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성경말씀에 등장한 사마리아의 마술사 시몬이 오늘의 성경말씀에도 등장합니다. 시몬은 박해를 면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 마을까지 도망쳐 온 빌립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자기에게는 없는 사랑을 가지고 불가사의한 일을 하는 빌립에게 감명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 빌립의 사랑을 통해서 예수님의 사랑을 알아 시몬은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빌립에게서 세례를 받고 새로운 신앙 생활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틀림없이 시몬은 예수님을 만나서 신앙을 갖고 새로운 신앙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옛날의 사고방식이 아직도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 중심적인 사고방식이며 손익을 따져 셈하는 판단이 그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빌립에게서 세례를 받은 것도 세례를 받으면 뭔가 그 보답으로 더 굉장한 힘이 주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였을지도 모릅니다.
거기에 예루살렘 교회에서 베드로와 요한이라는 제자의 대표격인 두 사람이 왔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도록 사마리아 사람들을 위해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17절에는 “이에 두 사도가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17-18절) 라고 쓰여 있습니다.
여기서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이것을 읽으면 빌립이 먼저 와서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을 때에는 성령이 주어지지 않았느냐는 의문이 생깁니다. 이구절의 성경 말씀만을 읽으면 세례를 받는 것과 성령을 받는 것은 다른 것 같이 보이지만, 다른 성경 말씀에는 세례를 받는 것과 동시에 성령을 받았다는 말씀도 있고, 성령을 받은 후에 세례를 받았다는 말씀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해석이 아주 어려운 말씀이지만, 여기에는 시몬이, 사람들이 성령을 받는 상태를 보았다고 써 있는 것을 볼때 이것은 사도행전 2장의 성령강림 때에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였다”고 쓰여 있는 것 같이 성령이 눈에 보이는 상태로 주어진 그 순간의 재현 같은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성령이라는 말은 이 사도행전에 몇번이나 나옵니다만 그것이 눈에 보이는 상태에서 나타나는 것은 드뭅니다. 그것이 2장에서 일어난 것과 마찬가지로 베드로와 요한들의 기도로 여기서 다시 일어났습니다.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교회의 전도가 새로운 단계에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맨 처음의 성령강림 때는 어디까지나 유대인들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여기 사마리아에서 유대인들이 싫어하는 그 사마리아 사람들 가운데서 일어났다는 것에 큰 의미가 있습니다.
사마리아에서 성령 충만이 퍼져 갔다는 것은 이 사마리아인들로 인한 교회가 예루살렘에 유대인들이 지은 교회와는 다른 교회가 아닌 같은 하나의 성령이 충만한 교회라는 것이 증명되었던 것입니다. 에베소서에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엡 4:5) 라고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면 나라나 인종이나 과거의 전쟁의 역사 등 모든 알력을 넘어서 사마리아 교회도 예루살렘 교회와 한 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교가 넘지 못했던 민족의 벽을 원시 기독교가 넘은 순간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눈 앞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목격하면서도 마술사 시몬이 한 것은 돈지갑을 꺼내어 그 속을 세면서 “저 지금 하신 것은 얼마에요?” 라고 묻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18절 후반 부분입니다. “돈을 드려 이르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18-19절)
안수하여 기도하면 보이는 형상으로 성령이 내려왔습니다. 그런 것은 베드로라도 요한이라도 컨트롤을 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시몬은 그것을 수중에 넣고 본인이 좋을데로 그 힘을 컨트롤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성령의 힘을 자신의 마술의 하나로 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에게는 마술은 상품이었습니다. 이 성령 충만을 상품으로 해서 한밑천 잡으려고, 더 사람들을 놀라게 해서 칭찬과 돈을 얻으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높이기 위해, 자기가 이익을 얻기 위해 성령의 힘을 이용하려고 한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베드로는 엄격하게 대응했습니다. 그것이 20절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20-23절)
성경에 있어서 죄란 이기주의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도 업신여기고 자기의 일만을 집착하는 것 그것이 죄입니다. 그것을 베드로는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다”라며 단호히 단죄했습니다.
하나님을 안다,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자기 중심의 생각을 버려 하나님을 중심으로 자기를 더 큰 테두리 속에 놓는 것입니다.
원래 기독교의 신앙이라는 것은 자기가 하나님을 믿는지 안 믿는지라는 판단 기준 위에 서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중심에 놓고 믿는지 안 믿는지 하나님을 판정해서 그것으로 믿는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과는 차원이 다르다고나 할까요. 무언가를 계기로 하나님을 만나고 그 때까지 자기 중심으로 돌았던 세계가 하나님을 중심으로 도는 세계로 바뀌는 것 그것이 신앙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안 계시는 세계와 하나님께서 계시는 세계와는 정반대인 것입니다. 그래서 원래 디메리트라고 생각했던 것이 메리트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역전이 일어납니다. 거기서는 실패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불가결한 단련의 때가 되고, 혼자 있는 시간이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의 시간이 되고 반대로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맛보는 시간이 됩니다. 우리의 한계와 마지막에 오는 죽음이 무한한 영원한 생명의 입구가 되는 것입니다. 돈이 없어도, 힘이 없어도 환영받고 사랑받는다. 그러한 세계가 열리는 것입니다.
예배 부름으로서 봉독한 이사야 55장 1절에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우리는 구하면 누구든지 무상으로 값 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도 성령강림을 받읍시다. 성령강림을 받고 자기 중심의 생각을 버립시다.
성령 강림이 지금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고,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예배 장소에는 하나님의 은혜의 큰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하늘로부터의 하나님의 말씀, 즉 예수 그리스도를 받고 있습니다. 눈을 감고 기도할 때에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하나님으로부터의 무상의 사랑을 우리 여기서 지금 충분히 받고 돌아갑시다.
【 2020年 8月 9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
「神の賜物をいただこう」 使徒言行録 8章 14~25節
先週の御言葉に登場しましたサマリアの魔術師シモンが今日の御言葉にも登場しています。シモンは迫害を逃れるためにエルサレムからサマリアの町まで逃げてきたフィリポと出会いました。そして、自分にはない愛をもって、不思議な業をなすフィリポに感銘を受けたのです。そのフィリポの愛を通して、イエスさまの愛を知り、シモンは信仰を持つに至りました。そして、フィリポから洗礼を受け、新たな信仰生活が始まったわけですね。確かに、シモンはイエスさまに出会い、信仰を持ち、新たな信仰生活を始めました。しかし、彼の中には昔の考え方がまだ残っておりました。それは自分中心的な考え方で、損得勘定に基づく判断が彼の心を支配していたようです。
彼がフィリポから洗礼を受けたのも、どこかで、洗礼を受ければ、その見返りに何かもっと素晴らしい力が与えられるのかもしれないと考えていたのかもしれません。
そこへ、エルサレム教会から、ペトロとヨハネという弟子の代表格が二人もやってきました。そして、聖霊を受けるようにとサマリアの人々のために祈ったとあります。これは大きなことです。17節には、「ペトロとヨハネが人々の上に手を置くと、彼らは聖霊を受けた。シモンは、使徒たちが手を置くことで、霊が与えられるのを見、」(17-18節)とあります。
ここで何が起こったのか? これを読みますと、フィリポが先に来てサマリアの人々に洗礼を授けた時には、そもそも聖霊が注がれなかったのだろうか、という疑問が湧いてきます。ここの聖書箇所だけを読みますと、洗礼を受けることと、聖霊を受けることが別のことのように思えますが、他の聖書箇所だと、洗礼と受けるのと同時に聖霊を受けたという箇所もありますし、聖霊を受けた後に洗礼を受けたという箇所もあります。ですから、解釈が難しい御言葉なのですけれども、ここには、シモンが、人々が聖霊を受ける様を見た、と書かれていることから、これは、使徒言行録2章に記されている、あのペンテコステの時の、炎のような舌が分かれ分かれに現れたと書かれているような、聖霊が目に見えるかたちで天から注がれた、あの瞬間の再現のようなことなのではないかと考えられます。聖霊という言葉は、この使徒言行録の至る所に出てきて、この使徒言行録を導きますけれども、それが目に見えるようなかたちで現れるのは稀です。それが、2章で起こったのと同じように、ペトロとヨハネたちの祈りによってまたここで起こりました。 なぜ、このようなことが起こったのか? 考えられますことは、教会の伝道が新たな段階に入ったということです。最初のペンテコステの時は、あくまでもユダヤ人たちに対するものでした。それが、ここサマリアにおいて、ユダヤ人たちが忌み嫌っているサマリア人たちの間で起こったということに大きな意味があります。
サマリアにおける神の聖霊の注ぎが拡がって行ったというのは、このサマリア人による教会が、エルサレムにユダヤ人たちが建てた教会とは、別の教会なのではなくて、同じ、一つの、神の聖霊がしっかりと注がれる教会なのだということが証明されたのです。エフェソの信徒への手紙に、「主は一人、信仰は一つ、洗礼は一つ」(エフェソ4:5)と言われていますように、イエス・キリストの名によって洗礼を受けるならば、国や人種や過去の戦争の歴史などのあらゆる軋轢を超えて、サマリアの教会も、エルサレムの教会と一体なのだということです。これは、ユダヤ教が越えられなかった民族の壁を、原始キリスト教が乗り越えた瞬間の出来事でした。
しかし、目の前でそういうことが起こっていることを目撃しながらも、魔術師シモンがしたことは、財布を取り出してきて、その中身を数えながら、「え~っと、今のいくらですか?」と聞く、そういうことでした。18節後半のところです。「金を持って来て、言った。『わたしが手を置けば、だれでも聖霊が受けられるように、わたしにもその力を授けてください。』」
祈って、手を置いたら、見えるかたちで聖霊が降った。こんなことは、ペトロにとってもヨハネにとっても、コントロールして出来るようなこと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けれどもシモンは、それを、手中に収めて、好きなようにその力をコントロールしようとしたわけです。聖霊の力を自分の魔術の一つとしようとしたわけですね。彼にとって魔術は商品でした。この聖霊の注ぎを商品にして、もう一山当てよう、もっと人々を騒がせ驚かせよう。そして賞賛と、さらなるお金を得ようと考えたわけですね。彼は、自分を高めるために、自分が利益を得るために、神さまの聖霊の力を利用しようとしたのです。
これに対してペトロは厳しく対応しています。それが20節です。「すると、ペトロは言った。『この金は、お前と一緒に滅びてしまうがよい。神の賜物を金で手に入れられると思っているからだ。お前はこのことに何のかかわりもなければ、権利もない。お前の心が神の前に正しくないからだ。この悪事を悔い改め、主に祈れ。そのような心の思いでも、赦していただけるかもしれないからだ。お前は腹黒い者であり、悪の縄目に縛られていることが、わたしには分かっている。』」(20-23節)
聖書において、罪とは、エゴイズムのことです。神さまのことを考えず、人のこともないがしろにし、自分のことだけに執着すること、それが罪です。そしてその態度は、自分の利益を最優先する消費者心理とも重なります。それをペトロは、「お前の心は、神の前に正しくない」と、きっぱりと断罪しました。
神さまを知る、信仰を持つということは、自分中心の考えを取っ払って、神さまを中心に、自分をもっと大きな枠組みの中に置くことです。
そもそもキリスト教の信仰というのは、自分が神さまを信じるかどうなのか、という判断基準の上に立っているのではないんです。神さまを前に、自分を中心にして信じるかどうなのか、神さまを品定めして、それでようやく信じるということではないんですね。
それとは次元が違うと言いますか、あることがきっかけで神さまと出会い、それまで自分中心に回っていた世界が神さまを中心にして回る世界へと変わること、それが信仰をするということです。ですから、神さまがいない世界と神さまがいる世界とは真逆なのですだからこそ、もともとデメリットだと思っていたようなことが、メリットになるのです。そういう逆転が起こります。そこでは失敗が、神さまによる不可欠な鍛錬の時となり、一人でいる時間が、神さまとの深い出会いと、逆に一人ではないことを味わい知る時間になる。私たちの限界と最後に来る死が、無限の永遠の命の入り口になるのです。お金がなくても、力がなくても、招かれ、歓迎され、愛される。そういう世界が開けるのです。
礼拝の招きの言葉として読みましたイザヤ書55章1節にこうありました。「渇きを覚えている者は皆、水のところに来るがよい。銀を持たない者も来るがよい。穀物を求めて、食べよ。来て、銀を払うことなく穀物を求め/価を払うことなく、ぶどう酒と乳を得よ。」
私たちは求めれば、誰でも、無償で、価無く、神さまの恵みを受け取ることが出来るのです。ですから皆さん、私たちも聖霊の注ぎを受けましょう。聖霊の注ぎを受けて、自分中心の考えを取り払いましょう。
聖霊の注ぎは、今は私たちの目には見えず、耳には何も聞こえません。でも、今この礼拝の場所には、神の恵みの大雨が降っています。私たちの心は、天からの神さまの言葉すなわちイエスキリストを、受けています。目を閉じて祈るときに、それが分かります。この神さまからの無償の愛を、私たちは今、たっぷりと受け取って帰りましょう。
【2020년 8월 9일 주일예배(요약판)】
“하나님의 선물을 받자” 사도행전 8장 14~25절
지난 주 성경말씀에 등장한 사마리아의 마술사 시몬이 오늘의 성경말씀에도 등장합니다. 시몬은 박해를 면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 마을까지 도망쳐 온 빌립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자기에게는 없는 사랑을 가지고 불가사의한 일을 하는 빌립에게 감명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 빌립의 사랑을 통해서 예수님의 사랑을 알아 시몬은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빌립에게서 세례를 받고 새로운 신앙 생활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틀림없이 시몬은 예수님을 만나서 신앙을 갖고 새로운 신앙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옛날의 사고방식이 아직도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 중심적인 사고방식이며 손익을 따져 셈하는 판단이 그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빌립에게서 세례를 받은 것도 세례를 받으면 뭔가 그 보답으로 더 굉장한 힘이 주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였을지도 모릅니다.
거기에 예루살렘 교회에서 베드로와 요한이라는 제자의 대표격인 두 사람이 왔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도록 사마리아 사람들을 위해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17절에는 “이에 두 사도가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17-18절) 라고 쓰여 있습니다.
여기서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이것을 읽으면 빌립이 먼저 와서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을 때에는 성령이 주어지지 않았느냐는 의문이 생깁니다. 이구절의 성경 말씀만을 읽으면 세례를 받는 것과 성령을 받는 것은 다른 것 같이 보이지만, 다른 성경 말씀에는 세례를 받는 것과 동시에 성령을 받았다는 말씀도 있고, 성령을 받은 후에 세례를 받았다는 말씀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해석이 아주 어려운 말씀이지만, 여기에는 시몬이, 사람들이 성령을 받는 상태를 보았다고 써 있는 것을 볼때 이것은 사도행전 2장의 성령강림 때에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였다”고 쓰여 있는 것 같이 성령이 눈에 보이는 상태로 주어진 그 순간의 재현 같은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성령이라는 말은 이 사도행전에 몇번이나 나옵니다만 그것이 눈에 보이는 상태에서 나타나는 것은 드뭅니다. 그것이 2장에서 일어난 것과 마찬가지로 베드로와 요한들의 기도로 여기서 다시 일어났습니다.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교회의 전도가 새로운 단계에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맨 처음의 성령강림 때는 어디까지나 유대인들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여기 사마리아에서 유대인들이 싫어하는 그 사마리아 사람들 가운데서 일어났다는 것에 큰 의미가 있습니다.
사마리아에서 성령 충만이 퍼져 갔다는 것은 이 사마리아인들로 인한 교회가 예루살렘에 유대인들이 지은 교회와는 다른 교회가 아닌 같은 하나의 성령이 충만한 교회라는 것이 증명되었던 것입니다. 에베소서에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엡 4:5) 라고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면 나라나 인종이나 과거의 전쟁의 역사 등 모든 알력을 넘어서 사마리아 교회도 예루살렘 교회와 한 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교가 넘지 못했던 민족의 벽을 원시 기독교가 넘은 순간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눈 앞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목격하면서도 마술사 시몬이 한 것은 돈지갑을 꺼내어 그 속을 세면서 “저 지금 하신 것은 얼마에요?” 라고 묻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18절 후반 부분입니다. “돈을 드려 이르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18-19절)
안수하여 기도하면 보이는 형상으로 성령이 내려왔습니다. 그런 것은 베드로라도 요한이라도 컨트롤을 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시몬은 그것을 수중에 넣고 본인이 좋을데로 그 힘을 컨트롤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성령의 힘을 자신의 마술의 하나로 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에게는 마술은 상품이었습니다. 이 성령 충만을 상품으로 해서 한밑천 잡으려고, 더 사람들을 놀라게 해서 칭찬과 돈을 얻으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높이기 위해, 자기가 이익을 얻기 위해 성령의 힘을 이용하려고 한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베드로는 엄격하게 대응했습니다. 그것이 20절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20-23절)
성경에 있어서 죄란 이기주의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도 업신여기고 자기의 일만을 집착하는 것 그것이 죄입니다. 그것을 베드로는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다”라며 단호히 단죄했습니다.
하나님을 안다,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자기 중심의 생각을 버려 하나님을 중심으로 자기를 더 큰 테두리 속에 놓는 것입니다.
원래 기독교의 신앙이라는 것은 자기가 하나님을 믿는지 안 믿는지라는 판단 기준 위에 서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중심에 놓고 믿는지 안 믿는지 하나님을 판정해서 그것으로 믿는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과는 차원이 다르다고나 할까요. 무언가를 계기로 하나님을 만나고 그 때까지 자기 중심으로 돌았던 세계가 하나님을 중심으로 도는 세계로 바뀌는 것 그것이 신앙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안 계시는 세계와 하나님께서 계시는 세계와는 정반대인 것입니다. 그래서 원래 디메리트라고 생각했던 것이 메리트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역전이 일어납니다. 거기서는 실패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불가결한 단련의 때가 되고, 혼자 있는 시간이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의 시간이 되고 반대로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맛보는 시간이 됩니다. 우리의 한계와 마지막에 오는 죽음이 무한한 영원한 생명의 입구가 되는 것입니다. 돈이 없어도, 힘이 없어도 환영받고 사랑받는다. 그러한 세계가 열리는 것입니다.
예배 부름으로서 봉독한 이사야 55장 1절에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우리는 구하면 누구든지 무상으로 값 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도 성령강림을 받읍시다. 성령강림을 받고 자기 중심의 생각을 버립시다.
성령 강림이 지금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고,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예배 장소에는 하나님의 은혜의 큰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하늘로부터의 하나님의 말씀, 즉 예수 그리스도를 받고 있습니다. 눈을 감고 기도할 때에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하나님으로부터의 무상의 사랑을 우리 여기서 지금 충분히 받고 돌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