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 호숫가에서의 식사가 끝난 후,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셨습니다. 베드로는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그 물음은 세번이나 계속했습니다. 세번째로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근심하였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부활의 주 예수님을 만난 기쁨 가운데 있었습니다만, 계속 자기의 배신이나 신앙의 연약함이나 죄많음이 마음에 걸렸을거라고 생각됩니다. 예수님께서 세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자기가 세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한 것이 생각났겠지요. 다시 베드로는 자기의 연약함과 죄많음으로 근심이 생겼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게서는 그것을 하나씩 부정이라도 하는 것 처럼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번이나 물으시면서 베드로와의 새로운 사랑의 관계를 맺으려고 하신 것입니다. 과거의 일은 묻지 않습니다. 과거의 일은 묻지 않는 대신 지금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 사람들보다 더” 라는 말, 이것은 베드로가 이전에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막14:29) 라고 즉 “누구보다 나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위하여 목숨을 버릴 수 있습니다” 라고 말했던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자기의 사랑이 확실함을 말하고 있었습니다만, 그러나 베드로는 자기의 연약함을 아프게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렇게 대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라고 대답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쥐어짜낸 듯한 마음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최대한 베드로가 할수있는 진정한 대답임과 동시에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긴다는 말투이기도 했습니다. 연약한 나의 마음을 다 아시는 것은 주님이십니다. 나의 사랑이 크던 작던 그 마음을 주님께 맡기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를 위하여 목숨까지 바쳐 주신 예수님께 대하여 자기의 사랑을 설명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가령 우리의 사랑이 부족해도 예수님께서는 그 사랑을 받아들여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베드로의 예수님에 대한 새로운 신뢰가 있습니다. 그 신뢰 관계에 의거해서 “내 양을 치라” 라는 말씀이 예수님께로부터 주어집니다. 즉 새 사명이 주어져서 그 사명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내 양을 치라” 라는 말은 베드로에게 전도자로서, 또 교회를 인도하는 자로서의 사명이 주어졌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에게는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 주님을 따라 양을 친다는 새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그것은 베드로뿐만이 아닙니다. 20장에서 같이 읽은 것 같이 부활의 주님을 맨 처음에 만났던 막달라 마리아도 그랬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그리고 우리들도 그렇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났던 자에게는 새 사명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새 인생의 여행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행은 결코 평탄한 여정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18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팔을 벌린다”라는 말은 십자가에 못박히게 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베드로가 마지막은 순교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아시면서도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엄한 말씀이지만, 그러나 베드로 자신이 후년 스스로 예수님을 따라 걸어온 길을 후회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큰 기쁨을 가지고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에 있어서 생전의 예수님도 부활하신 예수님도 모르는 제자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베전1:8-9)
예수님을 직접 모르는 사람들이 자기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사랑하여 기쁨이 넘치고 있는 그 사실을 보며 늙은 베드로는 만감이 교차할 것입니다. 투옥되기도 하고,여러 가지 곤란과 실패도 여러번 있었지만 베드로는 주어진 양을 치며 영혼의 구원으로 인도했습니다.
평탄한 인생이었더라도 경제적으로 유복하였더라도 사회적인 명예를 얻었더라도 영혼이 멸망하는 인생에는 참 기쁨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사랑하는 자의 인생이 곤란이 넘치면서도 결국엔 열매를 맺는 인생인 것을 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양을 친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사명에 사는 것은 자기 실현을 향하는 삶이 아닙니다. 자기가 향하는 곳에 간다고 말할 수 없는 삶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영혼이 구원받고 또 주위의 사람들의 영혼도 구원받는 그 신앙의 결실을 볼 수 있는 인생을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는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내 양을 치라”라고 하시며 각자의 인생 행로의 여행으로 우리를 밀어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대화한 후, 베드로는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고 예수님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너에게는 이 사람의 일은 상관이 없다, 오직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앞을 향하여 지금을 살아 갈 때, 그리고 미래로 나아갈 때, 우리는 우리의 사명으로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 우리는 되돌아보며 돌이켜 버리는 자이기도 합니다. 돌이켜 볼때, 우리는 불필요한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를 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 사람 저 사람과 비교해 버립니다. 각자 다른 사명을 받고 각자 다른 인생의 여행을 하고 있는데 비교를 하게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뒤돌아 본 그곳에 있었던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그 제자는 이윽고 요한복음을 기록했다고 쓰여 있습니다. 전해 내려오는 얘기로 이 제자는 오래오래 살아서 베드로처럼 순교 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이 제자는 배드로와는 다른 여행을 한 것입니다, 각자 사는 방법도 죽는 방법도 달랐습니다. 그러나 각자 열매를 맺는 인생을 보낸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마지막은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25절) 라고 기록하며 마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단순한 찬사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들에게 향한 말인 것입니다. 이 성경에 담을 수 없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은 바로 우리에게 행해 주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은 여기서 일단 끝이 나지만,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나날에 예수님의 사랑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베드로에게 행하신 일이 예수님을 직접 모르는 베드로의 제자들에게로 계속된 것 같이 2000년 후인 지금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여행의 이야기가 계속되어 가는 것입니다. 시간과 장소를 뛰어 넘는 방대한 이야기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세계조차도 담을 수 없는 여행의 이야기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그 물음에 반복하여 대답하며, 매일매일 예수님을 따르면서 우리 사랑의 여행은 계속 이어져 가는 것입니다.
【 2021年 4月 18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
「愛の旅は続いていく」 ヨハネ 21章 15~25節
ガリラヤ湖畔での食事が終わった後、イエスさまはペトロに「ヨハネの子シモン、この人たち以上にわたしを愛しているか」と尋ねられました。ペトロは「はい、主よ、わたしがあなたを愛していることは、あなたがご存じです」と答えました。そして、その問いかけは、三度続きました。三度目に問われたとき、ペトロは悲しくなったと言います。
ペトロは復活の主イエスさまと出会った喜びの中におりましたが、ずっと自分の裏切り、信仰の弱さ、罪深さが引っかかっていたと思います。イエスさまが三度も「わたしを愛しているか」と問われたとき、自分が三度もイエスさまのことを知らないと言ったことを思い出したのでしょう。改めて、ペトロは自分の弱さ、罪深さゆえに悲しくなりました。
だからこそ、イエスさまはそれを一つずつ打ち消すかのように、「わたしを愛しているか」と三度問いながら、ペトロとの新たな愛の関係を結ぼうとされたのです。過去のことは問いません。過去のことは問わない代わりに、今、「わたしを愛しているか」と問われるのです。「ヨハネの子シモン、この人たち以上にわたしを愛しているか。」
「この人たち以上に」という言葉、これはペトロが、かつて「たとえ、みんながつまずいてもわたしはつまずきません」(マルコ14:29)と、すなわち、「誰よりもあなたを愛しています」「あなたのためなら死ねます」と言っていたことと関連があります。ペトロは他の人との比較の中で、自分の愛の確かさを語っていたわけですが、しかし、ペトロは自分の弱さを痛いほど知りました。ですから、もうそのようには答えられないのです。「わたしがあなたを愛していることは、あなたがご存知です」と答えるのが精一杯でした。ペトロの振り絞るような思いがここにあります。
しかし、これは精一杯の答えであると同時に、神さまにすべてを委ねた言い方でもあったのです。弱い私の心をすべてご存知なのはあなたです。私の愛が大きかろうが小さかろうが、その心をあなたに委ねますと言っているのです。自分のために命まで捧げてくださったイエスさまに対して、自分の愛を説明することは出来ないのです。ただ「あなたがご存知です」としか答えようがありません。
そして、仮に私たちの愛が乏しくとも、イエスさまはその愛を受け取ってくださるのです。ここにペトロのイエスさまに対する新しい信頼があります。その信頼関係に基づいて、「わたしの羊を飼いなさい」という言葉がイエスさまから与えられます。つまり、新しい使命を与えられて歩み出すのです。「わたしの羊を飼いなさい」という言葉は、ペトロに伝道者として、また教会を導く者としての使命が与えられてたことを示しています。
ペトロは主を愛することと、主に従って羊を飼うという新たな使命が与えられました。それは、ペトロだけに限ったことではありません。20章で御一緒に読みましたように、復活の主に最初に出会ったマグダラのマリアもそうでした。他の弟子たちもそうでした。そして、私たちもそうです。復活の主と出会った者は、新たな使命が与えられるのです。
ペトロにとって、新しい人生の旅が始まりました。しかし、その旅はけっして楽な旅ではなかったのです。ここで、イエスさまはペトロに、「あなたは、若いときは、自分で帯を締めて、行きたいところに行っていた。しかし、年をとると、両手を伸ばして他の人に帯を締められ、行きたくないところに連れて行かれる」(18節)とおっしゃいました。「両手を伸ばして」という言葉は十字架にはりつけになる、ということを暗示します。ペトロが最後には殉教をすることになるとおっしゃっているわけですが、イエスさまはそのことをご存知でありながら、なお「わたしに従いなさい」と言われているのです。
まことに厳しい御言葉であるわけですが、しかし、ペトロ自身が、後年、自らがイエスさまに従って歩んだ道のりを後悔していないばかりか、むしろ大いなる喜びをもって語っております。ペトロの手紙一1章において、生前のイエスさまも復活なさったイエスさまも直接は知らない弟子たちの前で、このようには語っています。「あなたがたは、キリストを見たことがないのに愛し、今見なくても信じており、言葉では言い尽くせない素晴らしい喜びに満ちあふれています。それは、あなたがたが信仰の実りとして魂の救いを受けているからです。」(Ⅰペトロ1:8~9)
イエスさまを直接知らない人々が、自分と同じように、イエスさまを愛し、喜びに満たされている、その事実を見て、年老いたペトロは万感の思いにあふれるのです。投獄されたり、さまざまな困難があった、失敗も幾たびかした、しかし、ペトロは与えられた羊を養い魂の救いへと導きました。
楽な人生であったとしても、経済的に裕福であっても、社会的な名誉を得ても、魂が滅ぶ人生にはまことの喜びはありません。イエスさまはご自分を愛する者の日々が困難に満ちながらも、実を結ぶ人生であることをご存知だったのです。イエスさまの羊を飼う、つまり、神さまから与えられた使命に生きることは、自己実現を目指す生き方とは違います。自分の目指すところに行くとは限らない生き方です。しかし、自分の魂が救われ、また周囲の人々の魂も救われる、その信仰の実りを見ることのできる人生を、イエス・キリストを愛する者は生きていくのです。ですから、イエスさまは「わたしの羊を飼いなさい」とそれぞれの旅へと、私たちを押し出されるのです。
ペトロはイエスさまとの会話のあと、「振り向くと、イエスの愛しておられた弟子がついて来るのが見えた。」とあります。ペトロは振り向いて、後ろから来る弟子について「主よ、この人はどうなるのでしょうか」と問いました。イエスさまは「わたしの来るときまで彼が生きていることを、わたしが望んだとしても、あなたに何の関係があるか。あなたは、わたしに従いなさい。」とおっしゃいました。つまり、あなたには、この人のことは関係がない、ただ私に従いなさいとおっしゃったのです。
前を向いて、今を生きている時、そして未来へと歩むとき、私たちは私たちの使命に生きることができます。しかしまた私たちは振り向いてしまう者でもあります。振り向くとき、私たちは、余計なことを考えるのです。人と比べてしまうのです。あの人、この人と比べてしまいます。それぞれに違う使命を受けて、それぞれに人生の旅をしているのに、比べてしまうのです。
ペトロが振り向いた先にいたイエスさまが愛された弟子は、やがてヨハネによる福音書を記したと書かれています。伝承ではこの弟子は長生きをしてペトロのような殉教はしなかったとも言われます。この弟子はペトロとはまた違う旅を旅したのです。それぞれに生き方も死に方も違っていました。しかしそれぞれに実を結ぶ人生を送ったのです。
ヨハネによる福音書の最後は、「イエスのなさったことは、このほかにも、まだたくさんある。わたしは思う。その一つ一つを書くならば、世界もその書かれた書物を納め切れないであろう」(25節)と記して終わっております。これはイエスさまに対する単なる賛辞ではありません。むしろ私たちへ向けた言葉なのです。この書物に収めきれないイエスさまがなさったことは、私たちになさってくださったことだからです。
ヨハネによる福音書はここでいったん終わりますが、イエスさまの業はここで終わってはいません。私たちに続いているのです。私たちの日々にイエスさまの愛の業は為され続けています。ペトロになさった業が、イエスさまを直接は知らないペトロの弟子たちへと続いて行ったように、2000年後の今を生きる私たちにも続いています。私たち一人一人の旅の物語が続いていくのです。時間と場所を越えて、膨大な物語が続いています。世界も収めきれない旅の物語です。「わたしを愛しているか」その問いに繰り返し答えながら、日々イエスさまに従いながら、私たちの愛の旅は続いていくのです。
【2021년 4월 18일 주일예배(요약판)】
“사랑의 여행은 계속되어 간다” 요한복음 21장 15~25절
갈릴리 호숫가에서의 식사가 끝난 후,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셨습니다. 베드로는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그 물음은 세번이나 계속했습니다. 세번째로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근심하였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부활의 주 예수님을 만난 기쁨 가운데 있었습니다만, 계속 자기의 배신이나 신앙의 연약함이나 죄많음이 마음에 걸렸을거라고 생각됩니다. 예수님께서 세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자기가 세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한 것이 생각났겠지요. 다시 베드로는 자기의 연약함과 죄많음으로 근심이 생겼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게서는 그것을 하나씩 부정이라도 하는 것 처럼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번이나 물으시면서 베드로와의 새로운 사랑의 관계를 맺으려고 하신 것입니다. 과거의 일은 묻지 않습니다. 과거의 일은 묻지 않는 대신 지금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 사람들보다 더” 라는 말, 이것은 베드로가 이전에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막14:29) 라고 즉 “누구보다 나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위하여 목숨을 버릴 수 있습니다” 라고 말했던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자기의 사랑이 확실함을 말하고 있었습니다만, 그러나 베드로는 자기의 연약함을 아프게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렇게 대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라고 대답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쥐어짜낸 듯한 마음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최대한 베드로가 할수있는 진정한 대답임과 동시에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긴다는 말투이기도 했습니다. 연약한 나의 마음을 다 아시는 것은 주님이십니다. 나의 사랑이 크던 작던 그 마음을 주님께 맡기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를 위하여 목숨까지 바쳐 주신 예수님께 대하여 자기의 사랑을 설명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가령 우리의 사랑이 부족해도 예수님께서는 그 사랑을 받아들여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베드로의 예수님에 대한 새로운 신뢰가 있습니다. 그 신뢰 관계에 의거해서 “내 양을 치라” 라는 말씀이 예수님께로부터 주어집니다. 즉 새 사명이 주어져서 그 사명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내 양을 치라” 라는 말은 베드로에게 전도자로서, 또 교회를 인도하는 자로서의 사명이 주어졌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에게는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 주님을 따라 양을 친다는 새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그것은 베드로뿐만이 아닙니다. 20장에서 같이 읽은 것 같이 부활의 주님을 맨 처음에 만났던 막달라 마리아도 그랬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그리고 우리들도 그렇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났던 자에게는 새 사명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새 인생의 여행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행은 결코 평탄한 여정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18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팔을 벌린다”라는 말은 십자가에 못박히게 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베드로가 마지막은 순교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아시면서도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엄한 말씀이지만, 그러나 베드로 자신이 후년 스스로 예수님을 따라 걸어온 길을 후회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큰 기쁨을 가지고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에 있어서 생전의 예수님도 부활하신 예수님도 모르는 제자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베전1:8-9)
예수님을 직접 모르는 사람들이 자기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사랑하여 기쁨이 넘치고 있는 그 사실을 보며 늙은 베드로는 만감이 교차할 것입니다. 투옥되기도 하고,여러 가지 곤란과 실패도 여러번 있었지만 베드로는 주어진 양을 치며 영혼의 구원으로 인도했습니다.
평탄한 인생이었더라도 경제적으로 유복하였더라도 사회적인 명예를 얻었더라도 영혼이 멸망하는 인생에는 참 기쁨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사랑하는 자의 인생이 곤란이 넘치면서도 결국엔 열매를 맺는 인생인 것을 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양을 친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사명에 사는 것은 자기 실현을 향하는 삶이 아닙니다. 자기가 향하는 곳에 간다고 말할 수 없는 삶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영혼이 구원받고 또 주위의 사람들의 영혼도 구원받는 그 신앙의 결실을 볼 수 있는 인생을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는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내 양을 치라”라고 하시며 각자의 인생 행로의 여행으로 우리를 밀어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대화한 후, 베드로는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고 예수님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너에게는 이 사람의 일은 상관이 없다, 오직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앞을 향하여 지금을 살아 갈 때, 그리고 미래로 나아갈 때, 우리는 우리의 사명으로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 우리는 되돌아보며 돌이켜 버리는 자이기도 합니다. 돌이켜 볼때, 우리는 불필요한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를 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 사람 저 사람과 비교해 버립니다. 각자 다른 사명을 받고 각자 다른 인생의 여행을 하고 있는데 비교를 하게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뒤돌아 본 그곳에 있었던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그 제자는 이윽고 요한복음을 기록했다고 쓰여 있습니다. 전해 내려오는 얘기로 이 제자는 오래오래 살아서 베드로처럼 순교 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이 제자는 배드로와는 다른 여행을 한 것입니다, 각자 사는 방법도 죽는 방법도 달랐습니다. 그러나 각자 열매를 맺는 인생을 보낸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마지막은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25절) 라고 기록하며 마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단순한 찬사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들에게 향한 말인 것입니다. 이 성경에 담을 수 없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은 바로 우리에게 행해 주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은 여기서 일단 끝이 나지만,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나날에 예수님의 사랑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베드로에게 행하신 일이 예수님을 직접 모르는 베드로의 제자들에게로 계속된 것 같이 2000년 후인 지금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여행의 이야기가 계속되어 가는 것입니다. 시간과 장소를 뛰어 넘는 방대한 이야기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세계조차도 담을 수 없는 여행의 이야기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그 물음에 반복하여 대답하며, 매일매일 예수님을 따르면서 우리 사랑의 여행은 계속 이어져 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