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성경말씀은 지지난주부터 이어지는 스데반이 말한 설교의 부분입니다. 설교 자체는 53절까지 계속되지만, 오늘은 38절까지를 함께 보고자 합니다.
스데반은 이 설교를 마친 후,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순교하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 그의 유언이 되어 버린 셈인데, 스데반은 그 아슬아슬한 상황 속에서 무엇을 말하였을까요?
그는 생명의 말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고,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보여 주며,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였습니다. 지지난 주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스데반은 하나님의 구원의 스토리를 힘차게 말한 것입니다. 그로 인해 자기가 살해당할 것을 알면서도 말입니다.
그 때의 스데반은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지혜와 성령으로 말했다고 6장에 쓰여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의 특징이 그 때의 스데반의 모습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성령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우리에 대해서, 우리와 마주보고 계시는 게 아니라, 우리들의 편이 되어, 우리 옆에 나란히 함께 다가서서, 우리와 같은 방향을 향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입을 사용하셔서 전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 성령의 힘이 아주 깊게 스데반을 잡아 주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스데반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쳐다보면서 말할 수 있었고 그 얼굴은 천사의 얼굴 같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스데반은 먼저 지지난 주 말씀드린 것 같이, 아브라함에 대해서 말하고,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변화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자기가 의지하여 서 있었던 곳을 떠나, 생활과 생각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구원의 스토리로 옮겨 가는, 마치 모험과도 같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성경말씀 부분입니다만, 9절부터 짧게 요셉 이야기에 대해서 말합니다. 요셉 이야기가 가리키는 것도 하나님의 구원의 스토리이며, 하나님의 계획의 크기와 굉장함입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아버린다는 비극도, 그 후에 일어나는 이스라엘의 기근 때에 주님의 백성 야곱의 일족이 애굽에 몸을 의지하여 거기에서 번영해 가기 위한 중요한 포석이었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비극을 하나님의 크신 계획은 구원과 축복을 위하여 써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셉 이야기의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나서 스데반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거기에 겹쳐 비유하면서 모세의 이야기를 말했습니다. 모세는 애굽 왕 바로의 압제 아래에서 태어난 유대인의 아들을 죽이라는 칙령이 내려진 가운데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도 해롯 왕으로 목숨이 위협 받는 상태 가운데 마구 간에서 불우한 출생을 하시고 그 후에 학살을 피하여 애굽으로 도망하셨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나이 사십이 되었을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했습니다만, 반대로 사람들에게 거절을 당하는 경험을 했습니다.
예수님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셨음에도 불구하고 고향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그 생애의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하나님을 모독한 자로서 십자가에 못박혀 같은 유대인의 손에 살해 당하게 되어 버립니다.
모세가 더 40년 지나서 80세가 되었을 때, 모세는 드디어 애굽에서 노예 상태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해방자로 세워져, 지도자로서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가는 일을 120세까지 40년 동안 해냈습니다. 거기서 모세는 여러 가지의 기적이나 불가사의한 일을 행하여 하나님께로 받은 생명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예수님도 모세와 겹치는 백성들의 해방자이십니다. 그리고 모세와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련을 말하는 결정적인 말씀이 37절에 써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하나님께서는 나와 같은 선지자를 너희 형제 가운데 세우리라고 말했던 모세의 말이 바로 지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실현했다고, 이것이야말로 스데반이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스데반의 말을 통해서 교회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어 온 것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의 말에 주목하려고 합니다만, 38절에 “광야의 집회” 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집회라고 번역된 말은 보통은 "교회"라고 번역되어지는 “에크레시아” 라는 말입니다. 출애굽의 백성들이 40년 동안이나 광야를 방황하면서 수많은 고난과 결핍 가운데 성막을 치고, 거기에 생명의 말씀인 율법을 놓고, 그 성막을 중심으로 에워싸는 모양으로 부족마다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향하여 사막 지대를 걸어 가고 있었습니다. 성령으로 인도 받은 스데반은 그 모습을 가리켜 저것은 참으로 광야를 걷는 교회였다. 그것이, 그 모습이야말로 교회의 모습이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교회를 교회라고 여기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루살렘 성전에서나 볼 수 있는, 석양에 물들어 새빨갛게 빛나는 흰 대리석의 건물이 아닙니다. 원래 교회 한가운데 있었던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생명의 말씀이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을 얽매어 틀에 박고 자유를 빼앗아 그것으로 그 규칙을 따르는 사람과 따르지 못하는 사람들을 선별하여 승자와 패자를 분단 시키는 것 같은 율법이 아니었습니다. 본래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과 사람을 연결시키는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의 말씀이었는데, 나중에 인간의 의도로 인간적인 말로 바꿔 버린 율법이 원래 교회 한가운데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광야를 걸어가는 교회에는 죽음으로 향하여 나아가는 인간에게 생명을 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사랑에 굶주리는 인간에게 너는 혼자가 아니다, 사막 속에서 더운 바람이 휘몰아치고 몸과 마음을 건조시켜 너희를 날려 버리려고 하는 가운데 있어도 하나님께서는 너희 중심에 계신다는 약속과 사실이 광야 교회에는 있었고, 그것이 지탱이 되어 출애굽의 백성들은 40년의 고난의 걸음을 걸어 내어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죄짐 맡은 우리 구주” 라는 크리스천이 아니라도 다 아는 찬송가가 있습니다만, 바로 그 찬송가처럼 하나님의 그 생명과 사랑과 그리고 너희를 친구로 삼아 늘 함께 하신다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초래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곳에 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예배당을 나간 후에 이 밖에 펼쳐지는 것은 어떤 풍경일까요? 코로나 때문에 광야처럼 보이는 세상일지도 모릅니다. 전보다 한층 더 험난해지는 것 같고 걱정이 됩니다만, 그런 우리들을 번쩍 정신이 들게 해줄 것 같은 말씀을 오늘 예배 부름의 말씀으로 읽었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바울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성령의 역사 가운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자기 안에 품고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광야 속에서 생명의 말씀을 품은 교회인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스데반을 힘차게 말하게 하신 성령께서 살아 계시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생명의 말씀이 있고 그 말씀은 이 역사의 전체를 약속의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의 크신 구원의 스토리를 품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스데반과 마찬가지로 해야만 하는 말이 있습니다. 생명의 말씀을 말하고, 구원의 스토리를 말하며,그곳에 사람을 부르는 것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약속의 땅을 향하여 광야로 발을 내딛어 갑시다. 우리 안에도 성령님께서 거하여 주시고 계십니다.
【 2020年 7月 12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
「救いのストーリー②」 使徒言行録 7章9 ~38節
今日の御言葉は、ステファノが語った説教の先々週に引き続いての部分です。説教は53節まで続きますが、今日は38節までを御一緒に見ていきたいと思います。
ステファノは、この説教を語り終えたあと、彼は石打ちにされて殺されてしまいます。殉教してしまうわけですね。それこそ彼の遺言のような言葉でありますが、ステファノはそのギリギリの状態の中で、何を語ったのでしょうか?
命の言葉を、語ったのです。彼は神さまの愛を語り、キリストが見えていない人に、キリストの指し示し、神さまの愛を伝えようと語りました。先々週も言いましたが、ステファノは神さまの救いのストーリーを力強く語ったのです。それによって、自分が殺されると知っていてもです。
この時のステファノは、恵みと力に満ち、知恵と霊とによって語っていたと、6章の初めに書かれています。聖霊なる神さまの働きの特徴が、この時のステファノの姿によく表れています。聖霊なる神さまは、イエス・キリストのように、私たちに「対して」「向き合う」神さまではなく、私たちの「がわ」にいて、隣に寄り添い、同じ方向を向いてくださいます。そして私たち口を用いて語ってくださるのです。その聖霊なる神さまの力が、深くステファノを捕らえておりました。ですから、ステファノは、主イエス・キリストを、まっすぐに見上げながら語ることが出来ており、その顔は、天使の顔のように輝いておりました。
ステファノはまず、先々週お話しましたように、アブラハムについて語り、信仰をするということは、変わることだ、と語りました。それは、今まで自分がよって立っていたところを離れて、生活と考え方のすべてを、神さまの救いのストーリーの中へと移し替えていくという、まさに冒険のようなことなのだということを語りました。
それから、今日の御言葉の部分でありますが、9節から短くヨセフ物語について語ります。ヨセフ物語が示していることも、神さまの救いのストーリーであり、神さまの計画の大きさと素晴らしさです。ヨセフが兄弟によっていじめられてエジプトに売られたという悲劇も、そのあと起こるイスラエルの大飢饉の際に、主の民ヤコブの一族がエジプトに身を寄せて、そこで繁栄していくための、大事な布石でした。私たちの目に映る悲劇を、神さまの大きな御計画は、救いと祝福のために用いてくださるのです。これがヨセフ物語のメッセージです。
そしてそのあと、ステファノは主イエス・キリストの姿をそこに重ねながら、モーセのことを語ります。モーセが、エジプトの王ファラオの圧政のもとで、生まれてきたユダヤ人男子は殺してしまえとの勅令が出されるという絶望的な状況の中で、この世に生を受けました。主イエス・キリストも、ヘロデ王によって命を狙われるような状態の中、馬小屋で不遇の出生をなされ、そのあとは虐殺を逃れてすぐにかつてのモーセのエジプトに逃れています。
またモーセはそのあと、40歳になった時に、イスラエルの人々を救おうとしましたが、逆に人々からの拒絶を受けるという経験をしました。
イエスさまも、イスラエルの民を救うためにこの世に生まれられたにもかかわらず、故郷で受け入れられず、その生涯の終わりには、神のみ子でありながら、神さまを冒涜した者として十字架に架けられ、同じユダヤ人の手によって殺されてしまいます。
モーセがさらにもう40年経ち、80歳になった時、モーセはいよいよ、エジプトで奴隷状態にあったイスラエルの民の解放者として立てられて、リーダーとして民を先導し、約束の地に導いていくという仕事を、120歳までの40年間をかけて行いました。そこでモーセは、数々の奇跡や不思議な業を行い、神さまから受け取った命の御言葉を人々に伝えました。
イエスさまも、モーセと重なる民の解放者です。そして、モーセと主イエス・キリストのつながりを語る決定的な言葉が、モーセが申命記で語ったとされる言葉ですが、それがステファノによって、37節で語られています。「このモーセがまた、イスラエルの子らにこう言いました。『神は、あなたがたの兄弟の中から、わたしのような預言者をあなたがたのために立てられる。』」
神さまはわたしのような預言者をあなたがたの兄弟の中から立てられると語ったモーセの言葉が、今まさに、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実現したのだ、と。これがステファノが訴えたかったことでした。そして、このステファノの言葉を通して、教会が「わたしは道であり、真理であり、命である。わたしを通らなければ、だれも父のもとに行くことができない」と言われたイエスさまの御言葉を信じてきたことであったわけです。
最後に、一つの言葉に注目したいと思うのですが、38節に、「荒れ野の集会」という言葉があります。この集会と訳された言葉は、普通は「教会」と訳される「エクレシア」という言葉です。出エジプトの民が、40年間もの間、荒野をさまよい歩きながら、幾多の苦難と欠乏の中を、幕屋を張ってそこに命の言葉である律法を収め、その幕屋を中心にして囲むような形で部族ごとに礼拝を献げていました。そうしながら、約束のカナンの地に向かって砂漠地帯を歩んでいましたた。聖霊に導かれたステファノは、その姿を指して、あれは実に、荒れ野を歩む教会であった。それが、その姿こそが教会だったのだと語ったのです。
教会を教会たらしめているものは何か。それは、エルサレム神殿にみられるような、夕日に染まって真っ赤に光るような白い大理石の建物ではありません。もともと教会の真ん中にあったのは、昔も今も命の言葉でありました。それは人を縛り付け、型にはめて自由を奪い、またそれによって、その戒めに従える者と、従えない者を選り分け、勝者と敗者を分断していくような律法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本来は人間を救う、神さまと人をつなぐ神さまの命と愛の言葉であったのに、のちに人間の思惑によって人間的な言葉に変えられてしまった律法が、もともと教会の真ん中にあったのではなかったのです。
荒野を歩む教会には、死に向かって進んでいた人間に、命を与える言葉がありました。愛に飢え乾く人間に、あなたは一人ではない。砂漠の中で、熱い砂風が吹き付け、体と心を乾燥させ、あなたを吹き飛ばそうとしている中にあっても、神さまがあなたの中心にいるという約束と事実が、荒れ野の教会にはあり、それに支えられて出エジプトの民は、40年の苦難の歩みを歩み切って、約束の地に入ることができたのです。
いつくしみ深き、友なるイエスは、というクリスチャンでなくても知っている讃美歌がありますが、まさにあの讃美歌が歌うように、神さまのその命と愛と、そして、あなたを友として、いつも一緒にいてくださるという、神さまの、あなたへのいつくしみは、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もたらされます。そして、そのキリストがおられるところに、教会があるのです。
さらに新約聖書、コリントの信徒への手紙一の3章16節で、パウロは、「あなたがたは、自分が神の神殿であり、神の霊が自分たちの内に住んでいることを知らないのですか。」と語り、私たち一人一人、それぞれが、聖霊なる神さまの働きによって、主イエス・キリストの霊を自分の内側に宿している、神さまの神殿であるとまで語っています。
今日この礼拝堂を出た後に、この外に広がっているのは、どんな景色でしょうか? コロナ禍の荒れ野と思われる世の中かもしれません。その険しさが一層増しているような感じで心配ではありますが、けれども、そんな私たちをはっとさせるような言葉が礼拝の招きの言葉として読まれました。コリントの信徒への手紙3章16節の御言葉です。
「あなたがたは、自分が神の神殿であり、神の霊が自分たちの内に住んでいることを知らないのですか。」
私たち一人一人が、荒野の中で、命の言葉を宿す、教会なのです。私たちのこの内側には、ステファノを語らしめた、聖霊なる神さまが住んでくださっています。ここには命の言葉があって、その言葉は、この歴史の全体を、約束のカナンの地へと導いてくださる、神さまの大きな救いのストーリーを宿しているのです。
皆さん、私たちにも、ステファノと同じように、語るべき言葉があります。命の言葉を語り、救いのストーリーを語り、そこに人を招くことさえできるのです。
皆さん、約束の地を目指して、荒れ野に踏み込んでいきましょう。私たちの内側にも、聖霊なる神さまが宿ってくださっています。
【2020년 7월 12일 주일예배(요약판)】
“구원의 스토리 ②” 사도행전 7장 9~38절
오늘의 성경말씀은 지지난주부터 이어지는 스데반이 말한 설교의 부분입니다. 설교 자체는 53절까지 계속되지만, 오늘은 38절까지를 함께 보고자 합니다.
스데반은 이 설교를 마친 후,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순교하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 그의 유언이 되어 버린 셈인데, 스데반은 그 아슬아슬한 상황 속에서 무엇을 말하였을까요?
그는 생명의 말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고,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보여 주며,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였습니다. 지지난 주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스데반은 하나님의 구원의 스토리를 힘차게 말한 것입니다. 그로 인해 자기가 살해당할 것을 알면서도 말입니다.
그 때의 스데반은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지혜와 성령으로 말했다고 6장에 쓰여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의 특징이 그 때의 스데반의 모습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성령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우리에 대해서, 우리와 마주보고 계시는 게 아니라, 우리들의 편이 되어, 우리 옆에 나란히 함께 다가서서, 우리와 같은 방향을 향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입을 사용하셔서 전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 성령의 힘이 아주 깊게 스데반을 잡아 주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스데반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쳐다보면서 말할 수 있었고 그 얼굴은 천사의 얼굴 같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스데반은 먼저 지지난 주 말씀드린 것 같이, 아브라함에 대해서 말하고,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변화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자기가 의지하여 서 있었던 곳을 떠나, 생활과 생각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구원의 스토리로 옮겨 가는, 마치 모험과도 같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성경말씀 부분입니다만, 9절부터 짧게 요셉 이야기에 대해서 말합니다. 요셉 이야기가 가리키는 것도 하나님의 구원의 스토리이며, 하나님의 계획의 크기와 굉장함입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아버린다는 비극도, 그 후에 일어나는 이스라엘의 기근 때에 주님의 백성 야곱의 일족이 애굽에 몸을 의지하여 거기에서 번영해 가기 위한 중요한 포석이었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비극을 하나님의 크신 계획은 구원과 축복을 위하여 써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셉 이야기의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나서 스데반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거기에 겹쳐 비유하면서 모세의 이야기를 말했습니다. 모세는 애굽 왕 바로의 압제 아래에서 태어난 유대인의 아들을 죽이라는 칙령이 내려진 가운데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도 해롯 왕으로 목숨이 위협 받는 상태 가운데 마구 간에서 불우한 출생을 하시고 그 후에 학살을 피하여 애굽으로 도망하셨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나이 사십이 되었을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했습니다만, 반대로 사람들에게 거절을 당하는 경험을 했습니다.
예수님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셨음에도 불구하고 고향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그 생애의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하나님을 모독한 자로서 십자가에 못박혀 같은 유대인의 손에 살해 당하게 되어 버립니다.
모세가 더 40년 지나서 80세가 되었을 때, 모세는 드디어 애굽에서 노예 상태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해방자로 세워져, 지도자로서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가는 일을 120세까지 40년 동안 해냈습니다. 거기서 모세는 여러 가지의 기적이나 불가사의한 일을 행하여 하나님께로 받은 생명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예수님도 모세와 겹치는 백성들의 해방자이십니다. 그리고 모세와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련을 말하는 결정적인 말씀이 37절에 써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하나님께서는 나와 같은 선지자를 너희 형제 가운데 세우리라고 말했던 모세의 말이 바로 지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실현했다고, 이것이야말로 스데반이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스데반의 말을 통해서 교회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어 온 것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의 말에 주목하려고 합니다만, 38절에 “광야의 집회” 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집회라고 번역된 말은 보통은 "교회"라고 번역되어지는 “에크레시아” 라는 말입니다. 출애굽의 백성들이 40년 동안이나 광야를 방황하면서 수많은 고난과 결핍 가운데 성막을 치고, 거기에 생명의 말씀인 율법을 놓고, 그 성막을 중심으로 에워싸는 모양으로 부족마다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향하여 사막 지대를 걸어 가고 있었습니다. 성령으로 인도 받은 스데반은 그 모습을 가리켜 저것은 참으로 광야를 걷는 교회였다. 그것이, 그 모습이야말로 교회의 모습이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교회를 교회라고 여기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루살렘 성전에서나 볼 수 있는, 석양에 물들어 새빨갛게 빛나는 흰 대리석의 건물이 아닙니다. 원래 교회 한가운데 있었던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생명의 말씀이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을 얽매어 틀에 박고 자유를 빼앗아 그것으로 그 규칙을 따르는 사람과 따르지 못하는 사람들을 선별하여 승자와 패자를 분단 시키는 것 같은 율법이 아니었습니다. 본래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과 사람을 연결시키는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의 말씀이었는데, 나중에 인간의 의도로 인간적인 말로 바꿔 버린 율법이 원래 교회 한가운데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광야를 걸어가는 교회에는 죽음으로 향하여 나아가는 인간에게 생명을 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사랑에 굶주리는 인간에게 너는 혼자가 아니다, 사막 속에서 더운 바람이 휘몰아치고 몸과 마음을 건조시켜 너희를 날려 버리려고 하는 가운데 있어도 하나님께서는 너희 중심에 계신다는 약속과 사실이 광야 교회에는 있었고, 그것이 지탱이 되어 출애굽의 백성들은 40년의 고난의 걸음을 걸어 내어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죄짐 맡은 우리 구주” 라는 크리스천이 아니라도 다 아는 찬송가가 있습니다만, 바로 그 찬송가처럼 하나님의 그 생명과 사랑과 그리고 너희를 친구로 삼아 늘 함께 하신다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초래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곳에 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예배당을 나간 후에 이 밖에 펼쳐지는 것은 어떤 풍경일까요? 코로나 때문에 광야처럼 보이는 세상일지도 모릅니다. 전보다 한층 더 험난해지는 것 같고 걱정이 됩니다만, 그런 우리들을 번쩍 정신이 들게 해줄 것 같은 말씀을 오늘 예배 부름의 말씀으로 읽었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바울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성령의 역사 가운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자기 안에 품고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광야 속에서 생명의 말씀을 품은 교회인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스데반을 힘차게 말하게 하신 성령께서 살아 계시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생명의 말씀이 있고 그 말씀은 이 역사의 전체를 약속의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의 크신 구원의 스토리를 품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스데반과 마찬가지로 해야만 하는 말이 있습니다. 생명의 말씀을 말하고, 구원의 스토리를 말하며,그곳에 사람을 부르는 것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약속의 땅을 향하여 광야로 발을 내딛어 갑시다. 우리 안에도 성령님께서 거하여 주시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