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 없는 생애라는 설교 제목을 내걸었습니다만, 이것은 가능할까요? 후회 없는 생애라는 것이 있을까요?
우리가 아무리 후회 없게 살려고 노력하고, 좋은 결과를 내고, 가령 하는 일이 모두 다 잘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후회가 없어지고, 후회 없는 생애가 되느냐 하면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어떻게해도 후회는 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후회 없는 생애가 가능할까요?
오늘의 성경말씀에는 스데반이 생애의 최후에 순교하는 장면이 쓰여 있습니다. 성서 시대에 순교한 사람들은 이루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에 순교 장면이 쓰여져 있는 것은 이 스데반의 순교 뿐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을까요? 이것은 아마 이 스데반의 순교가 모든 크리스천의 순교를 대표하는 것이며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크리스천들에게는 이 스데반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그러므로 이 스데반의 순교는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와도 관계 없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면, 스데반의 순교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요? 저는 스데반의 순교 모습 속에 후회 없는 생애의 비결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55절을 보십시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55-56절)
성령이 충만한 스데반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을 때에 거기에 서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서 계신다고 두번이나 반복되어 있습니다. 자세한 이야기가 됩니다만, 사도신경에는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는 말은 성경 속에서는 여기밖에 쓰여 있지 않습니다. 그 의미에 대해 어떤 설교자는 누가복음 12장 8절을 인용하면서 이것은 하늘의 법정에서 예수님께서 나서서 스데반을 위해 변호해 주시는 장면이 아니냐고 말했습니다.
스데반이 순교로 인하여 죽음을 맞이할 때 스데반 자신도 하늘의 법정에서 심판을 받아야 하는데 그 때 하나님 우편에 서신 예수님께서 “ 이 스데반을 내가 시인한다”고 주장하시며 스데반을 변호해 주신다. 그렇게 서 계시는 예수님이 보인다고 스데반은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늘의 법정의 모습이 보인 것으로 스데반은 힘을 얻었습니다. 그가 있는 가혹한 상황 속에서 나는 혼자가 아니다, 나의 올바름은 예수님께서 증명해 주신다는 확신을 스데반은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조금 전에 지적받은 적대자들은 할례를 받지 못한 닫은 귀를 더 강하게 막아 가는 것입니다. 57절입니다.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57-58절)
여기에 처음으로 사울, 나중의 바울의 이름이 나옵니다. 사울은 스데반이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고 또 그는 8장 3절에 있듯이 스데반을 살해한 후도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겨” 라고 쓰여져 있었습니다.
그 때의 사울은 참으로 야만스럽고 폭력적인 인간이었습니다만, 그 자신은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의 사울도 역시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 한편으로, 스데반은 돌을 맞아가면서도 여전히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59절입니다.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59절)
이것은 구약성서 시편 31편의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시31:5) 라는 말씀의 인용이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말씀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나의 영을 부탁합니다” 라는 말이 아니라 더 강한 의미의 말로 나의 모든 것을 상대에게 맡겨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받아들여 주시옵소서” 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리고 또 60절,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60절)
이 60절의 말씀도 예수님의 말씀과 비슷한 말이지만,지금 막 살해당하려 하는 사람이 하는 말이라 생각하기엔 어려운 굉장히 덕이 높은 말입니다. 우리가 만약 이렇게 남을 위해 기도해서 죽을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떤 때에 가능할까요? 이것은 적어도 지금부터 죽어가는 자신의 죽음이 해결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말입니다. 사람이 죽음에 직면하는 순간, 그 때 그 사람이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그 순간의 두려움이나 괴로움에 대한 무서움이나, 사후 자기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불안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렇게 남을 위해, 특히 남의 용서를 위해 큰 소리로 기도의 말을 생애의 마지막에 떠올린다는 것은 도저히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죽음에 관한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도저히 임종시 남에게 배려를 향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죽음의 건너편에 어김없이 계시고, 자기의 모든 것을 받아들여 주시는 예수님이 보였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의 건너편에서도 서서 기다리고 계시고 자기를 잘 받아들여 주신다는 것이 확실히 보이고 있다면 어떤 생애를 걸어도, 만약 어떤 죽음을 맞이하여도 후회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걸어온 자신의 발자취만 돌아보면 어떻게 해도 후회가 생깁니다만, 예수님께서 기다리고 계시는 목표점을 볼 때에 자신의 생애는 후회 없는 생애가 되는 것입니다.
스데반의 순교라는 것은 하나님을 믿고 죽는 모든 사람의 대표로서 성경에 쓰여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최후를 맞이한다해도 그곳에 예수님께서 기다려 주시고, 우리를 마중해 주시는 예수님께서 그 최후를 훌륭한 인생으로 바꿔 주시는 것입니다.
죽음은 끝도 소멸도 아니고 그것은 역전 마라톤 경주의 선수가 골인한 후에 코치에게 껴안기는 것 같이, 인생의 결승선 테이프를 가지고 서서 기다려 주시는 예수님의 품에 뛰어들어가는 것입니다. 거기에 헛된 죽음은 없습니다. 헛된 죽음이 없기는 커녕 모든 죽음은 각각 의미 있는 목적지이며 그 뒤에 있는 모든 인생은 후회해야 하는 인생이 아닌 것입니다.
일본어로 스테이시라는 말이 있습니다. 버린 돌이라는 뜻이지만, 바다에 방파제를 만들 때에 그냥 방파제만 있을 뿐이라면 파도의 직접 힘을 받아 방파제가 무너지기 때문에 파도의 힘을 약하게 하기 위해 방파제 바깥쪽 바다 밑에 가라앉히는 돌을 말합니다. 그 돌은 해면에서는 결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돌이 없으면 모처럼 쌓아둔 방파제가 밑부분에서부터 무너져 버리게됩니다.
그리고 크리스천의 사는 태도도 어떤 뜻으로서는 그 돌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그것은 크리스천의 생애에 있어서 자기를 살리는 것이 지상 목적이 아니라 자기의 생명으로 남을 살린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하셨고 스데반의 순교 역시 그것에 입회한 사울의 개심을 위해 불가결한 포석이었습니다.
남의 눈에는 헛된 것으로 보일지도 모릅니다. 세속적으로는 빛을 보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그것으로 후회스럽지 않은 것입니다. 후회할 필요도 없습니다. 자기의 생애를 받아들여 주시는 예수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나의 생애라도 그렇게 의미 있는 돌로 써 주시기 때문에 후회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위해 쓰인다면, 그러기 위해 버리는 돌이 되었더라도 죽든 살든 후회는 없습니다. 우리도 하늘을 우러러보고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라고 예수님께 호소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곳을 향해 가기 위해 주님 안에서 후회할 필요 없는 의미 있는 하루 하루를 이번 주도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 2020年 7月 26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
「悔いのない生涯」 使徒言行録 7章 54節~8章 3節
悔いのない生涯という説教題を掲げましたが、これは可能でしょうか? 悔いのない生涯などあるでしょうか?
私たちがいくら悔いなく生きようといくら努力して、良い結果を出して、仮にやることなすことがすべてうまくいったとしても、じゃあそれで後悔が無くなって、悔いのない生涯になるかと言えば、そういうことでもないのだと思います。どうしたって後悔は残る、どうしたって悔いは残ります。ではどうすれば、悔いのない生涯が可能なのでしょうか?
今日の御言葉には、ステファノが、生涯の最後に殉教する場面が語られます。聖書の時代に殉教した人は、数え切れないほどたくさんおりました。なのに、聖書には殉教の場面が記されているのは、このステファノの殉教のみです。
これは何を意味しているのでしょうか? これはきっと、このステファノの殉教が、すべてのクリスチャンの殉教を代表しているものであり、多かれ少なかれ、クリスチャンたちには、このステファノのようなことが起こりうると聖書は語ってい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ですから、このステファノの殉教は、ここにいる私たちすべてにとって、関係のない話ではないのです。
では、ステファノの殉教とは、果たしてどういうものであったのでしょうか。私は、ステファノのこの殉教の姿の中にこそ、悔いのない生涯のあり方が見えてくるのだと思います。
まず、55節をご覧下さい。「ステファノは、聖霊に満たされ、天を見つめ、神の栄光の右に立っておられるイエスを見て、『天が開いて、人の子が神の右に立っておられるのが見える』と言った。」(55-56節)
聖霊に満たされたステファノが天を仰ぎ見た時に、そこに立っておられるイエスさまを見ました。イエスさまが立っておられる、と二度も繰り返されています。細かい話になりますが、使徒信条には、「天に上り、全能なる父なる神の右に座したまえり」とあるように、神の右に座すという言葉が、聖書には記されていますが、神の右に立つという言葉は、聖書の中でここだけにしか使われていません。この意味について、ある説教者は、ルカによる福音書12章8節を引用しながら、これは天の法廷で、イエスさまがステファノの弁護者として、立ちあがって裁判を行ってくださっている場面ではないかと語っていました。ルカによる福音書12章8節には、イエスさまが「言っておくが、だれでも人々の前で自分をわたしの仲間であると言い表す者は、人の子も神の天使たちの前で、その人を自分の仲間であると言い表す。」と語られています。
ステファノが殉教によって死を迎えるとき、ステファノ自身も天の法廷で裁かれるわけですが、その時、神の右に立つイエスさまが「このステファノは、自分の仲間であるのだ」と、主張し、ステファノを弁護してくださっている。そのように立っておられるイエスさまが見えると、ステファノは語ったのです。
そして、その天の法廷の様子が見えたことによって、ステファノは力づけられました。彼のおかれた厳しい状況の中で、私は一人なのではない、私の正しさはイエスさまが証明してくださっている、という確信を、ステファノは抱くことができたのです。
けれども、「かたくなで心と耳に割礼を受けていない人たち」と、ついさっき指摘された敵対者たちは、割礼を受けていない閉じた耳をますます強くふさいでいくのです。57、58節、「人々は大声で叫びながら耳を手でふさぎ、ステファノ目がけて一斉に襲いかかり、都の外に引きずり出して石を投げ始めた。証人たちは、自分の着ているものをサウロという若者の足元に置いた。」
ここに初めて、サウロ、のちのパウロの名前が出てきます。サウロはステファノの殺害に賛成し、また彼は、8章3節にあるように、ステファノ殺害後も、「家から家へと押し入って教会を荒らし、男女を問わず引き出して牢に送って」おりました。
この時のサウロは、何とも野蛮で暴力的な人間であったようですが、彼自身は、神さまのためと思ってそれをやっていたのです。しかし、この時のサウロは、やはり「かたくなで心と耳に割礼を受けていない人」であったのです。
その一方で、ステファノは、石を投げつけられながらも、なおも神さまに呼び掛けています。59節です。「人々が石を投げつけている間、ステファノは主に呼びかけて、『主イエスよ、わたしの霊をお受けください』と言った。」
これは、旧約聖書の詩編31編の「主よ、御手にわたしの霊をゆだねます。」という言葉の引用ではありますが、イエスさまが十字架の上で語られた言葉でもありました。けれどもステファノは、わたしの霊をゆだねます、という言葉ではなくて、もっと強い意味の言葉で、自分のすべてを相手に委ねて、「主イエスよ、わたしの霊をお受けください」、「受け取ってください」と呼びかけました。
そしてさらに60節、「それから、ひざまずいて、『主よ、この罪を彼らに負わせないでください』と大声で叫んだ。ステファノはこう言って、眠りについた。」
この60節のこの言葉も、イエスさまが語られた言葉にそっくりですが、今まさに殺されようとしている人間の言葉としては、考えられないような、恐ろしく徳の高い言葉です。私たちがもし、このように、人のために祈って死ぬことができるとするならば、それはどんな時に可能なのでしょうか?これは、少なくとも、今から死んでいく自分の死が解決されていなければ、語ることのできない言葉です。人が死に直面する瞬間、その時その人が、自分の死のこと、その瞬間の恐れや痛みへの怖さや、自分の死後、自分は果たしてどうなるのかということ関する不安を持ったままでいるとしたら、このように人のために、人の許しのために大声で祈る言葉を、生涯の最後に持ってくることなど、とてもできません。自分の死に関するすべてのことが解決されていなければ、とても死に際に人に配慮を向けることなどできません。
けれどもステファノにはそのように出来ました。なぜなら、彼には、死の向こう側にちゃんと居て、自分のすべてを受け取ってくださるイエスさまが、見えていたからです。イエスさまが死の向こう側でも、立って待っていてくださり、自分をしっかりと受け止めてくださる。それが確実に見えているなら、どんな生涯を歩もうが、たとえどんな死に方で死のうが、悔いはないのです。
私たちの歩んできた自分の足跡だけを見るときには、どうしても後悔が湧いてきてしまいますが、イエスさまが待っておられるゴールを見るときに、自分の生涯は、悔いのない生涯になるのです。
ステファノの殉教というのは、神さまを信じて死ぬ者すべての代表として、聖書には記されています。私たちがどのような最後を迎えようとも、そこでイエスさまは待っていて下さり、私たちを迎えて下さるイエスさまが、その最後を素晴らしい人生へと変えてくださるのです。
死は、終わりでも消滅でもなく、それは駅伝ランナーが、ゴールした後にコーチにガシっと抱きかかえられるように、人生のゴールテープをもって、立って待っていてくださっているイエスさまのところに、駆け込むことです。そこには無駄な死はありません。無駄な死はないどころか、すべての死はそれぞれに意味のあるゴールであり、その後ろにあるすべての人生は、悔いるべき人生ではないのです。
捨て石という言葉があります。それは、海に防波堤を建てるとき、ただ防波堤があるだけでは波の力を受けて防波堤が崩れてしまうために、波の勢いを殺すために防波堤のさらに外側の海底に沈めておく石のことです。捨て石は、海面からは決して見えませんが、けれどもその捨て石が無ければ、せっかく築いた防波堤が、根元から崩れてしまいます。
そして、クリスチャンの生き方も、ある意味でその捨て石のようなものだと思います。つまりそれは、クリスチャンの生涯にとって、自分を生かすことが至上目的なのではなく、自分の命で、人を生かす。そのために私たちは生きているのです。イエスさまもそうされましたし、ステファノの殉教も、それに立ち会ったサウロの回心のための、不可欠な布石でした。
傍目には、無駄に見えるかもしれない。世間的には陽の目は見ないかもしれない。けれどもそれで、悔しいことはないのです。悔いる必要もありません。自分の生涯を受け止めてくださるイエスさまがいてくださるから。イエスさまが、どんな私の生涯であっても、そのように、意味のある捨て石として用いてくださるから、だから悔いはないのです。
神さまの御業のために用いられるなら、そのために捨て石になったとしても、生きるにも死ぬにも、悔いはありません。私たちも、天を仰ぎ見て、「主イエスよ、私の霊をお受けください」と、イエスさまに呼び掛け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
皆さん、そこに向かっていくために、主にあって、悔いる必要などない、意味のある一日一日を、今週も歩んでいきたいと願っております。
【2020년 7월 26일 주일예배(요약판)】
“하나님의 처소” 사도행전 7장 54절~ 8장 3절
후회 없는 생애라는 설교 제목을 내걸었습니다만, 이것은 가능할까요? 후회 없는 생애라는 것이 있을까요?
우리가 아무리 후회 없게 살려고 노력하고, 좋은 결과를 내고, 가령 하는 일이 모두 다 잘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후회가 없어지고, 후회 없는 생애가 되느냐 하면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어떻게해도 후회는 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후회 없는 생애가 가능할까요?
오늘의 성경말씀에는 스데반이 생애의 최후에 순교하는 장면이 쓰여 있습니다. 성서 시대에 순교한 사람들은 이루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에 순교 장면이 쓰여져 있는 것은 이 스데반의 순교 뿐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을까요? 이것은 아마 이 스데반의 순교가 모든 크리스천의 순교를 대표하는 것이며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크리스천들에게는 이 스데반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그러므로 이 스데반의 순교는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와도 관계 없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면, 스데반의 순교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요? 저는 스데반의 순교 모습 속에 후회 없는 생애의 비결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55절을 보십시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55-56절)
성령이 충만한 스데반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을 때에 거기에 서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서 계신다고 두번이나 반복되어 있습니다. 자세한 이야기가 됩니다만, 사도신경에는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는 말은 성경 속에서는 여기밖에 쓰여 있지 않습니다. 그 의미에 대해 어떤 설교자는 누가복음 12장 8절을 인용하면서 이것은 하늘의 법정에서 예수님께서 나서서 스데반을 위해 변호해 주시는 장면이 아니냐고 말했습니다.
스데반이 순교로 인하여 죽음을 맞이할 때 스데반 자신도 하늘의 법정에서 심판을 받아야 하는데 그 때 하나님 우편에 서신 예수님께서 “ 이 스데반을 내가 시인한다”고 주장하시며 스데반을 변호해 주신다. 그렇게 서 계시는 예수님이 보인다고 스데반은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늘의 법정의 모습이 보인 것으로 스데반은 힘을 얻었습니다. 그가 있는 가혹한 상황 속에서 나는 혼자가 아니다, 나의 올바름은 예수님께서 증명해 주신다는 확신을 스데반은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조금 전에 지적받은 적대자들은 할례를 받지 못한 닫은 귀를 더 강하게 막아 가는 것입니다. 57절입니다.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57-58절)
여기에 처음으로 사울, 나중의 바울의 이름이 나옵니다. 사울은 스데반이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고 또 그는 8장 3절에 있듯이 스데반을 살해한 후도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겨” 라고 쓰여져 있었습니다.
그 때의 사울은 참으로 야만스럽고 폭력적인 인간이었습니다만, 그 자신은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의 사울도 역시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 한편으로, 스데반은 돌을 맞아가면서도 여전히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59절입니다.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59절)
이것은 구약성서 시편 31편의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시31:5) 라는 말씀의 인용이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말씀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나의 영을 부탁합니다” 라는 말이 아니라 더 강한 의미의 말로 나의 모든 것을 상대에게 맡겨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받아들여 주시옵소서” 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리고 또 60절,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60절)
이 60절의 말씀도 예수님의 말씀과 비슷한 말이지만,지금 막 살해당하려 하는 사람이 하는 말이라 생각하기엔 어려운 굉장히 덕이 높은 말입니다. 우리가 만약 이렇게 남을 위해 기도해서 죽을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떤 때에 가능할까요? 이것은 적어도 지금부터 죽어가는 자신의 죽음이 해결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말입니다. 사람이 죽음에 직면하는 순간, 그 때 그 사람이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그 순간의 두려움이나 괴로움에 대한 무서움이나, 사후 자기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불안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렇게 남을 위해, 특히 남의 용서를 위해 큰 소리로 기도의 말을 생애의 마지막에 떠올린다는 것은 도저히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죽음에 관한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도저히 임종시 남에게 배려를 향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죽음의 건너편에 어김없이 계시고, 자기의 모든 것을 받아들여 주시는 예수님이 보였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의 건너편에서도 서서 기다리고 계시고 자기를 잘 받아들여 주신다는 것이 확실히 보이고 있다면 어떤 생애를 걸어도, 만약 어떤 죽음을 맞이하여도 후회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걸어온 자신의 발자취만 돌아보면 어떻게 해도 후회가 생깁니다만, 예수님께서 기다리고 계시는 목표점을 볼 때에 자신의 생애는 후회 없는 생애가 되는 것입니다.
스데반의 순교라는 것은 하나님을 믿고 죽는 모든 사람의 대표로서 성경에 쓰여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최후를 맞이한다해도 그곳에 예수님께서 기다려 주시고, 우리를 마중해 주시는 예수님께서 그 최후를 훌륭한 인생으로 바꿔 주시는 것입니다.
죽음은 끝도 소멸도 아니고 그것은 역전 마라톤 경주의 선수가 골인한 후에 코치에게 껴안기는 것 같이, 인생의 결승선 테이프를 가지고 서서 기다려 주시는 예수님의 품에 뛰어들어가는 것입니다. 거기에 헛된 죽음은 없습니다. 헛된 죽음이 없기는 커녕 모든 죽음은 각각 의미 있는 목적지이며 그 뒤에 있는 모든 인생은 후회해야 하는 인생이 아닌 것입니다.
일본어로 스테이시라는 말이 있습니다. 버린 돌이라는 뜻이지만, 바다에 방파제를 만들 때에 그냥 방파제만 있을 뿐이라면 파도의 직접 힘을 받아 방파제가 무너지기 때문에 파도의 힘을 약하게 하기 위해 방파제 바깥쪽 바다 밑에 가라앉히는 돌을 말합니다. 그 돌은 해면에서는 결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돌이 없으면 모처럼 쌓아둔 방파제가 밑부분에서부터 무너져 버리게됩니다.
그리고 크리스천의 사는 태도도 어떤 뜻으로서는 그 돌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그것은 크리스천의 생애에 있어서 자기를 살리는 것이 지상 목적이 아니라 자기의 생명으로 남을 살린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하셨고 스데반의 순교 역시 그것에 입회한 사울의 개심을 위해 불가결한 포석이었습니다.
남의 눈에는 헛된 것으로 보일지도 모릅니다. 세속적으로는 빛을 보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그것으로 후회스럽지 않은 것입니다. 후회할 필요도 없습니다. 자기의 생애를 받아들여 주시는 예수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나의 생애라도 그렇게 의미 있는 돌로 써 주시기 때문에 후회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위해 쓰인다면, 그러기 위해 버리는 돌이 되었더라도 죽든 살든 후회는 없습니다. 우리도 하늘을 우러러보고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라고 예수님께 호소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곳을 향해 가기 위해 주님 안에서 후회할 필요 없는 의미 있는 하루 하루를 이번 주도 걸어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