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15:36)
바울은 바나바에게 제2차 전도 여행을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마가를 동행시켜야 할지 말아야 할지로 격렬히 대립해 버린 것입니다. 마가는 제1차 전도여행에도 동행한 인물이지만, 구브로에서 밤빌리아 버가에 왔을 때 갑자기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바울은 자기 임무를 중도에 그만둬 버리는 그런 사람은 데려갈 수 없다고 생각했겠지요. 한편, 바나바는 지난번에는 도중에 좌절해 버린 마가였지만 그래도 다시 한번 전도자로 키워보고자 동행시키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결국 두 사람은 대립한 채 따로 전도 여행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 두 사람의 대립은 신앙의 차이가 아니라 각자의 관심사의 차이로 무엇을 더 중요시하고 있는지의 차이였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받고 있는 달란트의 차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각각 교회에 있어서는 중요한 것이었습니다만, 때로는 그 때문에 대립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거기에는 뭔가 신앙과는 거리가 먼 세속적인 느낌마저 듭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그 이상은 쓰여 있지 않았기에 이 대립에 관하여 바울이 너무 엄격하다고도 또 바나바의 판단이 안이하다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애당초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활약이나 사람들의 모습을 담고 있지는 않습니다. 사도행전은 이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성령언행록인 것입니다. 이 대립과 헤어짐 위에도 하나님께서 풍요롭게 일 하신 것을 사도행전은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찍이 마음을 하나로 했던 사람들이 대립하게 되어 헤어져 버린다거나 함께 동행하며 나아가지 못한다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어리석음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어리석음을 넘어서 하나님께서는 행하십니다. 인간의 어리석음도 하나님께서는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이 두 사람이 따로 선교 활동을 하는 것으로 더 광범위한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울이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제2차 전도 여행이 바울 자신도 예상치 못했던 유럽으로 첫발을 내딛는 역사적인 여행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것은 인간의 자그마한 생각을 훨씬 넘어선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 깨진 것 같이 보이는 인간 관계도 이윽고 회복되는 것입니다. 마가는 박해가 심한 대륙 지역이 아니라 바나바의 고향이며 전의 전도 여행에서 총독이 그리스도인이 되고 비교적으로 평온한 구브로에서의 활동을 통해서 성장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11절에는 바울의 말로서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것으로 알 수 있는 것은 때가 지나서 바울과 바나바는 화해하고, 마가는 바울에게 있어서 자신을 지지해주는 조력자이자 소중한 동역자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바나바와 헤어지고 혼자 전도 여행을 하기에는 불안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협력자를 찾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거기에 수리아라는 인물을 마련해 주셨던 것입니다. 이 수리아는 예루살렘 교회가 공회의의 결정 사항을 편지에 써서 그 편지를 안디옥 교회에 가져온 두 사람 특사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수리아만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지 않고 안디옥에 남았던 것 같습니다. 이 수리아는 유대인이면서도 바울과 같이 로마 시민권을 갖고 있었습니다. 즉 로마 제국의 지배 지역에서 자유롭게 활동하기에는 아주 적절한 조건을 갖고 있었던 인물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 더해 전도지의 루스드라에서는 젊은 디모데라는 협력자가 주어졌습니다. 디모데는 그리스인의 아버지와 유대인의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혼혈아였습니다만, 제1차 전도여행의 루스드라 전도에 있어서 이 디모데의 할머니와 어머니가 신앙을 가진 것이 디모데후서 1장 5절에 쓰여 있습니다. 다시 루스드라를 방문했더니 그녀들의 손자이며 아들인 디모데가 훌륭한 믿는 자로 성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나바나 마가와 대립해서 상심하던 바울에게 큰 기쁨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쁨과 위로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십니다. 우리의 인생, 하루하루 살아가다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대립한 것 처럼 잘 되지 않는 어려운 일들이 많이 생깁니다. 그 때마다 모든 것을 떠맡아 스스로 어떻게든 하려고 하면 너무 힘듭니다. 살아가는 것조차 괴로운 일이 됩니다. 그러지말고 순순히 자기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맡겨서 다음 단계로 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도망침도 아니고 참을성이 부족함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좌절 가운데 바울에게 수리아와 디모데를 주신 것 같이 우리에게도 새 만남과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16장 3절에는 이 디모데에게 바울이 할례를 행한 것이 쓰여 있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이방인에게 할례까지는 필요없다고 주장하여 예루살렘 공회의의 결말이 났는데 여기서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모순되는 것 같이 보이지만 이 할례는 당연히 구원의 조건으로서 할례가 필요하다는 의미로 행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디모데의 개인적인 사정이 배경에 있었습니다. 신앙적으로는 어머니에게서 유대의 신앙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의 징표인 할례는 아버지가 그리스인이라서 받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디모데는 유대인입장에서 보면 이방인으로 간주됩니다. 전도의 실마리가 되는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이방인쪽에서는 유대인이라고 간주되기 때문에 앞으로의 전도 활동을 생각하면 그부분이 큰 장애가 됩니다.
디모데 자신도 유대인도 이방인도 아니라는 복잡한 배경을 갖고 자기의 태생을 꺼림칙하게 느끼고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한 태생이나 과거의 일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고 가르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괴로움 속에 살아온 디모데야말로 이 후의 이방인 전도에 있어서 바울의 좋은 동역자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주위로부터 이해받지 못해서 상쳐입은 바울과 그 태생때문에 멸시당했던 디모데, 그러나 그 바울에게도 디모데에게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위로가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실로 불가사의한 방법으로 위로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의 성경 말씀 마지막에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가니라”(16:5) 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 제2차 전도여행의 시작은 결코 좋은 시작이 아니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대립하여 따로 행동을 취한다는 최악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갔다는 것은 모든 조건이 구비되어 호조건 가운데 교회가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불완전한 인간이 각자의 연약함을 가진채로 모여서 때로는 여러 가지 대립이 생길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사람들을 쓰셔서 교회를 성장하게 해 주셨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교회 일치를 위하여 각자의 연약함을 서로 채우고 서로 사랑해 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고 그 때문에 우리가 전도하기에 호조건을 채우지 못할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대로 써 주시고 교회를 성장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지금의 코로나화에서는 자유롭게 예배를 드리고 찬미를 하거나 교제마저도 제대로 나누지 못하는 상황이기에 전도의 차원에서 보자면 너무나도 악조건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그것이 어찌할 수도 없는 악조건일지라도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것마저도 사용하셔서,자신의 교회를 지켜주시고 인도해 주신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하며, 그런 하나님을 더욱 더 믿고 나아가기를 소망합니다.
【 2021年 4月 25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
「再出発 ~人間の愚かさを越えて~」 使徒言行録 15章36節~16章5節
「さあ、前に主の言葉を宣べ伝えたすべての町へもう一度行って兄弟たちを訪問し、どのようにしているかを見て来ようではないか」(15:36)
パウロはバルナバに第二回伝道旅行を提案しました。しかし、二人はマルコを同行させるのかどうなのかで、激しく対立してしまったのです。マルコは第一回伝道旅行にも同行した人物ですが、キプロス島からパンフィリア州のベルゲに来た時に、突然、エルサレムに帰ってしまいました。パウロは途中で自分の任務を投げ出してしまうような人間は連れてはいけないと思ったのでしょう。一方、バルナバは前回は途中で挫折してしまったマルコをもう一度伝道者として育てようと、同行させることを願ったのです。
結局、二人は対立したまま、別行動を取ることになりました。二人の対立は信仰の違いというよりも、それぞれの関心事の違い、何を大事に思っているのかの違いだったと思います。それは神さまから頂いてる賜物の違いとも言えます。ですから、それぞれが教会にとって大切なものであったわけですが、時にはそのために対立することもあるわけですね。そこには、何か信仰から離れた人間臭いような感じがします。ただ、聖書にはそれ以上のことは書かれておりませんので、この対立に関して、パウロが厳しすぎるとも、また、バルナバの判断が甘いとも言えません。
そもそも使徒言行録は、伝道者たちの活躍や人間模様を記してはいないのです。使徒言行録は、前にも言いましたが、聖霊言行録なのです。この対立と別れの上にも神さまが豊かに働かれたことを使徒言行録は伝えているのです。かつて心を一つにしていた者たちが対立し別れてしまう、共に歩めないということは不幸なことです。それは人間の愚かさかもしれません。しかしその愚かさを越えて、神さまは働かれます。人間の愚かさをも神さまは用いられるのです。
結果的には、この二人が別々に宣教活動をすることによって、より広範囲な活動が出来るようになりました。そして何より大きなことは、パウロのこれから始まる第二回伝道旅行が、パウロ自身も予想していない、ヨーロッパへ足を踏み入れるという歴史的な旅行となりました。真に神さまの御計画というのは、人間のちっぽけな思いを遥かに越えていくのです。
そしてまた、神さまが働かれる時、壊れたように見える人間関係も、やがて修復されるのです。マルコは迫害の激しい大陸の地域ではなく、バルナバの故郷でもあり、先の宣教旅行で総督がキリスト者となり、比較的平穏な状態で宣教ができるキプロス島での活動を通して成長することが出来たようです。テモテへの第二の手紙の4章11節には、パウロの言葉として「マルコを連れて来てください。彼はわたしの務めをよく助けてくれるからです」と記されています。これから分かりますことは、時を経て、パウロとバルナバは和解し、マルコはパウロにとって、自分を支えてくれる大事な同労者となったのです。
とはいえ、バルナバと別れて一人で伝道旅行をするのは不安がありました。そこでパウロは協力者を捜しました。神さまはここにシラスという人物をすでに用意して下さっていたのです。このシラスはエルサレム教会が会議の決定事項を手紙に記して、その手紙をアンティオキア教会に持って来た二人の特使の一人でした。そして、シラスだけはエルサレムに帰らずに、アンティオキアに残っていたようです。このシラスはユダヤ人でありながら、パウロのようにローマの市民権を持っておりました。つまり、ローマ帝国の支配地域で自由に活動するためにはとても好都合な条件を持っていた人物なのです。
それからさらに、伝道先のリストラで若いテモテという協力者が与えられました。テモテはギリシャ人の父親とユダヤ人の母親の間に生まれたダブルですが、第一回伝道旅行のリストラ伝道において、このテモテの祖母と母親が信仰を持ったことが、テモテへの手紙二の1章5節に記されています。再びリストラを訪問したら、彼女たちの孫であり息子であるテモテが立派な信仰者として成長していたのです。バルナバやマルコと対立して痛みを負っていたパウロに大きな喜びが与えられました。神さまは喜びと慰めを与えてくださるお方なのです。
皆さん、このように神さまは必要を満たしてくださいます。私たちの人生、日々の歩みにおいて、パウロとバルナバが対立したように、うまくいかないことが多くあります。その都度、すべてを背負い込み、自分で何とかしようとするなたば、とても大変です。生きて行くことすら苦しいものとなります。そうではなくて、素直に自分の限界を認めて、神さまに委ねて次に行くのです。それは逃げでも辛抱が足りないということではありません。神さまは挫折の中で、パウロにシラスとテモテを与えられたように、私たちにもまた新しい出会いや恵みを与えてくださるのです。
さて、16章3節には、このテモテにパウロが割礼を受けさせたことが記されています。パウロがあれほど異邦人に割礼など必要ないと主張して、エルサレム会議の決着までついたのに、ここでは「ユダヤ人の手前」テモテに割礼を施した、というのです。
これは矛盾しているようにも見えますが、この割礼は、当然ながら、救いの条件として割礼が必要だという意味で施されたのではありません。それはテモテの個人的な事情が背景にあったのです。信仰的には母親からユダヤの信仰を持っていました。しかし、ユダヤ人のしるしである割礼は、父親がギリシャ人ということもあり受けていなかったようです。ですからテモテは、ユダヤ人から見たら異邦人とみなされます。伝道の足掛かりとなるユダヤ人会堂に入れません。しかしまた一方で、異邦人からはユダヤ人と見なされるわけですから、これからの伝道活動を考えますと大きな障害となります。
テモテ自身も、ユダヤ人でも異邦人でもないという複雑な背景を持ち、自分の出自に後ろめたさを感じていたと思われます。そのような出自や過去のことに囚われる必要はないのだと示されたのです。そしてそのような苦しみの中に生きて来たテモテこそ、この後の異邦人伝道において、パウロの良き同労者となっていくのです。周囲から理解されず傷ついたパウロと、その出自から蔑まれていたテモテ、しかしそのパウロにもテモテにもそれぞれに神さまから慰めが与えられたのです。神さまは実に不思議な形で慰めを与えてくださる方なのです。
今日の御言葉の最後に「こうして、教会は信仰を強められ、日ごとに人数が増えていった」(16章5節)とあります。
この第二回伝道旅行の始まりは、決して良い始まり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パウロとバルナバが対立し、別行動を取るというような最悪の始まりであったわけです。それなのに、「教会は信仰を強められ、日ごとに人数が増えていった」というのは、すべての条件が整い好条件の中で、教会は成長することが出来ると言っているのではないと言うことです。
教会は不完全な人間がそれぞれの弱さを持って集り、時には様々な対立が生まれることがありました。しかし、神さまはそのような人々を用いて教会を成長させてくださったと聖書は教えているのです。
もちろん、私たちは教会の一致のために、またそれぞれの弱さを補い合って、愛し合って行く必要があります。しかし、その上でなお、私たちは解決の出来ない問題があり、そのために私たちが伝道のために好条件を満たすことが出来ない時もあるのです。それでも神さまは私たちをそのままで用いて教会を成長させて下さるのです。
今のコロナ禍で、自由に礼拝を守り、讃美したり、交わりも出来ないような状況というのは、伝道には悪条件ですよね。人間の目から見ればそれがどうしようもない悪条件であったしても、神さまはそれをも用いてご自身の教会を守り、導いてくださることを私たちは覚え、その神さまに信頼して行きたいと思います。
【2021년 4월 25일 주일예배(요약판)】
“재출발 ~인간의 어리석음을 넘어서~” 사도행전 15장 36절~16장 5절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15:36)
바울은 바나바에게 제2차 전도 여행을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마가를 동행시켜야 할지 말아야 할지로 격렬히 대립해 버린 것입니다. 마가는 제1차 전도여행에도 동행한 인물이지만, 구브로에서 밤빌리아 버가에 왔을 때 갑자기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바울은 자기 임무를 중도에 그만둬 버리는 그런 사람은 데려갈 수 없다고 생각했겠지요. 한편, 바나바는 지난번에는 도중에 좌절해 버린 마가였지만 그래도 다시 한번 전도자로 키워보고자 동행시키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결국 두 사람은 대립한 채 따로 전도 여행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 두 사람의 대립은 신앙의 차이가 아니라 각자의 관심사의 차이로 무엇을 더 중요시하고 있는지의 차이였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받고 있는 달란트의 차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각각 교회에 있어서는 중요한 것이었습니다만, 때로는 그 때문에 대립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거기에는 뭔가 신앙과는 거리가 먼 세속적인 느낌마저 듭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그 이상은 쓰여 있지 않았기에 이 대립에 관하여 바울이 너무 엄격하다고도 또 바나바의 판단이 안이하다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애당초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활약이나 사람들의 모습을 담고 있지는 않습니다. 사도행전은 이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성령언행록인 것입니다. 이 대립과 헤어짐 위에도 하나님께서 풍요롭게 일 하신 것을 사도행전은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찍이 마음을 하나로 했던 사람들이 대립하게 되어 헤어져 버린다거나 함께 동행하며 나아가지 못한다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어리석음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어리석음을 넘어서 하나님께서는 행하십니다. 인간의 어리석음도 하나님께서는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이 두 사람이 따로 선교 활동을 하는 것으로 더 광범위한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울이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제2차 전도 여행이 바울 자신도 예상치 못했던 유럽으로 첫발을 내딛는 역사적인 여행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것은 인간의 자그마한 생각을 훨씬 넘어선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 깨진 것 같이 보이는 인간 관계도 이윽고 회복되는 것입니다. 마가는 박해가 심한 대륙 지역이 아니라 바나바의 고향이며 전의 전도 여행에서 총독이 그리스도인이 되고 비교적으로 평온한 구브로에서의 활동을 통해서 성장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11절에는 바울의 말로서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것으로 알 수 있는 것은 때가 지나서 바울과 바나바는 화해하고, 마가는 바울에게 있어서 자신을 지지해주는 조력자이자 소중한 동역자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바나바와 헤어지고 혼자 전도 여행을 하기에는 불안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협력자를 찾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거기에 수리아라는 인물을 마련해 주셨던 것입니다. 이 수리아는 예루살렘 교회가 공회의의 결정 사항을 편지에 써서 그 편지를 안디옥 교회에 가져온 두 사람 특사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수리아만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지 않고 안디옥에 남았던 것 같습니다. 이 수리아는 유대인이면서도 바울과 같이 로마 시민권을 갖고 있었습니다. 즉 로마 제국의 지배 지역에서 자유롭게 활동하기에는 아주 적절한 조건을 갖고 있었던 인물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 더해 전도지의 루스드라에서는 젊은 디모데라는 협력자가 주어졌습니다. 디모데는 그리스인의 아버지와 유대인의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혼혈아였습니다만, 제1차 전도여행의 루스드라 전도에 있어서 이 디모데의 할머니와 어머니가 신앙을 가진 것이 디모데후서 1장 5절에 쓰여 있습니다. 다시 루스드라를 방문했더니 그녀들의 손자이며 아들인 디모데가 훌륭한 믿는 자로 성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나바나 마가와 대립해서 상심하던 바울에게 큰 기쁨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쁨과 위로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십니다. 우리의 인생, 하루하루 살아가다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대립한 것 처럼 잘 되지 않는 어려운 일들이 많이 생깁니다. 그 때마다 모든 것을 떠맡아 스스로 어떻게든 하려고 하면 너무 힘듭니다. 살아가는 것조차 괴로운 일이 됩니다. 그러지말고 순순히 자기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맡겨서 다음 단계로 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도망침도 아니고 참을성이 부족함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좌절 가운데 바울에게 수리아와 디모데를 주신 것 같이 우리에게도 새 만남과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16장 3절에는 이 디모데에게 바울이 할례를 행한 것이 쓰여 있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이방인에게 할례까지는 필요없다고 주장하여 예루살렘 공회의의 결말이 났는데 여기서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모순되는 것 같이 보이지만 이 할례는 당연히 구원의 조건으로서 할례가 필요하다는 의미로 행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디모데의 개인적인 사정이 배경에 있었습니다. 신앙적으로는 어머니에게서 유대의 신앙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의 징표인 할례는 아버지가 그리스인이라서 받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디모데는 유대인입장에서 보면 이방인으로 간주됩니다. 전도의 실마리가 되는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이방인쪽에서는 유대인이라고 간주되기 때문에 앞으로의 전도 활동을 생각하면 그부분이 큰 장애가 됩니다.
디모데 자신도 유대인도 이방인도 아니라는 복잡한 배경을 갖고 자기의 태생을 꺼림칙하게 느끼고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한 태생이나 과거의 일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고 가르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괴로움 속에 살아온 디모데야말로 이 후의 이방인 전도에 있어서 바울의 좋은 동역자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주위로부터 이해받지 못해서 상쳐입은 바울과 그 태생때문에 멸시당했던 디모데, 그러나 그 바울에게도 디모데에게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위로가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실로 불가사의한 방법으로 위로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의 성경 말씀 마지막에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가니라”(16:5) 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 제2차 전도여행의 시작은 결코 좋은 시작이 아니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대립하여 따로 행동을 취한다는 최악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갔다는 것은 모든 조건이 구비되어 호조건 가운데 교회가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불완전한 인간이 각자의 연약함을 가진채로 모여서 때로는 여러 가지 대립이 생길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사람들을 쓰셔서 교회를 성장하게 해 주셨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교회 일치를 위하여 각자의 연약함을 서로 채우고 서로 사랑해 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고 그 때문에 우리가 전도하기에 호조건을 채우지 못할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대로 써 주시고 교회를 성장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지금의 코로나화에서는 자유롭게 예배를 드리고 찬미를 하거나 교제마저도 제대로 나누지 못하는 상황이기에 전도의 차원에서 보자면 너무나도 악조건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그것이 어찌할 수도 없는 악조건일지라도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것마저도 사용하셔서,자신의 교회를 지켜주시고 인도해 주신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하며, 그런 하나님을 더욱 더 믿고 나아가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