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불가사의한 인도하심 가운데 교회의 박해자였던 사울은 다메섹에서 회심하여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사울은 예루살렘으로 가서 거기에서 사도들과 함께 하고자 했습니다. 그 때의 상황이 쓰여 있는 것이 오늘의 성경말씀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사울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열렬한 박해자였던 사울이 “회심했습니다. 저도 여러분들과 함께하게 해 주세요” 라고 한다고 그렇게 쉽사리 받아들여 환영해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원래 박해자였던 사울이 사도들에게 인정받고 교회 멤버가 된다는 것은 실은 대단한 일입니다. 교회 입장에서는 중대한 결단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목사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제가 지금의 교회에 부임한지 십년이 조금 지났습니다. 제가 부임하고 나서 교회에서 돌아가신 분이 삼십여명이 계십니다. 또 교적을 다른 교회로 옮긴 전출자분도 이십여명 계시구요. 다 합계하면 오십명 이상입니다. 부임한 당초의 교회 멤버는 오십 명입니다. 즉 부임한 10년 사이에 플러스 마이너스하면 숫자 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그러나 현시점에서 세어 보면 지금도 역시 오십 명정도의 멤버가 계십니다. 자, 여기서 우리가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문제입니다. 오십 명이 있었고 오십 명이 없어졌는데 또 다른 오십 명이 어딘가로부터 갑자기 솟아난 것처럼 나타난 겁니다. 그것을 그저 우연히 그렇게 되었다고 치부할건지, 아니면 이 사실을 하나님께서 새로이 오십 명을 보내 주신 사실로서 받아들일지, 과연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따라 우리의 신앙의 모습을 엿볼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 신변에는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납니다. 과거에 일어난 일이 있습니다. 현재 일어나는 일이 있습니다. 장래는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적어도 과거와 현재의 일은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것입니다.
신앙을 가져도, 갖고 있지 않아도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받아들이는 방법은 다릅니다. 믿는 자는 “하나님께서 계시니 과거에 일어난 일과 지금 일어나는 일은 뭔가 의미가 있을 것이고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반드시 좋은 방향으로 인도해 주신다” 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것에 반하여 “하나님은 없다. 우연히 괴거에도 현재에도 이런 일이 일어났다. 장래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말고 스스로 어떻게든 해야 한다”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은 믿지 않는 자의 생각입니다. 같은 일이 일어나도 받아들이는 방법이 전혀 다른 것입니다.
오늘의 성경말씀에 쓰여 있는 내용도 이와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 눈 앞에서 일어난 일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여기에 나오는 사람들은 그 물음을 받았던 것입니다.
교회는 사울을 교회의 멤버로서 받아들일지 고민했습니다. “박해자였던 사울이 교회의 멤버가 되고 싶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겠는가?” 신앙을 가지고 이 사실을 파악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나 사울을 믿을 수 없습니다. 신앙의 눈으로 사울을 볼 수도 없고 신앙을 가지고 이 사실을 파악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바나바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나바는 열두 사도의 멤버가 아니지만 교회가 탄생한 당초부터 있었던 멤버입니다. 성경에는 사도행전 4장 36절에 처음으로 등장한 인물입니다.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 (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사도행전4:36-37)
바나바는 본명이 요셉이라고 하지만 아주 신앙이 깊고 사도들이 “위로의 아들”이라고 부를만큼 교회 사람들에게 인정받은 인물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위로를 받고 있었기에 자기를 희생하면서도 남을 위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바나바가 중재해 주어서 겨우 사울은 교회에 받아들여지게 되고, 제자의 일원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 때, 바나바가 말한 것은 두 가지 사실입니다. 사울이 예수님을 만났던 것, 그리고 다메섹에서 담대히 선교한 것, 이 두 가지 사실을 바나바는 그대로 전했습니다.
교회 사람들은 바나바에게서 전해 들은 사실에 더 추가해서 판단해야 했습니다. 사울이 회심한 모양이다. 주 예수님을 만났던 모양이다. 다메섹에서 담대히 선교한 모양이다. 그리고 이제 교회 멤버에 들어가는 것을 원하고 있다.
거기서 판단이 요구되어졌습니다. 그 결론이 28절에 쓰여 있습니다.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28-29절) 교회는 여러가지 사실에 의거하여 사울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사울로써도 여기서 교회로 들어가는 것을 아주 중요시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조금 전까지는 박해자였으니까 당연히 교회로 들어가기가 어려운 것은 예상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에 가도 상대해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예 들어갈 가능성이 없는게 아닐까? 그렇게 사울은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로 들어가길 원했습니다.
사울은 신앙을 얻어 자신의 주관적인 신앙으로 즉 혼자서 전도하려고 했던 게 아닙니다. 교회와 제대로 연결되기를 원했습니다.
그 때, 사도들이 마음을 열어 사울을 받아들인 것은 이 설명을 듣고 납득한 것보다도 바나바의 열성적인 권유에 사도들의 마음이 움직여 위로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백 가지 이론을 늘어 놓아도 움직이지 않던 마음이 하나의 위로로 움직이기도 합니다. 바나바는 그렇게 위로의 말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바나바처럼 주위 사람들에게 위로와 화해를 할 수 있게 해 주는 사람이 있는 교회는 참으로 다행입니다. 우리는 자칫하면 자기 주위에 싸움과 대립만을 일으켜 버립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자는 모두 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있는 자입니다. 즉 우리는 실로 모두 다 주위에 위로와 화해를 가져오는 바나바이기도 하며, 위로의 아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31절)
저 박해자 였던 사울이 회심하여 전도자가 되고 이제 교회 멤버가 되어 있다. 적 중의 적이라고 여겼던 사람이 이제 자기들 편이 되었다.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이것은 인간의 힘에 의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주셨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스데반의 순교를 계기로 시작된 박해로 인해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각지에 흩어져 갔습니다. 그러나 흩어진 장소에서도 신앙을 지켜 전도하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빌립에 의해 사마리아인 전도가 이루어지고 이걸 계기로 하여 이방인에 대한 전도의 문호가 열리게 되었고, 에디오피아 내관의 전도로 율법에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 못한다고 쓰여 있는 사람들에 대한 전도의 문호도 열리고, 적대자인 사울은 회심하여 신앙을 가지는 건 물론이며, 교회의 멤버로 전도사까지 되었습니다.
교회의 위기가 일변하여 전도의 호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 때에는 박해를 조금 멈추었을지도 모릅니다. 교회에 평화가 있었습니다. 적대자조차 회심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가 있었습니다. 성령의 위로도 있었습니다. 여기서 교회의 기반이 튼튼해지고 교회가 성장해 갔던 것을 사도행전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우리 히로시마교회에도 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도 각각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납니다. 과거에 일어난 것, 현재 일어나는 것, 앞으로 일어날 것, 여러 가지 일들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좋은 일이 일어나더라도 나쁜 일이 일어나더라도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우리는 앞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구원의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모든 일들을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여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 2020年 9月 13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
「教会の基礎が固まる」 使徒言行録 9章 26~31節
神さまの不思議な導きの中で、教会の迫害者であったサウロが、ダマスコで回心し、福音を宣べ伝える者に変えられました。サウロはエルサレムへ向かい、そこで使徒たちの仲間に加わろうとしたのです。その時の様子が記されているのが今日の御言葉です。
ところが、エルサレムの使徒たちはサウロを信じないのです。当然のことです。熱烈な迫害者であったサウロが「回心しました、仲間に入れてください」と言って来たところで、そう簡単に歓迎できるわけはありません。
元迫害者であるサウロが使徒たちに認められて、教会の仲間になるというのは、実は大変な出来事なのです。教会にとっては重大な決断が迫られているわけですね。
ある牧師任がこのような話しをしました。「自分が今の教会に赴任して、十年と少しが経った。自分が赴任してから、教会で逝去された方が三十数人おられる。また、教会の籍を別のところに移した転出者が十数人おられる。合計すると五十名以上です。赴任した当初、教会のメンバーはおよそ五十人。つまり、ここ十年で数字上はゼロになるということになります。しかし現時点でもやはり五十名ほどのメンバーがいる。この事実をどう受け止めるかということが問われるのです。五十名いて、五十名がいなくなったけれども、別の五十人がどこから降って沸いたように現れた。そんなのは偶然そうなったと片付けるのか。それとも、この事実を神さまが新たに五十人を与えてくださった事実として受け止めるのか。事実の受け止め方に、私たちの信仰がかかわってくるのです。」
このことは、私たちの信仰にとって大事なことであると思います。私たちの身近には、様々な出来事が起こっています。過去に起こった出来事がある。現在、起こっている事実がある。将来はどのようになるかは分かりません。少なくとも、過去と現在のことは私たちには分かるわけです。それをどう受け止めるか、ということです。
信仰を持っていても、持っていないとしても、いろいろな出来事が起こります。それは変わりません。しかしその受け止め方は違います。信仰者は、「神さまがおられ、過去に起こったことと今起こっていることは、何らかの意味があるのではないか。これからも神さまが善きように導いてくださるのではないか」と考えます。それが信仰です。
それに対し、神さまなどいない。偶然、たまたま、過去にも現在にもこんな出来事が起こった。将来もどうなるか分かったものではない。神になど頼らず、自分でなんとかしなくては。そのように受け止めるのは、信仰を持たない者の考え方です。同じ出来事が起こったとしても、受け止め方がまるで変ってくるのです。
今日の御言葉に記されている内容も、このことと同じことが言えるだろうと思います。今、目の前で起こっているこの出来事をどう受け止めるか。ここに出てくる人たちはそのことが問われていたのです。
教会はサウロを教会の仲間として受け入れるかどうか悩みました。「迫害者のサウロが教会の仲間になりたいと言っている。これをどうのように受けとめれば良いのか?」信仰をもってこの事実を捉えなければなりません。でも、サウロが信じられません。信仰の目でサウロを見、信仰をもってこの事実を捉えられないのです。しかし、そこにバルナバという人が登場します。
バルナバは12使徒のメンバーではありませんが、教会が誕生した当初からいたメンバーです。聖書には、使徒言行録4章36節に初めて登場した人物です。「レビ族の人で、使徒たちからバルナバ-『慰めの子』という意味-と呼ばれていた、キプロス島生まれのヨセフも、持っていた畑を売り、その代金を持って来て使徒たちの足もとに置いた。」(使4:36-37)
バルナバは本名はヨセフと言いますが、とても信仰深く、使徒たちから「慰めの子」と呼ばれるほどに教会の人々から一目置かれた人物でした。神さまから慰めを受けているからこそ、自分を犠牲にしても、人を慰めることが出来たのでしょう。
このバルナバが執り成してくれて、ようやくサウロは教会に受け入れられ、弟子の仲間に入ることが出来ました。この時、バルナバが語ったのは二つの事実です。サウロがイエスさまに出会ったこと、そしてダマスコで大胆に宣教をしたこと。この二つです。事実をそのまま伝えました。
教会の人たちはバルナバから知らされた事実を加えて、判断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でした。サウロが回心したらしい。主イエスさまと出会ったらしい。ダマスコで大胆に宣教したらしい。そして今、教会に加わることを求めている。
そこで、判断を迫られました。その結論が、28節に記されています。「それで、サウロはエルサレムで使徒たちと自由に行き来し、主の名によって恐れずに教えるようになった。」(28節) 教会は様々な事実をもとに、サウロを受け入れたのです。
サウロにしても、ここで教会に加わるということを、とても大切にしています。ちょっと前までは迫害者でしたから、当然ながら教会に加わることの困難が予想されます。教会に行っても相手にされないのではないか。加えられる可能性などないのではないか。そうサウロは思っていたかもしれません。しかしそれでもサウロは教会を求めました。
サウロは信仰を得て、自分の主観的な信仰で、すなわち一人で伝道をしようとしたのではないのです。教会にきちんとつながることを求めました。
この時、使徒たちが心を開いてサウロを受け入れたのは、この説明を聞いて納得したからと言うよりも、バルナバの熱心な勧めに心動かされ、慰められたからだと思うのです。百の理屈を並べても動かない心が、一つの慰めの言葉によって動くということがあります。バルナバは、そのような慰めの言葉を語ることが出来た人だったのです。
このバルナバのように、周囲の人々に慰めと和解をもたらすことができる人がいる教会は本当に幸いです。私たちはともすると、自分の周りに争いや対立ばかりを引き起こしてしまいます。しかし、私たち信仰者は皆、主イエス・キリストによる神さまの慰めを受けている者です。つまり、私たちは本当は皆、周囲に慰めと和解をもたらすバルナバ、慰めの子であることができるはずなのです。
「こうして、教会はユダヤ、ガリラヤ、サマリアの全地方で平和を保ち、主を畏れ、聖霊の慰めを受け、基礎が固まって発展し、信者の数が増えていった。」(31節)
あの迫害者であったサウロが回心をして伝道者になり、今や教会に加えられている。敵の中の敵だと思っていた人が、今や味方になっている。この事実をどう受け止めるのか。これはもう人間の力によるものではないことは明らかです。神さまがそうしてくださったとしか考えられないことなのです。
ステファノの殉教を契機に始まった迫害によって、エルサレム教会の信徒たちは各地に散らされました。しかし、散らされた場所で信仰を守り、伝道することを止めませんでした。フィリポによるサマリア人への伝道により、異邦人への伝道の門戸が開き、エチオピアの宦官への伝道により、律法に神の民となれないと記されている人々への伝道の門戸が開き、敵対者であるサウロが回心し、信仰をもつどころか、教会の仲間になり伝道者となりました。
教会の危機が一転して伝道の好機となったのです。この時には、迫害がこのとき少しは止んでいたのかもしれません。教会に平和がありました。敵対者さえも回心させてくださる、そんなことをしてくださった神さまへの畏れがありました。聖霊による慰めもありました。ここに教会の基礎が固まり、教会が成長していったことを、使徒言行録は私たちに教えているのです。
私たちのこの教会にも、また私たち一人一人にも、それぞれいろいろな出来事が起こります。過去に起こったこと、現在起こっていること、これから起こっていくこと、いろいろな出来事があります。私たちにとって良い出来事が起ころうとも、悪い出来事が起ころうとも、イエスさまを救い主と信じている私たちは前を向いて歩むことができます。なぜなら、イエスさまが私たちの罪を背負って十字架にお架かりになり、私たちの罪を赦してくださったからです。神さまがそのように救いの道を用意してくださいました。だから、あらゆる出来事を、私たちは神さまを信頼して受け止め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
【2020년 9월 13일 주일예배(요약판)】
“교회 기반이 튼튼해진다” 사도행전 9장 26~31절
하나님의 불가사의한 인도하심 가운데 교회의 박해자였던 사울은 다메섹에서 회심하여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사울은 예루살렘으로 가서 거기에서 사도들과 함께 하고자 했습니다. 그 때의 상황이 쓰여 있는 것이 오늘의 성경말씀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사울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열렬한 박해자였던 사울이 “회심했습니다. 저도 여러분들과 함께하게 해 주세요” 라고 한다고 그렇게 쉽사리 받아들여 환영해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원래 박해자였던 사울이 사도들에게 인정받고 교회 멤버가 된다는 것은 실은 대단한 일입니다. 교회 입장에서는 중대한 결단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목사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제가 지금의 교회에 부임한지 십년이 조금 지났습니다. 제가 부임하고 나서 교회에서 돌아가신 분이 삼십여명이 계십니다. 또 교적을 다른 교회로 옮긴 전출자분도 이십여명 계시구요. 다 합계하면 오십명 이상입니다. 부임한 당초의 교회 멤버는 오십 명입니다. 즉 부임한 10년 사이에 플러스 마이너스하면 숫자 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그러나 현시점에서 세어 보면 지금도 역시 오십 명정도의 멤버가 계십니다. 자, 여기서 우리가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문제입니다. 오십 명이 있었고 오십 명이 없어졌는데 또 다른 오십 명이 어딘가로부터 갑자기 솟아난 것처럼 나타난 겁니다. 그것을 그저 우연히 그렇게 되었다고 치부할건지, 아니면 이 사실을 하나님께서 새로이 오십 명을 보내 주신 사실로서 받아들일지, 과연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따라 우리의 신앙의 모습을 엿볼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 신변에는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납니다. 과거에 일어난 일이 있습니다. 현재 일어나는 일이 있습니다. 장래는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적어도 과거와 현재의 일은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것입니다.
신앙을 가져도, 갖고 있지 않아도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받아들이는 방법은 다릅니다. 믿는 자는 “하나님께서 계시니 과거에 일어난 일과 지금 일어나는 일은 뭔가 의미가 있을 것이고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반드시 좋은 방향으로 인도해 주신다” 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것에 반하여 “하나님은 없다. 우연히 괴거에도 현재에도 이런 일이 일어났다. 장래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말고 스스로 어떻게든 해야 한다”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은 믿지 않는 자의 생각입니다. 같은 일이 일어나도 받아들이는 방법이 전혀 다른 것입니다.
오늘의 성경말씀에 쓰여 있는 내용도 이와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 눈 앞에서 일어난 일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여기에 나오는 사람들은 그 물음을 받았던 것입니다.
교회는 사울을 교회의 멤버로서 받아들일지 고민했습니다. “박해자였던 사울이 교회의 멤버가 되고 싶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겠는가?” 신앙을 가지고 이 사실을 파악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나 사울을 믿을 수 없습니다. 신앙의 눈으로 사울을 볼 수도 없고 신앙을 가지고 이 사실을 파악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바나바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나바는 열두 사도의 멤버가 아니지만 교회가 탄생한 당초부터 있었던 멤버입니다. 성경에는 사도행전 4장 36절에 처음으로 등장한 인물입니다.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 (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사도행전4:36-37)
바나바는 본명이 요셉이라고 하지만 아주 신앙이 깊고 사도들이 “위로의 아들”이라고 부를만큼 교회 사람들에게 인정받은 인물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위로를 받고 있었기에 자기를 희생하면서도 남을 위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바나바가 중재해 주어서 겨우 사울은 교회에 받아들여지게 되고, 제자의 일원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 때, 바나바가 말한 것은 두 가지 사실입니다. 사울이 예수님을 만났던 것, 그리고 다메섹에서 담대히 선교한 것, 이 두 가지 사실을 바나바는 그대로 전했습니다.
교회 사람들은 바나바에게서 전해 들은 사실에 더 추가해서 판단해야 했습니다. 사울이 회심한 모양이다. 주 예수님을 만났던 모양이다. 다메섹에서 담대히 선교한 모양이다. 그리고 이제 교회 멤버에 들어가는 것을 원하고 있다.
거기서 판단이 요구되어졌습니다. 그 결론이 28절에 쓰여 있습니다.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28-29절) 교회는 여러가지 사실에 의거하여 사울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사울로써도 여기서 교회로 들어가는 것을 아주 중요시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조금 전까지는 박해자였으니까 당연히 교회로 들어가기가 어려운 것은 예상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에 가도 상대해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예 들어갈 가능성이 없는게 아닐까? 그렇게 사울은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로 들어가길 원했습니다.
사울은 신앙을 얻어 자신의 주관적인 신앙으로 즉 혼자서 전도하려고 했던 게 아닙니다. 교회와 제대로 연결되기를 원했습니다.
그 때, 사도들이 마음을 열어 사울을 받아들인 것은 이 설명을 듣고 납득한 것보다도 바나바의 열성적인 권유에 사도들의 마음이 움직여 위로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백 가지 이론을 늘어 놓아도 움직이지 않던 마음이 하나의 위로로 움직이기도 합니다. 바나바는 그렇게 위로의 말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바나바처럼 주위 사람들에게 위로와 화해를 할 수 있게 해 주는 사람이 있는 교회는 참으로 다행입니다. 우리는 자칫하면 자기 주위에 싸움과 대립만을 일으켜 버립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자는 모두 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있는 자입니다. 즉 우리는 실로 모두 다 주위에 위로와 화해를 가져오는 바나바이기도 하며, 위로의 아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31절)
저 박해자 였던 사울이 회심하여 전도자가 되고 이제 교회 멤버가 되어 있다. 적 중의 적이라고 여겼던 사람이 이제 자기들 편이 되었다.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이것은 인간의 힘에 의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주셨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스데반의 순교를 계기로 시작된 박해로 인해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각지에 흩어져 갔습니다. 그러나 흩어진 장소에서도 신앙을 지켜 전도하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빌립에 의해 사마리아인 전도가 이루어지고 이걸 계기로 하여 이방인에 대한 전도의 문호가 열리게 되었고, 에디오피아 내관의 전도로 율법에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 못한다고 쓰여 있는 사람들에 대한 전도의 문호도 열리고, 적대자인 사울은 회심하여 신앙을 가지는 건 물론이며, 교회의 멤버로 전도사까지 되었습니다.
교회의 위기가 일변하여 전도의 호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 때에는 박해를 조금 멈추었을지도 모릅니다. 교회에 평화가 있었습니다. 적대자조차 회심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가 있었습니다. 성령의 위로도 있었습니다. 여기서 교회의 기반이 튼튼해지고 교회가 성장해 갔던 것을 사도행전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우리 히로시마교회에도 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도 각각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납니다. 과거에 일어난 것, 현재 일어나는 것, 앞으로 일어날 것, 여러 가지 일들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좋은 일이 일어나더라도 나쁜 일이 일어나더라도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우리는 앞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구원의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모든 일들을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여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