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성경말씀 내용은 스데반이 당국자들에게 잡혀서 공회의 심문을 받는 장면입니다. 스데반의 앞에는 거짓 증인이 거짓 증언을 하고 있었기에 그 이후에 스데반이 그 어떤 말을 한다해도 이미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죄가 되어, 사형은 피할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의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처럼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스데반은 이 사도행전 가운데 저 바울이나 베드로보다도 나은 가장 긴 설교를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설교 자체는 7장 53절까지 계속됩니다.
스데반은 그 때, 무엇을 말했을까요? 그는 구원의 스토리를 말했습니다. 스데반에게 억울한 죄를 뒤집어 씌우려고 한 사람들은 6장 13절에서 거짓 증인이 말한 것 같이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라고 거짓 스토리를 만들어내어 유대인의 상징이기도 한 예루살렘 성전과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부여 받은 율법을 파괴하는 위험 인물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스데반은 그들이 의지하는 율법과 성전의 루츠, 즉 구원의 루츠를 말하여 그들이 의지하는 토대를 뒤엎으려고 했습니다.
당시의 유대교 전체의 문제이기도 합니다만, 스데반을 잡은 사람들이 빠져 있었던 문제는 형식주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형식주의란 율법주의라고도 바꿔 말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형식만을 고집한다는 오류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외국에서 귀국해 온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어째서 그들이 일부러 귀국해 오느냐 하면 유대의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성전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거주하신다고 형식적으로 생각하여 성전과 그것을 지탱하고 있는 여러 가지의 의식이나 관습이, 유대인이라는 민족의 혈통, 그들의 소중함이 쓰여 있는 모세 율법을 치우친 생각으로 받아들여 그것을 엄격히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진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먼저 아브라함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직 유대에 들어가기도 전인 메소포타미아에 있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한 중간 지점인 하란에 조차도 아직 들어가지 않았던 상태인 그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2절) 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아직 율법도 성전의 토대도 없었던 그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토지나 조건에 좌우되지 않으시고, 아무 곳에라도 계시며, 또 그 어느 곳에서라도 말씀하시는, 조건 없이 자유로우신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영광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모일 땅으로 가라”(3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토지나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우신 하나님을 만나는 자는 그 사람 자신도 자신이 익숙한 땅을 떠나서 형식적인 관계가 아니라 인격적으로 하나님과 가까이 마주 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익숙한 땅과 친숙한 사람들을 떠나 하나님께서 가리키시는 땅을 향해 떠났습니다. 거기에 아브라함의 신앙 즉 성경이 가르치는 신앙의 본질이 있습니다. 신앙이란 여행을 떠나는 것입니다. 자기의 고향을 떠나 즉 안주했던 땅을 떠나 이 세상을 나그네로서 기류자로서 걸어가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아브라함의 그러한 걸음을 4절 후반에서 5절 전반에 걸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그러나 여기서 발 붙일 만한 땅도 유업으로 주지 아니하시고”
아무런 재산도 가지지 않고, 발 디딜 한뼘의 땅조차도 가지지 않고 사는 삶이야말로 나그네, 기류자로서 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것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을 전혀 갖지 않고 사는, 즉 자기가 갖고 있는 것에게 전혀 의존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아무것도 갖지 않고 게다가 행선지도 잘 모르는 채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것이 딱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약속의 말씀입니다. 5절 후반,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그와 그의 후손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
아브라함은 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떠나고 나아간 것입니다. 약속이란 지금은 아직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약속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에 있어서는 발 디딜 만한 땅조차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도 벌써 늙어 나이 들었고 자식도 없었습니다. 그러한 현실 가운데 “이 땅을 너와 그 후손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하는 약속을, 그 약속만을 믿고 나아간 것입니다.
그 약속은 좋은 일 뿐만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게다가 그의 후손이 외국에 이주해서 거기서 400년 동안 종으로 괴로워하고 그 후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거기서부터 인도해 주시고 이 땅으로 데려오신다는 것도 말씀하셨습니다. 애굽으로의 이주와 거기서 노예의 괴로움, 그리고 모세에 의한 출애굽과 가나안 땅으로의 정주가 예고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도 아직 일어나지 않는 일의 약속입니다. 그러한 일이 실현될거라는 눈에 보이는 보증은 그 어떤 것도 없습니다. 그냥 약속의 말에 불과하다고 말해 버리면 그뿐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걸어갑니다. 그것이 그의 신앙이었습니다.
스데반은 하나님의 구원의 스토리에 몸을 맡겨 산 아브라함의 신앙을 여기에 나타냈습니다. 400년이나 장래를 내다보는 스토리였지만 아브라함은 그 스토리에 인생을 건다는 결단을 해서 이 때까지의 스토리를 깨끗하게 버렸습니다.
우리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는 자신을, 자신이 둘러 싸인 작은 스토리의 중심에 두고 있기 때문에 해결되지 않는 그런 문제들뿐입니다. 그러나 그 문제는 우리가 자신을 떠나서 자기의 고집이나 생활, 경제, 희망, 그러한 것을 한번 손에서 내려 놓고 자기의 작은 스토리를 떠나 하나님의 큰 스토리로 갈아타는 그 때에 비로소 해결되는 것 같은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스데반은 자기들의 작은 스토리를 고집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또 유대교의 가르침에 대해서 재고를 촉구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너희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 그런 편협한 좁은 것도 아니고, 여러 가지의 조건이 필요한 어려운 것도 아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거나 성전에 참배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늘 우리와 함께 계시고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늘 내 눈 앞에 계셔서 항상 이런 나를 보시고 지금도 나의 얼굴을 예수님의 얼굴의 빛으로 비추어 주십니다.
자기들의 작은 스토리에 구애되어 그 우리 속에 틀어 박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여 거기를 떠나지 말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여 한 걸음을 내딛어 하나님의 구원의 스토리에 몸을 맡겨야 합니다. 너희들의 시야는 그 앞에 열릴거라고 스데반은 길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여기로 들어오세요. 예수님께서는 곁에서 친숙히 여러분을 불러 주십니다. 아브라함이 인도받았던 그 부르심이 여러분들에게는 들리지 않으십니까? 이것이 스데반의, 또 오늘의 성경말씀의 메시지입니다.
이 하나님의 구원의 스토리는 영화나 연극이 아닙니다. 설교가 끝나고 축도를 마치면 “ 음, 참 흥미로운 의미심장한 예배였어. 그럼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야지.” 그렇게 일상 생활의 스토리로 돌아가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스데반은 아브라함으로의 약속의 성취입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장소를 벗어나 모험을 떠난 것으로 스데반이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이 사도행전의 스토리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스토리는 지금 우리에게까지 계속 이어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조건 없는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께서는 나의 인생을 조건을 달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그 스토리를 살았던 아브라함이 있고, 그 스토리를 이어받은 스데반이 있고, 그리고 지금의 우리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 스토리야말로 진짜 스토리입니다. 그 구원의 스토리가 지금도 아직, 이 예배가 끝난 후에도 그 어떤 스토리보다도 더 강하게 계속되어 가는 것입니다.
【 2020年 6月 28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
「救いのストーリー」 使徒言行録 7章1 ~8節
今日の御言葉の内容ですが、場面は、ステファノが当局者たちにつかまって、最高法院で尋問を受けている場面です。ステファノの前には、偽物の証人が立てられて、嘘の証言がされており、この後ステファノが何を言おうとも、神さまへの冒涜罪ということで死刑はほぼ決まってしまっているような、絶望的な状況でした。けれどもこの時のステファノの顔は、さながら天使の顔のように輝いていました。そしてステファノは、この使徒言行録の中では、あのパウロやペトロなどに勝る、一番長い説教を語りだしたのです。説教自体は7章53節まで続きます。
ステファノはこの時、何を話したのか? 彼は救いのストーリーを語りました。ステファノを陥れようとしていた人々は、先週の御言葉の、6章13節で偽の証人に語らせましたように、「この男は、この聖なる場所と律法をけなして、一向にやめようとしない」と、嘘のストーリーを作り上げ、ユダヤ人のシンボルでもある、エルサレム神殿と、モーセが神さまから授かった律法を破壊する危険人物であると主張しました。
これに対して、ステファノは、彼らが拠り所としている律法と神殿のルーツ、それはすなわち救いのルーツを語り、彼らが拠って立っている土台をひっくり返そうとしているのです。
当時のユダヤ教全体の問題でもありますが、ステファノを逮捕した人たちが陥ってしまっていた問題は、形式主義というものでした。この形式主義とは、律法主義と言い換えても良いものですが、形にこだわるという誤りの中にあったのです。彼らは、外国から帰国してきたユダヤ人たちでした。なぜ彼らがわざわざ帰国してくるのかというと、ユダヤのエルサレムには神殿があるからです。そして彼らは、神殿があるところには、必ず神さまが宿ると、形式的に考えて、神殿と、それを支えてきた様々な儀式しきたり、ユダヤ人という民族の血筋、それらの大切さが書き記されているモーセ律法を、偏りのある受け取り方をして、厳格に守っておりました。そして、そこに真理があると思っていたのです。
それでステファノは、まずアブラハムについて語り始めました。アブラハムがまだユダヤに入っておらず、メソポタミアにいて、カナンの地に入るための中継地点であるハランにさえまだ入っていなかった状態の時に、「栄光の神が現れた」と語ったのです。
まだ律法もなく、神殿の土台もなかったその時に、栄光の神が現れました。神さまは、土地や条件に左右されず、どんなところにもおられて、どんなところにも届き、どんなところからも語られる、条件なしの、自由な、恵みの神さまです。そしてその栄光の神さまは、アブラハムに、「あなたの土地と親族を離れ、わたしが示す地に行け」と言われました。どんな土地や形式にも縛られない自由な神さまに出会う者は、その人自身も、自分の親しんだ土地を離れて、形式的な関係で神さまと向き合うのではなく、人格的に、神さまと親しく、近くで、向き合う必要があります。
アブラハムは、神さまの御言葉に従い、慣れ親しんだ地と親しい者たちを離れて、神さまの示す地に向かって彼は旅立ったのです。そこに、アブラハムの信仰の、即ち聖書が教える信仰の本質があります。信仰とは、旅に出ることです。自分の故郷から出て、つまり安住の地を離れて、この世を旅人として、寄留者として歩んでいくのです。ステファノはアブラハムのそのような歩みを、4節後半から5節前半にかけてこのように語っています。「神はアブラハムを、彼の父が死んだ後、ハランから今あなたがたの住んでいる土地にお移しになりましたが、そこでは財産を何もお与えになりませんでした。一歩の幅の土地さえも。」
何も財産を持たず、一歩の幅の土地さえも持たずに住む。旅人、寄留者として歩むとはそういうことです。「これは自分のもの」と言うことができる何物をも持たずに、つまり自分の持っているものに依り頼むことが全くできない中で生きていくのです。
アブラハムという人は、神さまに会うために、何も持たず、しかも行き先もよく分からずに歩み出しました。しかし、神さまが彼に与えて下さったものが一つだけありました。それは、約束のみ言葉です。5節後半、「しかし、そのとき、まだ子供のいなかったアブラハムに対して、『いつかその土地を所有地として与え、死後には子孫たちに相続させる』と約束なさったのです。」
アブラハムは、この神さまの約束の御言葉を信じて旅立ち、歩んだのです。約束とは、今はまだ目に見える現実となっていないことの約束です。目に見える現実においては、一歩の幅の土地さえも得てはいないのです。また、アブラハムも妻のサラも、旅立った時には既に高齢であり、子供がいなかったのです。そういう現実の中で、「この地をあなたに与え、あなたの子孫に相続させる」という約束を、約束のみを与えられて、それによって歩んだのです。
その約束は、良いことばかりではありません。神さまはさらに、彼の子孫が外国に移住し、そこで四百年の間、奴隷とされて虐げられ、その後神さまが彼らをそこから導き出し、この地に連れ帰るということをも語られました。エジプトへの移住と、そこでの奴隷の苦しみ、そしてモーセによる出エジプトとカナンの地への定住の歩みが予告されているわけです。これもまた、まだ起っていないことの約束です。そのようなことが実現するという目に見える保証は何もない、ただの約束の言葉に過ぎないと言ってしまえばその通りのことです。
アブラハムはこのような神さまの約束のみ言葉を信じて歩みました。それが彼の信仰なのです。
ステファノは、神さまの救いのストーリーに身を委ねて生きたアブラハムの信仰をここに示しました。400年も先を見通すというストーリーでありましたが、アブラハムはそのストーリーに人生を賭けるという決断をして、それまでのストーリーをきっぱりと捨てました。
私たちの抱えている問題の多くは、自分を、自分を取り巻く小さなストーリーの中心に置き続けているがゆえに解決しない、そんな問題ばかりです。けれどもその問題は、私たちが自分から離れて、自分のこだわり、生活、経済、希望、そういったものを一度手放して、自分の小さなストーリーを離れて、神さまの大きなストーリーに乗り換えていくならば、その時におのずと解決されてしまうような、そんな問題がほとんどであるように思います。
ステファノは、自分たちの小さなストーリーにこだわっている人々に対して、またユダヤ教の教えに対して、この考え直しを迫りました。神さまの愛は、あなた方が考えているような、そんな偏狭な狭いものではなく、色々な条件が必要な難しいものでもない。律法を守らなければ、神殿に詣でなければ神さまに会えないのではなくて、神さまはいつもともにおられ、イエスさまが聖霊を送ってくださって、いつも私の目の前にいて、神さまはこの私を常に見つめ、今も私の顔を、御顔の光で照らしてくださっている。
自分たちの小さなストーリーにこだわって、その檻の中に閉じこもっているのではなくて、その神さまを信頼して、そこを離れなさいという神様の招きに応じて、一歩踏み出して、神さまの救いのストーリーに、身を任せるべきだ。あなた方の視界は、その先に開けると、ステファノは道を示したのです。
ここに入ってきてください。イエスさまはすぐそばで、親しく、あなたを招いてくださっています。アブラハムが導かれていったその招きが、あなた方には聞こえないのですか?これがステファノの、今日の御言葉のメッセージです。
この、神さまの救いのストーリーは、映画やお芝居ではありません。説教が終わって、祝祷が済んだら、さあやれやれ、興味深い礼拝だった、では日常に戻ろう。日常のストーリーに戻ろうということではありません。ステファノは、アブラハムへの約束の成就です。アブラハムが自分の場所から離れて、冒険に出たことで、ステファノが生まれました。そしてこの使徒言行録のストーリーはまだ終わっておりません。神さまの救いのストーリーは、今の私たちにまで続いているのです。
私たちには、条件抜きで神さまがいて、神さまは私の人生を、条件を付けることなく丸ごと受け止めてくれ、導いてくださる。そのストーリーを生きたアブラハムがいて、そのストーリーを引き継いだステファノがいて、そして今のこの私たちがいるのです。このストーリーこそが、本物のストーリーです。その救いのストーリーが、今もまだ、この礼拝が終わった後も、他のあらゆるストーリーよりももっと強く、ずっと続いていくのです。
【2020년 6월 28일 주일예배】
“구원의 스토리” 사도행전 7장 1~8절
오늘의 성경말씀 내용은 스데반이 당국자들에게 잡혀서 공회의 심문을 받는 장면입니다. 스데반의 앞에는 거짓 증인이 거짓 증언을 하고 있었기에 그 이후에 스데반이 그 어떤 말을 한다해도 이미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죄가 되어, 사형은 피할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의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처럼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스데반은 이 사도행전 가운데 저 바울이나 베드로보다도 나은 가장 긴 설교를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설교 자체는 7장 53절까지 계속됩니다.
스데반은 그 때, 무엇을 말했을까요? 그는 구원의 스토리를 말했습니다. 스데반에게 억울한 죄를 뒤집어 씌우려고 한 사람들은 6장 13절에서 거짓 증인이 말한 것 같이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라고 거짓 스토리를 만들어내어 유대인의 상징이기도 한 예루살렘 성전과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부여 받은 율법을 파괴하는 위험 인물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스데반은 그들이 의지하는 율법과 성전의 루츠, 즉 구원의 루츠를 말하여 그들이 의지하는 토대를 뒤엎으려고 했습니다.
당시의 유대교 전체의 문제이기도 합니다만, 스데반을 잡은 사람들이 빠져 있었던 문제는 형식주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형식주의란 율법주의라고도 바꿔 말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형식만을 고집한다는 오류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외국에서 귀국해 온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어째서 그들이 일부러 귀국해 오느냐 하면 유대의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성전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거주하신다고 형식적으로 생각하여 성전과 그것을 지탱하고 있는 여러 가지의 의식이나 관습이, 유대인이라는 민족의 혈통, 그들의 소중함이 쓰여 있는 모세 율법을 치우친 생각으로 받아들여 그것을 엄격히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진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먼저 아브라함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직 유대에 들어가기도 전인 메소포타미아에 있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한 중간 지점인 하란에 조차도 아직 들어가지 않았던 상태인 그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2절) 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아직 율법도 성전의 토대도 없었던 그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토지나 조건에 좌우되지 않으시고, 아무 곳에라도 계시며, 또 그 어느 곳에서라도 말씀하시는, 조건 없이 자유로우신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영광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모일 땅으로 가라”(3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토지나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우신 하나님을 만나는 자는 그 사람 자신도 자신이 익숙한 땅을 떠나서 형식적인 관계가 아니라 인격적으로 하나님과 가까이 마주 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익숙한 땅과 친숙한 사람들을 떠나 하나님께서 가리키시는 땅을 향해 떠났습니다. 거기에 아브라함의 신앙 즉 성경이 가르치는 신앙의 본질이 있습니다. 신앙이란 여행을 떠나는 것입니다. 자기의 고향을 떠나 즉 안주했던 땅을 떠나 이 세상을 나그네로서 기류자로서 걸어가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아브라함의 그러한 걸음을 4절 후반에서 5절 전반에 걸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그러나 여기서 발 붙일 만한 땅도 유업으로 주지 아니하시고”
아무런 재산도 가지지 않고, 발 디딜 한뼘의 땅조차도 가지지 않고 사는 삶이야말로 나그네, 기류자로서 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것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을 전혀 갖지 않고 사는, 즉 자기가 갖고 있는 것에게 전혀 의존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아무것도 갖지 않고 게다가 행선지도 잘 모르는 채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것이 딱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약속의 말씀입니다. 5절 후반,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그와 그의 후손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
아브라함은 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떠나고 나아간 것입니다. 약속이란 지금은 아직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약속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에 있어서는 발 디딜 만한 땅조차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도 벌써 늙어 나이 들었고 자식도 없었습니다. 그러한 현실 가운데 “이 땅을 너와 그 후손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하는 약속을, 그 약속만을 믿고 나아간 것입니다.
그 약속은 좋은 일 뿐만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게다가 그의 후손이 외국에 이주해서 거기서 400년 동안 종으로 괴로워하고 그 후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거기서부터 인도해 주시고 이 땅으로 데려오신다는 것도 말씀하셨습니다. 애굽으로의 이주와 거기서 노예의 괴로움, 그리고 모세에 의한 출애굽과 가나안 땅으로의 정주가 예고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도 아직 일어나지 않는 일의 약속입니다. 그러한 일이 실현될거라는 눈에 보이는 보증은 그 어떤 것도 없습니다. 그냥 약속의 말에 불과하다고 말해 버리면 그뿐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걸어갑니다. 그것이 그의 신앙이었습니다.
스데반은 하나님의 구원의 스토리에 몸을 맡겨 산 아브라함의 신앙을 여기에 나타냈습니다. 400년이나 장래를 내다보는 스토리였지만 아브라함은 그 스토리에 인생을 건다는 결단을 해서 이 때까지의 스토리를 깨끗하게 버렸습니다.
우리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는 자신을, 자신이 둘러 싸인 작은 스토리의 중심에 두고 있기 때문에 해결되지 않는 그런 문제들뿐입니다. 그러나 그 문제는 우리가 자신을 떠나서 자기의 고집이나 생활, 경제, 희망, 그러한 것을 한번 손에서 내려 놓고 자기의 작은 스토리를 떠나 하나님의 큰 스토리로 갈아타는 그 때에 비로소 해결되는 것 같은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스데반은 자기들의 작은 스토리를 고집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또 유대교의 가르침에 대해서 재고를 촉구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너희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 그런 편협한 좁은 것도 아니고, 여러 가지의 조건이 필요한 어려운 것도 아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거나 성전에 참배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늘 우리와 함께 계시고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늘 내 눈 앞에 계셔서 항상 이런 나를 보시고 지금도 나의 얼굴을 예수님의 얼굴의 빛으로 비추어 주십니다.
자기들의 작은 스토리에 구애되어 그 우리 속에 틀어 박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여 거기를 떠나지 말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여 한 걸음을 내딛어 하나님의 구원의 스토리에 몸을 맡겨야 합니다. 너희들의 시야는 그 앞에 열릴거라고 스데반은 길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여기로 들어오세요. 예수님께서는 곁에서 친숙히 여러분을 불러 주십니다. 아브라함이 인도받았던 그 부르심이 여러분들에게는 들리지 않으십니까? 이것이 스데반의, 또 오늘의 성경말씀의 메시지입니다.
이 하나님의 구원의 스토리는 영화나 연극이 아닙니다. 설교가 끝나고 축도를 마치면 “ 음, 참 흥미로운 의미심장한 예배였어. 그럼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야지.” 그렇게 일상 생활의 스토리로 돌아가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스데반은 아브라함으로의 약속의 성취입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장소를 벗어나 모험을 떠난 것으로 스데반이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이 사도행전의 스토리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스토리는 지금 우리에게까지 계속 이어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조건 없는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께서는 나의 인생을 조건을 달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그 스토리를 살았던 아브라함이 있고, 그 스토리를 이어받은 스데반이 있고, 그리고 지금의 우리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 스토리야말로 진짜 스토리입니다. 그 구원의 스토리가 지금도 아직, 이 예배가 끝난 후에도 그 어떤 스토리보다도 더 강하게 계속되어 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