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성경말씀을 읽어보면 예수님의 탄생으로 인해 두 살 이하의 아이들이 희생되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구세주가 탄생하셨는데 그로 인해 많은 아이들의 생명이 희생되었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위로와 평안이 주어져야할텐데 구세주의 탄생이 슬픔을 가져왔습니다. 이것은 도대체 무슨 일일까요?
마태복음은 구약성서 예레미아 31장 15절을 인용해서 이 도리에 맞지 않는 억울한 일도 미리 예언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언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납득할 수는 없습니다.
예레미야의 이 말씀은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로 인하여 멸망되어 북이스라엘 사람들이 유수의 백성이 되어 앗수르로 끌려가는 것을 보고 비탄한 것입니다.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다”(18절) 라는 말은 어떤 위로의 말도 전해지지 못한다는 바로 비탄의 소리인 것입니다.
마태복음이 왜 이 비탄의 말을 인용해서 유아 학살의 예언으로 했느냐하면 민족 멸망의 비극과 헤롯 왕으로 인한 유아 학살과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아무 잘못도 없는데 생각지도 못한 재난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부조리라는 현실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이 일에 대해서 어떤 뜻이 있는지, 이 비극이 어떻게 구원되는지에 관하여 그 아무것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말하고 있는 것은 이 부조리한 현실 세계에 크리스마스는 생겨났다는 것, 구세주가 탄생하셨다는 것, 그 뿐입니다.
그 때의 예수님께서는 누군가가 도와 주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참으로 작고 무력한 존재였습니다. 구세주로서의 위력과 존엄이 넘치는 모습은 어디에도 볼 수 없었습니다. 그 어린 예수님 곁을 잠시도 떠나지 않고 모든 것을 버려 애굽으로 간 요셉, 그리고 어린아이를 품에 안고 어디까지나 따라간 어머니 마리아, 이 요셉과 마리아처럼 예수님과 함께 어디까지나 계속 걸어가는 자가 될지, 아니면 헤롯 왕 처럼 예수님을 방해자로 여겨 자기 인생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거절할지, 그 어느 쪽에 서느냐는 물음을 들이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 자신은 예수님에 대해서 헤롯과 같은 적의 등은 전혀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정말로 예수님께서 언제든지 어디서나 우리 에게 들어 오실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 두고 있을까요? “예수님, 언제든지 어디서나 우리 있는 곳으로 와 주세요. 어떤 말씀이라도 해 주세요. 저는 그것을 다 듣겠습니다” 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요?
물론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은 아주 소중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더라도 “좀 기다려 주세요. 상황이 갖추어지면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라며 자신의 생각을 우선시하여 예수님의 은혜를 저버리는 때가 없을까요? 우리는 다시 한번 요셉과 마리아를 통해서 자기의 신앙을 반성해야 합니다.
그 때, 요셉과 마리아는 천사가 전한 말씀에 놀라울 정도로 순순히 따랐습니다. 천사는 꿈에서 요셉에게 헤롯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것을 고하며 애굽으로 떠나라고 전했습니다. 그것을 들었던 요셉은 즉시 따라 그 밤에 떠나간 것입니다. 요셉에게는 그 어린아이를 데리고 멀고 낯선 땅으로 가는 것이 얼마나 큰 희생이었을까요? “준비가 갖추어질 때까지 기다려 주세요” 라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또는 “애굽 이외에 더 가까운 좋은 데가 없을까요?” 라고 투덜거리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아무것도 알지 못했어도 즉시 그 말씀을 따랐습니다.
만약 그 때, 요셉이 주저했더라면 어린아이인 예수님께서는 헤롯에게 살해 되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주님께서 마련해 주신 길을,오직 말씀을 따라 걸어간 것입니다. 그리고 애굽으로 떠난 후도 오직 말씀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돌아가도 된다”는 말씀을 듣고 그것에 따른 것입니다.
우리도 요셉과 마리아처럼 주 예수님과 함께 어떠한 때라도 그 어디까지라도 말씀에 순종하며 걸어가는 자가 되길 원합니다.
우리가 생활하는 일상 중에는 어느날 갑자기 부조리한 일들이 덮쳐 오기도 합니다. 자연 재해도 그렇고 교통사고 등의 예기치 못한 불행이 오기도 하고 아무리 노력해도 그것을 보답받지 못하거나 하는 등 우리 가까이에는 부조리한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의 코로나화도 그렇습니다. 그 의미로 보자면 이 유아 학살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부조리의 상징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성경말씀에서는 그러한 부조리하고 비참한 일이 구세주 예수님의 탄생에 맞추어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의 구세주께서는 우리의 부조리 가운데서 “함께 괴로워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 라고 외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버림을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는 버림을 받을 만한 짓을 한 적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부조리의 극이 아닙니까? 그 부조리의 극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몸을 넣으신 것입니다.
부조리 속에 몸을 둘 때, 사람은 반드시 “왜” 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이 “왜”에 대답은 없습니다. 아무도 대답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흔히 있는 그런 대답은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 괴로움은 하나님께서 주신 시련이다. 그것으로 너희는 강하게 되는 것이다. 인내심을 배우는 것이다”, “시간이 걸리지만, 언젠가 그 대답을 알 수 있으니 그 때가지 믿고 기다리자”, “너희에게는 대답이 없을지도 모르나 하나님께서는 대답을 갖고 계신다.” 이런 대답들은 남의 괴로움의 경우라면 쉽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그런 부조리로 괴로워할 때에는 대답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 ”(18절) 슬픔 속에 있는 사람에게는 대답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부조리 가운데 있는 사람이 “왜” 라고 물을 때, 그 “왜”에 대답은 없습니다. 그러나 “왜” 라고 묻는 그 부조리 가운데에서도 여전히 살아갈 수 있다면, 그 “왜”를 공유하는 존재를 가질 때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외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부조리 가운데서 괴로워하는 사람과 “함께 괴로워하시는 하나님”으로서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게서는 바로 인간의 불행의 맨 밑바닥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의 괴로움을 짊어지시고 우리의 슬픔을 지시는 고난의 종으로 오신 것입니다. 인간의 동정이나 위로로서는 결코 덮을 수 없는 상처를 감싸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베들레헴의 말구유에서 가장 가난한 어린아이로 태어나시고 골고다의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께서는 “함께 괴로워하시는 하나님”께서 임마누엘이신 분으로 와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함께 괴로워해 주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 갈 것인지, 아니면, 크리스마스의 은혜를 모른채 이 세상의 부조리를 오직 비탄하면서 슬픔과 노여움 가운데를 걸어갈지, 여러분은 어느 길을 택하시겠습니까? 그것을 정하는 것은 바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인 것입니다.
【 2020年 12月 27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
「クリスマスの恵みを知らぬ悲しみ」 マタイ 2章 13~23節
今日の聖書箇所を読みますと、イエスさまの誕生によって二歳以下の子どもたちが犠牲になったように思えます。私たちは、救い主が誕生したのに、そのために多くの子どもたちの命が犠牲になったとは、一体どういうことなのか、という疑問を持たざるをえません。慰めと平安が与えられる筈の、救い主の御降誕が悲しみをもたらしました。これはどういうことでしょうか?
マタイによる福音書は、エレミヤ書31章15節を引用して、この理不尽な出来事も、既に預言されていたのだと言います。でも、預言されているからと言っても、それで納得することは、出来ません。
エレミヤ書のこの箇所は、北王国イスラエルがアッシリアによって滅ぼされ、北イスラエルの人々が捕囚の民として、アッシリアに連れて行かれるのを見て嘆いたものです。「慰めてもらおうともしない」(18節)というのは、どのような慰めの言葉も届かないという、まさに嘆きの声なのです。
マタイによる福音書がなぜ、このラケルの嘆きの箇所を引用して、幼児虐殺の預言としたかと言いますと、民族滅亡の悲劇と、ヘロデによる幼児虐殺とに、共通していることがあるからです。それは、何の落ち度もないのに、降って湧いたような災難に遭った、ということです。それは、この世の不条理という現実を、象徴しております。
しかし、聖書にはこの出来事に対して、どのような意味があるのか、この悲劇がどのように救済されるのか、ということに関して何も語っていません。語っているのは、この不条理な現実の世界にクリスマスは起こったと言うこと、救い主が誕生したことだけなのです。
この時のイエスさまは、誰かの助けがなければ生きていけない、本当に小さく、無力な存在でした。救い主としての、威光と尊厳に満ちたお姿は、どこにも見られません。その幼な子イエスさまから、片時も離れずに、何もかも捨てて、エジプトに行ったヨセフ。そして、幼な子をしっかりと胸に抱いて、どこまでもついて行った母マリア。このヨセフとマリアのように、イエスさまと一緒に、どこまでも歩き続ける者になるのか。それとも、ヘロデのように、イエスさまを邪魔者として、自分の人生の中に、入って来るのを拒むのか。あなたは、そのどちらの側に立つのか。そういう問いを、突き付けているのです。
私たちは、自分が、イエスさまに対して、ヘロデのような敵意など全く持っていないと思っています。しかし、本当にそうでしょうか。本当に、イエスさまが、何時でも、どこからでも、私たちのところに、入って来られるようにと、心を開いているでしょうか。「イエスさま、何時でも、どこででも、私たちのところに来てください。どんな御言葉でも、語り掛けて下さい。私は、それを聞きます」と、そう言い切ることが出来るでしょうか。
勿論、私たちは、イエスさまの御言葉は、大切だと思っています。でも、イエスさまの御言葉を聞いたとしても、「ちょっと待って下さい。状況が整ったら御言葉通りにします」と言いながら、自分の思いを優先させて、イエスさまの恵みを台無しにしてしまっていることはないでしょうか? 私たちは今一度、ヨセフとマリアから自分の信仰を省みなければなりません。
この時、ヨセフとマリアは、天使が伝えた御言葉に、驚くほど素直に従いました。天使は夢でヨセフに、ヘロデが、イエスさまをを殺そうとしていることを告げ、エジプトに避難するように伝えました。それを聞いたヨセフは、直ちに従い、その夜の内に旅立ったのです。ヨセフにとっては、幼な子を連れて、遠い見知らぬ地に行くことは、どれほど大きな犠牲であったでしょうか。けれどもヨセフは、「起きて、夜のうちに」出発したのです。朝まで待ちませんでした。「支度が整うまで待ってください」、とは言わなかったのです。或いは、「エジプト以外に、もっと近くに良いところはないでしょうか」、などと呟くこともしなかったのです。何も分からぬまま、御言葉に直ぐに従いました。
もし、この時、ヨセフが躊躇していたら、幼な子イエスさまは、ヘロデに殺されていたでしょう。ヨセフは、主が備えて下さった道を、ただ御言葉に従って、歩んで行ったのだと思います。そして、エジプトに逃れた後も、ひたすらに御言葉を待ちました。そして、「もう帰っても良い」、という御言葉を聞いて、それに従ったのです。
私たちも、このヨセフとマリアのように、主イエスさまと一緒に、どこまでも歩き続ける者でありたいと、心から願います。どんな時も、御言葉に従って、歩んで行きたいと願います。
私たちの生活の中にも、不条理な出来事が突然襲って来ます。自然災害などもそうですし、交通事故などの予期しない不幸とか、どんなに努力してもそれが報われないとか、私たちの身近に不条理の出来事というのはたくさんあります。今のコロナ禍もそうです。その意味では、この幼児虐殺は、今も起こっている、不条理の象徴とも言えます。しかし、今日の御言葉では、そのような不条理で、悲惨な出来事が、救い主イエスさまの誕生に合わせて、起こっているのです。それは、一体、何を意味しているのでしょうか。
それは私たちの救い主は、私たちの不条理の中で、「共に苦しむ神」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
イエスさまは十字架にかかられた時、「エリ、エリ、レマ、サバクタニ」、「わが神、わが神、なぜわたしをお見捨てになったのですか」、と叫ばれました。神の子であるイエスさまが、神さまから見捨てられたのです。イエスさまには、見捨てられるような覚えは、何もありません。これこそ、不条理の極みではないでしょうか。その不条理の極みに、イエスさまは、ご自分の身を、敢えて置かれたのです。
不条理の中に身を置くとき、人は必ず、「なぜ」と問います。しかし、この「なぜ」に答えはありません。誰も答えを持っていません。ありきたりの答えはあるかもしれません。「この苦しみは神さまの試練です。それによってあなたは強くなるのです、忍耐を学ぶのです」。「時間が掛かるでしょうが、その内にきっと分かります。それまで信じて待ちましょう」。「あなたには答えがないかもしれません。でも神さま様は答えをもっておられます」。このような答えは、他人の苦しみについては、言うことができます。しかし、自分が不条理に苦しんでいるときは、答えとはならないのです。「慰めてもらおうともしない」悲しみの中にいる人には、答えにはならないのです。
不条理のただ中にいる者が、「なぜ」と問うとき、その「なぜ」に、答えはありません。しかし「なぜ」と問う、その不条理の只中を、尚も生きることができるとするならば、その「なぜ」を共有する存在を持つ時です。「わが神、わが神、なぜわたしをお見捨てになったのですか」、と叫ばれながら、イエスさまは不条理の只中で、苦しむ者と「共に苦しむ神」でいてくださるのです。
イエスさまは、まさに、人間の不幸のどん底に、来られたのです。私たちの悩みを負い、私たちの悲しみを担う、苦難の僕として来られたのです。人間の同情や、慰めでは、決して覆うことの出来ない、傷口を包むために来られたのです。ベツレヘムの家畜小屋の飼い葉桶に、最も貧しい幼な子として生まれ、ゴルゴダの十字架に死なれたイエスさまは、「共に苦しむ神」に他ならないのです。クリスマスは、不条理の只中に生きる私たちに、この「共に苦しむ神」が、インマヌエルなるお方として、来てくださった出来事なのです。
皆さん、共に苦しんで下さる、インマヌエルの神さまを信じ、その神さまの恵みに生かされて歩むのか、それとも、クリスマスの恵みを知らずに、この世の不条理を、ただ嘆き、悲しみ、怒りの中を歩むのか、皆さんは、どちらの道を、選ばれますか? それを決めるのは、私たち一人一人なのです。
【2020년 12월 27일 주일예배(요약판)】
“크리스마스의 은혜를 모르는 슬픔” 마태복음 2장 13~23절
오늘의 성경말씀을 읽어보면 예수님의 탄생으로 인해 두 살 이하의 아이들이 희생되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구세주가 탄생하셨는데 그로 인해 많은 아이들의 생명이 희생되었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위로와 평안이 주어져야할텐데 구세주의 탄생이 슬픔을 가져왔습니다. 이것은 도대체 무슨 일일까요?
마태복음은 구약성서 예레미아 31장 15절을 인용해서 이 도리에 맞지 않는 억울한 일도 미리 예언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언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납득할 수는 없습니다.
예레미야의 이 말씀은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로 인하여 멸망되어 북이스라엘 사람들이 유수의 백성이 되어 앗수르로 끌려가는 것을 보고 비탄한 것입니다.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다”(18절) 라는 말은 어떤 위로의 말도 전해지지 못한다는 바로 비탄의 소리인 것입니다.
마태복음이 왜 이 비탄의 말을 인용해서 유아 학살의 예언으로 했느냐하면 민족 멸망의 비극과 헤롯 왕으로 인한 유아 학살과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아무 잘못도 없는데 생각지도 못한 재난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부조리라는 현실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이 일에 대해서 어떤 뜻이 있는지, 이 비극이 어떻게 구원되는지에 관하여 그 아무것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말하고 있는 것은 이 부조리한 현실 세계에 크리스마스는 생겨났다는 것, 구세주가 탄생하셨다는 것, 그 뿐입니다.
그 때의 예수님께서는 누군가가 도와 주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참으로 작고 무력한 존재였습니다. 구세주로서의 위력과 존엄이 넘치는 모습은 어디에도 볼 수 없었습니다. 그 어린 예수님 곁을 잠시도 떠나지 않고 모든 것을 버려 애굽으로 간 요셉, 그리고 어린아이를 품에 안고 어디까지나 따라간 어머니 마리아, 이 요셉과 마리아처럼 예수님과 함께 어디까지나 계속 걸어가는 자가 될지, 아니면 헤롯 왕 처럼 예수님을 방해자로 여겨 자기 인생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거절할지, 그 어느 쪽에 서느냐는 물음을 들이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 자신은 예수님에 대해서 헤롯과 같은 적의 등은 전혀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정말로 예수님께서 언제든지 어디서나 우리 에게 들어 오실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 두고 있을까요? “예수님, 언제든지 어디서나 우리 있는 곳으로 와 주세요. 어떤 말씀이라도 해 주세요. 저는 그것을 다 듣겠습니다” 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요?
물론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은 아주 소중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더라도 “좀 기다려 주세요. 상황이 갖추어지면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라며 자신의 생각을 우선시하여 예수님의 은혜를 저버리는 때가 없을까요? 우리는 다시 한번 요셉과 마리아를 통해서 자기의 신앙을 반성해야 합니다.
그 때, 요셉과 마리아는 천사가 전한 말씀에 놀라울 정도로 순순히 따랐습니다. 천사는 꿈에서 요셉에게 헤롯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것을 고하며 애굽으로 떠나라고 전했습니다. 그것을 들었던 요셉은 즉시 따라 그 밤에 떠나간 것입니다. 요셉에게는 그 어린아이를 데리고 멀고 낯선 땅으로 가는 것이 얼마나 큰 희생이었을까요? “준비가 갖추어질 때까지 기다려 주세요” 라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또는 “애굽 이외에 더 가까운 좋은 데가 없을까요?” 라고 투덜거리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아무것도 알지 못했어도 즉시 그 말씀을 따랐습니다.
만약 그 때, 요셉이 주저했더라면 어린아이인 예수님께서는 헤롯에게 살해 되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주님께서 마련해 주신 길을,오직 말씀을 따라 걸어간 것입니다. 그리고 애굽으로 떠난 후도 오직 말씀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돌아가도 된다”는 말씀을 듣고 그것에 따른 것입니다.
우리도 요셉과 마리아처럼 주 예수님과 함께 어떠한 때라도 그 어디까지라도 말씀에 순종하며 걸어가는 자가 되길 원합니다.
우리가 생활하는 일상 중에는 어느날 갑자기 부조리한 일들이 덮쳐 오기도 합니다. 자연 재해도 그렇고 교통사고 등의 예기치 못한 불행이 오기도 하고 아무리 노력해도 그것을 보답받지 못하거나 하는 등 우리 가까이에는 부조리한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의 코로나화도 그렇습니다. 그 의미로 보자면 이 유아 학살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부조리의 상징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성경말씀에서는 그러한 부조리하고 비참한 일이 구세주 예수님의 탄생에 맞추어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의 구세주께서는 우리의 부조리 가운데서 “함께 괴로워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 라고 외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버림을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는 버림을 받을 만한 짓을 한 적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부조리의 극이 아닙니까? 그 부조리의 극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몸을 넣으신 것입니다.
부조리 속에 몸을 둘 때, 사람은 반드시 “왜” 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이 “왜”에 대답은 없습니다. 아무도 대답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흔히 있는 그런 대답은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 괴로움은 하나님께서 주신 시련이다. 그것으로 너희는 강하게 되는 것이다. 인내심을 배우는 것이다”, “시간이 걸리지만, 언젠가 그 대답을 알 수 있으니 그 때가지 믿고 기다리자”, “너희에게는 대답이 없을지도 모르나 하나님께서는 대답을 갖고 계신다.” 이런 대답들은 남의 괴로움의 경우라면 쉽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그런 부조리로 괴로워할 때에는 대답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 ”(18절) 슬픔 속에 있는 사람에게는 대답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부조리 가운데 있는 사람이 “왜” 라고 물을 때, 그 “왜”에 대답은 없습니다. 그러나 “왜” 라고 묻는 그 부조리 가운데에서도 여전히 살아갈 수 있다면, 그 “왜”를 공유하는 존재를 가질 때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외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부조리 가운데서 괴로워하는 사람과 “함께 괴로워하시는 하나님”으로서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게서는 바로 인간의 불행의 맨 밑바닥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의 괴로움을 짊어지시고 우리의 슬픔을 지시는 고난의 종으로 오신 것입니다. 인간의 동정이나 위로로서는 결코 덮을 수 없는 상처를 감싸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베들레헴의 말구유에서 가장 가난한 어린아이로 태어나시고 골고다의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께서는 “함께 괴로워하시는 하나님”께서 임마누엘이신 분으로 와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함께 괴로워해 주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 갈 것인지, 아니면, 크리스마스의 은혜를 모른채 이 세상의 부조리를 오직 비탄하면서 슬픔과 노여움 가운데를 걸어갈지, 여러분은 어느 길을 택하시겠습니까? 그것을 정하는 것은 바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