地に徴を示そう。血と火と立ちこめる煙が、それだ。
2:20 主の偉大な輝かしい日が来る前に、/太陽は暗くなり、/月は血のように赤くなる。
2:21 主の名を呼び求める者は皆、救われる。』
2: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2: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하나씩 위에 임하여 있더니
2: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2:5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어 있더니
2:6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2:7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2: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2:9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림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2: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 온 사람들과
2: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2:12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
2:13 또 어떤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2:14 베드로가 열 한 사도와 같이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2:15 때가 제 삼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2:16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2:17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2:18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2:19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2:20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2: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〇説 教
「あなたも神の言葉を聞く」(要約版) 使徒言行録 2章 1~21節
今日は、聖霊降臨日です。聖霊降臨、ペンテコステの出来事は、五旬祭と呼ばれた祭りの時に起こりました。五旬祭は、過越祭から五十日目の祭りということです。過越祭から五十日目頃から小麦の収穫が始まります。五旬祭は、収穫した小麦の初穂をささげる収穫祭であったのです。そして、ユダヤにおいて、この五旬祭はモーセを通じてイスラエルの民に律法が与えられたことを記念する祭りでもありました。
エジプトで奴隷だったイスラエルの民が神さまによって解放されました。その神さまに救われた人間が、救い出してくださった神さまの恵みに応答して新しく生きていくために律法が与えられたのです。
そして、新約聖書の時代、イエスさまの十字架によって私たちの罪からの救いが成就されました。罪の奴隷であった私たちが自由を得ました。神さまに救われた私たちが新しく一歩を踏み出すための出来事が聖霊降臨であったのです。かつて、シナイ山で出エジプトの民に律法が与えられたように、聖霊降臨においては私たちに聖霊が与えられたのです。
その聖霊降臨の様子が、2節から記されていますが、突然、激しい風が吹いて、天から大きな音が響き渡り、炎のような舌が分かれ分かれに現れ、一人一人の上にとどまった、とあります。
「舌」というのは、ギリシャ語でグロッサという単語ですが、言葉という意味も持ちます。つまり一人一人の上に言葉がとどまったということです。炎のような舌、神さまの言葉が一人一人の上にとどまったのです。それは、人間の罪と裁きと救いの言葉です。その言葉が、見える形でとどまったというのです。それも一人一人の上に、その場にいたすべての人々の上にとどまったのです。こうして、聖霊を待ち望んでいたすべての人々に言葉が与えられました。
神さまの言葉を与えられた人々は語り出しました。しかも、「ほかの国々の言葉」で話し出したのです。「ほかの国々の言葉」というのは、聞く人に分かる言葉で語りだしたということです。
旧約聖書創世記11章にバベルの塔の物語があります。かつて人間は思い上がり、神さまの領域を犯すような高い塔を建てようとしました。それに対して、神さまは人間の言葉を乱されました。それまで同じ言葉を話していた人間は違う言葉を話すようになり、皆で団結して高い塔を建てることは出来なくなりました。そして、違う言葉を話すようになった人間は、コミュケーションが取れなくなり、世界中に散らされたのです。
しかし、今や、神さまの力によって人々に伝わる言葉が与えられたのです。罪と赦しと救いの言葉が、すべての人に伝わる時代が来たのです。神さまの言葉が、民族や国や文化を越えて聞かれる時代が来たのです。神さまの力による意思疎通、本当のコミュニケーションが与えられたのです。バベルの塔の時代から人間の罪ゆえに、つながることのなかった人間同士が、ほんとうにつながっていく時代が来たということです。
その場にいた人々は、神さまの霊によって話し出しました。逆に言いますと、神さまの霊によらなければ、本当の意味での伝わる言葉というものはないのです。意味としては伝わったとしても、バベルの塔の物語で描かれているように、罪の言葉しか人間には語ることは出来ないのです。
しかし、一方で、語る側が聖霊に満たされて語っていても、聞く側の人間によって、聞こえ方が違うのです。ある人には福音だと聞こえても、ある人にはつまらない話と聞こえたりします。この聖霊降臨の場面でも、弟子たちが語る言葉を聞いて、「『あの人たちは、新しいぶどう酒に酔っているのだ』と言って、あざける者もいた」と13節にあるように、聖霊に満たされた言葉を聞くことの出来ない人もいたのです。
その時、ペトロが弟子たちを代表して語り始めました。それが14節からの御言葉ですが、ペトロは旧約聖書のヨエル書を引用し語り始めました。この聖霊降臨の出来事は、ヨエル書で預言されていたことが起こった、と。
17節です。「神は言われる。終わりの時に、/わたしの霊をすべての人に注ぐ。すると、あなたたちの息子と娘は預言し、/若者は幻を見、老人は夢を見る。」
神さまの霊が与えられた人、聖霊に満たされた人は、新たな人生を歩み出すのです。罪にまみれた言葉を語っていた者が預言を、すなわち神さまの御言葉を語り、人を救う言葉を語り始めるのです。現実の中で失望していた若者が明るい将来のビジョンを語り始めるのです。また、空しい日々を送っていた老人が新たな夢を語り始めるのです。それが聖霊に満たされるということです。
この聖霊に満たされるという中で、教会が誕生しました。ある方が、この聖霊に満たされる、という時の「満たされる」という言葉は「支配される」という意味だと、おっしゃていました。つまり、聖霊に満たされるとは、聖霊に支配されるということです。
支配されるというと、あまり良いイメージを皆さんは持たれないかもしれません。支配などされず自由にのびのびとやりたいと思われると思います。
しかし、繰り返しますがバベルの塔の時代、人々が自由にのびのびと作ろうとしたものは天まで届く塔でした。「天まで届く塔のある町を建て、有名になろう」と人々は考えたのです。人々が住みやすい素晴らしい町を作ろうと言ったのではありません。有名になろうと言ったのです。それは自分の評価を求める行為でした。実際に自分や家族や街の人みんなが幸せになることではなく、人間の欲望を満たすことを大事にしたのです。それは自由なようであって、自分の欲望に支配された状態でした。聖霊降臨は、そのようなちっぽけな自分の欲望に支配された生き方から、聖霊に支配された生き方へと変わるための出来事であったのです。
聖霊は、自分の欲望に支配されていた私たちをまことに解放してくださる神さまです。自分の欲望に支配され罪の奴隷であった私たちが聖霊によって満たされる時、本当の意味で自由に生きていくことができるようになります。
聖霊はどんな時も人を活かすために働かれます。人を活かす言葉を私たちに語らせて下さるのです。
今、誰もが、SNS(ソーシャル・ネットワーキング・サービス)を使っています。今のコロナ禍の中で、人と人がつながるためには大事な手段となっています。でも、SNS上には、人を活かす言葉よりも、自分の欲求のはけ口として、人を批判する言葉で満ちております。それは悪霊に満ちた者が語る言葉です。
皆さん、教会に属する私たちは、聖霊に満たされた者なのです。聖霊によって語る者とされたはずなのです。でも、私たちが語る言葉は、やはり限界のある人間の言葉です。時には、人を知らない内に傷つけることもあるでしょう。それを十分にわきまえながら、神さまの御業を信じて、聖霊によって語る救いの言葉を人に語り続けたいと思います。
聖霊降臨は収穫祭として祝われたと先程言いましたが、神さまにとっての喜ばしい収穫は、何よりも、救われた私たち一人一人なのです。神さまはイエスさまを十字架につけてでも私たち一人一人を救いたかったのです。そして、救われた私たち一人一人に目を留め聖霊を与えて下さり、新しく生きる者として下さいます。私たちが神さまの救いを伝えていくならば、神さまはなお豊かな収穫を与えられます。私たちの人生においても豊かな実りを与えられ、広島教会にも与えられます。聖霊によって満たされたところに豊かな実りがあるのです。
[お祈りいたします]
私たちを愛し導かれる神さま。罪にまみれた言葉を話す私たちに聖霊を与えて下さり、神さまの御言葉を聞き、語り、伝える者に変えてくださることを覚え感謝します。
主よ、どうか、この教会、この場に、私たち一人一人に聖霊を満たしてください。豊かな実りを与え、神さまと共に豊かな収穫を喜ぶことが出来ますように。主イエス・キリストの御名によって祈ります。アーメン。
“성령이 가져다 주는 자유” (요약판) 사도행전 16장 16~40절
오늘의 성경 말씀에는 먼저 점을 치는 여종이 나옵니다. 여기서 “점치는 귀신 들린 여성”이 “노예”였다는 것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노예는 주인에게 지배되며 주인의 마음대로 쓰여지고 소용이 없어지면 버려집니다. 그녀의 주인들은 그녀에게 점을 치게 하고서 그것으로 많은 이익을 얻고 있었습니다. 그녀에게 들린 점치는 귀신은 그 주인들이 돈벌이를 하기에 용이한 계시나 탁선을 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점치는 귀신, 악령의 일입니다. 악령이라고 하면 인간에게 악한 것을 할거라는 생각은 하지만,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 점치는 귀신은 인간의 노예가 되어 섬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실은 사람들이 참 하나님을 따르는 게 하는게 아니라 자기가 주인, 지배자가 되어서 하나님마저도 노예로 삼는 죄로 끌어들여서 그것으로 사람을 죄의 노예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악령의 목적은 늘 거기에 있습니다. 그것을 인간에게 괴로움을 주는 방법으로 하던지, 또는 마치 인간에게 봉사는 것 처럼 보이는 방법으로 하는지의 차이입니다.
그런데, 이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이 바울 일행에게 착 달라붙어서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점치는 귀신이 그렇게 그녀에게 소리 지르게 했습니다. 틀림없이 그녀의 말은 옳은 것입니다. 그리고 고명한 점쟁이인 그녀가 그렇게 소리 지르는 것은 전도에는 좋은 선전이 되었지요. 그녀가 소리 지르는 것을 듣고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바울 일행의 주위에 모여 와서 그 이야기를 듣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녀에게서 그 점치는 귀신을 몰아내었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했을까요?
바울은 어떻게든 사람이 모이면 그것이 전도의 기회가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무엇으로 뭐 때문에 모이는지가 문제인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과 점의 세계와의 차이, 즉 성령의 일과 악령의 일의 구별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점쟁이의 말로 모이는 것은 만약 그 말이 형식적으로는 옳다고 해도 거기에 생기는 세계는 자기가 주인이 되어 하나님마저도 노예로 이용하려고 하는 세계입니다. 자기가 바꿔지는게 아니라 주위를 바꾸는 것으로 운명을 호전시키려고 하는 세계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라는 말에 속지 않고 악령의 일을 물리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여성에게서 점치는 귀신을 몰아냈다고 해서 투옥되어 버립니다. 관리들은 바울 일행을 제대로 취조하지도 않고 매로 치고 족쇄를 채워서 깊은 감옥에 가둔 것입니다.
바울 일행은 이렇게 부당한 괴로움을 받았는데 이 괴로움 속에서도 그들이 하고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찬송하고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른 것입니다. 찬양하면서 기도하는 그들의 모습에는 불가사의한 평안이 있습니다. 캄캄한 감옥 안 거기에서도 빛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평안과 빛은 그들 안에만 있었던 게 아니라 이 감옥에 붙잡혔던 모든 사람들에게도 전해져 갔습니다. 25절에 “죄수들이 듣더라” 라고 쓰여 있는 그대로입니다.
그랬더니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옥문들이 다 열리고 죄수들을 매었던 쇠사슬도 벗겨져 버리고 도망칠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죄수들은 누구 한 사람도 그곳에서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그곳에서 도망치는 것보다는 바울과 실라 곁에 그대로 남아 있고 싶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바울 일행의 찬송과 기도는 다른 죄수들의 마음을 그만큼 깊이 사로잡아 그들에게 평안과 빛을 가져다준 것입니다.
이 찬송과 기도, 거기에 있는 평안과 밝음, 그것을 가져다 준 것이야말로 성령입니다. 옥중이라는 괴로움 속에 있었지만 평안과 밝음을 주시는 성령의 역사와 은혜가 빌립보의 옥중 안에 흘러 넘쳤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한 사람과 그 가족 전원이 구원을 얻게되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사람이 바로 이 감옥의 간수입니다. 그는 큰 지진으로 옥문이 다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쳤을거라 생각했습니다. 죄수가 도망치면 모든 책임을 간수가 지고 벌을 받아야 합니다. 가족들까지도 그 죄를 짊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그는 절망에 빠져 자결하려고 했습니다.
그 때, 바울은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라고 크게 외쳤습니다. 바울 일행의 찬송과 기도가 가져다준 평안 가운데 죄수들은 단 한 사람도 도망치지 않고 그곳에 그대로 다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이제는 죽을 수 밖에 없다는 절망 가운데 있었던 간수에게는 바로 기적과도 같은 구원의 선언이었습니다.
그는 단순히 기적적인 구원을 체험했을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것으로 감옥 속에 있는 바울이나 실라야말로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또 반대로 옥 밖에서 그 망을 보고 있던 자기야말로 실은 자유롭지 못한 붙잡혀 있는 자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살아 계신 참 하나님의 지배를 바라보고 그것에 몸을 맡겨 사는 것이야말로 참된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그러한 참된 자유를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바울 일행의 참된 자유과 거기에 비해 오히려 자기의 붙잡혀 있는 자유롭지 못한 모습에 깜짝 놀란 이 간수는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려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해야만 구원을 받으리이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구원을 받아야 하는 자라고 깨닫고 구원을 간절히 바랐던 것입니다. 바울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기에 필요한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참 구세주이시며 참 하나님이심을 믿고 그 예수님께 자신의 인생을 맡기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괴로움이 없어지는 것도 목숨을 건지는 것도 아닙니다. 구원이란 참으로 몸을 바치며 맡길 만한 참 주인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이 분 밑에서는 괴로움 속에 있더라도 찬송하고 기도할 수 있다, 그러한 참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몸을 맡기는 것이야말로 구원인 것입니다.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이 구원은 믿는 우리들에게만 주어지는 게 아니라 우리 가족에도 이르게 됩니다. 그것은 한 사람이 믿으면 가족도 자동적으로 구원받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 몸을 맡긴다는 것은 자기가 가장 소중한 것을 맡긴다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가장 소중한 것, 거기에는 사랑하는 아내나 남편, 자식들, 가족이 당연히 포함됩니다. 가장 소중한 가족을 예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거기에 성령께서 일하시고 역사해 주실 것을 기도하여 구하는 것입니다.
이 간수가 한 것도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는 한밤중임에도 불구하고 바울 일행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가족들 모두가 바울이 말하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세례를 받아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성령의 역사, 은혜는 우리에게도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고 참된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물론 일상에서 여러 가지 제약을 받고 있습니다. 지금은 특히 코로나 상태 속에서 우리의 일상은 제약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가장 중요한 자유를 얻고 있는 것입니다. 그 자유 속에서 기뻐하면서 걸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디 하나님 앞에서 더 자유롭게 하나님의 자녀로서 걸어가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아멘.
〇讃 頌 讃頌歌 536(1, 4節)
〇献 金 ※ 毎週、各家庭で献金を献げ、教会で礼拝を守られるようになりましたなら、
まとめて献げてください。
〇報 告
①広島県に緊急事態宣言が出されましたので、解除される(予定では5月31日)まで教会を閉
鎖します。主日礼拝は継続しますが、非公開とさせて頂きます。主日礼拝の説教映像と礼拝
式順・説教を教会ホームページの「教会活動」に当日の午後1時頃に掲載いたしますので、
それを用いて、各家庭で礼拝をお守り下さい。
②聖書研究会は緊急事態宣言が解除されるまで、休会します。
③5月30日(主)の午後4時から、西部地方会第37回定期総会をオンラインにて開催いたしま
す。
〇感謝の祈り
主なる神さま。あなたの限りない恵みに感謝します。今ここに、それぞれが感謝と献身のしるしとして献金を献げました。、この献げ物を通して、あなたへの感謝と信頼を新たにすることができますように。そして、与えられた全てのものを通して、あなたの栄光をあらわすことが出来ますように、私たちをお導き下さい。今日よりの新たな一週間もあなたと共に歩ませてください。この困難な時期を耐える力を私たちにお与えください。また、あなたとのつながり、そしてあなたを信じる人々とのつながりがより深まりますように。
主イエス・キリストの御名によって祈ります。アーメン。
〇主祈祷 主の祈り
天にまします我らの父よ。
願わくは、御名をあがめさせたまえ。御国をきらたせたまえ。
みこころの天になるごとく、地にもなさせたまえ。
我らの日用の糧を、今日も与えたまえ。
我らに罪を犯す者を、我らが赦すごとく、我らの罪をも赦したまえ。
我らをこころみにあわせず、悪より救いだしたまえ。
国と力と栄えとは、限りなくなんじのものなればなり。
アーメ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