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주 예수님을 만났던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익숙한 갈릴리로 잠시 동안 되돌아왔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생계를 위하여 갈릴리 호수로 고기잡이를 나갔습니다.
원래 제자들 대부분이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기에 적어도 자기들이 먹을 만큼은 잡힐거라 생각했겠지요. 그러나 그날 밤은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지칠대로 지쳐 배고픔 가운데 새벽을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그 새벽 호숫가에 예수님께서 서 계셨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처음에 그것이 예수님이신 줄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5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라는 것은 “물고기를 잡았느냐” 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깊은 애정이 나타나 있습니다. 밤새도록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던 제자들은 지칠대로 지쳐 배도 고팠을 것입니다. 그런 그들의 식사를 걱정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이 호숫가에서 불을 지펴 식사 준비를 하시고 계셨습니다.
성경은 정신론이나 철학을 설명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인간이 필요로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아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말하는 것과 동시에 병든 자를 고치시고 배고픈 사람에게는 먹을 것을 주셨습니다. 물론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선교보다 자선 사업이나 사회 복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비가 깊으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들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자비심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신 것입니다. 병에는 고침을, 배고픔에는 식사를,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기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방법으로 주셨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하신 기적을 “표적”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 “표적”을 보고 하나님의 구원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실은 부여받은 사람들이나 구원받은 사람들은 거기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병고침을 받아도 식사를 받아도 많은 사람들은 거기서 “표적”으로서의 하나님의 역사를 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되리라 아셨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비 때문에 “표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도 제자들에게 먼저 “고기가 있느냐”라고 물으신 것입니다. 지금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신학이나 선교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쳐 버린 육체를 고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물음에 제자들은 “없나이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는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기잡이의 전문가인 제자들이 그런 말을 들었을때는 본의가 아니었을 것입니다.그런데도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대로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랬더니 그물을 들 수 없을만큼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여기서 “오른편”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틀림없이 하나님의 역사, 표적, 기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지칠대로 지치고 먹을 것도 없었던 제자들에게 넘치도록 많은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곤란한 나날을 지내는 중에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밤새도록 고기잡이를 해서 아무 성과도 없었던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헛수고로 끝난 밤을 보낸 후 우리는 아침에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힘껏 노력했는데도 불구하고 잘 되지 못했다, 실망했다, 그 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고.
먹을 것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힘껏 여러 가지 노력을 해 왔는데 모두가 헛수고였습니다. 그랬는데 이제 와서 무슨 말이냐고 따지고 싶은 마음이 든다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를 때에 비로소 은혜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엄청난 축복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물을 들을 수 없을 만큼 물고기가 잡혔을 때, 이것은 인간이 하는 일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깨닫고 제자들은 호숫가에 있는 사람이 예수님이시라는 걸 알았습니다.
그랬더니 베드로는 벌거숭이나 다름없는 모습이었기 때문에 겉옷을 두른 후에 호수로 뛰어 내렸습니다. 이것은 베드로다운 열성을 느낄 수 있는 행동입니다. 너무나 많이 잡은 물고기로 옴짝달싹 못하는 배로 호숫가까지 가는 것보다는 헤엄치는 게 빠르다고 생각해서 뛰어 내린 것입니다. 전문가 어부인 베드로가 잡은 물고기를 내버려 두고 한시라도 빨리 예수님 곁으로 가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기에 벌거숭인나 다름없는 모습으로서는 실례가 된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일부러 겉옷을 챙겨 걸쳐입고 호수로 뛰어 내렸습니다. 겉옷을 입고 헤엄치다니, 오히려 헤엄치기 거추장스러울텐데 조금은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베드로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모습이란 결코 숭고하거나 현명하고 훌륭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일부러 겉옷을 입고 호수에 뛰어 내리는 것 같은 우스꽝스러운 것입니다. 매일 일하느라 지쳐 있는데 일요일에 교회에 가는게 어떤 사람에게는 바보스럽게 보일지도 모릅니다. 모처럼의 휴일은 몸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현명하게 느껴집니다. 기도하는 시간이 있다면 오히려 그시간에 남을 위하여 활동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앙이라는 것은 멋짐이나 현명함이나 효율로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오히려 바보스럽게 보이는 것입니다. 특히 현대인은 멋짐이나 현명함이나 효율을 중요시합니다. 지금의 교회는 때때로 호수에 뛰어 내리는 것 같은 것은 바보스럽고 창피한 일로 생각해서 주저하는 게 아닐까요?
몰론 함부로 아무거나 다 좋다는 게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겉옷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겉옷을 입는다는 것 자체는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베드로의 하나님에 대한 경외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를 품으면서 그리고 또 하나님에 대한 열성을 가지고 호숫가까지 헤엄쳤습니다. 그 하나님에 대한 경외 때문에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베드로의 모습은 하나님께 사랑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11절에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라고 쓰여 있습니다. 인간이 하는 일에는 찢어짐이 있습니다. 무리가 있는 것입니다. 너무나 자나치게 노력하면 병이 나 버리기도 합니다. 경제적으로 풍족해도 가정불화가 있을 수도 있고 숱한 노력을 해서 명성을 얻었는데도 고독하게 되어 버릴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 걸어갈 때 찢어짐은 없는 것입니다. 넘치도록 물고기를 잡아도 그물은 찢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해낸 후 헛되이 느끼거나 다 소진해 버리거나 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침 빛 가운데 맛있게 구워지는 생선 굽는 냄새를 느끼며 화기 애애하게 식사를 하는 것 같은 기쁨으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14절에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라고 쓰여 있습니다. 지난 두 번은 예루살렘에서의 일이었습니다.그리고 이번에는 갈릴리에서의 일입니다. 어떤 해설에 예루살렘은 일요일이고, 갈릴리에서는 평일이었다고 쓰여 있습니다. 틀림 없이 예루살렘에서는 안식 후 첫날 즉 일요일에 부활의 주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갈릴리에서는 평일, 제자들이 일을 마치고 난 후에 나타나 주셨습니다. 즉 우리는 일요일에 교회에서 예수님을 만날 뿐만 아니라 평일에도 각자의 장소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특별한 한 번만의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반복해서 만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만나고 또 일상의 나날 속에서도 만납니다.
제자들은 그 때까지 부활의 주 예수님을 만났는데도 불구하고 처음 호숫가에서 예수님을 보았을 때 누군지 몰랐던 것 처럼 우리도 금방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기적적인 체험을 하여도, 결정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을 가져도 인간은 금방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늘 식탁을 준비해 주시는 하나님의 노고를 소홀히 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계속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고,하나님을 경외하면서도 그러나 또한 설레는 마음으로 바닷가까지 헤엄쳐 가야 할 것입니다. 거기에는 축복의 식탁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 2021年 4月 11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
「岸まで泳げ」 ヨハネ 21章 1~14節
復活の主イエスさまと出会った弟子たちは、エルサレムから慣れ親しんだガリラヤに暫く戻っていたようです。そして、自分たちの生活のために、ガリラヤ湖へ漁に出ました。
もともと、弟子たちの多くがガリラヤ湖で漁師をしていましたから、少なくとも自分たちが食べるぐらいは取られるだろうと思っていたんでしょう。でも、その晩は、魚一匹取れなかったのです。彼らは疲れ果てて、空腹の中、夜明けを迎えました。ところが、その夜明けの岸辺にイエスさまが立っておられたのです。弟子たちはそれがイエスさまだとは、最初、分かりませんでした。
イエスさまは「子たちよ、何か食べる物があるか」とおっしゃいました。この「何か食べる物があるか」というのは、「魚は捕れましたか?」という意味合いです。ここにイエスさまの深い愛情が現れています。一晩中漁をしていた弟子たちは、疲れ果て、お腹もすいていたでしょう。その彼らの食事を心配しておられるのです。イエスさまはすでに、この岸辺で火をおこし食事の準備をしてくださっておりました。
聖書は精神論や哲学を説いているのではありません。人間が必要とするものを神さまがご存知であることを語っているのです。イエスさまは神さまの教えを語ることと共に、病人を癒し、空腹の人には食べ物を与えられました。もちろん、それは神の国の宣教よりも、慈善活動、社会福祉が大事だということではありません。しかし、神さまは憐れみ深いお方です。イエスさまも人々の苦しむ姿をご覧になって憐れまれました。その憐れみの心のゆえ、イエスさまは人々の必要なものを与えらたのです。病には癒しを、空腹には食事を、その人に必要なものを、奇跡としか言いようのないやり方で与えられました。ヨハネによる福音書では、イエスさまのなさった奇跡のことを「しるし」と表現しています。人々がその「しるし」を見て、神さまの救いを知ることが出来るようになるためです。
ですから、本当は、与えられた人たち、救われた人たちはそこに神さまの救いの業を見るべきでした。しかし、病を癒されても、食事をいただいても、多くの人はそこに「しるし」としての神さまの業を見なかったのです。イエスさまはそうなることはご存知であったわけですが、それでもなお、憐れみのゆえ、「しるし」をなさったのです。
イエスさまはここでも弟子たちにまず「食べる物があるか」とお聞きになるのです。今、彼らに必要なものは、神学や宣教の話ではなく、疲れ切った肉体を癒すことでありました。イエスさまの問いかけに弟子たちは「ありません」と答えました。すると、イエスさまは「舟の右側に網を打ちなさい。そうすればとれるはずだ」とおっしゃったのです。
プロの漁師が、そのように言われるというのは、不本意であったでしょう。それでも弟子たちは言われるまま舟の右側の網を打ったのです。すると、網を引き上げことが出来ない程多くの魚が獲れたのです。
ここで、「右側」と言われていたのは、神の力を示しております。ですから、そこにはまぎれもなく神さまの御業、しるし、奇跡があったということです。ぼろぼろに疲れて、食べる物もなかった弟子たちに、あふれるほどの神さまの恵みが与えられました。
私たちは、それぞれの困難な日々にあって、復活のイエス・キリストと出会います。一晩中漁をして、何の成果もなかった弟子たちと同じように、徒労に終わった夜のあと、私たちは朝にキリストと出会います。精一杯頑張ったのにうまくいかなかった、失望していた、その時、イエス・キリストと出会います。皆さん、イエスさまは待っていてくださるのです。そして聞かれるのです。「子たちよ、何か食べる物があるか」と。
食べ物などあるわけがないのです。精一杯あれこれ努力してきたのに、すべて無駄だったのです。それなのに、今更何を言うのかと言いたくなるような思いの中で、それでも「舟の右側に網をおろしなさい」というイエスさまのおっしゃったことに従う時、恵みが与えられるのです。とてつもない祝福が与えられるのです。
さて、網を引き上げることができないほどの魚が獲れた時、これは人間の業ではない、これは神さまの業であると気づき、弟子たちは、岸におられるのがイエスさまだと分かりました。
すると、ペトロは裸同然だったので上着をまとって湖に飛び込みました。これはペトロらしい熱心さが感じられる行動です。大漁の魚で身動き取れない舟で岸に向かうよりも泳いだ方が早いと飛び込んだのです。プロの漁師であるペトロがもう魚のことはほったらかしで、一刻も早くイエスさまのところに行きたかったのです。そして、イエスさまにお会いするのに裸同然では失礼と思ったのでしょう。わざわざ上着をまとって湖に飛び込みました。上着を着て泳ぐなんて泳ぎにくいはずなのに、少々、滑稽とも思えるペトロの姿です。
しかし、信仰の姿というのは、けっして、崇高であったり、賢そうな立派なものではないと言うことです。わざわざ上着を着て、湖に飛び込むような滑稽なことなのです。毎日、働いて疲れ果てているのに教会に行くなんて、ある人にとって馬鹿げて見えるかもしれません。せっかくの休みの日は体を休ませるほうが賢く感じられます。祈る時間があったら、もっと人のためになる活動をした方が良さそうに思えます。
でも、信仰というのは、スマートさや、賢さ、効率では測れません。むしろ時に馬鹿らしくも思えるのです。ことに現代人は、スマートさ、賢さ、効率を重視します。今の教会は、往々にして、湖に飛び込むようなことはばかばかしく恥ずかしいことと思って躊躇す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もちろんむやみやたらと何でも良いということではありません。大事なことは上着を着るということです。上着を着ること自体は、滑稽なことに見えます。しかし、そこにペトロの神さまへの畏れがあったのです。神さまへの畏れを抱きつつ、そしてまた、神さまへの熱心を抱きつつ、ペトロは岸まで泳ぎました。その神さまに対する敬虔さのゆえに、滑稽とも思えるペトロの姿は、神さまに愛されるのです。
そして、11節に、「それほど多くとれたのに網は破れていなかった」とあります。人間の為すことには破れがあります。無理があるのです。あまりにも頑張りすぎると病気になってしまいます。経済的に恵まれていても、家庭が不和になってしまうこともあります。努力を重ねて名声を得たのに傲慢になって孤独になってしまうというようなこともあります。
しかし、神さまと共に歩むとき、破れはないのです。あふれるほど魚が獲れても網は破れないのです。やり終えた後むなしくなったり、燃え尽きたりもしないのです。朝の光の中、香ばしく魚が焼ける香りの中、和やかに食事をするような喜びに満たされるのです。
ところで、14節に「イエスが死者の中から復活した後、弟子たちに現れたのはこれでもう三度目である」とあります。過去の二回はエルサレムでのことでした。そして、今回はガリラヤでの出来事です。ある解説に、エルサレムは日曜日であり、ガリラヤは平日であるとありました。確かに、エルサレムでは週の初めの日(日曜日)に復活の主イエスさまは現れました。ガリラヤでは平日、弟子たちが仕事をし、それが終わった後、現れて下さっています。つまり、私たちは日曜日、教会でイエスさまとお会いするだけでなく、平日、それぞれの場所にあってもイエスさまとお会いするのです。復活なさったイエスさまとお会いするということは特別な一回だけのことではないということです。私たちは繰り返し出会うのです。教会で出会い、また日々においても出会います。
弟子たちが、これまでも復活の主イエスさまとお会いしていたのに、最初、岸辺にイエスさまを見たとき誰か分からなかったように、私たちもまた、すぐ忘れてしまうのです。奇跡的な体験をしても、決定的な神さまとの出会いをしても、なお人間はすぐ忘れてしまうのです。神さまの救いを、神さまの憐れみを忘れてしまうのです。いつも食卓を整えてくださっている神さまの労苦をないがしろにするのです。
ですから、皆さん、私たちは出会い続け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神さまと出会い、神さまを畏れつつ、しかしまた心弾ませ、岸まで泳いでいくのです。そこには祝福の食卓が用意されております。
【2021년 4월 11일 주일예배(요약판)】
“바닷가까지 헤엄쳐라” 요한복음 21장 1~14절
부활의 주 예수님을 만났던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익숙한 갈릴리로 잠시 동안 되돌아왔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생계를 위하여 갈릴리 호수로 고기잡이를 나갔습니다.
원래 제자들 대부분이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기에 적어도 자기들이 먹을 만큼은 잡힐거라 생각했겠지요. 그러나 그날 밤은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지칠대로 지쳐 배고픔 가운데 새벽을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그 새벽 호숫가에 예수님께서 서 계셨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처음에 그것이 예수님이신 줄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5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라는 것은 “물고기를 잡았느냐” 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깊은 애정이 나타나 있습니다. 밤새도록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던 제자들은 지칠대로 지쳐 배도 고팠을 것입니다. 그런 그들의 식사를 걱정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이 호숫가에서 불을 지펴 식사 준비를 하시고 계셨습니다.
성경은 정신론이나 철학을 설명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인간이 필요로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아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말하는 것과 동시에 병든 자를 고치시고 배고픈 사람에게는 먹을 것을 주셨습니다. 물론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선교보다 자선 사업이나 사회 복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비가 깊으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들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자비심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신 것입니다. 병에는 고침을, 배고픔에는 식사를,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기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방법으로 주셨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하신 기적을 “표적”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 “표적”을 보고 하나님의 구원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실은 부여받은 사람들이나 구원받은 사람들은 거기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병고침을 받아도 식사를 받아도 많은 사람들은 거기서 “표적”으로서의 하나님의 역사를 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되리라 아셨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비 때문에 “표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도 제자들에게 먼저 “고기가 있느냐”라고 물으신 것입니다. 지금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신학이나 선교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쳐 버린 육체를 고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물음에 제자들은 “없나이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는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기잡이의 전문가인 제자들이 그런 말을 들었을때는 본의가 아니었을 것입니다.그런데도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대로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랬더니 그물을 들 수 없을만큼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여기서 “오른편”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틀림없이 하나님의 역사, 표적, 기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지칠대로 지치고 먹을 것도 없었던 제자들에게 넘치도록 많은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곤란한 나날을 지내는 중에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밤새도록 고기잡이를 해서 아무 성과도 없었던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헛수고로 끝난 밤을 보낸 후 우리는 아침에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힘껏 노력했는데도 불구하고 잘 되지 못했다, 실망했다, 그 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고.
먹을 것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힘껏 여러 가지 노력을 해 왔는데 모두가 헛수고였습니다. 그랬는데 이제 와서 무슨 말이냐고 따지고 싶은 마음이 든다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를 때에 비로소 은혜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엄청난 축복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물을 들을 수 없을 만큼 물고기가 잡혔을 때, 이것은 인간이 하는 일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깨닫고 제자들은 호숫가에 있는 사람이 예수님이시라는 걸 알았습니다.
그랬더니 베드로는 벌거숭이나 다름없는 모습이었기 때문에 겉옷을 두른 후에 호수로 뛰어 내렸습니다. 이것은 베드로다운 열성을 느낄 수 있는 행동입니다. 너무나 많이 잡은 물고기로 옴짝달싹 못하는 배로 호숫가까지 가는 것보다는 헤엄치는 게 빠르다고 생각해서 뛰어 내린 것입니다. 전문가 어부인 베드로가 잡은 물고기를 내버려 두고 한시라도 빨리 예수님 곁으로 가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기에 벌거숭인나 다름없는 모습으로서는 실례가 된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일부러 겉옷을 챙겨 걸쳐입고 호수로 뛰어 내렸습니다. 겉옷을 입고 헤엄치다니, 오히려 헤엄치기 거추장스러울텐데 조금은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베드로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모습이란 결코 숭고하거나 현명하고 훌륭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일부러 겉옷을 입고 호수에 뛰어 내리는 것 같은 우스꽝스러운 것입니다. 매일 일하느라 지쳐 있는데 일요일에 교회에 가는게 어떤 사람에게는 바보스럽게 보일지도 모릅니다. 모처럼의 휴일은 몸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현명하게 느껴집니다. 기도하는 시간이 있다면 오히려 그시간에 남을 위하여 활동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앙이라는 것은 멋짐이나 현명함이나 효율로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오히려 바보스럽게 보이는 것입니다. 특히 현대인은 멋짐이나 현명함이나 효율을 중요시합니다. 지금의 교회는 때때로 호수에 뛰어 내리는 것 같은 것은 바보스럽고 창피한 일로 생각해서 주저하는 게 아닐까요?
몰론 함부로 아무거나 다 좋다는 게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겉옷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겉옷을 입는다는 것 자체는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베드로의 하나님에 대한 경외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를 품으면서 그리고 또 하나님에 대한 열성을 가지고 호숫가까지 헤엄쳤습니다. 그 하나님에 대한 경외 때문에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베드로의 모습은 하나님께 사랑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11절에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라고 쓰여 있습니다. 인간이 하는 일에는 찢어짐이 있습니다. 무리가 있는 것입니다. 너무나 자나치게 노력하면 병이 나 버리기도 합니다. 경제적으로 풍족해도 가정불화가 있을 수도 있고 숱한 노력을 해서 명성을 얻었는데도 고독하게 되어 버릴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 걸어갈 때 찢어짐은 없는 것입니다. 넘치도록 물고기를 잡아도 그물은 찢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해낸 후 헛되이 느끼거나 다 소진해 버리거나 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침 빛 가운데 맛있게 구워지는 생선 굽는 냄새를 느끼며 화기 애애하게 식사를 하는 것 같은 기쁨으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14절에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라고 쓰여 있습니다. 지난 두 번은 예루살렘에서의 일이었습니다.그리고 이번에는 갈릴리에서의 일입니다. 어떤 해설에 예루살렘은 일요일이고, 갈릴리에서는 평일이었다고 쓰여 있습니다. 틀림 없이 예루살렘에서는 안식 후 첫날 즉 일요일에 부활의 주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갈릴리에서는 평일, 제자들이 일을 마치고 난 후에 나타나 주셨습니다. 즉 우리는 일요일에 교회에서 예수님을 만날 뿐만 아니라 평일에도 각자의 장소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특별한 한 번만의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반복해서 만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만나고 또 일상의 나날 속에서도 만납니다.
제자들은 그 때까지 부활의 주 예수님을 만났는데도 불구하고 처음 호숫가에서 예수님을 보았을 때 누군지 몰랐던 것 처럼 우리도 금방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기적적인 체험을 하여도, 결정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을 가져도 인간은 금방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늘 식탁을 준비해 주시는 하나님의 노고를 소홀히 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계속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고,하나님을 경외하면서도 그러나 또한 설레는 마음으로 바닷가까지 헤엄쳐 가야 할 것입니다. 거기에는 축복의 식탁이 준비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