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요한복음 13장에 있는 “가룟 유다의 배신”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유다는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떠나 버렸습니다만, 이 죄의 문제는 결코 유다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제자들의 마음 속에도 있었던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들도 유다의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결코 남의 일이 아닌 죄의 문제가 지난 주에 함께 읽은 성경 말씀 속에 쓰여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부름을 받고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인 신앙 공동체이지만 거기에 모인 사람들은 유다의 마음을 갖고 있으며 다른 제자들처럼 연약함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우리들이 죄의 어둠 속으로 잘못 들어가 헤매지 않기 위해서는 예수님 곁에 즉 예수님의 사랑 아래 계속 머물러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그 이야기의 다음 부분에 해당되는 성경 말씀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하고 떠나 버렸습니다만, 반대로 베드로는 언제까지나 예수님 곁에 계속 머무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결과적으로는 유다와는 다른 형태였지만 예수님을 부인하고 배신해 버렸습니다. 오늘의 성경 말씀에는 우리가 예수님 곁에 계속 머무르려고 할 때의 주의점에 대해서 쓰여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부인”이라고 하면, 우리는 베드로의 연약함이나 한심스러움을 연상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단순히 연약한 사람 또 한심스러운 사람이었냐고 하면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와는 비할 수 없을 만큼 어디까지나 예수님께 충실하려고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체포되었을 때 예수님을 구하려고 칼을 뽑아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베어 버렸습니다. 또 위험을 감수하고 예수님께서 연행되어 간 대제사장 안나스의 집까지 따라갔습니다. 이 시점에서는 베드로에게는 주저도 두려움도 없었던 것 같이 보입니다. 예수님을 염려하는 훌륭한 수제자로서 행동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베드로를 갑자기 엄습한 것은, 적의 칼이나 폭력이 아니라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한 사람이 아니냐”(17절) 라는 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잡아간 적들의 한가운데서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이 들통나는 것은 아주 끔찍한 일입니다. 그 때문에 베드로는 순간적으로 “아니라”라고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해서이지만 다른 제자들의 안전을 위해서는 당연한 행위였습니다. 그리고 아무 것도 모른체하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 불을 쬐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는 어떻게 해서 위기를 넘긴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잠시 불을 쬐고 있는데, 사람들이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25절) 라고 말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결코 그렇지 않다는 어조로 “아니라”고 강하게 부정했습니다. 그러나 운 나쁘게 베드로가 귀를 베어 버린 사람의 친척이 거기에 있어서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는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26절) 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해서라도 위기를 벗어나려고 다시 “아니라”고 강하게 부인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닭이 울었습니다.
베드로는 결국 세 번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정합니다만, 실은 이것은 요한복음 13장에서 예수님께서 이미 예고하신 것이었습니다. 13장 36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라고.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가는 곳”이란 십자가를 지칭하지만, 물론 그 때, 베드로는 그런 것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이 말은 그 당시에는 베드로의 거짓없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는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라고 대답하셨습니다. (13장 37~38절)
그리고 오늘의 성경말씀에서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라고 말하던 베드로가 실제로 닭 울기 전에 세번 나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대답한 것입니다.
이 “베드로의 부인”의 이야기는 인간의 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럼, 베드로의 죄는 어디에 있었을까요? 인간은 어차피 연약하고 비겁한 존재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그런 것을 전하려고 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베드로의 죄의 문제는 연약함이나 비겁함에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반대입니다. 어디까지라도 자신은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다, 예수님을 지키고야 말겠다고 생각했던 “베드로의 강함”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우리도 보통 이 세상에서 강한 것을 요구 받게 됩니다. 어른이 되면 그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고 잘 살아가는 것을 요구 받게 됩니다. 그리고 죽을 힘을 다해 그것에 부응하려고 하면서 살아갑니다. 적에 대해서도 용감하게 싸우고 무서워도 참고 적 속으로 뛰어들어갑니다. 우리는 자립한 어른으로서 잘 살아가는 것을 요구 받게 되고 실제로 성실하게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열심히 그리고 강해지려고 살아온 우리들의 귀에 닭의 울음소리를 울리게 하셨습니다.
베드로의 마음에 닭의 울음소리가 울렸습니다. 그 때까지 어른으로서 성실하게 살아오고 또 유대인으로서 율법을 지켜 하나님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온 그의 마음에 닭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그 울음소리는 있는 힘껏 어른으로서 갑옷을 입고 살아온 베드로의 갑옷을 벗게 하였습니다. 작고 연약한 인간에 불과한 베드로의 본래의 모습을 드러나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죄의 모습을 드러나게 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죄의 본질은 예수님을 모른다고 거짓말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것도 비겁한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죄의 파생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그것보다도 혼자서 뭐든지 할 수 있다, 자신이 끝까지 노력해야 한다고 하면서 자신에게만 의지하려고 했던 것이 죄였습니다. 선의로서 한 것이고 또한 몰랐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어디까지라도 따라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진정한 의미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삼지 않았던 교만함이야말로 죄였습니다. 닭 울음소리는 그 죄의 모습을 드러나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단죄의 말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거기서부터 다시 재기해 나간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사랑의 말씀이었습니다. 실제로 베드로는 거기서부터 다시 일어섰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머지않아 베드로는 대전도자가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무거운 갑옷을 벗어 던지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서 의지하는 새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연약한 자신의 모습으로 살면 된다, 거기에 하나님의 힘이 역사하시는 것을 베드로는 깨달았습니다. 우리들도 참으로 강하신 분께 있는 그대로의 나를 맡기고 새롭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회개란 그런 것입니다.
이 베드로에게 견줄만큼 대전도자가 된 바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졌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병을 고쳐달라고 절실히 바라고 있었습니다만, 그 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라는 말씀이었습니다.(고린도후서 12장 9절 참조)
여러분, 자기의 갑옷을 벗을 때, 또 자기의 칼을 버릴 때, 우리에게 하나님의 힘이 주어집니다. 우리는 연약하지만, 그 연약함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고 하나님의 힘이 발휘됩니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우리는 일어설 것입니다.
【 2021年 3月 7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
「ペトロの否認」 ヨハネ 18章 15~18節, 25~27節
先週、ヨハネによる福音書13章にある「イスカリオテのユダの裏切り」についてお話ししました。ユダは最後の晩餐の席上でイエスさまの愛を拒否し神さまから離れてしまったわけですが、この罪の問題は、決してユダ一人の問題ではなく、他の弟子たちの心の中にもあった問題でした。そして、私たちもユダの心を持っております。決して他人事ではない罪の問題が、先週御一緒に読みました御言葉の中に記されておりました。
私たちの教会は、イエスさまの愛によって招かれ、イエスさまを中心に集まった信仰共同体ではありますが、そこに集まる人間は、ユダの心を持ち、他の弟子たちのように弱さを持つ人々です。そのような私たちが、罪の暗闇へと迷い出ないためには、イエスさまの側に留まり続けること、イエスさまの愛のもとに留まり続け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をお話ししました。
今日は、その話しの続きになる聖書箇所です。ユダはイエスさまを裏切り離れてしまいましたが、それに対して、ペトロはどこまでもイエスさまの側に留まり続けようとしました。しかし、ペトロは、結果的には、イエスさまを否認し、ユダとは違った形ではありますが、イエスさまを裏切ってしまったのです。今日の聖書箇所には、私たちがイエスさまの側に留まり続けようとする時の注意点が記されているように思います。
ところで、「ペトロの否認」というとき、ペトロの弱さ、情けなさを私たちは考えます。しかし、ペトロは単に弱い人間、情けない人間かと言いますと、決してそうではありません。私たちとは比べようもないほど、どこまでもイエスさまに忠実であろうとした人でした。イエスさまが逮捕された時、助けようと剣を抜き、大祭司の手下の耳を切り落としました。また、危険を顧みず、イエスさまが連行された大祭司アンナスの屋敷までついて行ったのです。この時点では、ペトロには迷いも恐れもないように見えます。イエスさまを案じる一番弟子として、しっかりふるまっていたのです。そのペトロをふいに襲ったのが、敵の剣や暴力ではなく、「あなたも、あの人の弟子のひとりではありませんか」(17節)という言葉でした。
イエスさまを捕らえた敵の真っ只中で、自分がイエスさまの弟子であることがばれるというのは恐ろしいことです。そのため、ペトロはとっさに「違う」と答えました。これは自分の身を守るためではありますが、他の弟子たちの安全のためには当然の行為でした。そして、何食わぬ顔をして他の人と共に火にあたっていたのです。
その時は、何とか危機を乗り越えたかのように思いました。ところが、暫く火にあたっておりますと、人々が「お前もあの男の弟子の一人ではないのか」(25節)と言い始めたのです。ペトロはそれを打ち消すかのように「違う」と強く否定しました。しかし、運悪く、ペトロが耳を切り落とした人の身内の者がそこにいて、「園でおの男と一緒にいるのを、わたしに見られたではないか」と言われてしまったのです。それでも、何とかその場を逃れようと再び「違う」と強く否定しました。するとその時、鶏が鳴きました。
ペトロは結局三度イエスさまのことを知らないと否定してしまったのですが、実はこのことは、ヨハネによる福音書13章において、イエスさまがすでに予告していたことだったのです。
13章36節で、イエスさまはペトロにこうおっしゃいました。「わたしの行く所に、あなたは今ついて来ることはできないが、後でついてくることになる」と。
ここで、イエスさまが言われる「行く所」とは十字架のことですが、もちろん、その時、ペトロはそんなことは知りません。ですから「主よ、なぜ今ついて行けないのですか。あなたのためなら命を捨てます。」と答えます。「命を捨てます」、これはその時のペトロの偽らざる思いでした。しかし、そのペトロに対してイエスさまは「鶏がなくまでに、あなたは三度わたしのことを知らないと言うだろう」とお答えになりました。(13章38節)
そして、今日の聖書箇所で、「あなたのためなら命をを捨てます」と言っていたペトロが、実際に、鶏が鳴くまでに、三度、私はイエスさまを知らないと答えたのです。
この「ペトロの否認」の物語は、人間の罪の物語です。では、ペトロの罪はどこにあったのでしょうか? 人間は所詮弱いものであり、卑怯なものであるという見方も出来ますが、しかし、聖書は私たちにそのようなことを伝えようとしてるのではありません。ペトロの罪の問題は、弱さ、卑怯さにあったのではなく、むしろ逆なのです。どこまでも自分はイエスさまについていく、イエスさまをお守りしてみせると思っていた「ペトロの強さ」が問題であったのです。
私たちも通常、この世界で、強くあることを求められます。大人である以上、誰にも迷惑をかけずにしっかりと生きていくことを求められます。そして精一杯それに応えようと生きていきます。敵に対しても勇敢に戦い、怖くても我慢をして敵の中にだって入っていくのです。私たちは自立した大人としてしっかりと生きていくことを求められ、実際に誠実にそのように生きてきたのです。しかし、神さまの出来事は、一生懸命、強くあろうと生きて来た私たちの耳に鶏の鳴き声を響かせるのです。
ペトロの心に鶏の鳴き声が響きました。それまで大人として、誠実に生きて来た、さらにはユダヤ人として律法を守り、神さまを大事にして生きて来た彼の心に鶏の鳴き声が鳴り響いたのです。その鳴き声は、精いっぱい大人として鎧を着てきたペトロの鎧を切り裂いたのです。ほんとうはちっぽけな弱い人間に過ぎなかった本当のペトロの姿をあらわにしたのです。そして罪の姿をあらわにしたのです。
ペトロの罪の本質は、イエスさまを知らないと嘘をついたということではありません。もちろんそれも卑怯なことではありますが、しかしそれは罪の派生的なことに過ぎません。それよりも自分で何でも出来る、自分で頑張らねばならないと、自分に依り頼んでいたことこそが罪でした。善意からであったとしても、そしてまた知らなかったこととはいえ、神さまであるイエスさまにどこまでもついて行けると思っていた、本当の意味で、神さまを神さまとしていなかった思い上がりこそが罪でした。鶏の鳴き声はその罪の姿をあらわにしたのです。
それでも、「鶏がなくまでに、あなたは三度わたしのことを知らないと言うだろう」とおっしゃったイエスさまの言葉は、断罪の言葉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イエスさまはペトロがそこから立ち上がっていくことを知っておられたのです。イエスさまの言葉は愛の言葉でした。実際、ペトロはそこから立ち上がったのです。皆さんもご存知のように、やがてペトロは大伝道者となりました。ペトロは重い自分の鎧を脱ぎ捨てて、神さまを神さまとして寄り頼む新しい生き方へと歩み出したのです。弱いままの自分で良い、そこに神さまの力が働いてくださることをペトロは知らされたのです。私たちも本当に強いお方に、ありのままの自分を明け渡して、新しく生きていくのです。悔い改めとはそういうことです。
このペトロと並んで大伝道者となったパウロに神さまの御言葉が与えられました。パウロは自分の病を癒してほしいと切実に願っておりましたが、その時、与えられた神さまの御言葉が、「わたしの恵みはあなたに十分である。力は弱さの中でこそ十分に発揮されるのだ」という御言葉でした。(Ⅱコリント12章9節参照)
皆さん、自分の鎧を脱ぐとき、自分の剣を捨てるとき、私たちに神さまの力が注がれます。私たちは弱い、その弱さの中に、神さまの恵みが注がれ、神さまの力が発揮されます。そして、そこから私たちは立ち上がるのです。
皆さん、まことに神さまに自分を明け渡して、悔い改め、神さまの祝福の内を歩んで行きましょう。
【2021년 3월 7일 주일예배(요약판)】
“베드로의 부인” 요한복음 18장 15~18절, 25~27절
지난 주, 요한복음 13장에 있는 “가룟 유다의 배신”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유다는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떠나 버렸습니다만, 이 죄의 문제는 결코 유다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제자들의 마음 속에도 있었던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들도 유다의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결코 남의 일이 아닌 죄의 문제가 지난 주에 함께 읽은 성경 말씀 속에 쓰여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부름을 받고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인 신앙 공동체이지만 거기에 모인 사람들은 유다의 마음을 갖고 있으며 다른 제자들처럼 연약함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우리들이 죄의 어둠 속으로 잘못 들어가 헤매지 않기 위해서는 예수님 곁에 즉 예수님의 사랑 아래 계속 머물러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그 이야기의 다음 부분에 해당되는 성경 말씀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하고 떠나 버렸습니다만, 반대로 베드로는 언제까지나 예수님 곁에 계속 머무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결과적으로는 유다와는 다른 형태였지만 예수님을 부인하고 배신해 버렸습니다. 오늘의 성경 말씀에는 우리가 예수님 곁에 계속 머무르려고 할 때의 주의점에 대해서 쓰여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부인”이라고 하면, 우리는 베드로의 연약함이나 한심스러움을 연상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단순히 연약한 사람 또 한심스러운 사람이었냐고 하면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와는 비할 수 없을 만큼 어디까지나 예수님께 충실하려고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체포되었을 때 예수님을 구하려고 칼을 뽑아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베어 버렸습니다. 또 위험을 감수하고 예수님께서 연행되어 간 대제사장 안나스의 집까지 따라갔습니다. 이 시점에서는 베드로에게는 주저도 두려움도 없었던 것 같이 보입니다. 예수님을 염려하는 훌륭한 수제자로서 행동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베드로를 갑자기 엄습한 것은, 적의 칼이나 폭력이 아니라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한 사람이 아니냐”(17절) 라는 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잡아간 적들의 한가운데서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이 들통나는 것은 아주 끔찍한 일입니다. 그 때문에 베드로는 순간적으로 “아니라”라고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해서이지만 다른 제자들의 안전을 위해서는 당연한 행위였습니다. 그리고 아무 것도 모른체하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 불을 쬐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는 어떻게 해서 위기를 넘긴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잠시 불을 쬐고 있는데, 사람들이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25절) 라고 말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결코 그렇지 않다는 어조로 “아니라”고 강하게 부정했습니다. 그러나 운 나쁘게 베드로가 귀를 베어 버린 사람의 친척이 거기에 있어서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는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26절) 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해서라도 위기를 벗어나려고 다시 “아니라”고 강하게 부인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닭이 울었습니다.
베드로는 결국 세 번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정합니다만, 실은 이것은 요한복음 13장에서 예수님께서 이미 예고하신 것이었습니다. 13장 36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라고.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가는 곳”이란 십자가를 지칭하지만, 물론 그 때, 베드로는 그런 것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이 말은 그 당시에는 베드로의 거짓없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는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라고 대답하셨습니다. (13장 37~38절)
그리고 오늘의 성경말씀에서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라고 말하던 베드로가 실제로 닭 울기 전에 세번 나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대답한 것입니다.
이 “베드로의 부인”의 이야기는 인간의 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럼, 베드로의 죄는 어디에 있었을까요? 인간은 어차피 연약하고 비겁한 존재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그런 것을 전하려고 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베드로의 죄의 문제는 연약함이나 비겁함에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반대입니다. 어디까지라도 자신은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다, 예수님을 지키고야 말겠다고 생각했던 “베드로의 강함”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우리도 보통 이 세상에서 강한 것을 요구 받게 됩니다. 어른이 되면 그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고 잘 살아가는 것을 요구 받게 됩니다. 그리고 죽을 힘을 다해 그것에 부응하려고 하면서 살아갑니다. 적에 대해서도 용감하게 싸우고 무서워도 참고 적 속으로 뛰어들어갑니다. 우리는 자립한 어른으로서 잘 살아가는 것을 요구 받게 되고 실제로 성실하게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열심히 그리고 강해지려고 살아온 우리들의 귀에 닭의 울음소리를 울리게 하셨습니다.
베드로의 마음에 닭의 울음소리가 울렸습니다. 그 때까지 어른으로서 성실하게 살아오고 또 유대인으로서 율법을 지켜 하나님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온 그의 마음에 닭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그 울음소리는 있는 힘껏 어른으로서 갑옷을 입고 살아온 베드로의 갑옷을 벗게 하였습니다. 작고 연약한 인간에 불과한 베드로의 본래의 모습을 드러나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죄의 모습을 드러나게 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죄의 본질은 예수님을 모른다고 거짓말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것도 비겁한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죄의 파생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그것보다도 혼자서 뭐든지 할 수 있다, 자신이 끝까지 노력해야 한다고 하면서 자신에게만 의지하려고 했던 것이 죄였습니다. 선의로서 한 것이고 또한 몰랐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어디까지라도 따라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진정한 의미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삼지 않았던 교만함이야말로 죄였습니다. 닭 울음소리는 그 죄의 모습을 드러나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단죄의 말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거기서부터 다시 재기해 나간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사랑의 말씀이었습니다. 실제로 베드로는 거기서부터 다시 일어섰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머지않아 베드로는 대전도자가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무거운 갑옷을 벗어 던지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서 의지하는 새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연약한 자신의 모습으로 살면 된다, 거기에 하나님의 힘이 역사하시는 것을 베드로는 깨달았습니다. 우리들도 참으로 강하신 분께 있는 그대로의 나를 맡기고 새롭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회개란 그런 것입니다.
이 베드로에게 견줄만큼 대전도자가 된 바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졌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병을 고쳐달라고 절실히 바라고 있었습니다만, 그 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라는 말씀이었습니다.(고린도후서 12장 9절 참조)
여러분, 자기의 갑옷을 벗을 때, 또 자기의 칼을 버릴 때, 우리에게 하나님의 힘이 주어집니다. 우리는 연약하지만, 그 연약함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고 하나님의 힘이 발휘됩니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우리는 일어설 것입니다.
여러분, 진심으로 하나님께 자기를 맡기고 회개하여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걸어 나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