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는 로마 황제가 내린 주민등록 칙령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지배자들의 편의를 위한 주민등록이었기에 출산이 다가온 임부마저도 아주 힘든 긴 여행을 감수하면서까지 주민 등록을 해야만 하는 피지배자들의 어두운 현실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주민 등록은 꼭 자기가 태어난 고향으로 돌아가서 등록을 해야만 하기 때문에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마리아와 함께 등록을 하기 위해 갈릴리 나사렛에서 유대의 베들레헴이라는 동네로 올라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베들레헴에 갈 즈음 마리아는 산달이 꽉 찬 만삭의 몸이었습니다. 황급히 출산할 곳을 찾았습니다만, 여관은 이미 주민 등록을 하려고 올라온 여행자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머물 방이 없어서 축사의 구유 속에서 첫아기를 낳게 된 것입니다. 아무도 모르는,또 아무도 기뻐해 주는 사람 없는 바로 그런 어두운 곳에서 예수님께서는 태어나신 것입니다.
이것이 구세주의 탄생이었습니다. 이 구세주 탄생의 소식을 제일 먼저 들은 것이 목자들이었습니다. 성경에는 평상시와 같이 밤새 밖에서 양 떼를 지키고 있던 목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났을 때,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9절) 라고 쓰여 있습니다.
목자들은 주의 영광, 그 빛을 보고 크게 무서워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영광의 빛을 알아차린 것은 그 일대에서 목자들 뿐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째서 일까요? 스포트라이트처럼 거기만 비춰졌던 때문일까요? 하지만 이후에 천사의 수많은 천군이 나타나서 하나님을 찬송하였다고 하니 하늘 전체가 영광의 빛으로 환히 빛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목자들 이외는 아무도 이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아마 “주의 영광”이라는 것이 누구나 볼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목자들은 왜 주님의 영광을 볼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목자들을 눈여겨 보셨기 때문입니다. 목자들의 일은 주야 불문하고 양들을 돌보아야 하는 가혹한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사람들에게는 그 일이 천한 일로 생각되고 있었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주변 밖으로 내몰렸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있을 곳이 없없던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렇게 천하게 업신여김을 받던 하찮은 존재였던 목자들에게 제일 먼저 구세주의 탄생이 알려졌던 것입니다.
“주의 영광”, 그것은 육안이 아닌 “신앙의 눈”으로 보지 않으면 볼 수 없는 빛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보인다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한걸음 더 내디디지 않으면 볼 수 없는 것, 체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목자들은 “이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15절)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그들은 일보를 내디딘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베들레헴으로 가서 한 집,한 집씩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 냈던 것입니다.
“축사”, “구유에 누인 아기” 라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는 뭔가 특별한 표시도 표적도 그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목자라는 일의 성질상 축사는 그냥 그들의 일상적인 것이었고,때로는 그들의 아기를 구유에 누인 적도 있었기에 그것은 늘 보던 일상적인 것에불과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자기들의 일상 생활 속에서 구세주를 찾아내었다는 것이 됩니다. 게다가 구유에 뉘어 있는 예수님께 동방 박사들처럼 보배를 드리거나 예배를 본 것도 아닙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누워 있는 아기가 구세주라는 실감은 없었던 것입니다. 이 아기가 구원의 표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12절) 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것을 잘 읽으면 이 아기가 표시라고 말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라는 “이것”이 가리키는 것은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라는 문장 전체입니다. 너희가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본다는 것이 너희에게 표시가 될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표시가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냐하면 이 날에 탄생하신 구세주가 “너희를 위한” 구세주시며 하나님께서 “너희들”을 택하시고 “큰 기쁨”을 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자들은 자기들이 보고 들은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눈여겨 보시고 축복해 주신 것을 깨닫고 기뻐했습니다. 기쁜 나머지 밤중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이를 전했습니다. 동네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성가신 이야기입니다. 당연히 아무도 믿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갔습니다. 또 평상시와 변함없는 일상으로, 사람들이 잠자는 한밤중에도 일을 하고 그런데도 자기나 가족들은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힘겨운 그런 생활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들의 변함없는 일상 생활 속에 임마누엘이신 주님께서 계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반복해서 말씀드리지만, 목자들은 뭔가 특별한 일이나 특별한 장면 가운데 “구세주”를 찾았던 게 아니라 아무 변화도 없는 그들의 일상 생활 속에서 찾아낸 것입니다. 평범한 하루 하루, 거기에는 기대나 즐거움, 또 괴로움이나 슬픔, 고생도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한 일상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라갈 때, 우리는 거기에 있는 “큰 기쁨”을 깨닫고 “구세주”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이른바 성공이나 행복한 생활을 “구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신앙으로 찾아내는 구원이라는 것은 틀림없이 “의아한 것”(18절)이며 일부러 찾으러 가려고도 생각하지 않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려고 사는 신앙으로 “큰 기쁨”을 깨닫고 맛보았던 사람에게는 그 구원은 진짜입니다. 진실입니다. 지금까지는 그냥 어두운 밤이 하나님의 영광이 빛나는 밤으로 바꿉니다. 그들은 큰 기쁨 가운데 자기의 인생을 걸어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의 찬송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크리스마스 날로부터 다시 한번 구원을 찾아내기 위하여 새로운 마음으로 신앙을 갖고 사는 일상 생활에 나아가고자 합니다. 말씀을 듣고 따르며 기도하면서 생활해 갈 때, 일상 생활 속에서 “큰 기쁨”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시고 “나”의 죄를 위하여 죽어 주시고 “나”와 함께 해 주시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찾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만나는 그 날 그 때야말로, 그러한 하루 하루가 우리에게 있어서 틀림없이 진실한 크리스마스가 될 것입니다.
【 2020年 12月 13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
「飼い葉桶の赤ちゃんがメシアのしるし?」 ルカ 2章 8~20節
この物語の始まりは、ローマ皇帝による住民登録の勅令から始まっております。支配者の都合によって、お産を間近にした妊婦さえも大変な長旅をして住民登録をしなければならない被支配者たちの暗い現実の生活がありました。住民登録は自分の生まれ故郷に帰って登録しなくてはならなかったので、マリアの夫ヨセフはマリアと共に登録するために、ガリラヤの町ナザレからユダヤのベツレヘムという町に上っていったのです。
ところが彼らがベツレヘムに滞在している間に、マリヤは月が満ちてしまいました。あわてて産む場所を捜しましたが、宿屋の客間は住民登録のために旅人でいっぱいだったために、宿屋には泊まることができないで、馬小屋の飼い葉おけの中で初子を産んだのです。誰にも知られずに、誰も喜んでくれる者がいない、まさに暗闇の世界に、イエスさまはお生まれになりました。
これが救い主の誕生でした。この救い主誕生の知らせを真っ先に聞いたのが、羊飼いたちでした。聖書は、いつものように夜通し羊の群れの番をしている羊飼いたちのところに天使が現れた時、「すると、主の天使が近づき、主の栄光が周りを照らしたので、彼らは非常に恐れた」(9節)と記しています。
羊飼いたちは主の栄光、その光を見て、非常に恐れたと言います。ところが、その栄光の光に気づいたのは、どうもその一帯で羊飼いたちだけだったようです。どうしてでしょう? スポットライトのように、そこだけが照らされたからでしょうか? でも、この後、天使の大軍が現れて、神さまを賛美したというのですから、空一面が栄光の光に輝いていたはずだと思うのです。けれども、羊飼いたち以外は誰もこのことに気づいていないのです。それはきっと、「主の栄光」というものが、誰でも見ることができるようなものではないからです。
では、羊飼いたちはなぜ主の栄光を見ることが出来たのでしょうか? それは神さまがこの羊飼いたちに目を留められたからです。羊飼いの仕事は、昼夜を問わず羊の世話をしなければならない過酷なものでした。しかも、人々からは卑しい仕事であると思われていたのです。ユダヤ社会からは枠外にあった人たちでした。この世に居場所のなかった人たちと言えるでしょう。そのように軽んじられており、小さな存在であった羊飼いたちに、真っ先に救い主の誕生が告げられたのです。
「主の栄光」、それは肉眼ではなく、“信仰の目”で見ないと見えない光なのかもしれません。そして、それは単に見える見えないということではなく、神さまの恵みを信じて、一歩を私たちが踏み出さなければ見ること、体験することの出来ないものなのでしょう。
羊飼いたちは、「さあ、ベツレヘムへ行こう。主が知らせてくださったその出来事を見ようではないか」(15節)と話し合ったとあります。神さまの恵みの御言葉を信じて、彼らは一歩を踏み出しました。
彼らはベツレヘムの町に行って、一軒一軒、家の扉を叩き探しました。そして、ついに飼い葉桶に寝ているイエスさまを探し当てたのです。
「家畜小屋」や「飼い葉桶に寝ている赤ちゃん」というのは、彼らにとっては何か特別なしるしでも何でもありません。羊飼いの仕事柄、家畜小屋は身近なものだし、自分の子どもを飼い葉桶に寝かせたこともあったでしょう。それは日常の出来事を目にしただけです。ですから、彼らは自分たちの日常の生活の中に救い主を探し出したことになります。しかも、飼い葉桶に寝ているイエスさまの対して、東方の博士たちのように、宝物を献げたり、礼拝をしたわけでもありません。彼らにとっては飼い葉桶に寝ている赤ちゃんが救い主であるという実感はないのです。この赤ちゃんが救いのしるしではないということです。聖書には「あなたがたは、布にくるまって飼い葉桶の中に寝ている乳飲み子を見つけるであろう。これがあなたがたへのしるしである」(12節)と記されています。これを良く読めば、この赤ちゃんがしるしであるとは言ってはいないのです。「これがあなたがたへのしるしである」という「これ」が指しているのは、「あなたがたは、布にくるまって飼い葉桶の中に寝ている乳飲み子を見つけるであろう」という文章全体です。あなたがたは飼い葉桶んい寝ている乳飲み子を見つける、そのことがあなたがたへのしるしだと言っているのです。そのしるしが何を示しているかと言いますと、この日誕生した救い主が、「あなたがたのため」の救い主であること、神さまが「あなたがた」を選んで、「大きな喜び」を告げておられる、ということなのです。
ですから、羊飼いたちは自分たちが見聞きしたことを通して、神さまが自分たちのことに目を留められ、祝福して下さったことを悟り、喜びました。喜びのあまり、夜中にも関わらず、人々に伝えました。町の人にとっては良い迷惑です。当然誰も信じません。それでも、彼らは神さまをあがめ、讃美しながら帰って行きました。また、いつもと変わらない日常へと、人が寝ている真夜中でも仕事をし、それでも自分や家族が生きていくだけで精一杯の生活へと戻っていったのです。でも、彼らには大きな変化がありました。それは、自分たちの変わりない日常の生活の中に、インマヌエルの主がおられるのが分かったからです。
繰り返して言いますが、羊飼いたちは、何か特別な出来事や、特別な場面の中に「救い主」を見つけたのではなく、何の変わりもない彼らの日常生活の中に見出したのです。平凡な一日一日、そこには期待や楽しみ、また悩みや悲しみ、苦労もあるかも知れない。そういう日常生活の中で、神さまの御言葉に聞き従って生きる時、私たちは、そこにある「大きな喜び」に気づかされ、「救い主」を探し当てるのです。
いわゆる成功とか、幸せな生活を“救い”と考えている人にとっては、信仰によって探し当てる救いなんてものは、確かに「不思議」(18節)であり、探しに行こうとも思わないことでしょう。けれども、神さまの御言葉に聴き、従って生きる信仰によって、「大きな喜び」に気づかされ、味わった人にとって、その救いはリアルです。真実です。今まではただの暗い夜が、神さまの栄光が輝く夜に変わります。彼らは大きな喜び中で、自分の人生を歩むようになったのです。それが彼らの讃美となりました。
皆さん、私たちはこのクリスマスの日から、改めて救いを探し当てるために、新たな思いで、信仰を持って生きる日常生活に出かけようと思います。御言葉に聴き従い、祈りを持って生活していく時、日常の生活の中で「大きな喜び」に出会うことができるのです。“私”を愛し、“私”の罪のために死んでくださり、“私”と共にいてくださる救い主イエス・キリストに出会うことができます。神さまの愛を見つけ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そして、キリストに出会うその日その時こそが、そのような一日一日が、私たちにとって真実のクリスマスとなるに違いありません。
【2020년 12월 13일 주일예배(요약판)】
“구유의 아기가 구세주의 표시?” 누가복음 2장 8~20절
이 이야기는 로마 황제가 내린 주민등록 칙령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지배자들의 편의를 위한 주민등록이었기에 출산이 다가온 임부마저도 아주 힘든 긴 여행을 감수하면서까지 주민 등록을 해야만 하는 피지배자들의 어두운 현실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주민 등록은 꼭 자기가 태어난 고향으로 돌아가서 등록을 해야만 하기 때문에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마리아와 함께 등록을 하기 위해 갈릴리 나사렛에서 유대의 베들레헴이라는 동네로 올라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베들레헴에 갈 즈음 마리아는 산달이 꽉 찬 만삭의 몸이었습니다. 황급히 출산할 곳을 찾았습니다만, 여관은 이미 주민 등록을 하려고 올라온 여행자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머물 방이 없어서 축사의 구유 속에서 첫아기를 낳게 된 것입니다. 아무도 모르는,또 아무도 기뻐해 주는 사람 없는 바로 그런 어두운 곳에서 예수님께서는 태어나신 것입니다.
이것이 구세주의 탄생이었습니다. 이 구세주 탄생의 소식을 제일 먼저 들은 것이 목자들이었습니다. 성경에는 평상시와 같이 밤새 밖에서 양 떼를 지키고 있던 목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났을 때,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9절) 라고 쓰여 있습니다.
목자들은 주의 영광, 그 빛을 보고 크게 무서워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영광의 빛을 알아차린 것은 그 일대에서 목자들 뿐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째서 일까요? 스포트라이트처럼 거기만 비춰졌던 때문일까요? 하지만 이후에 천사의 수많은 천군이 나타나서 하나님을 찬송하였다고 하니 하늘 전체가 영광의 빛으로 환히 빛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목자들 이외는 아무도 이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아마 “주의 영광”이라는 것이 누구나 볼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목자들은 왜 주님의 영광을 볼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목자들을 눈여겨 보셨기 때문입니다. 목자들의 일은 주야 불문하고 양들을 돌보아야 하는 가혹한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사람들에게는 그 일이 천한 일로 생각되고 있었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주변 밖으로 내몰렸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있을 곳이 없없던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렇게 천하게 업신여김을 받던 하찮은 존재였던 목자들에게 제일 먼저 구세주의 탄생이 알려졌던 것입니다.
“주의 영광”, 그것은 육안이 아닌 “신앙의 눈”으로 보지 않으면 볼 수 없는 빛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보인다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한걸음 더 내디디지 않으면 볼 수 없는 것, 체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목자들은 “이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15절)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그들은 일보를 내디딘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베들레헴으로 가서 한 집,한 집씩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 냈던 것입니다.
“축사”, “구유에 누인 아기” 라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는 뭔가 특별한 표시도 표적도 그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목자라는 일의 성질상 축사는 그냥 그들의 일상적인 것이었고,때로는 그들의 아기를 구유에 누인 적도 있었기에 그것은 늘 보던 일상적인 것에불과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자기들의 일상 생활 속에서 구세주를 찾아내었다는 것이 됩니다. 게다가 구유에 뉘어 있는 예수님께 동방 박사들처럼 보배를 드리거나 예배를 본 것도 아닙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누워 있는 아기가 구세주라는 실감은 없었던 것입니다. 이 아기가 구원의 표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12절) 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것을 잘 읽으면 이 아기가 표시라고 말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라는 “이것”이 가리키는 것은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라는 문장 전체입니다. 너희가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본다는 것이 너희에게 표시가 될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표시가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냐하면 이 날에 탄생하신 구세주가 “너희를 위한” 구세주시며 하나님께서 “너희들”을 택하시고 “큰 기쁨”을 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자들은 자기들이 보고 들은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눈여겨 보시고 축복해 주신 것을 깨닫고 기뻐했습니다. 기쁜 나머지 밤중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이를 전했습니다. 동네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성가신 이야기입니다. 당연히 아무도 믿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갔습니다. 또 평상시와 변함없는 일상으로, 사람들이 잠자는 한밤중에도 일을 하고 그런데도 자기나 가족들은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힘겨운 그런 생활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들의 변함없는 일상 생활 속에 임마누엘이신 주님께서 계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반복해서 말씀드리지만, 목자들은 뭔가 특별한 일이나 특별한 장면 가운데 “구세주”를 찾았던 게 아니라 아무 변화도 없는 그들의 일상 생활 속에서 찾아낸 것입니다. 평범한 하루 하루, 거기에는 기대나 즐거움, 또 괴로움이나 슬픔, 고생도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한 일상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라갈 때, 우리는 거기에 있는 “큰 기쁨”을 깨닫고 “구세주”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이른바 성공이나 행복한 생활을 “구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신앙으로 찾아내는 구원이라는 것은 틀림없이 “의아한 것”(18절)이며 일부러 찾으러 가려고도 생각하지 않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려고 사는 신앙으로 “큰 기쁨”을 깨닫고 맛보았던 사람에게는 그 구원은 진짜입니다. 진실입니다. 지금까지는 그냥 어두운 밤이 하나님의 영광이 빛나는 밤으로 바꿉니다. 그들은 큰 기쁨 가운데 자기의 인생을 걸어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의 찬송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크리스마스 날로부터 다시 한번 구원을 찾아내기 위하여 새로운 마음으로 신앙을 갖고 사는 일상 생활에 나아가고자 합니다. 말씀을 듣고 따르며 기도하면서 생활해 갈 때, 일상 생활 속에서 “큰 기쁨”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시고 “나”의 죄를 위하여 죽어 주시고 “나”와 함께 해 주시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찾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만나는 그 날 그 때야말로, 그러한 하루 하루가 우리에게 있어서 틀림없이 진실한 크리스마스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