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성경말씀은 일본어 성경에는 “사울의 회심”이라는 표제가 붙어 있습니다. “회심”이란 180도로 마음을 돌린다는 말입니다. 보통은 회개라는 의미로 쓰이는 말입니다. 내용적으로는 교회를 박해하던 사울이 회개하여 복음을 전하는 자로 되는 계기의 이야기이므로 “사울의 회개” 라는 표제로도 좋을텐데, 일본어 성경에서는 일부러 “회심”이라는 표제를 붙인 것입니다. 그것은 이 성경말씀의 주제가 “회개”가 아니라 “회심”이기 때문입니다. “회심”, 마음을 돌린다. 마음의 방향을 바꿀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마음의 방향을 바꾼다는 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오랫동안 살아오면서 우리 마음의 방향이라는 건 어느 정도 이미 굳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방향이라는 것은 무엇을 목표로 해 왔느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생의 목표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인생의 목표를 바꾼다는 것은 대단한 결단과 각오가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면, 오늘의 성경말씀은 그것에 대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일까요? 성경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먼저 사울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조금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사울은 갈리기아 다소(지금의 터키 남동부에 있었던 도시)에서 태어난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가말리엘이라는 공회의 회원이기도 한 유대교의 스승 밑에서 성경을 배웠습니다. 그러므로 사울은 누구보다도 성경과 율법을 잘 이해하고 있었지만, 그의 성경에 대한 이해는 지극히 인간적인 눈으로 보는 것이었으며, 하나님의 마음보다도 먼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오직 지키는 것보다도 마음을 하나님으로 향하는 것, 마음을 하나님으로 향하여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교회는 그 가르침을 따르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사울로서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가 그동안 열심히 해 온 모든 일들을 부정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사울은 그 방면의 엘리트이자 젊은 리더적 존재였기에 더욱 더 기독교회를 미워했던 것입니다. 사울은 철저히 박해를 행하기 위해 대제사장의 공문을 챙겨서 다메섹으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다메섹에 다가갔을 때 갑자기 하늘로부터 빛이 비춰졌습니다. 그리고 음성뿐이긴하였습니다만, 예수님께서 등장 하셔서 이렇게 사울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4절) 사울은 “주여 누구시니이까”(5절)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돌아온 대답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5절)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사울이라고 부르셨습니다만, 그리스어 원문에는 그리스어가 아닌 히브리어로 쓰여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히브리 말로 “사울아” 라고 부르셨습니다. 히브리어는 유대인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언어인데 여기서 예수님께서 그 말로, 그 언어로 부르신 것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라는 말씀입니다. “어찌하여 교회를 박해하느냐”가 아닙니다. “어찌하여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느냐”도 아닙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사울이 박해하고 있는 것은 교회이며 크리스천 한 사람 한 사람이지만, 이 목소리는 교회가 나 자신이요 크리스천이란 나 자신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울은 이것에 대해서 “주여 누구시니이까” 라고 물었습니다. “어째서 크리스천을 박해하면 안 됩니까?” 라고 물었던 게 아닙니다. “왜 교회를 부수면 안 됩니까?” 라고 물었던 것도 아닙니다. “주여 누구시니이까?” 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이 때야 비로소 사울은 하나님과 마주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5절) 라고.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사울을 만나 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와 너라는 관계가 여기서 맺어져 있습니다. 그것 뿐만 아닙니다. 계속해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향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6절) 이 때, 사울은 목숨을 빼앗겨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울에게 예수님께서는 역할을 주셨습니다.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은 곳에서 설 수 있게 해 주신 것입니다. 이 때, 사울의 눈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이것은 사울이 지금부터 행하려는 일이 자기의 눈으로 보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사울이 해야하는 일을 알게 되었을 때, 다시 그의 눈을 보이게 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 때부터 사울은 무엇을 보게 되었을까요? 지금까지 사울은 사람을 보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율법을 지키고 있는지 어떤지, 사울의 눈은 사람을 검사하는 냉엄한 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다시 볼 수 있게 되었을 때부터는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하나님의 사랑으로, 또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눈을 향하게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회심입니다.
사울의 시각은 바뀌었습니다. 마음이 향하는 방향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바꾼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바꿔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회심도 생각해 보면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요? 물론 사울처럼 극적인 경험은 아닐지라도, 비슷한 경험이 있지는 않았을까요?
그러므로 우리는 이 교회라는 장소에 모여 있는 게 아닐까요? 이 장소는 특별한 장소입니다. 오늘, 우리는 들었습니다. 교회는 예수님 자신입니다. 우리로서는 도저히 그렇게 생각할 수 없어도 예수님께 있어서는 그런 것입니다.
사울은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져 다시 보이게 되었습니다. 그가 눈을 뜨고 있지 않았던 게 아니었습니다. 눈은 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만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뚜렷이 보이게 되었습니다. 저 스데반이 보고 있었던 예수님의 모습이 보이게 된 것입니다. 실로 그는 바뀌어진 것입니다.
이 일을 통해서 사울은 지금까지 사울이라는 이름을 썼습니다만, 바울이라는 이름을 쓰게 됩니다. 사울이라는 것은 이스라엘의 옛날 왕의 이름입니다. 그것에 비해 바울이라는 것은 그리스어로 “작은 자” 라는 의미의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났던 작은 자가 큰 일을 해 나아 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약속해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모두 다 참으로 작은 자이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 자신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못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고 주어진 장소에서 복음의 씨를, 사랑의 씨를 뿌려 갑시다.
【 2020年 8月 30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
「回 心」 使徒言行録 9章 1~19節
日本語の聖書箇所には「サウロの回心」というタイトル(小見出し)が付けられています。「回心」、心を回す、180度回す、ということです。普通は、悔い改めるということで用いられる言葉です。内容的には、教会を迫害していたサウロが悔い改めて、福音を伝える者になるきっかけの話ですから、「サウロの悔い改め」というタイトルで良いのですが、日本語訳ではわざわざ「回心」とタイトルをつけているんですね。それはこの聖書箇所のテーマが「悔い改め」ということではなく「回心」ということだからです。「回心」、心を回す、心の向きを変えることが必要なんだと言うことなんですね。
しかし、そうは言っても心の向きを変えるということは簡単なことではありません。それまでの長い間、生きてきた中で、言ってみれば私たちの心の向きというのはもう固まっているわけです。心の向きというのは、それは何を目指してきたのか、ということです。それは人生の目標ということでもありますが、人生の目標を変えるというのは、大変な決断が必要であり、覚悟が必要です。ですから、それは楽なことではないんですね。
では、今日の御言葉はそれについて、何を私たちに教えてくれるでしょうか。御言葉に聞きたいと思います。
まず、サウロという人物について少し説明が必要かと思いますが、サウロはタルソス(今のトルコの南東部にあった町)で生まれたユダヤ人でした。それから、エルサレムでガマリエルというサンヘリドンのメンバーでもあるユダヤ教の先生のもとで聖書を学びました。ですから、サウロは誰よりも聖書と律法をよく理解していたわけですが、彼の聖書理解は、人間的な目から見たものであり、神さまの御心よりも、律法を守ることがすべてでした。
けれども、イエスさまは律法をひたすら守ることよりも、心を神さまに向けること、心を神さまに向けて、神さまと人とを愛することを教えました。教会はその教えに従っていたわけですから、これはもうサウロとしては受け入れられません。自分が一生懸命やっていることを否定されているように思うわけです。ましてサウルはその道のエリートで、若いリーダー的存在でしたから、なおさらキリスト教会を憎んだのです。サウロは徹底的に迫害を行おうとして、大祭司の手紙を携えて、ダマスコという町へ出かけました。
そして、ダマスコに近づいた時、突然、天からの光に照らされます。そして、声だけでありますが、イエスさまが登場して、このようにサウロに言うのです。「サウル、サウル、なぜ、わたしを迫害するのか」(4節)。「主よ、あなたはどなたですか」(5節)、サウロは答えます。そうすると返ってきた答えはこうでした。「わたしは、あなたが迫害しているイエスである」(5節)。
ここにイエスさまの呼び掛けとして「サウル」という名が出て来ます。本来、彼の名前はヘブル語でサウルという名前です。それがギリシャ語表記されたのがサウロです。イエスさまはヘブル語で「サウル」と呼びました。ヘブル語というのはユダヤ人にとっては神の言葉なのですが、その言葉で呼び掛けたのです。
「サウル、サウル、なぜ、わたしを迫害するのか」。ここで一番注目したいのは、「なぜ、わたしを迫害するのか」というこの言葉です。「なぜ、教会を迫害するのか」ではないんですね。「なぜ、クリスチャンを迫害するのか」でもないんです。「なぜ、わたしを迫害するのか」。
パウロが迫害しているのは教会であり、クリスチャン一人一人なんですが、この声は、教会は自分自身である、クリスチャンとは私自身であると言っているのです。サウロはこれに対して、「主よ、あなたはどなたですか」と問いかけました。「なぜクリスチャンを迫害してはいけないのですか」と聞いたのではありません。「なぜ教会をつぶしてはいけないのですか」と聞いたのでもありません。「あなたはどなたですか」と聞いたのです。この時初めて、サウロは神さまに向き合ったのです。
そして、答えが返ってきました。「わたしは、あなたが迫害しているイエスである」(5節)、と。この言葉は、イエスさまがサウロに出会ってくださったということを意味しています。わたしとあなたという関係がここで結ばれています。それだけではありません。続けて、声が聞こえます。「起きて町に入れ。そうすれば、あなたのなすべきことが知らされる」(6節)。この時、サウロは命を取られていてもおかしくはなかったのです。けれども、そのサウロに、イエスさまは役割を与えてくださるのです。もう立てないようなところから、立ち上がらせてくださるのです。この時、サウロの目は見えなくなっていました。これは、サウロがこれからなすべきことが、自分の目で見て判断するものではないということです。そしてこの目は、サウロがなすべきことを知らされた時、再び見えるようにされるのです。
その時から、サウロは何を見るようになったでしょうか。これまでサウロは人を見ていました。人が律法を守っているかどうか。サウロの目は人をチェックする厳しい目でした。けれども、再び見えるようになってからは、今までは見えていなかった神さまの愛に、神さまの導きに目を向けるようになっていくのです。まさに回心です。
サウロは目が変わりました。心の向く方向が変わったということです。自分で変えたわけではありません。神さまが変えてくださったんです。私たちの回心も、考えてみればそのようなものではなかったでしょうか。勿論、サウロのような劇的な出来事ではないかも知れませんが、似たような経験があった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だからこそ、私たちは、この教会という場所に集ってい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この場所は特別な場所です。今日、私たちは聞きました。教会はイエスさまご自身なんです。そして、私たちはイエスさまご自身なんです。私たちにはとてもそのように思えないとしても、イエスさまにとってはそうなのです。
サウロは目からうろこのようなものが落ち、彼の目は見えるようになりました。彼の目が開けていなかったわけではありません。目は開いていたのです。でも、見えていなかったのです。それがはっきりと見えるようになりました。あのステファノが見ていたイエスさまの姿が見えるようになったのです。まさに彼は変えられたのです。
この出来事を通して、サウロはこれまではサウロと名乗っていましたが、パウロと名乗るようになります。サウロというのはイスラエルの昔の王様の名前です。それに対して、パウロというのは、ギリシャ語で「小さい者」という意味の言葉です。キリストに出会った小さい者が、大きな働きをなしていくのです。そのことを聖書は私たちに約束してくれているのです。
皆さん、私たちは皆まことに小さい者でありますが、しかし、私たちはキリスト自身であるのです。イエスさまがそうおっしゃって下さっています。ですから、私たちにできないことはないのです。そのことを信じ、与えられた場所で福音の種を、愛の種を蒔き続けていきましょう。
【2020년 8월 30일 주일예배(요약판)】
“회 심” 사도행전 9장 1~19절
오늘의 성경말씀은 일본어 성경에는 “사울의 회심”이라는 표제가 붙어 있습니다. “회심”이란 180도로 마음을 돌린다는 말입니다. 보통은 회개라는 의미로 쓰이는 말입니다. 내용적으로는 교회를 박해하던 사울이 회개하여 복음을 전하는 자로 되는 계기의 이야기이므로 “사울의 회개” 라는 표제로도 좋을텐데, 일본어 성경에서는 일부러 “회심”이라는 표제를 붙인 것입니다. 그것은 이 성경말씀의 주제가 “회개”가 아니라 “회심”이기 때문입니다. “회심”, 마음을 돌린다. 마음의 방향을 바꿀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마음의 방향을 바꾼다는 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오랫동안 살아오면서 우리 마음의 방향이라는 건 어느 정도 이미 굳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방향이라는 것은 무엇을 목표로 해 왔느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생의 목표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인생의 목표를 바꾼다는 것은 대단한 결단과 각오가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면, 오늘의 성경말씀은 그것에 대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일까요? 성경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먼저 사울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조금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사울은 갈리기아 다소(지금의 터키 남동부에 있었던 도시)에서 태어난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가말리엘이라는 공회의 회원이기도 한 유대교의 스승 밑에서 성경을 배웠습니다. 그러므로 사울은 누구보다도 성경과 율법을 잘 이해하고 있었지만, 그의 성경에 대한 이해는 지극히 인간적인 눈으로 보는 것이었으며, 하나님의 마음보다도 먼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오직 지키는 것보다도 마음을 하나님으로 향하는 것, 마음을 하나님으로 향하여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교회는 그 가르침을 따르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사울로서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가 그동안 열심히 해 온 모든 일들을 부정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사울은 그 방면의 엘리트이자 젊은 리더적 존재였기에 더욱 더 기독교회를 미워했던 것입니다. 사울은 철저히 박해를 행하기 위해 대제사장의 공문을 챙겨서 다메섹으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다메섹에 다가갔을 때 갑자기 하늘로부터 빛이 비춰졌습니다. 그리고 음성뿐이긴하였습니다만, 예수님께서 등장 하셔서 이렇게 사울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4절) 사울은 “주여 누구시니이까”(5절)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돌아온 대답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5절)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사울이라고 부르셨습니다만, 그리스어 원문에는 그리스어가 아닌 히브리어로 쓰여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히브리 말로 “사울아” 라고 부르셨습니다. 히브리어는 유대인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언어인데 여기서 예수님께서 그 말로, 그 언어로 부르신 것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라는 말씀입니다. “어찌하여 교회를 박해하느냐”가 아닙니다. “어찌하여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느냐”도 아닙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사울이 박해하고 있는 것은 교회이며 크리스천 한 사람 한 사람이지만, 이 목소리는 교회가 나 자신이요 크리스천이란 나 자신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울은 이것에 대해서 “주여 누구시니이까” 라고 물었습니다. “어째서 크리스천을 박해하면 안 됩니까?” 라고 물었던 게 아닙니다. “왜 교회를 부수면 안 됩니까?” 라고 물었던 것도 아닙니다. “주여 누구시니이까?” 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이 때야 비로소 사울은 하나님과 마주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5절) 라고.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사울을 만나 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와 너라는 관계가 여기서 맺어져 있습니다. 그것 뿐만 아닙니다. 계속해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향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6절) 이 때, 사울은 목숨을 빼앗겨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울에게 예수님께서는 역할을 주셨습니다.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은 곳에서 설 수 있게 해 주신 것입니다. 이 때, 사울의 눈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이것은 사울이 지금부터 행하려는 일이 자기의 눈으로 보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사울이 해야하는 일을 알게 되었을 때, 다시 그의 눈을 보이게 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 때부터 사울은 무엇을 보게 되었을까요? 지금까지 사울은 사람을 보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율법을 지키고 있는지 어떤지, 사울의 눈은 사람을 검사하는 냉엄한 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다시 볼 수 있게 되었을 때부터는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하나님의 사랑으로, 또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눈을 향하게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회심입니다.
사울의 시각은 바뀌었습니다. 마음이 향하는 방향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바꾼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바꿔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회심도 생각해 보면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요? 물론 사울처럼 극적인 경험은 아닐지라도, 비슷한 경험이 있지는 않았을까요?
그러므로 우리는 이 교회라는 장소에 모여 있는 게 아닐까요? 이 장소는 특별한 장소입니다. 오늘, 우리는 들었습니다. 교회는 예수님 자신입니다. 우리로서는 도저히 그렇게 생각할 수 없어도 예수님께 있어서는 그런 것입니다.
사울은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져 다시 보이게 되었습니다. 그가 눈을 뜨고 있지 않았던 게 아니었습니다. 눈은 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만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뚜렷이 보이게 되었습니다. 저 스데반이 보고 있었던 예수님의 모습이 보이게 된 것입니다. 실로 그는 바뀌어진 것입니다.
이 일을 통해서 사울은 지금까지 사울이라는 이름을 썼습니다만, 바울이라는 이름을 쓰게 됩니다. 사울이라는 것은 이스라엘의 옛날 왕의 이름입니다. 그것에 비해 바울이라는 것은 그리스어로 “작은 자” 라는 의미의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났던 작은 자가 큰 일을 해 나아 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약속해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모두 다 참으로 작은 자이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 자신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못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고 주어진 장소에서 복음의 씨를, 사랑의 씨를 뿌려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