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어드벤트에 들어갔습니다. 어드벤트라는 말은 라틴어의 어드벤토스에서 온 말로 “도래”, “도착”이라는 뜻입니다. 더 쉽게 말하자면 “찾아오다”, “다가온다"라는 의미입니다. 코로나화의 세계, 분쟁이나 미움이나 더러움에 찬 이 세상, 어둠에 덮인 것 같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독생자가 참된 빛으로 와 주신다,우리 인간을 하나님의 아들로 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독생자가 사람으로 오신다,그 일을 대망할 때가 곧 어드벤트, 대림절입니다.
제자들이 탄 배, 거기에는 예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그 배가 폭풍을 만나 큰일이 일어 났습니다. 저녁부터 새벽까지 제자들은 필사적으로 노를 저었습니다. 그러나 세찬 파도와 바람의 힘으로 되밀려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앞으로 전진할 수가 없습니다.
주변은 사납게 몰아치는 파도와 바람, 이 폭풍을 헤치고 자기들을 구해 줄 사람이 와 줄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힘으로 이 위기를 헤쳐 나가야 합니다. 그러한 고독한 전쟁을 제자들은 필사적으로 계속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25절입니다.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25절)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로 와 주셨습니다. 인간이 물 위를 걷는다.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기적입니다. 폭풍 가운데서 괴로워하고 고민하고 있는 제자들에게로 가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일으키신 것입니다.기적까지 일으키시며 제자들에게로 가려고 하신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성경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적을 일으키시는 힘을 갖고 계시는 분이시다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고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기적까지도 일으키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크리스마스도 같은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이 세상에 와 주신다. 이것은 생각할 수 없는 기적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게다가 무엇을 위하여 와 주시느냐하면 어둠 속에 있는 우리들을 구하기 위하여 와 주시는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어 주시기 위하여 와 주신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기 위하여 와 주신 예수님, 그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장소는 어둡고 춥고 더러운 축사였습니다. 축사란 사람을 위하여 모든 것을 바치는 가축이 사는 곳입니다. 가축은 젖을 바치고 노력을 바치고 마지막은 자기 자신의 몸도 인간이 살게 하기 위하여 바칩니다. 그러한 가축이 사는 곳에서 예수님께서는 태어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있어서 우리를 위하여 피를 흘리시고 모든 것을 바치신 예수님께서 태어나시는 장소는 축사 외에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축사에서 태어나시고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기 위하여 우리에게로 와 주셨다. 이것은 폭풍의 바다를 걸어서 제자들을 구하러 와 주신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바다 위로 걸어 오시는 예수님을 유령이라고 여겨서 무서워했습니다. 할 수 없습니다. 이런 폭풍의 바다 가운데를 누가 올 수 있을까요? 제자들은 무서운 나머지 큰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것을 듣고 예수님께서는 즉시 말을 거셨습니다.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27절)
이 말씀을 듣고 베드로가 흥분된 나머지 외쳤습니다.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28절)
여기에 베드로의 신앙이 있습니다. “나에게 명해 주소서” 라고 말한 것입니다. “지금 내가 가니까 기다려 주소서” 라고 말한 게 아닙니다.
우리가 어째서 신앙 생활을 계속할 수 있느냐면, “오라”(29절) 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때문입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서는 신앙 생활은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오라” 하며 부르십니다. 모든 사람을 내게로 오라며 부르시는 것입니다. 만일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을 나에게 말씀하신 말씀으로 믿고 한걸음 내디디면, 우리는 새 인생을 걸어 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말씀을 계속 듣는 것입니다. 예배마다 계속 듣는 것입니다.
“내게로 오라. 다른 데에 가지 말라. 나에게서 눈을 떼지 말고 따라오라.”
이 말씀을 주일예배마다 되풀이해서 듣기 때문에 우리는 소망을 가지고 한걸음 더 내디딜 수 있는 것입니다. 힘을 받아 용기를 얻고 내디디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물 위를 걷는다는 기적적인 걸음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베드로의 이 걸음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만 들었으면 좋았는데 엉겁결에 바람을 보고 말았습니다. 폭풍에 눈이 향하여 버렸습니다. 그랬더니 발이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이것도 우리가 흔히 경험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발을 내디뎠는데, 주변의 곤란에 눈을 향하여 두려워 해 버립니다. 그리고 빠져 버리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신앙을 가지고 내디딘다. 그러나 도리에 맞지 않는 억울함이나 괴로움을 당하면 우리는 가라앉게 됩니다. 신앙을 갖고 있으면 무엇이든 극복할 수 있다고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진지하게 나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 왔는데 어째서 이런 꼴을 당해야 되느냐?” 코로나19에 감염되어 생명의 위기에 직면하는 사람이나 그 가족, 또 코로나 때문에 실업한 사람은 이렇게 말하겠지요. “이 바이러스도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면, 왜 하나님께서는 이런 것을 만드셨을까?” “하나님이 계신다면 어째서 이런 참혹한 일이 일어나게 두시는 걸까?” 라고.
이것에 대해서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메시지이다” 라고. 또 “이 괴로움보다 몇 배나 더 큰 기쁨이 천국에서 기다리고 있다” 라고. 확실히 그렇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떻게 이해하여도 “왜” 라는 의문은 남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조차도 십자가 위에서의 도리에 맞지 않는 억울한 죽음을 앞 두고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 라고 하나님께 외치신 것입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적어도 살아 있는 동안, 이 “어째서”의 답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울며 외쳐도 괜찮습니다. 발이 빠지기 시작한 베드로는 외쳤습니다. “주여 나를 나를 구원하소서”(30절) 그랬더니 주님께서는 즉시 손을 내밀어 구원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31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어차피 작은 것입니다. 약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어둠 속에서 축사인 저 말구유에서 태어나 주신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구유에서 태어나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어둠에 빛나는 “참된 빛”이십니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된 빛”말입니다.
그 빛 가운데 우리의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의 평안이 있습니다. 우리의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기쁨의 크리스마스를 코로나화 가운데 있을지라도 함께 축하하고 싶은 것입니다.
【 2020年 11月 29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
「近づいてこられる主」マタイ 14章 22~33節
今日からアドベントに入りました。アドベントという言葉は、ラテン語のアドヴェントゥスという言葉から来ています。「到来」とか「到着」という意味です。もっと平易に言えば、「やってくる」、「近づいてくる」ということですが、コロナ禍の世界。争いや、憎しみや、汚れに満ちたこの世。暗い闇に覆われたようなこの世に、神さまの独り子が、まことの光として来てくださる。私たち人間を、神さまの子供とするために、神さまの独り子が、人となってやって来られる。その出来事を待ち望む時がアドベント、待降節です。
弟子たちの乗った舟、そこにはイエスさまはおりません。その舟が嵐に遭い、大変なことになってしまいました。夕方から夜明けまで、弟子たちは必死に舟を漕ぎました。でも、激しい波と風の力で押し戻されてしまうのです。前進出来ません。
周りは荒れ狂う波と風。この嵐を突き抜けて、自分たちを助けてくれる人など来てくれわけがありません。ですから、彼らは自分たちの力だけでこの危機を乗り越えなければなりません。そういう孤独な戦いを、弟子たちは必死で続けていたのです。
ところが、その時、25節です。「夜が明けるころ、イエスは湖の上を歩いて弟子たちのところに行かれた」。
イエスさまが、水の上を歩いて、弟子たちの所に来て下さったのです。人間が水の上を歩く。あり得ないことです。これは奇蹟です。嵐の中で、苦しみ悩んでいる、ご自分の弟子たちの所に行くために、イエスさまは奇蹟を起こされました。奇蹟を起こしてでも、弟子たちの所に行こうとなさったのです。
この物語を通して、聖書が私たちに伝えていることは、イエスさまがこのような奇蹟を起こす力を持っておられるお方だ、ということではありません。そうではなくて、私たちの主であるイエス・キリストというお方は、私たちを救うために奇蹟さえも起こされるお方だ、ということです。
クリスマスも同じ出来事です。神さまが、人となって、この世に来てくださる。これは、考えられない奇蹟です。あり得ないことです。しかも、何のために来てくださるかというと、暗闇の中にいる私たちを救うために来てくださるのです。十字架の上で死んでくださるために来てくださる、というのです。
十字架の上で死ぬために来てくださったイエスさま。そのイエスさまが生まれた場所は、暗くて、寒くて、汚い家畜小屋でした。家畜小屋とは、人のためにすべてを献げる家畜の住むところです。家畜は、乳を献げ、労力を献げ、最後には自分自身の肉をも人間が生きるために献げます。そんな家畜の住む場所で、イエスさまはお生まれになったのです。しかし、このことは、決して偶然ではありません。
十字架において、私たちのために、血を流され、すべてを献げられたイエスが、お生まれになられる場所は、家畜小屋をおいて他になかったのです。そのように家畜小屋で生まれ、十字架の上で血を流すために、私たちの所に来てくださった。これは、嵐の海を歩いてでも、弟子たちを救いに来てくださる、ということと同じです。
しかし、弟子たちは湖の上を歩いて来られるイエスさまを幽霊だと思って恐れたのです。仕方ありません。こんな嵐の湖の中、誰が来ることが出来るでしょうか。弟子たちは恐怖のあまり叫び声を上げました。それを聞いて、イエスさまは直ぐに声を掛けられました。「安心しなさい。わたしだ。恐れることはない。」(27節)
このお言葉を聞いて、ペトロが興奮のあまり叫びました。「主よ、あなたでしたら、わたしに命令して、水の上を歩いてそちらに行かせてください。」(28節)
ここにペトロの信仰があります。「私に命令してください」、と言ったのです。「今、私が行きますから、待ってて下さい」と言ったのではないのです。
私たちが、どうして信仰生活を続けることが出来るのかと言えば、「私の所に来なさい」というイエスさまの言葉を聞くからです。このイエスさまの言葉を聞かないで、信仰生活は出来ません。
イエスさまは、すべての人に「私の所に来なさい」と呼び掛けておられます。すべての人を、ご自身のもとへと招いておられます。もし、このように、イエスさまのお言葉を、私自身に語られた言葉だと信じて、一歩踏み出すなら、私たちは新しい人生を歩むことが出来ます。私たちは、この主イエスのお言葉を聞き続けるのです。礼拝のたびごとに聞き続けるのです。
「私の所に来なさい。他の所に行くことはない。私から目を離さずに、付いて来なさい」。
このお言葉を、主日礼拝の度に繰り返して聞くから、私たちは、希望をもって一歩を踏み出せるのです。力を与えられ、勇気を与えられて、踏み出すのです。
ペトロはこのように水の上を歩くという、奇跡的な歩みを始めました。しかし、残念ながら、ペトロのこの歩みは長続きしませんでした。イエスさまのお言葉だけを聞いていれば良かったのに、思わず風を見てしまいました。嵐に目を向けてしまいました。そうしたらとたんに、足が沈み始めた。これも、私たちが良く経験することです。イエスさまの言葉に従って、足を踏み出したはずなのに、周りの困難に目を向けて、恐れおののいてしまいます。そして、沈んでいってしまうのです。
信仰をもって歩み出す。でも、理不尽な苦しみに遭いますと、私たちは沈んでしまいます。信仰を持っていれば何でも乗り越えられるというのは、頭の中では理解出来ますが、実際はそうではありません。「これまで真面目に自分なりに頑張ってきたのに、なぜ、こんな目に遭わなければならないのか」新型コロナウイルスに感染し生命の危機に瀕している人やその家族、また、コロナのために失業した人はこう言うでしょう。「このウイルスも神さまの被造物だとすれば、なぜ、神さまはこんなものを造ったのか」「神さまがいるならば、なぜ、こんなひどいことが起こるのか」と。
これに対し、ある人は言うでしょう。「悔い改めよ、という神さまのメッセージである」と。また、「この苦しみの何倍もの喜びが天国で待っている」と。確かにそうなのかもしれません。でも、どのように理解しても、「なぜ」という思いは残るのです。
皆さん、イエス・キリストでさえ、十字架上での理不尽な死を前にして「なぜ、わたしをお見捨てになったのですか」と神さまに問いかけたのです。私たち人間には、少なくとも生きている間、この「なぜ」の答えは分からないのです。
ですから、私たちは泣き叫んでも良いのです。溺れそうになったペトロは、叫びました。「主よ、助けてください」。そうしたら、主はすぐに手を伸ばして、助けてくださいました。
イエスさまはペトロに対して、「信仰の薄い者よ、なぜ疑ったのか」(31節)と言われました。私たちの信仰なんて、しょせん薄いのです。小さなものでしかありません。だからこそ、イエスさまの方から近づいて来られるのです。暗闇の中で、あの家畜小屋に生まれてくださった。私たちを愛し、私たちを救うために、飼い葉桶に生まれてくださった。それこそが、暗闇に輝く「まことの光」です。すべての人を照らす「まことの光」です。
その光の中に、私たちの希望があります。私たちの平安があります。私たちの喜びがあります。私たちは、その喜びのクリスマスを、このコロナ禍の中にあっても共に祝いたいと思います。
【2020년 11월 29일 주일예배(요약판)】
“다가오시는 주님” 마태복음 14장 22~33 절
오늘부터 어드벤트에 들어갔습니다. 어드벤트라는 말은 라틴어의 어드벤토스에서 온 말로 “도래”, “도착”이라는 뜻입니다. 더 쉽게 말하자면 “찾아오다”, “다가온다"라는 의미입니다. 코로나화의 세계, 분쟁이나 미움이나 더러움에 찬 이 세상, 어둠에 덮인 것 같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독생자가 참된 빛으로 와 주신다,우리 인간을 하나님의 아들로 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독생자가 사람으로 오신다,그 일을 대망할 때가 곧 어드벤트, 대림절입니다.
제자들이 탄 배, 거기에는 예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그 배가 폭풍을 만나 큰일이 일어 났습니다. 저녁부터 새벽까지 제자들은 필사적으로 노를 저었습니다. 그러나 세찬 파도와 바람의 힘으로 되밀려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앞으로 전진할 수가 없습니다.
주변은 사납게 몰아치는 파도와 바람, 이 폭풍을 헤치고 자기들을 구해 줄 사람이 와 줄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힘으로 이 위기를 헤쳐 나가야 합니다. 그러한 고독한 전쟁을 제자들은 필사적으로 계속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25절입니다.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25절)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로 와 주셨습니다. 인간이 물 위를 걷는다.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기적입니다. 폭풍 가운데서 괴로워하고 고민하고 있는 제자들에게로 가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일으키신 것입니다.기적까지 일으키시며 제자들에게로 가려고 하신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성경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적을 일으키시는 힘을 갖고 계시는 분이시다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고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기적까지도 일으키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크리스마스도 같은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이 세상에 와 주신다. 이것은 생각할 수 없는 기적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게다가 무엇을 위하여 와 주시느냐하면 어둠 속에 있는 우리들을 구하기 위하여 와 주시는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어 주시기 위하여 와 주신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기 위하여 와 주신 예수님, 그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장소는 어둡고 춥고 더러운 축사였습니다. 축사란 사람을 위하여 모든 것을 바치는 가축이 사는 곳입니다. 가축은 젖을 바치고 노력을 바치고 마지막은 자기 자신의 몸도 인간이 살게 하기 위하여 바칩니다. 그러한 가축이 사는 곳에서 예수님께서는 태어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있어서 우리를 위하여 피를 흘리시고 모든 것을 바치신 예수님께서 태어나시는 장소는 축사 외에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축사에서 태어나시고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기 위하여 우리에게로 와 주셨다. 이것은 폭풍의 바다를 걸어서 제자들을 구하러 와 주신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바다 위로 걸어 오시는 예수님을 유령이라고 여겨서 무서워했습니다. 할 수 없습니다. 이런 폭풍의 바다 가운데를 누가 올 수 있을까요? 제자들은 무서운 나머지 큰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것을 듣고 예수님께서는 즉시 말을 거셨습니다.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27절)
이 말씀을 듣고 베드로가 흥분된 나머지 외쳤습니다.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28절)
여기에 베드로의 신앙이 있습니다. “나에게 명해 주소서” 라고 말한 것입니다. “지금 내가 가니까 기다려 주소서” 라고 말한 게 아닙니다.
우리가 어째서 신앙 생활을 계속할 수 있느냐면, “오라”(29절) 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때문입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서는 신앙 생활은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오라” 하며 부르십니다. 모든 사람을 내게로 오라며 부르시는 것입니다. 만일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을 나에게 말씀하신 말씀으로 믿고 한걸음 내디디면, 우리는 새 인생을 걸어 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말씀을 계속 듣는 것입니다. 예배마다 계속 듣는 것입니다.
“내게로 오라. 다른 데에 가지 말라. 나에게서 눈을 떼지 말고 따라오라.”
이 말씀을 주일예배마다 되풀이해서 듣기 때문에 우리는 소망을 가지고 한걸음 더 내디딜 수 있는 것입니다. 힘을 받아 용기를 얻고 내디디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물 위를 걷는다는 기적적인 걸음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베드로의 이 걸음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만 들었으면 좋았는데 엉겁결에 바람을 보고 말았습니다. 폭풍에 눈이 향하여 버렸습니다. 그랬더니 발이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이것도 우리가 흔히 경험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발을 내디뎠는데, 주변의 곤란에 눈을 향하여 두려워 해 버립니다. 그리고 빠져 버리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신앙을 가지고 내디딘다. 그러나 도리에 맞지 않는 억울함이나 괴로움을 당하면 우리는 가라앉게 됩니다. 신앙을 갖고 있으면 무엇이든 극복할 수 있다고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진지하게 나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 왔는데 어째서 이런 꼴을 당해야 되느냐?” 코로나19에 감염되어 생명의 위기에 직면하는 사람이나 그 가족, 또 코로나 때문에 실업한 사람은 이렇게 말하겠지요. “이 바이러스도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면, 왜 하나님께서는 이런 것을 만드셨을까?” “하나님이 계신다면 어째서 이런 참혹한 일이 일어나게 두시는 걸까?” 라고.
이것에 대해서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메시지이다” 라고. 또 “이 괴로움보다 몇 배나 더 큰 기쁨이 천국에서 기다리고 있다” 라고. 확실히 그렇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떻게 이해하여도 “왜” 라는 의문은 남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조차도 십자가 위에서의 도리에 맞지 않는 억울한 죽음을 앞 두고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 라고 하나님께 외치신 것입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적어도 살아 있는 동안, 이 “어째서”의 답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울며 외쳐도 괜찮습니다. 발이 빠지기 시작한 베드로는 외쳤습니다. “주여 나를 나를 구원하소서”(30절) 그랬더니 주님께서는 즉시 손을 내밀어 구원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31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어차피 작은 것입니다. 약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어둠 속에서 축사인 저 말구유에서 태어나 주신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구유에서 태어나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어둠에 빛나는 “참된 빛”이십니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된 빛”말입니다.
그 빛 가운데 우리의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의 평안이 있습니다. 우리의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기쁨의 크리스마스를 코로나화 가운데 있을지라도 함께 축하하고 싶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