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은 지난 주 말씀드린 것 처럼 바나바와는 다툼으로 인해 헤어지는 최악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래도 디모데와의 만남으로 인하여 힘을 얻은 바울은 소망을 가지고 전도여행을 계속해서 해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6절에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라고 쓰여 있습니다. 바울들은 아시아의 중심지인 에베소로 향하여 서쪽으로 가려고 한 모양입니다. 그것이 성령으로 금지되자 서쪽을 향해 가는 것은 단념하고 북쪽으로 향하여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7절에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라고 쓰여 있듯이 흑해 연안까지 가려고 했는데 예수님의 영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성령이나 예수님의 영이 금한다,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구체적으로 무엇이 있었는지 사도행전에는 쓰여져 있지 않으므로 잘 모르겠지만 바울이 쓴 편지에서 조금은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갈라디아서 4장 13~14절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내가 처음에 육체의 역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바울은 무슨 병에 걸렸던 모양입니다. “업신여기지도” “버리지도” 라고 쓰여 있는걸 보면 아마도 간질 같은 병이라고 생각됩니다. 갑자기 쓰러지고 경련하는 그 증상은 마치 귀신 들린 것처럼 보이니까 전도자로서는 사람을 실족하게 하는 증상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계기로 바울 일행들이 머무른 곳(아마도 그곳은 누군가의 집이었을지도 모르지만)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고 나중에 그곳에 교회가 생겼던 것 같습니다. 그들 교회를 향해 쓴 바울의 편지가 바로 갈라디아서입니다.
이렇게 바울은 어떤 병에 걸려서 계획을 변경해야만 했습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여러번 그랬기에 그 때마다 계획을 변경해서 마지막으로 도달한 곳이 드로아였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나중에 생각해 보니 성령님께서 금하신게 아니었나 하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여기에 쓰여 있는 바울의 발자취는 요컨데 인간의 계획이나 생각이 그대로는 되지 않는다, 여러 사정으로 인해 바뀌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 사정이 아까 추측한 것 같이 바울의 병이었다면 그것은 그에게는 아주 큰 괴로움이며 좌절이었겠지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사명을 받고 파견되어 지금 바로 그 전도여행의 중도에 있는 자신에게 어찌하여 이런 병에 걸리게 하시는지, 하나님께서는 일부러 전도의 사명을 주셨으면서 어찌하여 그 일을 방해라도 하는 것처럼 시련을 주시는지, 그렇게 그는 한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 7절 이하에서 바울은 내 육체에 가시가 주어졌다고 하고 그것을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세 번 주께 간구하였다”라고 합니다. 그 “가시”란 이 병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것을 자기에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세 번 간구했다는 것은 그가 깊은 괴로움 가운데 참으로 진지하게 고침을 구하며 기도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도 인생의 여정에 있어서 자신의 생각이나 계획이 그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을 체험합니다. 여러 가지 뜻밖의 일이 생겨서 모처럼 이렇게 하려고 한 것을 변경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게다가 결코 제멋대로인 자기를 위한 계획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사람들을 섬기는 의미 있는 좋을 일을 계획하고 행하려고 하는데 그것이 방해 받아 하지 못하게 되어 버릴 때도 있습니다. 그런때에 우리는 큰 괴로움과 좌절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어째서 이런 일을 하시느냐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싶게 될 때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괴로움과 좌절 가운데서 겨우 당도한 데가 드로아라 하는 아시아 최서단의 동네였습니다. 자기가 오고 싶어서 온 게 아닙니다. 계획한 것을 모두 다 이루지 못하고 바울은 잇달아 서쪽으로 몰리게 되는 것처럼 해서 거기까지 간 것입니다. 그곳은 이제 더 이상 서쪽의 육로로는 갈 수 없는 막다른 골목의 동네였습니다.
바울은 드로아에 도착한 밤에 환상을 보았습니다. 한 사람의 마게도냐 사람이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 주세요” 라고 원했던 것입니다. 마게도냐는 드로아에서 에게해를 건넌 그리스입니다. 바울은 이번 전도 여행에서 유럽까지 가리라고는 전혀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10절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그 때야 비로소 바울은 이제까지의 여정중에 자기의 생각대로 계획한 것이 잘 되지 않고 왜 숱한 변경을 해야만 했는지 그 의미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생각이나 계획과는 다른 일을 시키려 하셨고, 그곳으로 인도하기 위해 자신의 걸음을 방해하는 일을 하셨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그는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은 것을 성령이 금지한 것이다, 예수님의 영이 허락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즉 이는 그 당시에는 몰랐던 하나님의 마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모처럼의 계획이 뜻밖의 방해를 받게 되어 버리는 괴로움과 좌절을 우리도 겪을때가 있지만 그럴 때에 자포자기에 빠지거나 절망하는 게 아니라 자기 본의와는 다르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구하면서 계속 걸어 갈 때에 하나님의 뜻밖의 마음을 깨닫게 됨을 우리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COVID-19에 의한 판데믹 상황 때문에 온 세계가 어디로 가는지 몰라 방황하고 있는 것 처럼 보입니다. 백신이 개발도 되고 감염 확대의 종식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만 백신 공급양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변종 바이러스도 나타나고 있으니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어디로 향해 나아가면 좋을지 솔직히 모르는 상태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오늘의 성경말씀을 빌리자면 어디가 드로아인지 전혀 모르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가리켜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령 지금 생각대로 되지 않는 나날일지라도 안심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실제로 오늘의 성경말씀에는 쓰여 있지 않습니다만, 드로아까지의 여행 중에도 아까 말씀드린 것 처럼 갈라디아 등 몇 개의 교회가 개척되었던 것 같습니다. 생각대로 되지 않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우리는 이것으로부터 앞이 없다는 서쪽 끝인 드로아까지 왔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방향이 결정되어 인간 자신 속의 불필요한 것을 벗겨 내고 겸손한 자가 되어야할 때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드로아에서 새롭게 출발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드로아가 서쪽 끝의 막다른 골목의 동네라고 생각되었습니다만, 그곳은 유럽 선교에 있어서는 동쪽에 위치하는 출발의 동네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막다른 골목이라고 생각했던 끝에 새로운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새로운 커다란 세계의 입구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은 장대한 스케일로 자신의 계획을 추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계획 가운데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세심한 배려를 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도 담대하게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 2021年 5月 2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
「行き止まりの末に」 使徒言行録 16章 6~10節
パウロの第二回伝道旅行は、先週、お話ししたようにバルナバと喧嘩別れになってしまうという最悪の始まりでした。それでもテモテとの出会いによって、パウロは力づけられ、希望をもって伝道旅行を続けて行くことになりました。
ところが、6節に「アジア州で御言葉を語ることを聖霊から禁じられたので、フリギア・ガラテヤ地方を通って行った」とあります。パウロたちはアジア州の中心地であるエフェソに向かって西へ行こうとしていたようです。それが聖霊から禁じられて、西に向かって行くことを断念し、北に向かって進み始めました。
すると、今度は、7節に「ミシア地方の近くまで行き、ビティニア州に入ろうとしたが、イエスの霊がそれを許さなかった」とありますように、黒海沿岸まで行こうとしたら、イエスの霊がそれを許さなかったというのです。
聖霊やイエスさまの霊が禁じる、許さないとはどういうことなのでしょうか? 具体的に何があったのかは、使徒言行録には記されておりませんので、よく分からないのですが、パウロが書いた手紙から少しだけ推測することは出来ます。
それは、ガラテヤの信徒への手紙なのですが、4章13~14節にこうあります。「知ってのとおり、この前わたしは、体が弱くなったことがきっかけで、あなたがたに福音を告げ知らせました。そして、わたしの身には、あなたがたにとって試練ともなるようなことがあったのに、さげすんだり、忌み嫌ったりせず、かえって、わたしを神の使いであるかのように、また、キリスト・イエスででもあるかのように、受け入れてくれました。」
パウロは何らかの病気になったようです。「さげすんだり、忌み嫌ったり」とありますから、恐らく、てんかんのような病気だと考えられます。突然、倒れ、痙攣する、その症状は、まるで悪霊に取り憑かれたように見えますから、伝道者としては人を躓かせるような病状であるわけですね。しかし、そのことがきっかけでパウロたちが留まった所で、それは誰かの家だったのかもしれませんが、そこにも福音の種が蒔かれ、後に教会が出来たようです。それらの教会に向けて、パウロが手紙を記したのが、ガラテヤの信徒への手紙です。
このように、パウロは何かの病気になり、計画を変更せざるを得なかったようです。それも一度ではなく何度もあって、その度に計画を変更して、そしてたどり着いたのが、トロアスであったということです。それを後で考えたときに、聖霊に禁じられたとようだったと考えたのでしょう。
ここに描かれているパウロの歩みは、要するに、人間の計画や思いがその通りにいかない、いろいろな事情によって変えられてしまう、ということです。その事情が先程の推測のようにパウロの病気だったとするならば、それは彼にとって大きな苦しみであり、挫折だったでしょう。主イエス・キリストの福音を宣べ伝えるために召され、派遣されて、今まさに伝道旅行の途上にある自分が、何故このような病気になってしまうのか、神さまはせっかく私に伝道の使命を与えて下さったのにどうしてそれを妨げるようなことをなさるのか、そのように彼は嘆かずにはおれなかったでしょう。
コリントの信徒への手紙二の12章7節以下で、パウロは、自分の身に一つのとげが与えられたと言っており、それを取り去って下さるように、「三度主に願った」と言っています。その「とげ」とはこの病気のことを言っているのだと思われます。それを取り除いて下さるように三度主に祈ったというのは、彼が深い苦しみの中で、本当に真剣に、いやしを求めて祈ったことを意味しているのです。
私たちも、人生の歩みにおいて、自分の思いや計画がその通りに行かないことを体験します。いろいろな思いがけないことが起ってきて、せっかくこうしようと思っていたことを変更せざるを得ないことがあります。しかも決して自分勝手な、自分のための計画ではなくて、神さまの栄光を表し、人々に仕えるための、意味のある、良いことを計画し行なおうとしているのに、それが妨げられ、できなくなってしまう、ということがあるのです。そういうことによって私たちは大きな苦しみ、挫折を経験します。そして、神さまは何故このようなことをなさるのだろうか、と神さまを恨みたくなることがあるのです。
パウロは苦しみと挫折の中で、ようやくたどり着いたのがトロアスというアジア州最西端の町でした。自分で来たくて来たのではありません。計画したことがすべて上手く行かず、パウロはどんどん西へと追いやられるようにしてここまで来ました。もうこれ以上、西へ陸路では行きようのない行き止まりの町でした。
パウロはトロアスに着いた夜、幻を見ました。一人のマケドニア人が、「マケドニア州に渡って来て、わたしたちを助けてください」と願ったのです。マケドニアは、トロアスからエーゲ海を渡ったギリシャになります。パウロは今回の伝道旅行でヨーロッパに行くなんて考えもしておりません。それが10節にはこうあります。「パウロがこの幻を見たとき、わたしたちはすぐにマケドニアへ向けて出発することにした。マケドニア人に福音を告げ知らせるために、神がわたしたちを召されているのだと、確信するに至ったからである。」
この時初めてパウロは、これまでの歩みにおいて、自分が思い計画したことがうまくいかず、変更に変更を重ね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ことの意味を悟ったのです。神さまが、自分の思いや計画とは別のことをさせようとしておられ、そこへと導くために、自分の歩みを妨げるようなことをなさったのだ、そのことを知った時に彼は、自分の思い通りにならなかったことは、聖霊が禁じておられたのだ、イエスさまの霊が許さなかったのだ、ということが分かったのです。つまりこれらのことは、その時には分からなかった神さまの御心が、後になって分かってきた、ということです。せっかくの計画が思いがけないことによって妨げられてしまうという苦しみ、挫折を私たちも味わいますが、そのような中で、やけを起したり絶望するのではなく、自分としては不本意な道を、しかし御心を求めながら歩み続ける時に、神さまの思いがけない御心に気づかされる、ということを私たちは体験するのです。
皆さん、昨年からの新型コロナウイルスによるパンデミックのために世界中がどのように向かえば良いのか分からず、さまよっていたように思います。ワクチンの開発もなされ、感染拡大の終息も見え始めておりますが、ワクチンの供給量が絶対的に不足しており、変異種のウイルスも現れておりますので、どうなるか分かりません。どこに向かって進めば良いのか、正直分からない状態が続いております。今日の御言葉で言うなら、どこがトロアスなのかまだまったく分からない状態です。
しかし、神さまは必ず御心を示してくださいます。ですから、私たちは仮に今、思うようにはならない日々であったとしても、安心して、生きていきます。実際、今日の聖書箇所には記されていませんが、トロアスまでの旅の中でも、先ほど言いましたようにガラテアなど、いくつかの教会が開拓されたようです。思うようにはならない中でも神さまの恵みは与えられるのです。そしてまた、私たちはもうこれから先はない、という西の果てのトロアスまで来た時に、はじめて御心を知る者でもあります。
今は、神さまによって、方向が決められ、人間自身の中の余計なものを削ぎ落とされ、人間は謙遜な者とされる時なのかもそれません。そして、トロアスから新しく出発する、船出する者とされるのです。
パウロにとって、トロアスは西の果て、行き止まりの町と思われましたが、しかし、ヨーロッパ宣教における東に位置する出発の町であったのです。神さまによって旅立たせていただくとき、気がつくと、行き止まりと思っていた先の道が拓けているのです。もうこれでおしまいとばかり思っていた場所が、もっと大きな世界への入り口であったことに気がつくのです。
私たちは、今、新しい大きな世界の入口に立っています。神さまは壮大なスケールでご自身のご計画を進めらておられます。神さまはその御計画の中で、私たち一人一人に細心の配慮をなさって下さいます。ですから、皆さん、私たちも大胆に歩めるのです。
【2021년 5월 2일 주일예배(요약판)】
“막다른 골목 끝에” 사도행전 16장 6~10절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은 지난 주 말씀드린 것 처럼 바나바와는 다툼으로 인해 헤어지는 최악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래도 디모데와의 만남으로 인하여 힘을 얻은 바울은 소망을 가지고 전도여행을 계속해서 해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6절에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라고 쓰여 있습니다. 바울들은 아시아의 중심지인 에베소로 향하여 서쪽으로 가려고 한 모양입니다. 그것이 성령으로 금지되자 서쪽을 향해 가는 것은 단념하고 북쪽으로 향하여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7절에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라고 쓰여 있듯이 흑해 연안까지 가려고 했는데 예수님의 영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성령이나 예수님의 영이 금한다,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구체적으로 무엇이 있었는지 사도행전에는 쓰여져 있지 않으므로 잘 모르겠지만 바울이 쓴 편지에서 조금은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갈라디아서 4장 13~14절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내가 처음에 육체의 역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바울은 무슨 병에 걸렸던 모양입니다. “업신여기지도” “버리지도” 라고 쓰여 있는걸 보면 아마도 간질 같은 병이라고 생각됩니다. 갑자기 쓰러지고 경련하는 그 증상은 마치 귀신 들린 것처럼 보이니까 전도자로서는 사람을 실족하게 하는 증상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계기로 바울 일행들이 머무른 곳(아마도 그곳은 누군가의 집이었을지도 모르지만)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고 나중에 그곳에 교회가 생겼던 것 같습니다. 그들 교회를 향해 쓴 바울의 편지가 바로 갈라디아서입니다.
이렇게 바울은 어떤 병에 걸려서 계획을 변경해야만 했습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여러번 그랬기에 그 때마다 계획을 변경해서 마지막으로 도달한 곳이 드로아였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나중에 생각해 보니 성령님께서 금하신게 아니었나 하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여기에 쓰여 있는 바울의 발자취는 요컨데 인간의 계획이나 생각이 그대로는 되지 않는다, 여러 사정으로 인해 바뀌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 사정이 아까 추측한 것 같이 바울의 병이었다면 그것은 그에게는 아주 큰 괴로움이며 좌절이었겠지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사명을 받고 파견되어 지금 바로 그 전도여행의 중도에 있는 자신에게 어찌하여 이런 병에 걸리게 하시는지, 하나님께서는 일부러 전도의 사명을 주셨으면서 어찌하여 그 일을 방해라도 하는 것처럼 시련을 주시는지, 그렇게 그는 한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 7절 이하에서 바울은 내 육체에 가시가 주어졌다고 하고 그것을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세 번 주께 간구하였다”라고 합니다. 그 “가시”란 이 병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것을 자기에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세 번 간구했다는 것은 그가 깊은 괴로움 가운데 참으로 진지하게 고침을 구하며 기도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도 인생의 여정에 있어서 자신의 생각이나 계획이 그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을 체험합니다. 여러 가지 뜻밖의 일이 생겨서 모처럼 이렇게 하려고 한 것을 변경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게다가 결코 제멋대로인 자기를 위한 계획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사람들을 섬기는 의미 있는 좋을 일을 계획하고 행하려고 하는데 그것이 방해 받아 하지 못하게 되어 버릴 때도 있습니다. 그런때에 우리는 큰 괴로움과 좌절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어째서 이런 일을 하시느냐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싶게 될 때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괴로움과 좌절 가운데서 겨우 당도한 데가 드로아라 하는 아시아 최서단의 동네였습니다. 자기가 오고 싶어서 온 게 아닙니다. 계획한 것을 모두 다 이루지 못하고 바울은 잇달아 서쪽으로 몰리게 되는 것처럼 해서 거기까지 간 것입니다. 그곳은 이제 더 이상 서쪽의 육로로는 갈 수 없는 막다른 골목의 동네였습니다.
바울은 드로아에 도착한 밤에 환상을 보았습니다. 한 사람의 마게도냐 사람이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 주세요” 라고 원했던 것입니다. 마게도냐는 드로아에서 에게해를 건넌 그리스입니다. 바울은 이번 전도 여행에서 유럽까지 가리라고는 전혀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10절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그 때야 비로소 바울은 이제까지의 여정중에 자기의 생각대로 계획한 것이 잘 되지 않고 왜 숱한 변경을 해야만 했는지 그 의미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생각이나 계획과는 다른 일을 시키려 하셨고, 그곳으로 인도하기 위해 자신의 걸음을 방해하는 일을 하셨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그는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은 것을 성령이 금지한 것이다, 예수님의 영이 허락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즉 이는 그 당시에는 몰랐던 하나님의 마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모처럼의 계획이 뜻밖의 방해를 받게 되어 버리는 괴로움과 좌절을 우리도 겪을때가 있지만 그럴 때에 자포자기에 빠지거나 절망하는 게 아니라 자기 본의와는 다르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구하면서 계속 걸어 갈 때에 하나님의 뜻밖의 마음을 깨닫게 됨을 우리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COVID-19에 의한 판데믹 상황 때문에 온 세계가 어디로 가는지 몰라 방황하고 있는 것 처럼 보입니다. 백신이 개발도 되고 감염 확대의 종식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만 백신 공급양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변종 바이러스도 나타나고 있으니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어디로 향해 나아가면 좋을지 솔직히 모르는 상태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오늘의 성경말씀을 빌리자면 어디가 드로아인지 전혀 모르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가리켜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령 지금 생각대로 되지 않는 나날일지라도 안심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실제로 오늘의 성경말씀에는 쓰여 있지 않습니다만, 드로아까지의 여행 중에도 아까 말씀드린 것 처럼 갈라디아 등 몇 개의 교회가 개척되었던 것 같습니다. 생각대로 되지 않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우리는 이것으로부터 앞이 없다는 서쪽 끝인 드로아까지 왔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방향이 결정되어 인간 자신 속의 불필요한 것을 벗겨 내고 겸손한 자가 되어야할 때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드로아에서 새롭게 출발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드로아가 서쪽 끝의 막다른 골목의 동네라고 생각되었습니다만, 그곳은 유럽 선교에 있어서는 동쪽에 위치하는 출발의 동네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막다른 골목이라고 생각했던 끝에 새로운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새로운 커다란 세계의 입구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은 장대한 스케일로 자신의 계획을 추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계획 가운데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세심한 배려를 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도 담대하게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