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의 성경 말씀 중 사울은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지는 체험을 했다고 하였습니다. 사울은 한 번 시력을 잃은 곳에서 마치 껍질을 부수는 것처럼 이전의 자기를 버리고,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사울은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것으로 사울은 180도 기독교를 박해하는 자에서 이번에는 목숨을 걸고 참으로 뜨겁게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라는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경에는 이 사울의 변화가 마치 갑자기 일어난 것 처럼 쓰여 있습니다. 그것은 이렇게 극적인 변화가 성령의 힘으로 인해 일어난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시간이 필요하고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사람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할 수 없는 것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사울 자신도 갈라디아서 1장에서 이것을 고백했습니다만, 그 부분을 읽어보면, 사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그리스도를 만나서 회심한 후, 다메섹에서 일단 아라비아로 갔던 것을 알수 있습니다. 이 내용이 사도행전에는 쓰여 있지 않습니다.
사울은 잠시 그곳에 나갔던 것입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성경에 쓰여 있지 않으니 상상할 수 밖에 없지만, 사람이 많아서 활기찬 다메섹을 떠나 조용하고 쓸쓸한 광야로 가서 하나님과의 기도와 묵상의 시간을 가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것은 이전에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후 곧바로 세상에 나가서 복음을 전파하신 게 아니라, 광야로 나가 사십 일 동안 단식하며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신 것처럼 말입니다.
갈라디아서 1장 11~12절에 사울(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라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1:11-12)
사울은 직접 예수님께 계시를 받아 복음을 배웠다고 합니다. 그것이 아라비아에 갔을 때의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때, 사울은 사람이 율법으로 구원받는 게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으로 구원받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사울(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16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2:16)
만일 율법을 실행해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면 참으로 지칠대로 지치고 절망해 버릴 것입니다. 평안이 없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러나 사울은 하늘에서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율법을 행하고 지키지 못한 죄인인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를 격렬히 박해한 그를 심판하여 처벌하는 게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 와 주신 것입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복음을 전파하는 도구로서, 그릇으로서 사울을 받아들여 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사울은 비로소 구원받은 것입니다. 평안을 얻은 것입니다. 옛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기쁨이 생겼습니다. 이런 나 일지라도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받아들여 주시고, 사랑해 주신다라고 말입니다.
죄인은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이 율법입니다. 그것에 비해서 죄인인 그대로의 나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원해 주신다는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깨달았을 때 사울은 구원받았습니다. 사울은 진정한 의미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다시 태어난 사울은 율법이 아닌 복음을 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반응은 냉랭하였습니다. 어찌보면 그건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린 것 처럼 사울의 변화는 유대인들에게도 교회 사람들에게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22절을 보면,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 라고 적혀 있습니다.
“힘을 더 얻어”, 사울은 힘이 더해져 갔습니다. 성서학적인 것을 말하자면 여기서는 미완료 수동태의 동사를 사용하고 있는데 하나님으로부터 더욱더 힘을 얻었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자기의 힘을 의지하였던것이 하나님의 힘에 의지하여 하나님께 힘을 더 받는 상황이 쓰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 힘으로 증언한 것입니다. 이것도 지금까지는 무기를 들고 교회 사람들을 박해하고 있었던 것이 이번에는 성경의 말씀을 들고 상대를 논파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울을 전도의 그릇으로서 택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사울은 구약성서의 전문가입니다. 다른 사도들보다 훨씬 성서 지식이 풍부합니다. 이것이 사물의 무기로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성서에 쓰여 있는 메시아(구세주)임을 증언하기에 충분한 지식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먼저 사울의 회심, 마음의 눈을 180도 돌릴 필요가 있었다는 내용은 지난 주 말씀드렸던 것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이 사울에게 위기가 닥쳐왔습니다. 유대인들이 사울의 목숨을 빼앗으려 했던 것입니다. 24절에 “그들이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라고 쓰여 있듯이 그것은 위기적인 상황이었습니다.
사울은 이것을 기적적인 방법으로 벗어나 예루살렘으로 가서 사도들과 만났습니다. 그 자세한 내용은 다음 주에 말씀드리기로 하고, 사울은 그 후 가이사랴를 지나,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인 다소로 갑니다. 그리고 사울은 바나바에 의해 세계 선교를 위해 이끌려 질 때까지의 십 수년간 다소에서 이를테면 은둔 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 십수년간이 사울에게 필요한 시간이었습니다. 그의 신앙과 신학이 더 깊어진 때였던 것입니다.
사람이 바뀔 때라는 것은 거기에는 무언가의 위기가 있습니다. 위기적인 상황이 없으면 사람은 바뀔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도 어쩔 수 없는 위기적 상황에 몰리게 되면 사람은 어떻게 할까요? 그 상황을 바꿀 수 없을 때야말로 자기가 바뀌어져야할 때입니다.
다메섹에서 예수님과 만났을 때도 그렇습니다. 그 후, 아라비아에 갔을 때도 그렇습니다. 또 다소에서의 은둔 생활 당시도 그렇습니다. 사울이 바뀔 때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때를 주신 것입니다.
사울은 이 후, 사도행전 13장에 다시 등장합니다. 13장 9절에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라고 소개되어 있는데 그 후 사울의 이름은 바울이 됩니다. 바울이라는 것은 그리스 말로 “작은 자” 라는 뜻입니다. 사울은 몇 번이나 경험한 위기적인 상황 속에서 “작은 자”로 조금씩 바뀌어져 갔습니다.
십자가의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이 “작은 자”가 구원받고 이 “죄인”이 선택받은 하나님의 그릇으로서 쓰여 지는 은혜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 후, 몇 번이나 위기적인 상황이 그를 덮칩니다. 그러나 사울은 갈라디아서 2장에서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의 대하여 살려 함이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2:19-20) 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사울은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사울에게 일어난 일이 우리 인생에도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각자 여러 처지 가운데 인생을 살아 왔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각자 다른 교육을 받고 또 다른 체험을 해 왔습니다. 그 모두가 진정한 의미로 살게해 주시는 때가 온 것을 이 사울 이야기는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전파하려고 할 때, 또 그 그리스도의 교회를 함께 세우려고 할 때, 우리가 지금까지 익힌 것 모두가 진정한 의미로 도움이 될 때가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에 우리가 익힌 지식이나 경험을 살리셔서 우리를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로 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코로나로 인해 혼란스러운 지금의 이 상황이야말로 우리를 바꾸어 야할 때입니다. 그리하여 사울처럼 담대히 복음을 말하고,주님이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가 되고자 합니다.
【 2020年 9月 6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
「ますます力を得て」 使徒言行録 9章 19~25節
先週の御言葉の中で、サウロは目からうろこが落ちるような体験をしました。サウロが、一度視力を失ったところから、殻を破るようにして古い自分を脱ぎ捨てて、神さまのことを知る人間となったのです。そして、サウロは洗礼を受けました。
これによってサウロは、180度、キリスト教を迫害する者から、今度は、命を懸けて、本当に熱く、イエス・キリストは救い主であるという福音を、宣べ伝える人になりました。
聖書には、このサウロの変化がまるで突然起こったかのように記されております。それは、このような劇的な変化が聖霊の力によるものであることを強調しているからです。しかし、実際には、時間が必要であり、聖霊の導きの中で、人々の助けがなければ為し得なかったことであると思われます。
サウロ自身もガラテヤの信徒への手紙1章でこのことを告白しているのですが、そこを読みますと、サウロはダマスコ途上でキリストと出会い、回心した後、ダマスコの町からいったんアラビアに行っていることが分かります。このことは使徒言行録には書かれていません。
サウロは一時そこに出かけて行ったわけです。何のためにでしょうか? それは聖書に書かれていないので想像するしかありませんが、恐らく、人口が多く賑やかなダマスコから、静かな、さびしい、荒れ野のほうへ行って、神さまとの祈りと黙想のときを持ったのではないかと思われます。それは、かつてイエスさまが洗礼者ヨハネから洗礼を受けた後、すぐに世に出て福音を宣べ伝えたのではなく、荒れ野に出かけて40日間の断食をなさり、悪魔の試みを受けられたようにです。
ガラテヤの信徒への手紙1章11~12節で、サウロ(パウロ)はこう書いています。「兄弟たち、あなたがたにはっきり言います。わたしが告げ知らせた福音は、人によるものではありません。わたしはこの福音を人から受けたのでも教えられたのでもなく、イエス・キリストの啓示によって知らされたのです。」(ガラテヤ 1:11-12)
パウロは直接イエスさまから啓示を受けて福音を教えられたと言っています。それが、アラビアに行っている時の出来事であると考えられます。
この時に、サウロは人が律法によって救われるのではなく、ただ、イエス・キリストへの信仰によって救われることを悟るわけですね。
サウロ(パウロ)はガラテヤの信徒への手紙2章16節でこのように言っています。「けれども、人は律法の実行ではなく、ただイエス・キリストへの信仰によって義とされると知って、わたしたちもキリスト・イエスを信じました。これは、律法の実行ではなく、キリストへの信仰によって義としていただくためでした。なぜなら、律法の実行によっては、だれ一人として義とされないからです。」(ガラテヤ 2:16)
もし、律法を実行しなければ救われないとしたら、本当に疲れ果て、絶望してしまいます。平安がないどころではありません。
しかしサウロは、天から現れたイエス・キリストに出会いました。そして、そのイエスさまは、そのように律法を実行出来ない罪人である自分をそのまま受け入れて下さいました。キリストの教会をはげしく迫害した自分を、裁いて罰するのではなく、救うために来て下さったのです。そればかりか、福音を伝える器として、サウロを受け入れて下さったのです。
ここでサウロは、初めて救われたのです。平安を得たのです。イエス・キリストを信じることによって、救われたのです。喜びが生まれたのです。こんな自分でも、主イエス・キリストは受け入れて下さった!愛してくださっている!と。
罪人では救われないというのが、律法です。それに対して、罪人であるままの自分をイエス・キリストが救ってくださる、というのが福音です。この福音を知った時、サウロは救われました。サウロは、本当の意味で生まれ変わったのです。
生まれ変わったサウロは、律法ではなく福音を語るようになりました。でも、人々の反応は冷たいものでした。当たり前と言えば当たり前です。先程も言いましたように、サウロの変化はユダヤ人にも教会の人々にも受け入れ難いものでした。
しかし、22節を見ますと、「サウロはますます力を得て、イエスがメシアであることを論証し、ダマスコに住んでいるユダヤ人をうろたえさせた」とあります。
「ますます力を得て」、サウロは力を増して行きました。聖書学的なことを言いますと、ここでは未完了受動態の動詞が使われていて、神さまからますます力をいただいた、という表現になっているんですね。今までは自分の力に頼っていたのが、神さまの力にたより、神さまから力をますます頂いた様子が記されています。そして、その力で論証したのです。これも今までは、武器をもって教会の人々を迫害していたものが、今度は聖書の言葉をもって、相手を論破していくようになったわけです。
イエスさまがサウロを伝道の器として選ばれた理由がここにあるかと思います。サウロは、旧約聖書の専門家です。他の使徒たちよりもずっと聖書知識が豊富なのです。これがサウロの武器となりました。イエス・キリストが旧約聖書に記されているメシア(救い主)であることを証言するのに十分な知識があったわけです。そのために、まずサウロの回心、心の目を180度回す必要があったことは、先週お話しした通りです。
ところが、このサウロに危機が訪れます。ユダヤ人たちがサウロの命を狙ったのです。24節に「ユダヤ人は彼を殺そうと、昼も夜も町の門で見張っていた」とありますように、それは危機的な状況でした。
サウルはこれを奇跡的な方法で逃れ、エルサレムに行き、エルサレムで使徒たちと出会うのですが、その内容は来週お話しするとして、その後、カイサリアを通って、生まれ故郷のタルソスへと行きます。そして、サウロはバルナバによって世界宣教のために引き出されるまでの10数年間、タルソスで謂わば隠遁生活を過ごすことになります。この十数年間がサウロに必要な時間でした。彼の信仰・神学がより深まる時であったのです。
人が変わる時というのは、そこには何かしらの危機があります。追い込まれる状況というものがなければ、人は変わる必要がないのです。けれども、自分ではどうしようもない危機的状況に追いやられますと、人はどうするのか?周りを変えることの出来ない時こそ、自分が変わる時なのです。
ダマスコでイエスさまと出会った時もそうです。その後、アラビアに行った時もそうです。また、タルソスでの隠遁生活の時もそうです。サウロが変わる時でした。神さまがその時を与えて下さったのです。
サウロはこの後、使徒言行録13章に再び登場します。13章9節に「パウロとも呼ばれていたサウロは」と紹介されているのですが、その後、サウロの名はパウロとなります。パウロというのは、ギリシア語で「小さき者」という意味です。サウロは何度も経験する危機的な状況の中で、「小さき者」に少しずつ変えられて行きました。
十字架の主イエス・キリストの御前で、この「小さき者」が救われ、この「罪人」が選ばれた神さまの器として用いられている恵みを悟ったのです。この後、何度も危機的な状況が彼を襲います。しかし、サウロはガラテヤの信徒への手紙2章で、「わたしは、神に対して生きるために、死んだのです。わたしは、キリストと共に十字架につけられています。生きているのは、もはやわたしではありません。キリストが、わたしの内に生きておられるのです」(ガラテヤ 2:19-20)と語っております。
皆さん、サウロは特別な人間なんだと思わないで下さい、このサウロに起こったことは私たちの人生にも起こりえるのです。私たちは今までそれぞれ様々な境遇の中に生き、人生を送ってきました。そして、私たちはそれぞれ違った教育を受け、また違った体験をしてきています。そのすべてが本当の意味で生かされるときがやってきていることをこのサウロの物語は私たちに教えてくれているのです。
私たちがキリストを宣べ伝えようとする時、またそのキリストの教会を共に建て上げようとする時、私たちが今まで身につけたものすべてが本当の意味で役に立つ時がやってくるのです。神さまは私たちの過去に身につけた知識や経験を生かして、私たちをキリストに使える者としてくださるのです。
この今のコロナ禍の時、この困難な状況だからこそ、私たちが変わる時なのです。そして、サウロのように大胆に福音を語り、主なる神さまに栄光をあらわして行く者になりたと願っております。
【2020년 9월 6일 주일예배(요약판)】
“힘을 더 얻어” 사도행전 9장 19~25절
지난 주의 성경 말씀 중 사울은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지는 체험을 했다고 하였습니다. 사울은 한 번 시력을 잃은 곳에서 마치 껍질을 부수는 것처럼 이전의 자기를 버리고,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사울은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것으로 사울은 180도 기독교를 박해하는 자에서 이번에는 목숨을 걸고 참으로 뜨겁게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라는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경에는 이 사울의 변화가 마치 갑자기 일어난 것 처럼 쓰여 있습니다. 그것은 이렇게 극적인 변화가 성령의 힘으로 인해 일어난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시간이 필요하고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사람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할 수 없는 것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사울 자신도 갈라디아서 1장에서 이것을 고백했습니다만, 그 부분을 읽어보면, 사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그리스도를 만나서 회심한 후, 다메섹에서 일단 아라비아로 갔던 것을 알수 있습니다. 이 내용이 사도행전에는 쓰여 있지 않습니다.
사울은 잠시 그곳에 나갔던 것입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성경에 쓰여 있지 않으니 상상할 수 밖에 없지만, 사람이 많아서 활기찬 다메섹을 떠나 조용하고 쓸쓸한 광야로 가서 하나님과의 기도와 묵상의 시간을 가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것은 이전에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후 곧바로 세상에 나가서 복음을 전파하신 게 아니라, 광야로 나가 사십 일 동안 단식하며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신 것처럼 말입니다.
갈라디아서 1장 11~12절에 사울(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라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1:11-12)
사울은 직접 예수님께 계시를 받아 복음을 배웠다고 합니다. 그것이 아라비아에 갔을 때의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때, 사울은 사람이 율법으로 구원받는 게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으로 구원받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사울(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16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2:16)
만일 율법을 실행해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면 참으로 지칠대로 지치고 절망해 버릴 것입니다. 평안이 없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러나 사울은 하늘에서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율법을 행하고 지키지 못한 죄인인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를 격렬히 박해한 그를 심판하여 처벌하는 게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 와 주신 것입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복음을 전파하는 도구로서, 그릇으로서 사울을 받아들여 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사울은 비로소 구원받은 것입니다. 평안을 얻은 것입니다. 옛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기쁨이 생겼습니다. 이런 나 일지라도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받아들여 주시고, 사랑해 주신다라고 말입니다.
죄인은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이 율법입니다. 그것에 비해서 죄인인 그대로의 나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원해 주신다는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깨달았을 때 사울은 구원받았습니다. 사울은 진정한 의미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다시 태어난 사울은 율법이 아닌 복음을 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반응은 냉랭하였습니다. 어찌보면 그건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린 것 처럼 사울의 변화는 유대인들에게도 교회 사람들에게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22절을 보면,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 라고 적혀 있습니다.
“힘을 더 얻어”, 사울은 힘이 더해져 갔습니다. 성서학적인 것을 말하자면 여기서는 미완료 수동태의 동사를 사용하고 있는데 하나님으로부터 더욱더 힘을 얻었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자기의 힘을 의지하였던것이 하나님의 힘에 의지하여 하나님께 힘을 더 받는 상황이 쓰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 힘으로 증언한 것입니다. 이것도 지금까지는 무기를 들고 교회 사람들을 박해하고 있었던 것이 이번에는 성경의 말씀을 들고 상대를 논파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울을 전도의 그릇으로서 택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사울은 구약성서의 전문가입니다. 다른 사도들보다 훨씬 성서 지식이 풍부합니다. 이것이 사물의 무기로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성서에 쓰여 있는 메시아(구세주)임을 증언하기에 충분한 지식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먼저 사울의 회심, 마음의 눈을 180도 돌릴 필요가 있었다는 내용은 지난 주 말씀드렸던 것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이 사울에게 위기가 닥쳐왔습니다. 유대인들이 사울의 목숨을 빼앗으려 했던 것입니다. 24절에 “그들이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라고 쓰여 있듯이 그것은 위기적인 상황이었습니다.
사울은 이것을 기적적인 방법으로 벗어나 예루살렘으로 가서 사도들과 만났습니다. 그 자세한 내용은 다음 주에 말씀드리기로 하고, 사울은 그 후 가이사랴를 지나,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인 다소로 갑니다. 그리고 사울은 바나바에 의해 세계 선교를 위해 이끌려 질 때까지의 십 수년간 다소에서 이를테면 은둔 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 십수년간이 사울에게 필요한 시간이었습니다. 그의 신앙과 신학이 더 깊어진 때였던 것입니다.
사람이 바뀔 때라는 것은 거기에는 무언가의 위기가 있습니다. 위기적인 상황이 없으면 사람은 바뀔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도 어쩔 수 없는 위기적 상황에 몰리게 되면 사람은 어떻게 할까요? 그 상황을 바꿀 수 없을 때야말로 자기가 바뀌어져야할 때입니다.
다메섹에서 예수님과 만났을 때도 그렇습니다. 그 후, 아라비아에 갔을 때도 그렇습니다. 또 다소에서의 은둔 생활 당시도 그렇습니다. 사울이 바뀔 때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때를 주신 것입니다.
사울은 이 후, 사도행전 13장에 다시 등장합니다. 13장 9절에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라고 소개되어 있는데 그 후 사울의 이름은 바울이 됩니다. 바울이라는 것은 그리스 말로 “작은 자” 라는 뜻입니다. 사울은 몇 번이나 경험한 위기적인 상황 속에서 “작은 자”로 조금씩 바뀌어져 갔습니다.
십자가의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이 “작은 자”가 구원받고 이 “죄인”이 선택받은 하나님의 그릇으로서 쓰여 지는 은혜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 후, 몇 번이나 위기적인 상황이 그를 덮칩니다. 그러나 사울은 갈라디아서 2장에서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의 대하여 살려 함이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2:19-20) 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사울은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사울에게 일어난 일이 우리 인생에도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각자 여러 처지 가운데 인생을 살아 왔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각자 다른 교육을 받고 또 다른 체험을 해 왔습니다. 그 모두가 진정한 의미로 살게해 주시는 때가 온 것을 이 사울 이야기는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전파하려고 할 때, 또 그 그리스도의 교회를 함께 세우려고 할 때, 우리가 지금까지 익힌 것 모두가 진정한 의미로 도움이 될 때가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에 우리가 익힌 지식이나 경험을 살리셔서 우리를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로 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코로나로 인해 혼란스러운 지금의 이 상황이야말로 우리를 바꾸어 야할 때입니다. 그리하여 사울처럼 담대히 복음을 말하고,주님이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가 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