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안디옥 교회가 바나바와 바울을 세계 선교로 파견한 일을 함께 읽었습니다. 그 맨 처음의 선교지가 구브로입니다. 이 구브로는 바나바의 출신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구브로에서의 전도 성과는 어떠했는지, 또 전도를 어떻게 했는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사도행전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습니다. 아마 각지의 유대인 회당을 돌아다니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도 하고, 때로는 바나바의 친지와도 재회하거나 잘 아는 곳에서 전도 회동도 했었겠지요. 그러나 성경에는 아무런 기재도 없고 바나바와 바울이 어떻게 복음을 말했는지에 대해서도 쓰여 있지 않습니다. 단지, 거기에 등장하는 것은 이 땅의 총독인 서기오 바울이라는 인물입니다.
물론, 서기오 바울은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입니다. 그런 그가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했던 것입니다. 바나바와 바울의 구브로 전도는 여기에서 큰 진전을 보이게 됩니다. 총독이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아주 큰 전도 성과입니다. 여기에 큰 복음을 위한 문호가 개방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전도가 진전하여 문호가 개방되는 곳에는 반드시 그것에 대한 방해 또한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유대인 마술사 바예수였습니다. 그는 여기에 쓰여 있는 것 같이 총독 서기오 바울과의 관계로부터 생각하면, 8절에 쓰여 있는 “마술사 엘루마”와 동일 인물이라고 여겨집니다. “바예수”는 “예수의 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예수”는 “주께서는 구원”이라는 의미를 가진 이름이니까 “바예수”는 “구원의 아들”이라는 뜻이 됩니다. 또 “엘루마”는 여기서 “이 이름을 번역하면 마술사” 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만, 정확히는 “지혜” 라는 의미를 가진 이름입니다. 이름에는 이렇게 훌륭한 의미가 있는데 그의 행동은 구원과는 정반대의 방향을 향한 것으로 결코 진실한 지혜에 의거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이 마술사 바예수를 “거짓 선지자” 라고도 부르고 있습니다.(6절) 아마 그가 총독 서기오 바울에게 가까이 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싶다고 바라는 서기오 바울의 마음을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총독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해서 바나바와 바울을 불렀습니다. 그는 더 하나님을 알고 싶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다고 생각했었지요. 그러나 바예수가 “그들을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썼던” 것입니다.(8절) 자기의 지위가 위태롭게 될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바예수는 복음이 서기오 바울에게 전해지고 그를 구원하려고 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방해한 것입니다.
그 때, 바울은 바예수에 대하여 엄격하게 비난하고 있습니다. 9절입니다.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이르되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맹인이 되어 얼마 동안 보지 못하리라”(9-11절)
이 바울의 말대로 바예수는 “안개와 어둠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11절) 라는 상황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흥미깊은 것은 이 바예수에게 일어난 일은 바울이 전에 다메섹에 향하는 도중에서 주님을 만나고 거기서 체험한 상황과 비슷합니다.(9장 8절)
바울도 전에 눈이 보이지 않게 된 체험을 해서 거기서 회개하여 주님을 따르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한 의미로 바울은 이 바예수를 비난하면서도 그가 하나님의 엄격한 심판을 체험하게 됨으로 인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기를 원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눈이 보이지 않게 된다는 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이 눈이 보인다거나 안 보인다거나 하는 것은 성경에 있어서는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있어서 참으로 보인다는 것은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고, 하나님을 따를 수 있는 자의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그 반대로 아무리 이 세상의 지혜가 가득하다 해도 하나님을 따를 수 없는 자는 “눈이 안 보이는 자” 라고 판단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총독은 이 일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놀랍게 여겼다”라고 12절에 쓰여 있습니다. 마술사 바예수의 눈이 보이지 않게 된다는 일을 목격한 총독의 영적인 눈이 그 때 열렸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순히 불가사의한 일을 보고 그 두려움으로부터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는 게 아니라 확실히 “주의 가르치심에 매우 놀라게 되었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말한 것입니다. 성령의 힘으로 바예수의 눈을 보이지 않게 하고, 그리고 성령의 힘으로 총독의 마음을 열리게 하여 하나님을 믿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주님의 가르치심의 굉장함을 깨달아 신앙을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 세계 선교의 맨 처음 결실이 이처럼 주어졌습니다. 예배와 기도 가운데 교회에 나타난 주님의 마음이 이와같이 성령의 역사하심에 의해 실현되어 갑니다.
사도행전은 여기서도 지난 주에 이어 바나바와 바울에 의하여 시작된 전도가 성령의 역사하심이었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전도 업적에 대한 마음을 열어 복음을 믿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 또한 성령의 역사하심이며 그들의 마음의 눈을 성령께서 열어 주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현대는 바울이 활약한 시대와는 생활 양식도 문화도 전혀 다릅니다. 그러나 교회의 전도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하심은 예나 지금이나 전혀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의 오늘 이 예배에도 성령의 하나님께서 틀림없이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이 움직이게 되어 말씀을 믿게 되고 조금씩 바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같은 복음의 말씀을 들어도 어떤 사람은 그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는가 하면 다른 어떤 사람은 단지 지식으로서만 받아들일런지도 모릅니다. 총독 서기오 바울은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 바예수는 손을 떼지 않으면 안되는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이 바예수에게도 “얼마 동안”(11절) 라고 말하고 있는 바울의 말을 마음에 새겨 두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같은 예배를 보고 모두 같은 성경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같은 설교를 듣습니다. 모두가 참으로 기뻐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기쁨이었어도 어떤 사람에게는 어려웠다, 이해하지 못했다, 마음에 울리지 않았다라고 여겨질지도 모릅니다.때론 실족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그게 맘 아프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거기에 반드시 때를 마련해 주심을 믿고자 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전부를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만, 하나님께서 반드시 적당한 시기를 주시고 우리가 참으로 기뻐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는 살 수 있다”고 생각하게 해 주시는 것을 믿으며 소망을 가지고 예배를 바치면서 나아가도록 합시다.
【 2020年 11月 15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
「目が見えること」 使徒言行録 13章 4~12節
先週、聖霊の導きの中で、アンティオキア教会がバルナバとパウロを世界宣教へと派遣したことを御一緒に読みました。その最初の宣教地がキプロス島です。このキプロス島はバルナバの出身地でもありました。
では、キプロス島での伝道成果はどうであったのかということですが、使徒言行録には、その伝道がどのようになされたのか、細かなことは何も記されていません。きっと、各地のユダヤ人会堂を巡りながら神さまの御言葉を語り、時には、バルナバの知人とも再会したり、良く知るところでの伝道活動もしたことでしょう。でも、聖書には、そのような記載はなく、バルナバとパウロがどのように福音を語ったのかも記されていません。ただ、ここで登場するのが、この地の地方総督であるセルギウス・パウルスという人物です。
セルギウス・パウルスは勿論ユダヤ人ではなく、異邦人です。その彼が、積極的に神さまのみ言葉を聞こうとしたのです。バルナバとサウロとのキプロス伝道は、ここで大きな進展を見せるわけですね。総督が信仰を持つということは、とても大きな伝道成果です。ここに、大きく福音のための門戸が開かれたのです。
しかし、このように伝道が進展し、門戸が開かれるところには、必ず、それに対する妨害が起ってきます。それがユダヤ人魔術師バルイエスでした。彼はここで語られているように地方総督セルギウス・パウルスとの関係から考えますと、8節で語られる「魔術師エリマ」と同一人物であると考えられます。「バルイエス」は「イエスの子」と言う意味です。つまり「イエス」は「主は救い」と言う意味を持った名前ですから「バルイエス」は「救いの子」と言う意味になります。また「エリマ」はここでは「魔術師という意味」と説明されていますが、正確には「知恵」と言う意味を持った名前です。名前にはこんなにすばらしい意味があるのですが、彼の行動は救いとは正反対の方向に向かうものであり、本当の知恵に基づくもの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
聖書はこの魔術師バルイエスを「偽預言者」とも呼んでいます(6節)。おそらく彼が地方総督セルギウス・パウルスの身近に近づくことができたのは、神さまの御心を知りたいと願うパウロスの態度につけいることが出来たからだと考えられます。
総督自身が「神の言葉を聞こうとして」、バルナバとサウロを自分の下に招きました。彼はもっと神さまのことを知りたい、神さまの御言葉を聞きたいと思ったのでしょう。ところが、バルイエスが「二人に対抗して、地方総督をこの信仰から遠ざけようとした」のです(8節)。自分の今の地位が危うくなると思ったのかもしれません。しかし、結果的に、バルイエスは福音がセルギウスに伝えられ、彼を救おうとされる聖霊の導きを妨害することになったのです。
この時、パウロはバルイエスに対して厳しく非難しています。9節です。「パウロとも呼ばれていたサウロは、聖霊に満たされ、魔術師をにらみつけて、言った。『ああ、あらゆる偽りと欺きに満ちた者、悪魔の子、すべての正義の敵、お前は主のまっすぐな道をどうしてもゆがめようとするのか。今こそ、主の御手はお前の上に下る。お前は目が見えなくなって、時が来るまで日の光を見ないだろう。』」(9-11節)
このパウロの言葉の通り、バルイエスは「目がかすんできて、すっかり見えなくなり、歩き回りながら、だれか手を引いてくれる人を探した」(11節)と言う状況に追い込まれました。興味深いのは、このバルイエスに起こった出来事は、パウロがかつてダマスコに向かう途中で、主に出会い、そこで体験した状態と似ております(9:8)。
パウロもかつて目が見えなくなる体験をして、そこから回心を遂げ、主に従う者となりました。そのような意味でパウロはこのバルイエスを非難しつつも彼が神さまの厳しい裁きを体験することで自分の誤りを悟り、回心することを望んでいたのかもしれません。
目が見えなくなると言うことは大変なことです。この目が見えるとか見えないと言うことは、聖書にとっては特別な意味を持っております。なぜなら、聖書において本当に見えると言うことは、神さまを正しく知り、神さまに従うことが出来る者の特徴だからです。その反対に、いくらこの世の知恵に満ちていても、神さまに従うことが出来ない者は「目が見えない者」と判断されるのです。
さて、総督はこの出来事を見て、「主の教えに非常に驚き、信仰に入った」と12節にあります。魔術師バルイエスの目が見えなくなると言う出来事を目撃した地方総督の霊的な目が、この時に開かれたと聖書は語っているんですね。単に不思議な出来事を見て、その恐れから信仰に入ったというのではなくて、はっきりと「主の教えに非常に驚き」とあります。ここでパウロは神さまの御言葉を語ったのです。聖霊の御力によって、バルイエスの目を見なくし、そして、聖霊の御力で総督の心を開かれ、神さまを信じるようにさせたということです。だから彼は主の教えのすばらしさを悟り、信仰に入ることができたのです。
アンティオキア教会の世界宣教の最初の実りがこのようにして与えられました。礼拝と祈りの中で教会に示された主の御心が、このようにして、聖霊の働きによって実現していきます。
使徒言行録はここでも、先週に引き続き、バルナバとサウロによって始められた伝道が聖霊の働きであることを教えています。そして、その彼らの伝道の業に対して、心を開き、福音を信じる人々が起こされたのもまた聖霊の働きであり、彼らの心の目を聖霊が開いてくださったからだと語るのです。
私たちの住む現代はパウロが活躍した時代とは全く生活の様式も、また文化も違います。しかし、教会の伝道における聖霊の働きは今も昔も全く変わることがありません。この私たちの礼拝においても聖霊なる神さまは確かに働いておられます。だからこそ、私たちは心を動かされ、御言葉を信じ、私たちは少しずつでも変えられていくわけですね。ただ、同じ福音の御言葉を聞いても、ある人はその言葉を信じて受け入れるけれど、別のある人は知識としてだけ受け取り、本当には受け入れることが出来ないかもしれません。総督セルギウス・パウルスは信じました。けれどもバルイエスは手を引いてもらわなくてはならない姿になってしまいました。しかし、このバルイエスにも「時が与えられる」(11節)と語っているパウロの言葉を心に留めたいと思います。
私たちは、同じ礼拝を捧げ、皆で同じ聖書の言葉に耳を傾け、同じ説き明かしの言葉を聞きます。皆が本当に喜べるならば良いのですが、ある人は喜んでも、ある人には難しかった、分からなかった、心に響かなかったと思う時があるかもしれません。つまずく人もいるかもしれません。私たちはそのことに心を痛めますが、しかし神さまが、そこにきっと時を備えてくださることを信じたいと思うのです。
皆さん、私たちにはすべてを理解することはできませんが、神さまがきっと時を与えてくださり、私たちが本当に喜んで「神さまの言葉によってわたしは生きることができる」と思わせてくださることを信じて、希望を持って礼拝をささげながら、歩んで行きましょう。
【2020년 11월 15일 주일예배(요약판)】
“눈이 보이는 것” 사도행전 13장 4~12절
지난 주,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안디옥 교회가 바나바와 바울을 세계 선교로 파견한 일을 함께 읽었습니다. 그 맨 처음의 선교지가 구브로입니다. 이 구브로는 바나바의 출신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구브로에서의 전도 성과는 어떠했는지, 또 전도를 어떻게 했는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사도행전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습니다. 아마 각지의 유대인 회당을 돌아다니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도 하고, 때로는 바나바의 친지와도 재회하거나 잘 아는 곳에서 전도 회동도 했었겠지요. 그러나 성경에는 아무런 기재도 없고 바나바와 바울이 어떻게 복음을 말했는지에 대해서도 쓰여 있지 않습니다. 단지, 거기에 등장하는 것은 이 땅의 총독인 서기오 바울이라는 인물입니다.
물론, 서기오 바울은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입니다. 그런 그가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했던 것입니다. 바나바와 바울의 구브로 전도는 여기에서 큰 진전을 보이게 됩니다. 총독이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아주 큰 전도 성과입니다. 여기에 큰 복음을 위한 문호가 개방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전도가 진전하여 문호가 개방되는 곳에는 반드시 그것에 대한 방해 또한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유대인 마술사 바예수였습니다. 그는 여기에 쓰여 있는 것 같이 총독 서기오 바울과의 관계로부터 생각하면, 8절에 쓰여 있는 “마술사 엘루마”와 동일 인물이라고 여겨집니다. “바예수”는 “예수의 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예수”는 “주께서는 구원”이라는 의미를 가진 이름이니까 “바예수”는 “구원의 아들”이라는 뜻이 됩니다. 또 “엘루마”는 여기서 “이 이름을 번역하면 마술사” 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만, 정확히는 “지혜” 라는 의미를 가진 이름입니다. 이름에는 이렇게 훌륭한 의미가 있는데 그의 행동은 구원과는 정반대의 방향을 향한 것으로 결코 진실한 지혜에 의거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이 마술사 바예수를 “거짓 선지자” 라고도 부르고 있습니다.(6절) 아마 그가 총독 서기오 바울에게 가까이 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싶다고 바라는 서기오 바울의 마음을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총독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해서 바나바와 바울을 불렀습니다. 그는 더 하나님을 알고 싶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다고 생각했었지요. 그러나 바예수가 “그들을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썼던” 것입니다.(8절) 자기의 지위가 위태롭게 될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바예수는 복음이 서기오 바울에게 전해지고 그를 구원하려고 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방해한 것입니다.
그 때, 바울은 바예수에 대하여 엄격하게 비난하고 있습니다. 9절입니다.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이르되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맹인이 되어 얼마 동안 보지 못하리라”(9-11절)
이 바울의 말대로 바예수는 “안개와 어둠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11절) 라는 상황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흥미깊은 것은 이 바예수에게 일어난 일은 바울이 전에 다메섹에 향하는 도중에서 주님을 만나고 거기서 체험한 상황과 비슷합니다.(9장 8절)
바울도 전에 눈이 보이지 않게 된 체험을 해서 거기서 회개하여 주님을 따르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한 의미로 바울은 이 바예수를 비난하면서도 그가 하나님의 엄격한 심판을 체험하게 됨으로 인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기를 원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눈이 보이지 않게 된다는 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이 눈이 보인다거나 안 보인다거나 하는 것은 성경에 있어서는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있어서 참으로 보인다는 것은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고, 하나님을 따를 수 있는 자의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그 반대로 아무리 이 세상의 지혜가 가득하다 해도 하나님을 따를 수 없는 자는 “눈이 안 보이는 자” 라고 판단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총독은 이 일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놀랍게 여겼다”라고 12절에 쓰여 있습니다. 마술사 바예수의 눈이 보이지 않게 된다는 일을 목격한 총독의 영적인 눈이 그 때 열렸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순히 불가사의한 일을 보고 그 두려움으로부터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는 게 아니라 확실히 “주의 가르치심에 매우 놀라게 되었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말한 것입니다. 성령의 힘으로 바예수의 눈을 보이지 않게 하고, 그리고 성령의 힘으로 총독의 마음을 열리게 하여 하나님을 믿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주님의 가르치심의 굉장함을 깨달아 신앙을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 세계 선교의 맨 처음 결실이 이처럼 주어졌습니다. 예배와 기도 가운데 교회에 나타난 주님의 마음이 이와같이 성령의 역사하심에 의해 실현되어 갑니다.
사도행전은 여기서도 지난 주에 이어 바나바와 바울에 의하여 시작된 전도가 성령의 역사하심이었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전도 업적에 대한 마음을 열어 복음을 믿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 또한 성령의 역사하심이며 그들의 마음의 눈을 성령께서 열어 주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현대는 바울이 활약한 시대와는 생활 양식도 문화도 전혀 다릅니다. 그러나 교회의 전도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하심은 예나 지금이나 전혀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의 오늘 이 예배에도 성령의 하나님께서 틀림없이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이 움직이게 되어 말씀을 믿게 되고 조금씩 바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같은 복음의 말씀을 들어도 어떤 사람은 그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는가 하면 다른 어떤 사람은 단지 지식으로서만 받아들일런지도 모릅니다. 총독 서기오 바울은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 바예수는 손을 떼지 않으면 안되는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이 바예수에게도 “얼마 동안”(11절) 라고 말하고 있는 바울의 말을 마음에 새겨 두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같은 예배를 보고 모두 같은 성경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같은 설교를 듣습니다. 모두가 참으로 기뻐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기쁨이었어도 어떤 사람에게는 어려웠다, 이해하지 못했다, 마음에 울리지 않았다라고 여겨질지도 모릅니다.때론 실족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그게 맘 아프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거기에 반드시 때를 마련해 주심을 믿고자 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전부를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만, 하나님께서 반드시 적당한 시기를 주시고 우리가 참으로 기뻐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는 살 수 있다”고 생각하게 해 주시는 것을 믿으며 소망을 가지고 예배를 바치면서 나아가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