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에 의해 사마리아 땅에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유대교의 일파로서의 틀을 넘어서, 기독교가 이미 유대의 종교만이 아니라 세계 종교로 확대되는 선구적인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빌립은 사마리아 땅에서 큰 전도 성과를 얻었습니다만, 이번에는 예루살렘에서 남서쪽으로 60킬로 정도 내려간 곳에 자리한 가사라는 황폐한 동네로 파견되었습니다.
가사는 인적이 드문 쓸쓸한 곳이었습니다만, 실은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한 사람의 구도자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사마리아의 많은 사람들을 위해 발휘된 빌립의 능력과 노력을 하나님께서는 이곳에서 단 한 사람을 위해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 인물은 바로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관리였습니다.
그는 여왕의 모든 국고를 맡고 있는 아주 우수한 능력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그가 일부러 에디오피아에서 예루살렘까지 구약성서의 하나님을 예배하러 왔다라고 하는 아주 열심히 구도하는 모습이 성서에는 쓰여 있습니다.
어떻게 에디오피아의 관리가 예루살렘 성전에 예배하러 왔는지 참으로 불가사의합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성경에는 쓰여 있지 않습니다. 상상할 수밖에 없지만 단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에디오피아는 이스라엘과 깊은 관계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열왕기상 10장에 스바의 여왕이 이스라엘의 솔로몬 왕을 찾아왔다고 쓰여 있습니다만, 그 스바가 에디오피아입니다. 그리고 에디오피아의 전설에 의거하면 그 이스라엘의 솔로몬과 스바의 여왕 사이에 태어난 아이가 에디오피아 왕실을 계승해 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왕의 관리인 그는 이스라엘과 그 신앙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관리인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27절) 라고 쓰여 있습니다. 내시라는 것은 여왕을 모시는 거세된 관리입니다. 그가 이렇게 직접 여왕을 모시는 관리까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내시였기 때문입니다. 즉 그의 높은 지위나 명예는 남성으로서의 기능을 잃어버리는 것과 상환해서 얻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내시는 유대인으로부터 보면 결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구약성서 신명기 23장 1절에 이런 규칙이 있습니다. “고환이 상한 자나 음경이 잘린 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신명기23:1)
유대인이라는 것은 이른바 민족적인 집단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예배드려 섬기는 자가 되면 민족적인 출신은 관계없이 유대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민족이라고 하기보다는 그러한 신앙공동체, 하나님의 백성의 집단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증거로서 할례를 받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거세된 내시는 그것을 할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아무리 열심히 구해도 유대인 즉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에디오피아에서 예루살렘까지 그 먼길을 예배하러 올 만큼 여호와 하나님을 사모하며 열심히 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에 가로막혀 결코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시야말로 진실한 하나님이시며 여기에 진짜 구원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날이 갈수록 강하게 들어가는 것입니다. 거기에 그의 깊은 슬픔과 비탄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예루살렘에 와도 성전 안에 들어갈 수도 없고 이방인의 뜰이라는 떨어진 곳에서 예배를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강한 동경과 깊은 슬픔을 함께 안으면서 그는 예배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루살렘을 떠날 때에 그는 거금을 털어서 어떤 물건을 샀던 것이니다. 그것은 성경입니다. 당시의 성경은 모두 다 손으로 베낀 것이며 큰 두루마리였습니다. 그당시 성경을 자기 몫으로 가진다는 것은 어지간히 웬만한 부자가 아니면 살 수 없는 그런 시대였습니다. 그는 그런 성경을 사서 귀국길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길을 가면서 그것을 읽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봐도 아까 말씀드린 것 처럼 그가 이방인으로서 또 내시로서의 많은 차별을 받으면서도 여호와 하나님을 얼마나 간절히 진지하게 구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빌립을 만났습니다. 28절에서 31절까지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돌아가는데 수레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냐 대답하되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 하고 빌립을 청하여 수레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28-31절)
아마도 비싼 수레였을 것이며, 주위에 시중드는 사람도 몇 사람 있었을 그런 수레에 빌립은 성령의 인도를 받고 달려갔습니다. 이 만남 모두가 성령의 인도하심이었습니다. 보통이라면 빌립은 수레에 가까이 나아가지도 않았겠지요. 그러나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말을 건넸습니다. 지금 여기서 꼭 저 사람에게 말을 건네야 한다. 그러기 위해 오늘 이 자리가 있는 것이라 여기며 빌립은 수레 가까이 갔습니다. 그랬더니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는 소리가 들린 것입니다. 이 이사야의 글을 읽는 소리를 듣는 순간 빌립은 역시 이 사람을 만나기 위해 나는 여기에 왔다라는 확신을 키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빌립은 “읽는 것을 깨닫느냐”고 말을 건네고, 내시는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고 말하며 수레에 올라 와 같이 앉으라고 부탁했습니다.
내시가 잘 모르면서도 낭독하고 있었던 말씀은 이사야 53장 7~8절의 말씀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예언하는 말씀입니다. 내시는 빌립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청컨대 내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냐 자기를 가리킴이냐 타인을 가리킴이냐”(33-34절)
인간적으로 보면 이것은 우연일지도 모릅니다. 빌립과 에디오피아의 내시가 우연히 만났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타이밍, 베스트 타이밍이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사람들이 보면 “설마” 라고 생각되는 일입니다.
이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주님의 사자가 지시하고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타이밍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빌립의 해설을 들었던 내시는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빌립은 바로 하나님으로 인하여 그 때 인도받고 쓰임 받았습니다. 그리고 에디오피아의 내시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바로 그 때가 아니면 안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때”를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 유대인으로부터 시작한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이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가운데 사마리아 사람에게로 확대되고 더 나아가 아프리카의 에디오피아 사람에게도 전해졌습니다. 종교도 인종도 다른 나라에 말입니다. 게다가 그는 구약성서의 율법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고 정하고 있었던 내시였습니다. 그러한 벽을 모두 다 때려 부수게 된 것이 오늘의 성경 말씀입니다. 게다가 때려 부순 것도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것들의 벽은 제거되었습니다. 이니 유대인도 이방인도 없습니다. 한국 사람도 일본 사람도 미국 사람도 아프리카 사람도 없습니다. 죄인이라도 귀신 들린 사람이라도 누구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나도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말씀에서 하나 더 기억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에디오피아 사람인 내시는 이 날 갑자기 하나님께 인도받고 예수님을 믿은 게 아니라 이전부터 씨가 뿌려졌다는 것입니다.
그는 빌립을 만나기 전에 성서에 쓰여 있는 진실한 하나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멀리 예루살렘까지 순례 여행하러 왔습니다. 그만큼 그는 진실한 하나님을, 진짜 구원을 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빌립이 왔을 때에는 벌써 내시의 마음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는 진실한 하나님을 알고 있었을까요?
아마 누군가가 가르쳐 주었겠지요. 누군가가 그의 마음에 씨를 뿌린 것입니다. 그러나 그 씨를 뿌린 사람의 이름은 써 있지 않습니다. 무명의 누군가가 그의 마음에 씨를 뿌렸던 것이었습니다. 전도란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복음의 씨를 뿌린다. 그것이 언제 싹이 나고 성장하여 열매를 맺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씨가 뿌려져 있기 때문에 빌립의 말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씨를 뿌린다. 소중한 것입니다. 그리고 때를 지배하시는 하나님께서 언젠가 열매를 맺는 베스트 타이밍을 정해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39절에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라고 쓰여 있습니다. 내시는 여기서 세례를 받고 성경 속에 그리스도를 찾아내서 기쁨에 넘쳤습니다. 그는 이미 혼자서 여행을 하는 게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스도와 함께 걷는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된 내시에게 있어서 혼자서 귀국하는 여행길은 빌립과의 이별을 슬퍼하는 걸음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를 만났던 장소에서 새롭게 하나님으로 맡은 자리로 파견되어 간다는 파견되는 걸음으로 바꿔졌습니다.
실은 이 내시가 경험한 것은 이곳에서 우리가 매주 경험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여기 이 교회를 나설때에 성경에서 들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음성에 힘입어 기뻐하면서 돌아갑시다.
【 2020年 8月 23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
「神さまのタイミング」 使徒言行録 8章 26~40節
フィリポによってサマリアの地に福音が伝えられました。それはキリストの教会がユダヤ教の一派であった枠を超えて、キリスト教がもはやユダヤの宗教ではなく、世界宗教へと拡大される先駆けの出来事でした。このように、フィリポはサマリアの地で大きな伝道成果を得たわけですが、今度はエルサレムから南西に60キロほど下ったところにあるガザという寂れた町に遣わされます。ガザの町はあまり人もいないような寂しい所であったようですが、実は、神さまはこの地に、一人の求道者を備えてくださっていました。サマリアの大勢の人たちに対して発揮されたフィリポの賜物と労力を、神さまはここではそのたった一人の人に対して注がれています。その人物は、エチオピアの女王カンダケの高官でした。
彼は女王の全財産の管理を任されていた、非常に優秀で力のある人物でした。その彼が、わざわざエチオピアからエルサレムまで、旧約聖書の神を礼拝しに来ていたという、とても熱心に求道する姿が聖書には描かれています。
なぜ、エチオピアの高官がエルサレムの神殿に礼拝しに来ていたのか不思議です。そのことについては聖書には記されておりません。想像するしかないんですが、ただ、考えられますことは、エチオピアはイスラエルと深い関係がありました。それはイスラエルのソロモン王のところに、シェバの女王が訪れたという出来事が書かれていますが、あのシェバがエチオピアです。そしてエチオピアの伝説では、そのイスラエルのソロモン王とシェバの女王の間に生まれた子が、エチオピアの王室を継いでいったそうです。 ですから、女王の高官である彼は、イスラエルとその信仰について、よく知っていたようです。
聖書には、「エチオピアの宦官がエルサレムに礼拝に来て」(27節)とあります。宦官というのは、宮廷に仕える去勢された役人です。彼がここまで直接女王に仕える高官になれたのも彼が宦官であったからです。つまり彼の高い地位や名誉は、男性としての機能を失うことと引き換えに得られたものでした。
ただ、この宦官、ユダヤ人から見るならば、決して神の民になることが出来ない人でした。旧約聖書申命記の23章2節にこういう掟があります。「睾丸のつぶれた者、陰茎を切断されている者は主の会衆に加わることはできない」。
ユダヤ人というのは、いわゆる民族的集団ではありません。主なる神さまを信じ、礼拝し、仕える者となるならば、民族的出身はどうであれ、ユダヤ人になることが出来るのです。ユダヤ人は民族と言うよりも、そういう信仰共同体、神の民の集団なのです。ただ、その証しとして割礼を受けることが必要でした。しかし、去勢された宦官にはそれが出来なかったのです。ですから、彼がどんなに熱心に求めても、ユダヤ人、神の民に加えられることができないのです。
彼はエチオピアからエルサレムまではるばる礼拝をしに来るほどに、主なる神さまを慕い、熱心に求めています。しかし、律法に阻まれて、決して神の民に加わることができないのです。だからといって彼は、諦めることはありませんでした。主なる神さまこそまことの神であり、ここにこそ本当の救いがあるはずだ、という思いは日ましに強くなっていくのです。そこに、彼の深い悲しみ、嘆きがあったと思います。エルサレムに礼拝に来ても、神殿の中には入ることも出来ず、異邦人の庭という離れた所から礼拝を守るしかありません。このような強い憧れと深い悲しみを共に抱きながら、彼は礼拝を守ったことでしょう。そして、いよいよエルサレムを離れるに当って彼は、大枚の金を注ぎ込んであるものを買ったのです。それは、聖書です。当時の聖書は、全て手で書き写されたものであり、大きな巻物でした。聖書を自分のものとして持つなどということは、よほどの大金持ちでなければできない時代だったのです。彼はそういう買い物をして、聖書を持って帰国の途につきました。そして道々、馬車に揺られながらそれを読んでいたのです。このことから、先程申しましたように彼が、異邦人として、また宦官としての何重もの隔てを受けながらもなお主なる神さまを真剣に求めていたということがわかるのです。
そして、彼はフィリポと出くわします。28節から31節まで、もう一度お読みします。「帰る途中であった。彼は、馬車に乗って預言者イザヤの書を朗読していた。すると、“霊”がフィリポに、『追いかけて、あの馬車と一緒に行け』と言った。フィリポが走り寄ると、預言者イザヤの書を朗読しているのが聞こえたので、『読んでいることがお分かりになりますか』と言った。宦官は、『手引きしてくれる人がなければ、どうして分かりましょう』と言い、馬車に乗ってそばに座るようにフィリポに頼んだ。」
恐らく、高価な馬車であり、お付きの者たちも何人かいたであろうその馬車に、フィリポは、霊に促されて、走り寄っていきました。不思議な書き方が為されていますが、この出会いがすべて神さまの、聖霊の導きであったわけですね。通常でしたら、フィリポは馬車に近づくこともしないでしょう。しかし、聖霊に後押しされて、声を掛けました。今ここで、是が非でもあの人に声を掛けなければならない。そのために今日のこの場があるのだと、フィリポは馬車に近づきました。すると、預言者イザヤの書を朗読する声が聞こえたのです。このイザヤ書の朗読を聞いた瞬間に、フィリポは、ああやっぱり、この人に会うために私はここに来たのだという確信を深めたのだと思います。フィリポは、「読んでいることがお分かりになりますか」と声をかけ、宦官は、「手引きしてくれる人がなければ、どうして分かりましょう」と言い、馬車に乗ってそばに座るようにフィリポに頼みました。
宦官が、分からないながらも朗読していた御言葉は、イザヤ書53章の7~8節の御言葉でした。それはまさに、イエス・キリストの受難を預言している個所です。宦官はフィリポに質問をしました。「『どうぞ教えてください。預言者は、だれについてこう言っているのでしょうか。自分についてですか。だれかほかの人についてですか。』そこでフィリポは口を開き、聖書のこの個所から説きおこして、イエスについて福音を告げ知らせた。」(34-35節)
人間的に見ればこれは偶然かもしれません。フィリポとエチオピアの宦官が偶然出会った。しかし、これは神さまのタイミング、ベスト・タイミングであったわけです。エルサレムの教会の人たちから見れば「まさか!」と思われるような出来事です。
これは偶然でもなんでもはありません。天使が指示をし、聖霊が導かれている神さまのタイミングであったのです。そして、フィリポの解説を聞いた宦官は、イエスさまを信じて洗礼を受けるに至りました。フィリポはまさに、神さまによって、その時に導かれて用いられました。そして、エチオピアの宦官も神さまの恵みによって救われたのです。まさに、その時でなければなりませんでした。神さまは、その「時」をご存知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
さて、こうして、ユダヤ人から始まったイエス・キリストの信仰が、神さまの主導によってサマリア人へと広がり、さらにアフリカのエチオピア人へと伝えられた。宗教も人種も異なる国にです。しかも彼は旧約聖書の律法に神の民にはなれないと定められていた宦官でした。
そういう壁を、すべてぶち壊されたのが今日の聖書個所です。しかも、ぶち壊されたのは神さま御自身です。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それらの壁は取り払われたのです。もはやユダヤ人も異邦人もない。韓国人も日本人もアメリカ人もアフリカ人も違いはない。罪人でも悪霊にとりつかれた者でも、誰でもイエス・キリストを信じるならば救われる。私も救われるのです。
さて、今日の聖書箇所で、もう一つ覚えておきたいことがあります。それは、このエチオピア人の宦官は、この日いきなり神さまに導かれてイエスさまを信じたのではなく、以前から種が蒔かれていたということです。
彼はフィリポに出会う前に、聖書に記されている真の神さまを知っていました。そして、遠くエルサレムまで巡礼の旅に来ていました。それほど彼は真の神を、真の救いを求めていたわけです。フィリポが来た時にはすでに宦官の心は、キリストを受け容れる準備がされていたのです。なぜ彼は、真の神さまを知っていたのでしょうか?
きっと、誰かが教えたのでしょう。誰かが彼の心に種を蒔いていたのです。しかしその種を蒔いた人の名前は記されていません。無名の誰かが、彼の心に種を蒔いておりました。 伝道とは、種を蒔くことです。福音の種を蒔く。それがいつ芽を出して、成長し、実を結ぶかは分かりません。しかし種が蒔かれていたからこそ、フィリポの言葉を素直に受け容れることができました。種を蒔く。尊いことです。そして、時を支配する神さまが、いつか実を結ぶ時、ベスト・タイミングを定めて下さる。そう信じたいと思います。
39節に「宦官はもはやフィリポの姿を見なかったが、喜びにあふれて旅を続けた」とあります。宦官は、ここで洗礼を受け、聖書の中にキリストを見出し、喜びにあふれました。彼はもう一人で旅をするのではありません。キリストに出会い、キリストと共に歩む者となったのです。そして、そうなった宦官にとって、一人で帰国する旅路は、フィリポとの別離を悲しむ歩みではなくて、むしろ、キリストに出会った場所から新しく、神さまによって自分の持ち場に遣わされていくという、派遣される歩みへと変わりました。
実は、この宦官が経験したことは、私たちが毎週ここで経験することでもあるのです。私たちも、この教会からの帰り道を、聖書から聞こえるキリストの愛の声に、喜び力づけられて、帰っていきましょう。
【2020년 8월 23일 주일예배(요약판)】
“하나님의 타이밍” 사도행전 8장 26~40절
빌립에 의해 사마리아 땅에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유대교의 일파로서의 틀을 넘어서, 기독교가 이미 유대의 종교만이 아니라 세계 종교로 확대되는 선구적인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빌립은 사마리아 땅에서 큰 전도 성과를 얻었습니다만, 이번에는 예루살렘에서 남서쪽으로 60킬로 정도 내려간 곳에 자리한 가사라는 황폐한 동네로 파견되었습니다.
가사는 인적이 드문 쓸쓸한 곳이었습니다만, 실은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한 사람의 구도자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사마리아의 많은 사람들을 위해 발휘된 빌립의 능력과 노력을 하나님께서는 이곳에서 단 한 사람을 위해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 인물은 바로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관리였습니다.
그는 여왕의 모든 국고를 맡고 있는 아주 우수한 능력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그가 일부러 에디오피아에서 예루살렘까지 구약성서의 하나님을 예배하러 왔다라고 하는 아주 열심히 구도하는 모습이 성서에는 쓰여 있습니다.
어떻게 에디오피아의 관리가 예루살렘 성전에 예배하러 왔는지 참으로 불가사의합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성경에는 쓰여 있지 않습니다. 상상할 수밖에 없지만 단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에디오피아는 이스라엘과 깊은 관계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열왕기상 10장에 스바의 여왕이 이스라엘의 솔로몬 왕을 찾아왔다고 쓰여 있습니다만, 그 스바가 에디오피아입니다. 그리고 에디오피아의 전설에 의거하면 그 이스라엘의 솔로몬과 스바의 여왕 사이에 태어난 아이가 에디오피아 왕실을 계승해 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왕의 관리인 그는 이스라엘과 그 신앙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관리인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27절) 라고 쓰여 있습니다. 내시라는 것은 여왕을 모시는 거세된 관리입니다. 그가 이렇게 직접 여왕을 모시는 관리까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내시였기 때문입니다. 즉 그의 높은 지위나 명예는 남성으로서의 기능을 잃어버리는 것과 상환해서 얻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내시는 유대인으로부터 보면 결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구약성서 신명기 23장 1절에 이런 규칙이 있습니다. “고환이 상한 자나 음경이 잘린 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신명기23:1)
유대인이라는 것은 이른바 민족적인 집단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예배드려 섬기는 자가 되면 민족적인 출신은 관계없이 유대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민족이라고 하기보다는 그러한 신앙공동체, 하나님의 백성의 집단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증거로서 할례를 받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거세된 내시는 그것을 할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아무리 열심히 구해도 유대인 즉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에디오피아에서 예루살렘까지 그 먼길을 예배하러 올 만큼 여호와 하나님을 사모하며 열심히 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에 가로막혀 결코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시야말로 진실한 하나님이시며 여기에 진짜 구원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날이 갈수록 강하게 들어가는 것입니다. 거기에 그의 깊은 슬픔과 비탄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예루살렘에 와도 성전 안에 들어갈 수도 없고 이방인의 뜰이라는 떨어진 곳에서 예배를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강한 동경과 깊은 슬픔을 함께 안으면서 그는 예배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루살렘을 떠날 때에 그는 거금을 털어서 어떤 물건을 샀던 것이니다. 그것은 성경입니다. 당시의 성경은 모두 다 손으로 베낀 것이며 큰 두루마리였습니다. 그당시 성경을 자기 몫으로 가진다는 것은 어지간히 웬만한 부자가 아니면 살 수 없는 그런 시대였습니다. 그는 그런 성경을 사서 귀국길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길을 가면서 그것을 읽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봐도 아까 말씀드린 것 처럼 그가 이방인으로서 또 내시로서의 많은 차별을 받으면서도 여호와 하나님을 얼마나 간절히 진지하게 구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빌립을 만났습니다. 28절에서 31절까지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돌아가는데 수레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냐 대답하되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 하고 빌립을 청하여 수레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28-31절)
아마도 비싼 수레였을 것이며, 주위에 시중드는 사람도 몇 사람 있었을 그런 수레에 빌립은 성령의 인도를 받고 달려갔습니다. 이 만남 모두가 성령의 인도하심이었습니다. 보통이라면 빌립은 수레에 가까이 나아가지도 않았겠지요. 그러나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말을 건넸습니다. 지금 여기서 꼭 저 사람에게 말을 건네야 한다. 그러기 위해 오늘 이 자리가 있는 것이라 여기며 빌립은 수레 가까이 갔습니다. 그랬더니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는 소리가 들린 것입니다. 이 이사야의 글을 읽는 소리를 듣는 순간 빌립은 역시 이 사람을 만나기 위해 나는 여기에 왔다라는 확신을 키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빌립은 “읽는 것을 깨닫느냐”고 말을 건네고, 내시는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고 말하며 수레에 올라 와 같이 앉으라고 부탁했습니다.
내시가 잘 모르면서도 낭독하고 있었던 말씀은 이사야 53장 7~8절의 말씀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예언하는 말씀입니다. 내시는 빌립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청컨대 내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냐 자기를 가리킴이냐 타인을 가리킴이냐”(33-34절)
인간적으로 보면 이것은 우연일지도 모릅니다. 빌립과 에디오피아의 내시가 우연히 만났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타이밍, 베스트 타이밍이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사람들이 보면 “설마” 라고 생각되는 일입니다.
이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주님의 사자가 지시하고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타이밍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빌립의 해설을 들었던 내시는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빌립은 바로 하나님으로 인하여 그 때 인도받고 쓰임 받았습니다. 그리고 에디오피아의 내시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바로 그 때가 아니면 안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때”를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 유대인으로부터 시작한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이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가운데 사마리아 사람에게로 확대되고 더 나아가 아프리카의 에디오피아 사람에게도 전해졌습니다. 종교도 인종도 다른 나라에 말입니다. 게다가 그는 구약성서의 율법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고 정하고 있었던 내시였습니다. 그러한 벽을 모두 다 때려 부수게 된 것이 오늘의 성경 말씀입니다. 게다가 때려 부순 것도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것들의 벽은 제거되었습니다. 이니 유대인도 이방인도 없습니다. 한국 사람도 일본 사람도 미국 사람도 아프리카 사람도 없습니다. 죄인이라도 귀신 들린 사람이라도 누구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나도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말씀에서 하나 더 기억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에디오피아 사람인 내시는 이 날 갑자기 하나님께 인도받고 예수님을 믿은 게 아니라 이전부터 씨가 뿌려졌다는 것입니다.
그는 빌립을 만나기 전에 성서에 쓰여 있는 진실한 하나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멀리 예루살렘까지 순례 여행하러 왔습니다. 그만큼 그는 진실한 하나님을, 진짜 구원을 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빌립이 왔을 때에는 벌써 내시의 마음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는 진실한 하나님을 알고 있었을까요?
아마 누군가가 가르쳐 주었겠지요. 누군가가 그의 마음에 씨를 뿌린 것입니다. 그러나 그 씨를 뿌린 사람의 이름은 써 있지 않습니다. 무명의 누군가가 그의 마음에 씨를 뿌렸던 것이었습니다. 전도란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복음의 씨를 뿌린다. 그것이 언제 싹이 나고 성장하여 열매를 맺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씨가 뿌려져 있기 때문에 빌립의 말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씨를 뿌린다. 소중한 것입니다. 그리고 때를 지배하시는 하나님께서 언젠가 열매를 맺는 베스트 타이밍을 정해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39절에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라고 쓰여 있습니다. 내시는 여기서 세례를 받고 성경 속에 그리스도를 찾아내서 기쁨에 넘쳤습니다. 그는 이미 혼자서 여행을 하는 게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스도와 함께 걷는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된 내시에게 있어서 혼자서 귀국하는 여행길은 빌립과의 이별을 슬퍼하는 걸음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를 만났던 장소에서 새롭게 하나님으로 맡은 자리로 파견되어 간다는 파견되는 걸음으로 바꿔졌습니다.
실은 이 내시가 경험한 것은 이곳에서 우리가 매주 경험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여기 이 교회를 나설때에 성경에서 들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음성에 힘입어 기뻐하면서 돌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