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함께 읽은 것 같이 바울 일행은 마게도냐 전도의 사명이 주어지자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지중해를 건너갔습니다. 그리고 마게도냐의 로마 식민지인 빌립보까지 왔습니다.
이 빌립보는 당시 로마 황제로부터 여러 가지 우대를 받은 특별한 곳이었고 특히 은퇴한 로마 군인들이 많이 사는 동네였다고 합니다. 즉 빌립보는 그리스에 있으면서도 로마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그래서 여기에는 유대인이 적고 유대의 회당도 없었습니다. 여느 때였더라면 회당에서 설교를 하고 그것을 발판으로 전도로 이어갑니다만, 빌립보에서는 그리 하지 못했습니다. 그 때문에 바울 일행은 안식일에 기도할 곳이 있을 법한 강가로 갔습니다. 회당이 없어도 혹시 유대의 신앙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기도하는 사람이 있을거라 여기고 간 것입니다. 그랬더니 거기에 몇명의 여성들이 모여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에 루디아라는 여성이 있었습니다.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 라고 쓰여 있으니 이 여성은 유대인이 아니라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당시 자색 옷감은 고급 옷감이었기에 그런 장사를 하는 루디아는 상당히 유복한 여성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루디아와의 만남은 바로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만남이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 때문에 루디아는 바울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었습니다. 그리고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더욱 바울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구원에 대해서 더 알고 싶다고 생각한 루디아는 자기 집으로 바울 일행을 반강제로 초대했습니다. 그 결과, 루디아는 가족들과 함께 세례를 받았습니다. 바로 하나님에 의해 인도받은 기적의 만남이 한 가족을 구원으로 인도했습니다.
사도행전이나 빌립보서를 읽으면 이 루디아의 집과 가족이 빌립보 교회의 모체가 되었다고 여겨집니다. 바울 일행이 만난 것은 한 사람의 여성이었지만, 그녀의 회심에 의해 그 이 후의 유럽 전도의 거점이 될 교회가 일어선 것입니다.
그런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라고 쓰여 있습니다만, 그녀는 원래 하나님에 관한 말씀은 평소부터 열심으로 듣고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안식일에 일부러 강가에 기도하러 나가는 여성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적으로 원래 열성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열성적이라고 다 참 신앙을 가질 수 있느냐 하면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왜냐하면, 유대교를 믿고 있었던 그녀로서는 그리스도께서 오셔야 할 메시아인 것, 그리고 십자가 후에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전의 바울이 그랬던 것 처럼 바울의 이야기는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다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열성적임이나 성실함만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마음을 열어 주실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사람 안에 울려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의 말씀이 바로 피와 살이 되고 그 사람 안에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지적 이해를 구하거나 공부와 같이 듣는 자세만으로 복음이 그 사람의 마음에 전해지지는 않습니다. 지식은 늘어가도 생명의 말씀으로 와 닿지는 않습니다. 또는 심정적인 공감이나 일시적인 평안을 구하여 듣는다면 거기에는 참 위로나 구원은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자기의 지식이나 열성을 포기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울려 옵니다. 요즘 노래방에서는 점수가 나옵니다. 음정이 정확한지 비브라토나 억양이나 여러 가지 가창테크닉까지 판정해서 점수가 나옵니다. 개중에는 100점을 내는 사람도 있는데, 그사람은 틀림없이 노래는 잘한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누구나 그 노래를 듣고 감동하느냐면 그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노래의 멜로디와 가사와 그 사람의 목소리가 어울려 그것이 마음에 와닿아 감동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음정이 잘 맞았다거나 가창력이 좋다거나 그런 것을 일일히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뭔지 모르지만 왠지 마음이 떨리고, 나중에 그 이유를 생각해 보면 노래를 잘했다거나 목소리가 좋다거나 가사가 좋다거나 여러 가지 이유를 들 수 있습니다만, 사람이 감동할 때에는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도 없을 겁니다. 그 노래에 그 음악에 압도되어 가슴이 떨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도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만을 순순히 듣는 것입니다. 거기에 신학적으로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따져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순순히 들으려고만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열어 주십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의 열성이나 성실함 따위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자기의 신앙이 방해가 될 때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제까지의 자기를 버려야 할정도로 하나님의 말씀이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다가올 때 지금까지의 자신의 방법과 생각과 지식이 날아가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꾸지 않을 수 없게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바꾸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따라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더욱더 하나님의 말씀이 다가오는 체험을 하시기 바랍니다. 자기의 하는 방법이나 자기의 생각이나 자기의 지식을 버려 내려 놓고 아이처럼 순순히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그 때에 지금까지 들어오지 않았던 복음이 생명의 말씀으로서 들려올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 올 것입니다. 부디 하나님의 말씀을 순순한 마음으로 계속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바울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감동한 루디아는 바울 일행을 자기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아까 루디아는 유복한 여성이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그녀는 큰 집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유대교로 개종한 여성이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생활 양식도 잘 알고 있었겠지요. 처음에 말씀드린 것 같이 이 후, 루디아의 집은 빌립보 전도의 거점이 되어갑니다. 문화적으로 유럽인도 유대인도 모이기 쉬운 환경을 그녀는 제공할 수 있는 여성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 자기의 사명이라고 루디아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깨달았던 것입니다.
복음을 듣고, 죄사함이 주어지고, 그리고 새 사명이 주어지고 루디아는 그것을 당장 실행한 것입니다. 옛날에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려 함이라” 라는 말씀을 듣고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른 것 같이, 또 세리장이었던 마태가 예수님께 불려 당장 세관에서 일어난 것 같이 루디아도 새 걸음을 향하여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자는 금욕적으로 지금까지의 생활을 버리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축복을 받은 자는 스스로 다른 사람에게 축복을 주는 자로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받은 것을 이웃에게 바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의무라거나 그렇게 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거나 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그냥 복음을 믿었을 때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순순히 복음을 듣고 그 기쁨 가운데 이웃을 초대하는 사람이 됩니다. 새 사명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코로나 사태 가운데 여러 가지 제약된 생활을 어쩔 수 없이 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는 시련을 받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각자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축복을 주십니다. 그리고 축복을 받은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이웃을 초대하는 자가 되게 하십니다.
병상에 누워 있는 사람, 고령자, 아주 무거운 짐을 진 사람, 각자 상황이 다릅니다. 그러나 각자의 상황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을 각자 다른 형태로, 사람을 초대하는 자로 해 주시는 것입니다. 축복의 근원으로 해 주십니다. 축복을 받은 자로서 우리는 새로운 한 걸음을 내딛어 가는 것입니다.
【 2021年 5月 9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
「主が心を開かれるならば」 使徒言行録 16章 11~15節
先週、御一緒に読みましたように、パウロたちはマケドニア伝道の使命が与えられ、トロアスから船に乗り、地中海を渡りました。そして、マケドニアのローマ植民地であるフィリピまでやって来ました。
このフィリピの町は当時、ローマの皇帝によって様々な優遇措置が執られていた特別な町で、特に引退したローマの軍人たちが多く住む町だったと言われています。つまりフィリピの町はギリシャにありながらローマの町そのものでありました。ですから、ここにはユダヤ人が少なく、ユダヤの会堂もありません。いつもだったら会堂で説教をし、そこから伝道の足掛かりを見つけておりましたが、フィリピではそれが出来ません。そのため、パウロたちは、安息日に祈りの場所があると思われる川岸に行きました。会堂がなくても、もし、ユダヤの信仰を持つ人がいたなら、きっと祈っている人がいると思って行ったのです。すると、そこに何人かの女性たちが集まっていたのです。そして、その中にリディアという女性がおりました。
「ティアティラ市出身の紫布を商う人で、神をあがめるリディア」と書かれていることから、この女性は、ユダヤ人ではなく、ユダヤ教に改宗した異邦人であったと思われます。そしてまた、紫布は高級な布ですから、それを商売していたわけですから、かなり裕福な女性であったと考えられます。
リディアとの出会いは、まさに神さまが備えられた出会いでした。そればかりではなく、神さまはリディアの心を開かれました。そのため、リディアはパウロの話を真剣に聞きました。そして、深い興味を持ったのです。もっとパウロの話を聞きたい、救いについて知りたいと思ったリディアは、自宅にパウロたちを半ば強引に招きました。その結果、リディアは家族共々、洗礼を受けるに至ったのです。まさに、神さまによって導かれた奇跡の出会いが、一つの家族を救いへと導きました。
今日の聖書箇所につづく後の部分やフィリピの信徒への手紙を読みますと、このリディアの家とこの家族がフィリピ教会の母体となったことが考えられます。パウロたちが出会ったのは一人の女性でしたが、彼女の回心によって、これからの後のヨーロッパ伝道の拠点となる教会が立ち上がったのです。
ところで、「主が彼女の心を開かれたので」とありましたが、彼女はもともと神さまについて語られる言葉は普段から熱心に聞いていたと思われます。安息日にわざわざ川岸にやって来る女性です。ですから、信仰的にもともと熱心であったわけですね。ただ、熱心であれば真の信仰を持つことが出来るかというとそうではありません。なぜなら、ユダヤ教を信じていた彼女にとって、キリストが来るべきメシアであること、そして十字架の後に復活したことを信じるということは、簡単なことではないのです。かつてのパウロがそうであったように、パウロの教えは神さまを冒涜しているようしか思えないのです。
ですから、人間の熱心さ真面目さによって神さまの真理が理解出来るわけではないのです。神さまがその人の心を開かれた時に、神さまの言葉が初めて神さまの言葉としてその人の内に響いてくるのです。神さまの愛と真理の御言葉が、まさに血肉となってその人の内側に命を与えるのです。知的理解を求めたり、お勉強のように聞く姿勢では、福音はその人の心には届きません。知識は増えても命の言葉とはなりません。あるいは心情的な共感やひとときの安らぎを求めて聞くとき、そこには真の慰めや救いはないのです。
そうではなく、自分の知識や熱心さを放棄した時、神さまの御言葉が神さまの御言葉として私たちに響いてきます。最近のカラオケでは点数が出るようになっていますが、音程は正確なのか、ビブラートとかこぶしとか、色々な歌唱テクニックも判定し点数が出ます。中には100点を出す人もいて、確かに歌は上手いのだと思います。でも、それを聞いて感動するかと言いますと、それは別問題です。歌のメロディーと歌詞とその人の声が相まって、それが心に届き、感動を覚える時があります。その時、音程が合っているとか、歌唱力があるとかは考えていないでしょう。何だか分からないけれども心が震えてしまう。後でその理由を考えたときに、歌がうまいからとか、声が好きだとか、歌詞が良いとか、色々な理由が挙げられるかと思いますが、でも本当に感動する時というのは、そんなことを考える余裕などないと思います。その歌に、音楽に圧倒されて心が震えてしまうのです。これと同じように、神さまの御言葉を聞くときに、神さまの御言葉として素直に聞くことです。そこに神学的な意味はどうかだとか、考える必要はありません。私たちが素直に聞こうとするならば、神さまが私たちの心を開いて下さいます。そうなったら、自分の熱心さや真面目さというのは関係がありません。むしろ自分の信仰が邪魔になることだってあります。なぜなら、それまでの自分を捨てなければならないほどに、神さまの御言葉が迫ってくるからです。神さまの御言葉に迫られた時、ちっぽけな自分のやり方や考えや知識など、吹き飛ばされてしまうのです。自分自身が神さまの御言葉によって変わらざるを得なくなるのです。変わらない人は、神さまの御言葉に迫られていないのです。
ですから、皆さん、もっともっと神さまの御言葉に迫られる体験をしていただきたいのです。自分のやり方自分の考え、自分の知識を手放し、子供のように素直に御言葉を聞いていただきたいのです。その時、今まで聞こえなかった福音が、命の言葉の響きが聞こえてきます。神さまの細い声が聞こえてくるのです。ぜひ、神さまの御言葉を素直な心で聞き続けていただきたいと願います。
さて、パウロの言葉を神さまの御言葉として聞き、感動したリディアは、パウロたちを自分の家に招きました。先ほどリディアは裕福な女性であったと考えられると言いましたが、彼女は大きな家も構えていたと考えられます。ユダヤ教に改宗していた女性でしたから、ユダヤ人の生活様式も良く知っていたでしょう。最初に言いましたように、この後、リディアの家はフィリピ伝道の拠点となっていくのです。文化的にヨーロッパ人もユダヤ人も集まりやすい環境を彼女は提供できる女性だったのです。そして、そのような環境を提供することが自分の使命だとリディアは神さまによって目覚めさせられたのです。
福音を聞いて、罪の救いを与えられ、そして新たな使命を彼女は与えられ、それをすぐさま実行したのです。かつてペトロがイエスさまに「人間を獲る漁師としよう」と言われ、すぐに舟を置いてイエスさまに従ったように、徴税人であったマタイが、イエスさまに召されて、すぐさま徴税所から立ち上がったように、リディアもまた新しい歩みに向けて立ち上がったのです。これは信仰者はただ禁欲的に自分のこれまでの生活を捨てなさいということではないのです。祝福を受けた者は、自ずと他者へ祝福を与える者とされるということです。自分が受けたことを隣人へ捧げるのです。それは義務であるとか、そうしたら天国に入れるということではないのです。私たちはただ福音を信じた時に、神の子とされています。心素直に福音を聞き、その喜びのうちに、隣人を招く人とされます。新しい使命に生きるのです。
私たちは今、コロナ禍の中、色々な制約の中で生活をしています。この中には、試練の中にある方々もおられるでしょう。しかしなお、それぞれの場で、神さまは必ず祝福を与えてくださいます。祝福を受けた私たちは、それぞれに隣人を招く人とされます。病の中にある方、ご高齢の方、たいへんな重荷を負っておられる方、それぞれの状況があると思います。しかしなお、それぞれの状況に応じて、神さまは一人一人を一人一人異なった形で、人を招く者としてくださいます。祝福の源としてくださいます。祝福を受けた者として私たちは新たに一歩を踏み出して行くのです。
【2021년 5월 9일 주일예배(요약판)】
“주께서 내 마음을 여시면” 사도행전 16장 11~15절
지난 주, 함께 읽은 것 같이 바울 일행은 마게도냐 전도의 사명이 주어지자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지중해를 건너갔습니다. 그리고 마게도냐의 로마 식민지인 빌립보까지 왔습니다.
이 빌립보는 당시 로마 황제로부터 여러 가지 우대를 받은 특별한 곳이었고 특히 은퇴한 로마 군인들이 많이 사는 동네였다고 합니다. 즉 빌립보는 그리스에 있으면서도 로마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그래서 여기에는 유대인이 적고 유대의 회당도 없었습니다. 여느 때였더라면 회당에서 설교를 하고 그것을 발판으로 전도로 이어갑니다만, 빌립보에서는 그리 하지 못했습니다. 그 때문에 바울 일행은 안식일에 기도할 곳이 있을 법한 강가로 갔습니다. 회당이 없어도 혹시 유대의 신앙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기도하는 사람이 있을거라 여기고 간 것입니다. 그랬더니 거기에 몇명의 여성들이 모여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에 루디아라는 여성이 있었습니다.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 라고 쓰여 있으니 이 여성은 유대인이 아니라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당시 자색 옷감은 고급 옷감이었기에 그런 장사를 하는 루디아는 상당히 유복한 여성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루디아와의 만남은 바로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만남이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 때문에 루디아는 바울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었습니다. 그리고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더욱 바울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구원에 대해서 더 알고 싶다고 생각한 루디아는 자기 집으로 바울 일행을 반강제로 초대했습니다. 그 결과, 루디아는 가족들과 함께 세례를 받았습니다. 바로 하나님에 의해 인도받은 기적의 만남이 한 가족을 구원으로 인도했습니다.
사도행전이나 빌립보서를 읽으면 이 루디아의 집과 가족이 빌립보 교회의 모체가 되었다고 여겨집니다. 바울 일행이 만난 것은 한 사람의 여성이었지만, 그녀의 회심에 의해 그 이 후의 유럽 전도의 거점이 될 교회가 일어선 것입니다.
그런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라고 쓰여 있습니다만, 그녀는 원래 하나님에 관한 말씀은 평소부터 열심으로 듣고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안식일에 일부러 강가에 기도하러 나가는 여성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적으로 원래 열성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열성적이라고 다 참 신앙을 가질 수 있느냐 하면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왜냐하면, 유대교를 믿고 있었던 그녀로서는 그리스도께서 오셔야 할 메시아인 것, 그리고 십자가 후에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전의 바울이 그랬던 것 처럼 바울의 이야기는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다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열성적임이나 성실함만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마음을 열어 주실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사람 안에 울려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의 말씀이 바로 피와 살이 되고 그 사람 안에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지적 이해를 구하거나 공부와 같이 듣는 자세만으로 복음이 그 사람의 마음에 전해지지는 않습니다. 지식은 늘어가도 생명의 말씀으로 와 닿지는 않습니다. 또는 심정적인 공감이나 일시적인 평안을 구하여 듣는다면 거기에는 참 위로나 구원은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자기의 지식이나 열성을 포기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울려 옵니다. 요즘 노래방에서는 점수가 나옵니다. 음정이 정확한지 비브라토나 억양이나 여러 가지 가창테크닉까지 판정해서 점수가 나옵니다. 개중에는 100점을 내는 사람도 있는데, 그사람은 틀림없이 노래는 잘한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누구나 그 노래를 듣고 감동하느냐면 그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노래의 멜로디와 가사와 그 사람의 목소리가 어울려 그것이 마음에 와닿아 감동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음정이 잘 맞았다거나 가창력이 좋다거나 그런 것을 일일히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뭔지 모르지만 왠지 마음이 떨리고, 나중에 그 이유를 생각해 보면 노래를 잘했다거나 목소리가 좋다거나 가사가 좋다거나 여러 가지 이유를 들 수 있습니다만, 사람이 감동할 때에는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도 없을 겁니다. 그 노래에 그 음악에 압도되어 가슴이 떨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도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만을 순순히 듣는 것입니다. 거기에 신학적으로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따져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순순히 들으려고만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열어 주십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의 열성이나 성실함 따위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자기의 신앙이 방해가 될 때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제까지의 자기를 버려야 할정도로 하나님의 말씀이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다가올 때 지금까지의 자신의 방법과 생각과 지식이 날아가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꾸지 않을 수 없게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바꾸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따라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더욱더 하나님의 말씀이 다가오는 체험을 하시기 바랍니다. 자기의 하는 방법이나 자기의 생각이나 자기의 지식을 버려 내려 놓고 아이처럼 순순히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그 때에 지금까지 들어오지 않았던 복음이 생명의 말씀으로서 들려올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 올 것입니다. 부디 하나님의 말씀을 순순한 마음으로 계속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바울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감동한 루디아는 바울 일행을 자기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아까 루디아는 유복한 여성이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그녀는 큰 집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유대교로 개종한 여성이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생활 양식도 잘 알고 있었겠지요. 처음에 말씀드린 것 같이 이 후, 루디아의 집은 빌립보 전도의 거점이 되어갑니다. 문화적으로 유럽인도 유대인도 모이기 쉬운 환경을 그녀는 제공할 수 있는 여성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 자기의 사명이라고 루디아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깨달았던 것입니다.
복음을 듣고, 죄사함이 주어지고, 그리고 새 사명이 주어지고 루디아는 그것을 당장 실행한 것입니다. 옛날에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려 함이라” 라는 말씀을 듣고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른 것 같이, 또 세리장이었던 마태가 예수님께 불려 당장 세관에서 일어난 것 같이 루디아도 새 걸음을 향하여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자는 금욕적으로 지금까지의 생활을 버리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축복을 받은 자는 스스로 다른 사람에게 축복을 주는 자로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받은 것을 이웃에게 바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의무라거나 그렇게 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거나 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그냥 복음을 믿었을 때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순순히 복음을 듣고 그 기쁨 가운데 이웃을 초대하는 사람이 됩니다. 새 사명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코로나 사태 가운데 여러 가지 제약된 생활을 어쩔 수 없이 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는 시련을 받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각자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축복을 주십니다. 그리고 축복을 받은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이웃을 초대하는 자가 되게 하십니다.
병상에 누워 있는 사람, 고령자, 아주 무거운 짐을 진 사람, 각자 상황이 다릅니다. 그러나 각자의 상황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을 각자 다른 형태로, 사람을 초대하는 자로 해 주시는 것입니다. 축복의 근원으로 해 주십니다. 축복을 받은 자로서 우리는 새로운 한 걸음을 내딛어 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