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함께 읽은 것과 같이 예수님한테서는 그 어떤 죄도 찾지 못하면서도 빌라도는 스스로 책임을 지기는 싫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라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기를 원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의 십자가형이 확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성경 말씀을 보면, 이 후에도 예수님의 재판은 계속되고 있었고, 예수님을 석방하고자 하는 빌라도의 고뇌를 엿볼 수 있습니다.
빌라도는 첫 재판으로 예수님에게 채찍질의 형을 처했습니다. 이 채찍질이란 로마식의 채찍질인데 그 채찍에는 날카로운 돌기물이 달려 있어서 한번 맞으면 살점이 도려나는 너무도 참혹한 것이었습니다. 때로는 도중에 죽기도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참혹한 채찍질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군인들이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예수님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옷을 입히고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라며 맨손으로 때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체적인 고통와 동시에 모욕마저 받으신 것입니다.
어쩌면 빌라도는 그렇게 무력하고 비참한 예수님에게는 아무 힘도 없고 유대의 권력자들이 우려할 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십자가형까지는 회피하려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빌라도는 채찍질을 당하여 전신에서 피를 흘리고 너덜너덜해진 모습인 예수님을 가리켜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라 이 사람이로다” 라고. 빌라도는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 유대인들이 마음이 풀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빌라도의 뜻에 반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라고 소리를 지른 것입니다.
우리는 유대의 권력자들이 자기들의 권력을 위협하는 존재로서 예수님을 보고 적대시하여 예수님께서는 그들에 의해 살해당하셨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확실히 그들이 선동한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정작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라고 외친 것은 유대의 민중들이었습니다. 당연히 그것은 권력자로서의 체면이 깎인 것에 대한 미움, 화, 질투로 외치는 게 아닙니다. 유대의 민중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과 권위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느꼈을 때, 인간은 겸손히 자신을 낮추느냐하면 결코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실은 말살하고 싶어합니다. 그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가 자신의 하나님이 되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자기의 중심이며 자기 자신의 의지대로 살고 싶어하기때문입니다. 그렇게 자기자신을 하나님으로 삼고 싶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가진 자가 나타난다는 것은 경외심도 있지만 동시에 용서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우리는 이렇게도 생각합니다.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나쁜 사람에 비하면 아주 좋다고. 실제로 우리는 헤롯 같은 일은 하지도 않고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은 있어도 실제로 죽이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또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라고 소리질러 누군가를 사형에 이르기까지 만들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좋은 일을 하고 있다, 또는 배려하고 있다라고 여기고 하는 일이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는 일은 없을까요? 자기자신은 잘 한다고 여겨 하는 일들이기에 전혀 깨닫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악의는 없었다고 치부해 버리기엔 너무도 참혹한 일들을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해 버리는 것입니다.
원래 죄라는 것의 본질을 생각할 때 거기에는 자기 중심이 늘 자리합니다. 처지가 다른 사람의 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결과적으로 냉담한 태도나 더 참혹한 일을 해버릴지도 모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차별적인 일을 자신도 모르게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소중한 사람을 모르는 사이에 상처를 입힐지도 모릅니다. 친한 사람과의 사이에서도. 가족 가운데서도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나쁜 사람들의 모습을 참혹하고 무도하게 생각하지만 우리도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갈 때, 성경에 나오는 그들과 우리의 죄질은 똑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성경말씀 8절에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 라고 쓰여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께서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였다”는 것에 대해서 빌라도는 두려워한 것입니다. 이방인인 빌라도에게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신성한 느낌이었던 것 같고 ,예수님을 신적인 존재로서 받아들였던 모양입니다. 게다가 “더욱 두려워하였다”라고 하니까 원래 빌라도에게는 두려움이 있었던 것입니다.
빌라도는 종교적인 인간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낀 것입니다. 죽이면 안되는 존재라고 느낀 것입니다. 한편으로 자기들은 종교적인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은 오히려 예수님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두려움도 없이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라고 외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자기는 하나님을 믿고 있다. 크리스천이라고 하는 사람이 사실은 예수님을 경외하지 않고 경시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빌라도는 두려움으로 예수님을 석방하려 하지만 사태는 빌라도의 생각과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유대인들은 빌라도에 대해서도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라고 저항한 것입니다. 본래 유대인들이 몹시 싫어하는 로마 황제를 들어 반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최종적인 재판 자리에 끌려나가셨습니다. 그것은 제육시였다고 쓰여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유월절 준비를 할 때였습니다. 옛날에 출애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어린 양이 희생이 된 그것을 기억하는 유월절이 시작된 그 때에 예수님께 사형이 선고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해방하기 위하여, 구원하기 위하여 희생의 어린 양이 되셔서 이제부터 피를 흘리시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보라 너희 왕이로다”(14절) 라고 했습니다. 그것에 대하여 유대인들은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라고 소리 지른 것입니다. 그리고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라고까지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눈 앞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참되신 왕이 계셨습니다. 참되신 왕을 앞에 두고 그들은 로마 황제야말로 우리의 왕이라고 말해 버렸습니다. 본래는 유대인이 미워해야 하는 로마 황제보다도 참되신 왕이신 예수님을 더 미워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들도 이전에 외친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삼지 않고 자기중심적으로 살아온 우리들은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라고 아무것도 모른체 외친 것입니다. 그런 우리들을 위하여 희생의 어린 양으로서 예수님께서는 인도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구원을 실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삼지 않았던 우리가 참으로 죄에서 해방되어 참으로 하나님과 함께 평화롭게 걸어가는 나날이 이날로부터 시작했습니다. 참되신 왕이 우리 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말은 그리고 죄를 드러내는 말은 절망의 말이 아닙니다. 참으로 소망의 말입니다. 참되신 왕이 우리를 위하여 희생의 어린 양이 되어 주셨습니다. 거기서부터 우리의 새로운 나날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앙고백 속에서 예수님께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라고 고백하지만, 오늘의 성경 말씀을 읽는 한 빌라도가 직접 십자가형의 사형 판결을 내렸던 게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께 두려움을 느끼면서 어떻게든 석방하려고 고뇌했습니다. 어느 편인가 하면 빌라도에 대하여 동정적인 견해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째서 신앙고백 속에는 이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라고 남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이 빌라도에게 대표되는 것 같은 인간의 죄를 잊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지금도 빌라도의 고뇌는 계속되고 있는 중입니다. 빌라도에게는 최종적인 판단을 할 권한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권한을 올바르게 행사하는 게 아니라 그 권한을 지키는 것을 제일로 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그 모습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요? 빌라도는 바로 우리들인 것입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는 사실은 “우리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인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야말로 우리의 구원인 것입니다.
素晴らしい説教感謝します。
受難週にふさわしい説教だと思いました。
正に私の罪が、神の御子イエス様を
十字架に掛けたのですね。
洪 秀任
素晴らしい説教感謝します。
受難週にふさわしい説教だと思いました。
正に私の罪が、神の御子イエス様を
十字架に掛けたのですね。
洪 秀任
【 2021年 3月 21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
「まことの王」 ヨハネ 19章 1~16節
先週御一緒の読みましたように、イエスさまには何の罪を見いだせないのに、ピラトは自分で責任を取りたくないが故に、ユダヤの人々に「あのユダヤ人の王を釈放して欲しいか」と尋ねました。すると、ユダヤの人々は「その男ではない。バラバを」と、イエスさまを十字架に架けることを望んだのです。こうして、イエスさまの十字架刑が確定しました。しかし、今日の聖書箇所を読みますと、この後もイエスさまの裁判が続けられており、イエスさまを釈放しようとするピラトの苦悩が見受けられます。
ピラトは最初の判決により、イエスさまに鞭を打ちました。この鞭打ちはローマ式の鞭打ちで、その鞭には鋭利な突起物をつけられており、打たれれば肉がえぐり取られるような、とても残酷なものでした。場合によっては、死んでしまう場合もあります。イエスさまはそのような残酷な鞭打ちをお受けになりました。そして、茨の冠を被せられ、紫の着物を着せられ、「ユダヤ人の王、万歳」といって、平手で打たれたりされました。肉体的な苦痛と共に、侮辱をも受けられました。
もしかすると、ピラトは、そのような無力で惨めなイエスさまには何の力もなく、ユダヤの権力者にとっても恐れるような存在ではないことを示し、十字架刑を回避しようとしたのかも知れません。
ピラトは、鞭打たれ、全身から血を流して、ぼろぼろのお姿になったイエスさまを指さしてこう言いました。「この人を見よ」と。ピラトにしてみたら、このようなイエスさまのお姿を見れば、ユダヤ人たちは気が済むと思ったのでしょう。ところが、ユダヤ人たちはピラトの意に反して、イエスさまを「十字架につけろ」と叫んだのです。
私たちは、ユダヤの権力者たちが、自分たちの権力を脅かす存在としてイエスさまを見て、敵対視し、イエスさまは彼らによって殺されたと思いがちですが、実際はそうじゃなかったのです。確かに、彼らの扇動があったことは確かですが、イエスさまを十字架にかけろと叫んだのは、ユダヤの民衆たちでした。当然それは、権力者としての面子をつぶされたことへの憎しみや腹立ちや嫉妬だけで叫んでいるのではないのです。ユダヤの民衆たちは、イエスさまに対し神さまの力、権威というものを感じておりました。神さまの力に触れた時、人間は謙遜に畏れ敬うのか、と言いますと、そうではないのです。人間は神という存在を本当のところは抹殺したいのです。それが罪の本質なのです。なぜなら人間は自分が自分の神でありたいからです。自分が自分の中心であって、自分の意のままに生きたいからです。そのように自分を神としたい者にとって、神さまの力を持ったものが現れるというのは、恐れると同時に、許しがたいことでもあるのです。
しかし、また一方で私たちはこうも思います。私たちは、聖書に出てくる悪い人に比べたら、全然良い、と。実際、私たちはヘロデのようなことはしませんし、誰かを憎むことはあっても、実際に殺そうとは思いません。また、「十字架につけろ」と叫んで、誰かを死刑にまで陥れるようなこともしません。
ところが、私たちは自分自身では全く気づかずに、むしろ良いことをしている、もしくは配慮しているということの中に、どれほど人を傷つけていることがないでしょうか?自分自身は良かれと思っているわけですから、そのことには全く気づかないのです。悪気はなかった、ではすまされない残酷なことを、私たちは気づかないうちにしてしまうのです。
そもそも、罪ということの本質を考えるとき、そこには自己中心というものがあります。境遇の違う人のことをどうしても理解することができず、結果的に冷たいこと、さらには残酷なことをしてしまうかもしれません。場合によっては、差別的なことを無意識にしている、そういうこともあるかもしれません。大事な人を知らないうちに傷つけているかもしれません。親しい人の間でも、家族の中でも、そういうことは起こりうることです。
聖書の中に出てくる悪い人々の姿というのは、残酷で非道のように思いますが、私たちが自己中心に生きていくとき、聖書の中の人々と私たちの罪の質はまったく同質なのです。
ところで、今日の御言葉の8節に「ピラトは、この言葉を聞いてますます恐れ」とあります。ユダヤ人たちがイエスさまは自分を「神の子と自称した」と言ったことに対して、ピラトは恐れたのです。異邦人であるピラトにとっても「神の子」という言葉は神聖な響きをもつもののようで、イエスさまを神的な存在として受け取ったようです。しかも、「ますます恐れ」た、ということから、もともと、ピラトには恐れがあったのです。
ピラトは宗教的な人間ではありません。にもかかわらず、イエスさまに対して恐れを感じたのです。殺してはいけない存在だと感じたのです。一方で、自分たちは宗教的な人間であると思っているユダヤ人たちは、むしろイエスさまに対して恐れを覚えていませんでした。恐れもなく、「十字架につけろ」というのです。
このことは、私たちにおいても起こることなのです。自分は神さまを信じている、クリスチャンだという人が、ほんとうのところはイエスさまを恐れていない、軽んじているということがあるのです。
このようにピラトは恐れからイエスさまを釈放しようとするわけですが、事態はピラトの思惑とは異なる方向に流れていきました。ユダヤ人たちはピラトに対して「もし、この男を釈放するなら、あなたは皇帝の友ではない」とは抵抗したのです。本来、ユダヤ人が忌み嫌っているはずのローマの皇帝をあげて反論をするのです。
そして、イエスさまは最終的な裁判の場へと引き出されました。それは正午のことだったと記されています。これはまさに過越祭の準備の時でした。かつて出エジプトの時代、イスラエルの民のために子羊が犠牲になった、そのことを覚える祭りのそのとき、イエスさまに死刑の宣告がなされるのです。イエスさまは人々の解放のために、救いのために、犠牲の小羊としてこれから血を流されるのです。
ピラトは「見よ、あなたたちの王だ」と言います。それに対して、ユダヤ人たちは、「十字架につけろ」と叫ぶのです。そして「わたしたちには、皇帝のほかに王はありません」とまで言うのです。
彼らの目の前には、神さまのもとから来られた、まことの王がおられました。まことの王を前にして、彼らはローマ皇帝こそがわたしたちの王だと言ってのけました。本来は、ユダヤ人にとって憎むべきローマの皇帝よりも、まことの王であるイエスさまを憎んだのです。
皆さん、私たちもかつて叫んだのです。神さまを神さまとせず、自分中心に生きて来た私たちは「殺せ、殺せ。十字架につけろ」と、何も知らないまま叫んでいたのです。その私たちのために、犠牲の小羊としてイエスさまは引き渡されました。それは私たちの救いが実現するためでした。神さまを神さまとしなかった私たちが、まことに罪から解放され、まことに神さまと共に平和に歩む日々がここから始まりました。まことの王が私たちのもとに来られたのです。
しかし、十字架の言葉は、そして罪をあらわにする言葉は、絶望の言葉ではありません。まことの希望の言葉です。まことの王が私たちのために犠牲の小羊となってくださった。そこから私たちの新しい日々が始まるからです。
私たちは信仰告白の中で、イエスさまが「ポンテオ・ピラトのもとに苦しみを受け」と告白しておりますが、今日の聖書箇所を読む限り、ピラトが直接、十字架刑の死刑判決を下したわけではありません。むしろ、イエスさまに恐れを感じながら、何とか釈放しようと苦悩しました。どちらかと言えばピラトに対して同情的な見方が出来るかと思います。なのに、どうして、信仰告白の中で、このピラトのもとに苦しみを受け、と残っているのか? それは私たちがこのピラトに代表されるような人間の罪を忘れないためです。今なおピラトの苦悩は続いているのです。ピラトには最終的な判断をする権限がありました。しかし、ピラトはその権限を正しく行使するのではなく、その権限を守ることを第一としたのです。それは神さまを神さまとしないということです。神さまに畏れを感じながらも神さまの御言葉を聞こうとしない姿です。その姿は、まさに私たちと重な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ピラトはまさに私たちなのです。
「ポンテオ・ピラトのもとに苦しみを受け」は、ほんとは「私たちのもとに苦しみを受け、十字架につけられ」なのです。私たちの罪のために主イエス・キリストは十字架にお架かりになりました。私たちの罪を赦すためです。だから十字架こそが、私たちの救いなのです。
【2021년 3월 14일 주일예배(요약판)】
“참되신 왕” 요한복음 19장 1~16절
지난 주 함께 읽은 것과 같이 예수님한테서는 그 어떤 죄도 찾지 못하면서도 빌라도는 스스로 책임을 지기는 싫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라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기를 원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의 십자가형이 확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성경 말씀을 보면, 이 후에도 예수님의 재판은 계속되고 있었고, 예수님을 석방하고자 하는 빌라도의 고뇌를 엿볼 수 있습니다.
빌라도는 첫 재판으로 예수님에게 채찍질의 형을 처했습니다. 이 채찍질이란 로마식의 채찍질인데 그 채찍에는 날카로운 돌기물이 달려 있어서 한번 맞으면 살점이 도려나는 너무도 참혹한 것이었습니다. 때로는 도중에 죽기도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참혹한 채찍질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군인들이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예수님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옷을 입히고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라며 맨손으로 때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체적인 고통와 동시에 모욕마저 받으신 것입니다.
어쩌면 빌라도는 그렇게 무력하고 비참한 예수님에게는 아무 힘도 없고 유대의 권력자들이 우려할 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십자가형까지는 회피하려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빌라도는 채찍질을 당하여 전신에서 피를 흘리고 너덜너덜해진 모습인 예수님을 가리켜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라 이 사람이로다” 라고. 빌라도는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 유대인들이 마음이 풀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빌라도의 뜻에 반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라고 소리를 지른 것입니다.
우리는 유대의 권력자들이 자기들의 권력을 위협하는 존재로서 예수님을 보고 적대시하여 예수님께서는 그들에 의해 살해당하셨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확실히 그들이 선동한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정작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라고 외친 것은 유대의 민중들이었습니다. 당연히 그것은 권력자로서의 체면이 깎인 것에 대한 미움, 화, 질투로 외치는 게 아닙니다. 유대의 민중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과 권위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느꼈을 때, 인간은 겸손히 자신을 낮추느냐하면 결코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실은 말살하고 싶어합니다. 그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가 자신의 하나님이 되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자기의 중심이며 자기 자신의 의지대로 살고 싶어하기때문입니다. 그렇게 자기자신을 하나님으로 삼고 싶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가진 자가 나타난다는 것은 경외심도 있지만 동시에 용서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우리는 이렇게도 생각합니다.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나쁜 사람에 비하면 아주 좋다고. 실제로 우리는 헤롯 같은 일은 하지도 않고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은 있어도 실제로 죽이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또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라고 소리질러 누군가를 사형에 이르기까지 만들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좋은 일을 하고 있다, 또는 배려하고 있다라고 여기고 하는 일이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는 일은 없을까요? 자기자신은 잘 한다고 여겨 하는 일들이기에 전혀 깨닫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악의는 없었다고 치부해 버리기엔 너무도 참혹한 일들을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해 버리는 것입니다.
원래 죄라는 것의 본질을 생각할 때 거기에는 자기 중심이 늘 자리합니다. 처지가 다른 사람의 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결과적으로 냉담한 태도나 더 참혹한 일을 해버릴지도 모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차별적인 일을 자신도 모르게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소중한 사람을 모르는 사이에 상처를 입힐지도 모릅니다. 친한 사람과의 사이에서도. 가족 가운데서도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나쁜 사람들의 모습을 참혹하고 무도하게 생각하지만 우리도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갈 때, 성경에 나오는 그들과 우리의 죄질은 똑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성경말씀 8절에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 라고 쓰여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께서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였다”는 것에 대해서 빌라도는 두려워한 것입니다. 이방인인 빌라도에게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신성한 느낌이었던 것 같고 ,예수님을 신적인 존재로서 받아들였던 모양입니다. 게다가 “더욱 두려워하였다”라고 하니까 원래 빌라도에게는 두려움이 있었던 것입니다.
빌라도는 종교적인 인간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낀 것입니다. 죽이면 안되는 존재라고 느낀 것입니다. 한편으로 자기들은 종교적인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은 오히려 예수님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두려움도 없이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라고 외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자기는 하나님을 믿고 있다. 크리스천이라고 하는 사람이 사실은 예수님을 경외하지 않고 경시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빌라도는 두려움으로 예수님을 석방하려 하지만 사태는 빌라도의 생각과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유대인들은 빌라도에 대해서도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라고 저항한 것입니다. 본래 유대인들이 몹시 싫어하는 로마 황제를 들어 반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최종적인 재판 자리에 끌려나가셨습니다. 그것은 제육시였다고 쓰여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유월절 준비를 할 때였습니다. 옛날에 출애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어린 양이 희생이 된 그것을 기억하는 유월절이 시작된 그 때에 예수님께 사형이 선고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해방하기 위하여, 구원하기 위하여 희생의 어린 양이 되셔서 이제부터 피를 흘리시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보라 너희 왕이로다”(14절) 라고 했습니다. 그것에 대하여 유대인들은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라고 소리 지른 것입니다. 그리고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라고까지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눈 앞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참되신 왕이 계셨습니다. 참되신 왕을 앞에 두고 그들은 로마 황제야말로 우리의 왕이라고 말해 버렸습니다. 본래는 유대인이 미워해야 하는 로마 황제보다도 참되신 왕이신 예수님을 더 미워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들도 이전에 외친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삼지 않고 자기중심적으로 살아온 우리들은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라고 아무것도 모른체 외친 것입니다. 그런 우리들을 위하여 희생의 어린 양으로서 예수님께서는 인도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구원을 실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삼지 않았던 우리가 참으로 죄에서 해방되어 참으로 하나님과 함께 평화롭게 걸어가는 나날이 이날로부터 시작했습니다. 참되신 왕이 우리 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말은 그리고 죄를 드러내는 말은 절망의 말이 아닙니다. 참으로 소망의 말입니다. 참되신 왕이 우리를 위하여 희생의 어린 양이 되어 주셨습니다. 거기서부터 우리의 새로운 나날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앙고백 속에서 예수님께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라고 고백하지만, 오늘의 성경 말씀을 읽는 한 빌라도가 직접 십자가형의 사형 판결을 내렸던 게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께 두려움을 느끼면서 어떻게든 석방하려고 고뇌했습니다. 어느 편인가 하면 빌라도에 대하여 동정적인 견해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째서 신앙고백 속에는 이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라고 남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이 빌라도에게 대표되는 것 같은 인간의 죄를 잊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지금도 빌라도의 고뇌는 계속되고 있는 중입니다. 빌라도에게는 최종적인 판단을 할 권한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권한을 올바르게 행사하는 게 아니라 그 권한을 지키는 것을 제일로 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그 모습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요? 빌라도는 바로 우리들인 것입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는 사실은 “우리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인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야말로 우리의 구원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