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성경구절은 이른바 바울의 첫번째 전도여행이라고도 불리며 본격적으로 교회가 세계 선교에 진출한 그 시작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2-3절)
이 전도여행이 안디옥 교회의 예배와 기도를 하는 가운데 성령으로 인해 이루어진 것이라는 부분입니다.
결코 바나바나 바울의 개인적인 결의나 의지로 시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2절에 먼저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라고 쓰여 있습니다. “주를 섬긴다”는 말은 예배를 뜻합니다. 그리고 “금식”은 기도를 위해 하는 것이므로 안디옥 교회가 예배와 기도를 하고 있을 때에 성령의 계시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때, 세계 선교의 사명・비전이 주어진 것입니다. 즉 전도여행을 하는 것도 또 누구를 그일에 파견해야할지도 모두 다 성령이 즉 하나님께서 교회에 명하신 것이었습니다. 바나바나 바울이 개인적으로 “전도여행에 가고 싶다”해서 가도록 한게 아니라 교회의 비전으로서 성령으로 하나님의 사명이 안디옥 교회에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것에 따라 두 사람 위에 손을 얹고 안수를 하여 보냈습니다. 교회가 안수를 했다는 것은 교회가 정식으로 이 일을 위하여 이 두 사람을 임명했다는 것이며 이 전도여행이 교회의 사업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성령의 역사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도 성령이 우리의 이 예배에도 역사하십니다.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시고 우리에게 변화를 요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이 때,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가운데 교회에 변화가 요구되어졌습니다. 안디옥 교회가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가운데 바나바와 바울을 세계전도로 파견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3절에 “보내니라” 라고 쓰여 있습니다. “파견했다”는 뜻이지만, 이 말은 원래 “해방한다, 풀어 준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교회로서 막 시작했습니다. 그 교회에 있어서 바나바도 바울도 소중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리고 안디옥에는 아직 복음을 모르는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을 이 두 사람은 짊어지고 있었습니다. 가능하다면 이 두 사람은 계속 안디옥에 남기 바랐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성령의 인도하시는 가운데 안디옥 교회는 이 두 사람을 자기들의 교회에서 맡아 하던 일들로부터 놓아 주었던 것입니다. 거기에는 교회의 큰 희생이 따랐던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가 이러한 희생을 치른 것으로 인하여 이른바 바울의 전도여행이 행해지고 그것으로 지중해 세계의 각지에 교회가 태어났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됩니다. 교회가 살아 있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성령으로 활기차게 살아 있는 교회는 늘 밖을 향하여 아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세상 사람들을 향하여 그것을 전파하고 사람들을 불러 맞아들인다는 마음을 가지고 또 그러기 위하여 희생을 치러 가는 자세를 가지는 것입니다. 교회가 만약 지금 모여 있는 자기들의 그 마음이 편한 교제에만 안주하며, 그 안주를 지키는 것만을 생각하여 새로운 사람이나 밖의 사람들에 대해서 폐쇄적으로 되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성령의 역사를 잃어버린 허물 같은 교회입니다. 거기에 지배하고 있는 것은 자기의 편함을 구하는 인간의 생각이며 하나님 말씀의 지배는 어딘가에 가버린 것입니다. 자기들의 편함을 희생하더라도 밖을 향하여 복음을 전파해 가려고 하는 안디옥 교회에서 볼 수 있는 이 자세를 우리 히로시마 교회도 이어받아야 합니다.
또 안디옥 교회는 이러한 희생을 치르는 것을 통해서 새롭게 바뀌어져 가게 됩니다. 그것은 전도로 파견되는 바나바나 바울에 있어서도 큰 변화가 요구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옛날도 교회는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큰 변화가 주어져 왔습니다. 우리도 성령으로 인도받고 바뀌어 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주시는 변화란 무엇이 바뀌는 것일까요? 어떻게 바뀌는 것일까요? 물론 인간이 신이 되거나 초인적인 사람으로 바뀌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보고 있는 곳이 바뀌고 걸어가야 하는 방향이 바뀌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새롭게 “보아야 하는 곳과 방향”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지금의 터키에 맨 처음에 태어난 이방인교회였습니다. 크게 성장해서 예루살렘 교회를 경제적으로 지원하기까지 되었다고 해도 아직도 힘이 부족한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힘이 부족하다고 해도 무력하고 내향적인 교회는 아니었습니다. 성령으로 밖으로 나아가는 교회였던 것입니다. 이 교회에서 파견된 두 사람이 향한 곳이 어디냐면 실루기아, 구브로, 살라미, 바보, 비시디아로 그들은 터키 주변의 지역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그것은 결코 쉬운 여행이 아닙니다. 당시는 이동하는 것만으로도 힘든 일입니다. 막상 전도를 하려면 많은 혼란과 시련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음 주에 읽을 구브로 선교에 관한 부분을 보면 거기에서도 바로 그런 방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원래 이 전도여행이 바나바나 바울의 뜨거운 복음 전도의 마음으로 시작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그냥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이교 세계로 향한 것입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병이 잦은 바울 로서는 큰 불안을 안고 여행을 떠났을 것입니다.
구도나오코라는 시인이며 동화 작가가 계십니다. 아이들에게도 알수 있도록 쉬운 말을 써서 많은 시나 동화를 쓰십니다만, 그녀의 작품에 “모른다” 라는 시가 있습니다. 이런 시입니다.
“모른다 / 손을 내밀어 본다 / 그 손이 가리키는 건너편에 / 뭐가 나타날지…… 모른다 / 발을 내디디려고 공중에 띄운다 / 그 발이 착지하는 세계는 / 나를 어디로 인도할지…… 모른다 / 그것을 전혀 모르니까 / 그것을 전혀 모르기에 / 먼저 손을 내밀어 발을 내디딘다”
이것이야말로 성령으로 내세워지고 내보내어진 바울의 심경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도 또 인생의 근본으로서 성령으로 내세워지면서 인생을 보내는 우리의 마음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를 내세우는 것은 귀신도 사탄도 아닙니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또 주 예수님을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만큼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성령이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나아가고 끝까지 나아갈 수 있는 힘도 주실 것입니다. 가령 “모른다”라고 하더라도 “전혀 모르기에 먼저 손을 내밀어 발을 내디디”는 것입니다.
성령이신 하나님께서는 이번에는 우리들을 하나님의 역사를 위하여 쓰시려고 하십니다. 지금 이 예배로부터 성령께서 우리를 각자의 장소로 내보내어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내보내어지고 성령의 역사에 몸을 맡기며 걸어가면 우리는 각자 주어진 장소에서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시는 전도의 사명을 짊어지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발은 아주 죄 많고 더러움에 넘쳐 있습니다만,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에 그것이 평화를 고하고 은혜의 좋은 소식을 전하여 구원을 고하는 아름다운 발로서 쓰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 2020年 11月 8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
「聖霊がもたらす変化」 使徒言行録 13章 1~3節
今日の聖書箇所には、いわゆるパウロの第一回伝道旅行と呼ばれる、本格的に世界宣教へと教会が踏み出した、その始まりについて記されております。
2節をご覧下さい。「2 彼らが主を礼拝し、断食していると、聖霊が告げた。「さあ、バルナバとサウロをわたしのために選び出しなさい。わたしが前もって二人に決めておいた仕事に当たらせるために。3 そこで、彼らは断食して祈り、二人の上に手を置いて出発させた。」(2-3節)
この伝道旅行がアンティオキア教会の礼拝と祈りの中で、聖霊によって示されたものだったということなのです。決して、バルナバやパウロの個人的な決意や意志によって始まったものではなかったのです。
2節にまず、「彼らが主を礼拝し、断食していると」とあります。断食は祈りのためになされることですから、アンティオキア教会が礼拝と祈りをしている時に、聖霊のお告げがあったのです。この時、世界宣教の使命・ビジョンが与えられたわけですね。つまり、伝道旅行が行われることも、また誰がそのために遣わされるのかも、全ては聖霊が、即ち神さまが教会にお命じになったことだったのです。バルナバやパウロの個人的に「伝道旅行に行きたい」という志を与えられたのではなくて、教会のビジョンとして、聖霊によって神さまの使命がアンティオキア教会に与えられたということです。教会はそれに従い、二人の上に手を置いて出発させました。「手を置く」というのは「按手」と言いますが、それは教会がこの働きのために正式にこの二人を任命したということであり、この伝道旅行が教会の働きであったと言うことです。そして、それは聖霊の働きであったのです。
皆さん、今も、聖霊がこの礼拝においても働かれております。御言葉を通して、私たちの心を動かし私たちに変化を求めておられるのです。アンティオキア教会は、この時、聖霊が働かれ、教会に変化を求められました。アンティオキア教会が聖霊の導きの中で、バルナバとパウロを世界伝道へと派遣したと言いましたが、それは決して簡単なことではなかったのです。
3節に「出発させた」とあります。「派遣した」という意味ですが、この言葉は、元々「解放した、解き放った」という意味を持っています。アンティオキア教会は教会として始まったばかりです。その教会にとって、バルナバもパウロも大切な指導者でした。そして、アンティオキアにはまだ福音に触れていない多くの人がおります。そのような人々に神さまの御言葉を告げ知らせる働きをこの二人は担っていたのです。出来れば、この二人にはずっとアンティオキアに留まって欲しかったわけですね。それでも、聖霊の導きの中で、アンティオキア教会はこの二人を自分たちの教会における働きから解き放ったのです。そこには教会の大きな犠牲があったのです。
アンティオキア教会がこのように犠牲を払ったことによって、いわゆるパウロの伝道旅行が行われ、それによって地中海世界の各地に教会が生まれていったことを私たちは忘れてはなりません。教会が生きているというのはこういうことです。聖霊によって生き生きと生かされている教会は、常に、外に向かって、まだ主イエス・キリストの福音を知らない世の人々に向かって、それを宣べ伝え、人々を招き、迎え入れていく、という思いを持ち、またそのために、犠牲を払っていく姿勢を持つのです。教会がもしも、今集っている自分たちの交わりに安住し、その居心地の良さにあぐらをかいて、その居心地の良さを守ることばかりを考え、新しい人、外の人々に対して閉鎖的になるようなことがあるなら、それは、聖霊の働きを失った、抜け殻のような教会です。そこに支配しているのは、自分の心地良さを求める人間の思いであり、神さまの御言葉の支配はどこかへ行ってしまっているのです。自分たちの心地良さを犠牲にしても、外に向かって福音を宣べ伝えていこうとする、アンティオキア教会に見られるこの姿勢を、私たち広島教会も受け継いで行かなければなりません。
また、アンティオキア教会はこのような犠牲を払うことを通して、新たに変えられていくことになります。それは伝道に派遣されるバルナバやパウロにとっても大きな変化を求められるものでした。
今も昔も、教会は「聖霊」の働きによって、大きな変化を与えられてきました。私たちも聖霊によって、導かれ変わっていくのです。では、聖霊が与える変化とは、何が変わるのでしょうか? どう変わるのか? 勿論、人間が神さまになったり、超人に変わ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私たちの見ている所が変わり、歩むべき方向が、変わるのです。聖霊は、私たちに新しく、「見るべきところと方向」を示してくださるのです。
アンティオキア教会は今のトルコに最初に生まれた異邦人教会でした。大きく成長し、エルサレム教会を経済的に支援するまでになったとはいえ、まだまだ非力な教会でした。。しかし非力であっても、無力で内向きの教会ではありません。聖霊によって外へと歩み出す教会であったのです。この教会から派遣された二人が、向かった先はどこかと言いますと、セレウキア、キプロス、サラミス、パフォス、ピシディアと、彼らはトルコ周辺の地域に向かって、歩みを進めていきます。それは決して簡単な旅ではありません。当時の事ですから、移動するだけでも大変です。いざ、伝道をするとなると、多くの困難や試練が待ち受けております。来週読みますキプロス宣教においても早速妨害がありました。
そもそもこの伝道旅行がバルナバやパウロの熱い福音伝道の思いから始まったものではありません。彼らはただ聖霊に押し出されて異教世界へと向かったわけですね。この先、どうなるかはわかりません。病気がちだったパウロにとっては大きな不安を抱えての旅立ちだったと思います。
工藤直子という詩人であり童話作家がおられます。子どもでも分かるような平易な言葉を使って多くの詩や童話を書かれていますが、彼女の作品に「わからん」という詩があります。このような詩です。「わからん / 手を のばしてみる / その手の 指さすむこうに / なにが あらわれるか…… わからん / 足を踏みだそうと 宙に浮かす / その足が 着地する世界は / わたしを どこに導くか…… わからん / それが まったく わからんので / それが まったく わからんからこそ / まず 手をのばし 足を踏みだす /」。
これこそ、聖霊によって押し出され、送り出されたパウロの心境だったかもしれません。そしてまた、人生の根本で聖霊によって、押し出されながら人生を送る私たちの心かもしれません。しかし、私たちを押し出すのは、鬼でも悪魔でもありません。それは主イエス・キリストなのです。また、主イエスさまを私たちのために犠牲にされるほど、私たちを愛して下さっている神さまなのです。そして、聖霊なる神さまのです。
そうであるならば、私たちが歩み出し、歩み通す力をも与えてくれるでしょう。たとえ「わからん」でも「わからんからこそ、手を伸ばし、足を踏み出す」のです。
聖霊なる神さまは、今度は私たちを、神さまの御業のために用いようとしておられます。今この礼拝から、聖霊が私たちをそれぞれの場へと送り出して下さるのです。聖霊に送り出されて、聖霊の働きに身を委ねつつ歩むならば、私たちはそれぞれの与えられている場で、神さまが教会に与えておられる伝道の使命を担う者となることができます。私たちの足はまことに罪深い、汚れに満ちたものでしかありませんが、聖霊が働いて下さる時、それが、平和を告げ、恵みの良い知らせを伝え、救いを告げる、美しい足として用いられるのです。
【2020년 11월 8일 주일예배(요약판)】
“성령이 가져오는 변화” 사도행전 13장 1~3절
오늘의 성경구절은 이른바 바울의 첫번째 전도여행이라고도 불리며 본격적으로 교회가 세계 선교에 진출한 그 시작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2-3절)
이 전도여행이 안디옥 교회의 예배와 기도를 하는 가운데 성령으로 인해 이루어진 것이라는 부분입니다.
결코 바나바나 바울의 개인적인 결의나 의지로 시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2절에 먼저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라고 쓰여 있습니다. “주를 섬긴다”는 말은 예배를 뜻합니다. 그리고 “금식”은 기도를 위해 하는 것이므로 안디옥 교회가 예배와 기도를 하고 있을 때에 성령의 계시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때, 세계 선교의 사명・비전이 주어진 것입니다. 즉 전도여행을 하는 것도 또 누구를 그일에 파견해야할지도 모두 다 성령이 즉 하나님께서 교회에 명하신 것이었습니다. 바나바나 바울이 개인적으로 “전도여행에 가고 싶다”해서 가도록 한게 아니라 교회의 비전으로서 성령으로 하나님의 사명이 안디옥 교회에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것에 따라 두 사람 위에 손을 얹고 안수를 하여 보냈습니다. 교회가 안수를 했다는 것은 교회가 정식으로 이 일을 위하여 이 두 사람을 임명했다는 것이며 이 전도여행이 교회의 사업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성령의 역사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도 성령이 우리의 이 예배에도 역사하십니다.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시고 우리에게 변화를 요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이 때,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가운데 교회에 변화가 요구되어졌습니다. 안디옥 교회가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가운데 바나바와 바울을 세계전도로 파견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3절에 “보내니라” 라고 쓰여 있습니다. “파견했다”는 뜻이지만, 이 말은 원래 “해방한다, 풀어 준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교회로서 막 시작했습니다. 그 교회에 있어서 바나바도 바울도 소중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리고 안디옥에는 아직 복음을 모르는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을 이 두 사람은 짊어지고 있었습니다. 가능하다면 이 두 사람은 계속 안디옥에 남기 바랐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성령의 인도하시는 가운데 안디옥 교회는 이 두 사람을 자기들의 교회에서 맡아 하던 일들로부터 놓아 주었던 것입니다. 거기에는 교회의 큰 희생이 따랐던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가 이러한 희생을 치른 것으로 인하여 이른바 바울의 전도여행이 행해지고 그것으로 지중해 세계의 각지에 교회가 태어났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됩니다. 교회가 살아 있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성령으로 활기차게 살아 있는 교회는 늘 밖을 향하여 아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세상 사람들을 향하여 그것을 전파하고 사람들을 불러 맞아들인다는 마음을 가지고 또 그러기 위하여 희생을 치러 가는 자세를 가지는 것입니다. 교회가 만약 지금 모여 있는 자기들의 그 마음이 편한 교제에만 안주하며, 그 안주를 지키는 것만을 생각하여 새로운 사람이나 밖의 사람들에 대해서 폐쇄적으로 되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성령의 역사를 잃어버린 허물 같은 교회입니다. 거기에 지배하고 있는 것은 자기의 편함을 구하는 인간의 생각이며 하나님 말씀의 지배는 어딘가에 가버린 것입니다. 자기들의 편함을 희생하더라도 밖을 향하여 복음을 전파해 가려고 하는 안디옥 교회에서 볼 수 있는 이 자세를 우리 히로시마 교회도 이어받아야 합니다.
또 안디옥 교회는 이러한 희생을 치르는 것을 통해서 새롭게 바뀌어져 가게 됩니다. 그것은 전도로 파견되는 바나바나 바울에 있어서도 큰 변화가 요구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옛날도 교회는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큰 변화가 주어져 왔습니다. 우리도 성령으로 인도받고 바뀌어 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주시는 변화란 무엇이 바뀌는 것일까요? 어떻게 바뀌는 것일까요? 물론 인간이 신이 되거나 초인적인 사람으로 바뀌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보고 있는 곳이 바뀌고 걸어가야 하는 방향이 바뀌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새롭게 “보아야 하는 곳과 방향”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지금의 터키에 맨 처음에 태어난 이방인교회였습니다. 크게 성장해서 예루살렘 교회를 경제적으로 지원하기까지 되었다고 해도 아직도 힘이 부족한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힘이 부족하다고 해도 무력하고 내향적인 교회는 아니었습니다. 성령으로 밖으로 나아가는 교회였던 것입니다. 이 교회에서 파견된 두 사람이 향한 곳이 어디냐면 실루기아, 구브로, 살라미, 바보, 비시디아로 그들은 터키 주변의 지역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그것은 결코 쉬운 여행이 아닙니다. 당시는 이동하는 것만으로도 힘든 일입니다. 막상 전도를 하려면 많은 혼란과 시련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음 주에 읽을 구브로 선교에 관한 부분을 보면 거기에서도 바로 그런 방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원래 이 전도여행이 바나바나 바울의 뜨거운 복음 전도의 마음으로 시작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그냥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이교 세계로 향한 것입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병이 잦은 바울 로서는 큰 불안을 안고 여행을 떠났을 것입니다.
구도나오코라는 시인이며 동화 작가가 계십니다. 아이들에게도 알수 있도록 쉬운 말을 써서 많은 시나 동화를 쓰십니다만, 그녀의 작품에 “모른다” 라는 시가 있습니다. 이런 시입니다.
“모른다 / 손을 내밀어 본다 / 그 손이 가리키는 건너편에 / 뭐가 나타날지…… 모른다 / 발을 내디디려고 공중에 띄운다 / 그 발이 착지하는 세계는 / 나를 어디로 인도할지…… 모른다 / 그것을 전혀 모르니까 / 그것을 전혀 모르기에 / 먼저 손을 내밀어 발을 내디딘다”
이것이야말로 성령으로 내세워지고 내보내어진 바울의 심경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도 또 인생의 근본으로서 성령으로 내세워지면서 인생을 보내는 우리의 마음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를 내세우는 것은 귀신도 사탄도 아닙니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또 주 예수님을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만큼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성령이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나아가고 끝까지 나아갈 수 있는 힘도 주실 것입니다. 가령 “모른다”라고 하더라도 “전혀 모르기에 먼저 손을 내밀어 발을 내디디”는 것입니다.
성령이신 하나님께서는 이번에는 우리들을 하나님의 역사를 위하여 쓰시려고 하십니다. 지금 이 예배로부터 성령께서 우리를 각자의 장소로 내보내어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내보내어지고 성령의 역사에 몸을 맡기며 걸어가면 우리는 각자 주어진 장소에서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시는 전도의 사명을 짊어지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발은 아주 죄 많고 더러움에 넘쳐 있습니다만,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에 그것이 평화를 고하고 은혜의 좋은 소식을 전하여 구원을 고하는 아름다운 발로서 쓰여지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