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성경말씀에서는 사도 야고보가 순교합니다. 그는 열두사도 중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는데, 거기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성경에는 쓰여져 있지 않습니다. 교회는 충격을 받게 되고, 큰 동요가 있었습니다. 게다가 베드로마저 체포되어 투옥되어 교회로서는 위기적인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교회 사람들은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개입으로 베드로는 구출되었습니다. 불가사의한 역사로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오늘 전하고자 하는 성경말씀의 내용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의 의문이 생깁니다. 그것은 어째서 사도 야고보는 칼로 죽임을 당하는데 사도 베드로는 극적으로 구출되었느냐는 것입니다. 이 차이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어째서 야고보를 구원해 주지 않으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야고보를 버리신 것일까요?
솔직히 말해서 그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단,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때 야고보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세계를 영접 하게 되고, 베드로는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사용되어졌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무교절” 즉 “유월절” 때에 체포되어 투옥되었습니다. 헤롯 왕은 유월절이 끝난 후에 베드로를 민중 앞에 끌어내어 처형할 생각이었습니다. 이미 베드로의 운명도 풍전등화였습니다. 아주 어려운 상황입니다. 교회로서도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때 교회는 어떻게 했는지 5절에 쓰여 있습니다.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5절)
그들에게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기도를 한다고 하는 것은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향하여 그 위대하신 힘을 믿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처형이 예정된 그 때도 교회는 기도를 했습니다.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간절한 기도” 라고 쓰여 있습니다. 간절한 기도란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계속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투옥된 베드로는 인간의 시각으로 볼 때 살아나기를 바라기엔 너무나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엄중한 경비 체제 하에 두명의 병사와 쇠사슬로 매여져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 베드로를 가둔 감옥 문에는 파수꾼들이 교대로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전에 사도들이 체포되어 투옥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주님의 천사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빠져 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이처럼 엄중한 경비 체제로 강화되었겠지요. 그래서 이것은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교회가 기도를 한다 해도 내일 베드로가 처형되기로 한 상황은 바뀌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처형당하기 전날 밤에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천사는 누워 자는 베드로를 깨웠습니다. 내일 처형이 예정되어 있는데 잠을 잘 수 있다는 걸 보면 베드로가 전면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모든 것을 맡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손에서 쇠사슬이 벗겨졌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천사가 이끄는대로 따라 가보니, 두 군데의 위병소도 무사히 지나게 되고 마을로 통하는 쇠문도 저절로 열려서 마을 안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는 못하실 일이 없다는 말씀 그대로의 기적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기적으로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11절에서는 베드로가 정신이 들어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 베드로는 지금까지의 기적이 마치 꿈을 꾸는 것만 같지 않았을까요? 너무나 불가사의한 일로 도저히 현실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그런 기적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베드로는 마가라고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갔다고 쓰여져 있습니다. 이 집은 최후의 만찬의 집이었다고도 합니다. 그리고 이 집이 교회로서 사용되어진 것 같습니다.
감옥에서 구출된 베드로는 그 마가의 어머니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대문을 두드렸습니다. 그 집에서는 많은 성도들이 모여서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여종이 현관까지 나갔는데, 베드로의 음성인 줄 알고 놀라움에 미처 문을 열지 못하고 다시 안으로 되돌아가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베드로가 문밖에 서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네가 미쳤구나”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이상한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옥중의 베드로가 살아날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기도가 이루어졌는데 그것을 믿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기도하고 있으면서 그 기도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우리에게도 종종 일어나는 일이 아닐까요? 기도하고 있는데 그 기도가 이루어진다고는 믿지 않는다. 즉 기도하면서도 어딘가 의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면서도 의심한다는 것은 바로 불신앙입니다. 그 때의 성도들도 지금의 우리들도 불신앙인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여기서 “기도하면 아무거나 괜찮다”고 그렇게 안이한 말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현실은 더 엄격한 것입니다. 이 때의 예루살렘 교회도 그랬습니다. 교회 사람들의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야고보는 헤롯에게 처형 당해 버렸습니다. “어째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지 않으시는가?” 그러한 교회 사람들의 비탄이 들리는 것 같은 엄격한 현실 속에서 교회 사람들은 베드로를 위하여 계속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더이상 어찌할 수 없는 엄격한 현실이 닥쳐도 교회 사람들은 하나님께 계속 기도했던 것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특별한 힘을 가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자기를 살리는 힘도 갖지 않고, 또 그들은 내일의 자기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궁지 속에서도 신앙을 계속 가지고 기도할 수 었었던 것은 거기에 벌써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하나님의 기적은 천사가 파견되기 이전부터 교회 위에 일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교회는 그리고 우리의 신앙 생활은 항상 하나님의 역사로 지탱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가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존재할 수가 있고, 우리도 신앙 생활을 계속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늘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깨닫기에 둔감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우리들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들을 위하여 도움의 손을 내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우리 교회의 걸음을 앞으로도 계속해 나아갑시다.
【 2020年 10月 25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
「教会の祈りと神の答え」使徒言行録12章 1~19節
今日の聖書箇所において、使徒ヤコブが殉教いたします。12使徒最初の殉教者になるわけですが、その詳細は何も記されていません。教会には衝撃が走り、大きな動揺があったでしょう。そして、それに加え、ペトロも逮捕され投獄されてしまいました。教会にとっては危機的な状況です。教会の人々は祈るしか出来ませんでした。
すると神さまの介入によって、ペトロは救出されるのです。不思議な御業によって神さまはペトロを助け出して下さいました。それが今日の聖書箇所の内容です。
ただ、ここで一つの疑問が出て来ます。それはどうして、使徒ヤコブは剣で斬り殺され、使徒ペトロは劇的に救出されたのか、ということです。この差はいったい何なのか? 神さまはなぜヤコブをお助けにならなかったのか? 神さまはヤコブを見捨てられたのでしょうか?
正直、その理由はわかりません。ただ、言えることは、ヤコブはこの時、イエスさまによって永遠の世界へと迎え入れられ、ペトロは神さまの御計画によって用いられたということです。
ペトロは「除酵祭」、すなわち「過越祭」の時に捕らえられ牢に入れられました。ヘロデは、祭りが終わったあとにペトロを民衆の前に引きだし、処刑するつもりだったのです。もはやペトロの運命も風前の灯火となりました。大変厳しい状況です。教会はどうすることもできません。
それでは、教会はこの時どうしたのかと言いますと、5節に記されています。「教会では彼のために熱心な祈りが神にささげられていた。」
彼らに出来ることは祈ることしかありませんでした。神さまに祈る。それは全く見栄えのしないことのように見えます。しかし、教会が祈るという時、それは天地の造り主であり、全知全能の神さまに向かって、その偉大な力を信じて祈ることです。この時も教会は祈りました。「彼のために熱心な祈りが神にささげられていた」、「熱心な祈り」とあります。熱心な祈りというのは、絶え間なく祈り続けるということです。彼らは祈り続けたのです。
さて、牢獄に閉じ込められたペトロは、人間の目で見たら助かるのは絶望的な状況でした。厳重な警備体制のもとに置かれていました。二人の兵士と鎖でつながれていました。さらにそのペトロの入れられている獄の部屋の戸口には番兵たちが交替で牢を見張っていました。余りにも厳重な警備体制ですが、それは以前、使徒たちが逮捕され牢につながれたことがありましたが、その時に天使の導きによって、牢から抜け出し境内で御言葉を宣べ伝えるということがありましたから、このような厳重な警備体制になったのでしょう。これではどうしようもありません。教会の祈りも無駄なことのように見えます。しかも明日、ペトロは引きだされて処刑されてしまうのです。
しかし、まさにそのような時に神さまは奇跡を起こされました。まさに引きだされる前夜、神さまは天使を送られました。天使は眠っていたペトロを起こしました。明日殺されるというのに眠っていられるところに、ペトロが全面的に神さまに信頼してゆだねていたことが分かりますが・・。ペトロの手から鎖が外れて落ちました。そしてペトロは天使の言うとおりについていくと、二つの衛兵所を通過し、町に通じる鉄の門が独りでに開き、町の中へと入っていったのです。
そういう奇跡が起きました。まさに神さまに出来ないことは何もない。その御言葉通りです。
ペトロは神さまの奇跡によって解放されました。11節ではペトロが、我に返って「今、初めて本当のことが分かった」と言っています。おそらくペトロはここまでの奇跡が、まるで夢を見ているようだった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あまりのことに、現実とは思えない。そういう奇跡だったのです。
これは教会の人々にとっても同様でした。ペトロは、マルコと呼ばれていたヨハネの母マリアの家に行ったと書かれています。この家は、最後の晩餐の家であったとも言われています。そしてこの家が、教会として使われていたようです。
牢獄から救い出されたペトロはそのマルコの母の家に行きました。そして玄関のドアをたたきました。その家では多くの信徒が集まって、ペトロのために祈りをささげていました。女中が玄関まで来ました。すると門をたたく人の声がペトロの声だと分かり、驚きのあまりドアを開けもしないで戻って、ペトロがいると、集まって祈っている人々に告げました。すると人々は、「あなたは気が変になっているのだ」と言ったと言うのです。
これはおかしな話です。なぜなら、彼らは獄中のペトロが助かるように神さまに祈っていたはずです。まさに、その祈りが聞かれたというのに、それが信じられないのです。祈っているのに、祈っていることがかなえられるということが信じられない‥‥。
しかし、こういうことは私たちにもあ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祈っているのに、祈っていることがかなえられるとは信じていない。つまり、祈っていながらも、どこか疑っているところがあるのです。祈りながら疑っているというのは、まさに不信仰です。この時の教会の信徒たちも、私たちも不信仰なのです。
ただ、私はここで「祈れば何でも大丈夫」と、そんな安易な言葉を語ろうとは思いません。現実はもっと厳しいものです。この時のエルサレムの教会もそうでした。教会の人々の熱心な祈りも関わらずヤコブがヘロデによって殺されてしまったのです。「どうして神さまは私たちの祈りに答えてくださらなかったのか」。そんな教会の人々の嘆きが聞こえて来てもいいような厳しい現実の中で、教会の人々はそれでもペトロのために祈り続けたと言うのです。もうどうにもならないと言うような厳しい現実を突きつけられてもなお、教会の人々は神さまに祈り続けたのです。
ここに登場する人々は特別な力を持った人々ではありません。自分を助ける力も持たず、また彼らは明日の自分がどうなっているかも分からない人たちでした。しかし、そのような人々が窮地の中でも信仰を持ち続けて、祈り続けることができたのは、そこにすでに神さまの御業が現れていたからではないでしょうか。神さまの奇跡は天使が遣わされる前から教会の上に起こっていたのです。
同じように私たちの教会は、そして私たちの信仰生活はいつもこの神さまの御業によって支えられています。私たちの上にも神さまの奇跡的な御業が働いているのです。だから私たちの教会は存在することができ、私たちの信仰生活は続けられているのです。
皆さん、いつも、私たちは神さまの御業を悟るのに鈍感な者たちです。しかし、そんな私たちにも関わらず、神さまはいつも私たちのために助けの御手を差し伸べてくださるのです。その神さまに信頼して、私たちの教会の歩みを続けていきたいと思います。
【2020년 10월 25일 주일예배(요약판)】
“교회의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 사도행전 12장 1~19절
오늘의 성경말씀에서는 사도 야고보가 순교합니다. 그는 열두사도 중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는데, 거기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성경에는 쓰여져 있지 않습니다. 교회는 충격을 받게 되고, 큰 동요가 있었습니다. 게다가 베드로마저 체포되어 투옥되어 교회로서는 위기적인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교회 사람들은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개입으로 베드로는 구출되었습니다. 불가사의한 역사로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오늘 전하고자 하는 성경말씀의 내용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의 의문이 생깁니다. 그것은 어째서 사도 야고보는 칼로 죽임을 당하는데 사도 베드로는 극적으로 구출되었느냐는 것입니다. 이 차이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어째서 야고보를 구원해 주지 않으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야고보를 버리신 것일까요?
솔직히 말해서 그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단,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때 야고보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세계를 영접 하게 되고, 베드로는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사용되어졌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무교절” 즉 “유월절” 때에 체포되어 투옥되었습니다. 헤롯 왕은 유월절이 끝난 후에 베드로를 민중 앞에 끌어내어 처형할 생각이었습니다. 이미 베드로의 운명도 풍전등화였습니다. 아주 어려운 상황입니다. 교회로서도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때 교회는 어떻게 했는지 5절에 쓰여 있습니다.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5절)
그들에게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기도를 한다고 하는 것은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향하여 그 위대하신 힘을 믿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처형이 예정된 그 때도 교회는 기도를 했습니다.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간절한 기도” 라고 쓰여 있습니다. 간절한 기도란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계속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투옥된 베드로는 인간의 시각으로 볼 때 살아나기를 바라기엔 너무나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엄중한 경비 체제 하에 두명의 병사와 쇠사슬로 매여져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 베드로를 가둔 감옥 문에는 파수꾼들이 교대로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전에 사도들이 체포되어 투옥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주님의 천사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빠져 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이처럼 엄중한 경비 체제로 강화되었겠지요. 그래서 이것은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교회가 기도를 한다 해도 내일 베드로가 처형되기로 한 상황은 바뀌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처형당하기 전날 밤에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천사는 누워 자는 베드로를 깨웠습니다. 내일 처형이 예정되어 있는데 잠을 잘 수 있다는 걸 보면 베드로가 전면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모든 것을 맡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손에서 쇠사슬이 벗겨졌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천사가 이끄는대로 따라 가보니, 두 군데의 위병소도 무사히 지나게 되고 마을로 통하는 쇠문도 저절로 열려서 마을 안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는 못하실 일이 없다는 말씀 그대로의 기적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기적으로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11절에서는 베드로가 정신이 들어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 베드로는 지금까지의 기적이 마치 꿈을 꾸는 것만 같지 않았을까요? 너무나 불가사의한 일로 도저히 현실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그런 기적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베드로는 마가라고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갔다고 쓰여져 있습니다. 이 집은 최후의 만찬의 집이었다고도 합니다. 그리고 이 집이 교회로서 사용되어진 것 같습니다.
감옥에서 구출된 베드로는 그 마가의 어머니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대문을 두드렸습니다. 그 집에서는 많은 성도들이 모여서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여종이 현관까지 나갔는데, 베드로의 음성인 줄 알고 놀라움에 미처 문을 열지 못하고 다시 안으로 되돌아가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베드로가 문밖에 서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네가 미쳤구나”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이상한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옥중의 베드로가 살아날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기도가 이루어졌는데 그것을 믿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기도하고 있으면서 그 기도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우리에게도 종종 일어나는 일이 아닐까요? 기도하고 있는데 그 기도가 이루어진다고는 믿지 않는다. 즉 기도하면서도 어딘가 의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면서도 의심한다는 것은 바로 불신앙입니다. 그 때의 성도들도 지금의 우리들도 불신앙인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여기서 “기도하면 아무거나 괜찮다”고 그렇게 안이한 말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현실은 더 엄격한 것입니다. 이 때의 예루살렘 교회도 그랬습니다. 교회 사람들의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야고보는 헤롯에게 처형 당해 버렸습니다. “어째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지 않으시는가?” 그러한 교회 사람들의 비탄이 들리는 것 같은 엄격한 현실 속에서 교회 사람들은 베드로를 위하여 계속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더이상 어찌할 수 없는 엄격한 현실이 닥쳐도 교회 사람들은 하나님께 계속 기도했던 것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특별한 힘을 가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자기를 살리는 힘도 갖지 않고, 또 그들은 내일의 자기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궁지 속에서도 신앙을 계속 가지고 기도할 수 었었던 것은 거기에 벌써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하나님의 기적은 천사가 파견되기 이전부터 교회 위에 일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교회는 그리고 우리의 신앙 생활은 항상 하나님의 역사로 지탱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가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존재할 수가 있고, 우리도 신앙 생활을 계속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늘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깨닫기에 둔감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우리들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들을 위하여 도움의 손을 내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우리 교회의 걸음을 앞으로도 계속해 나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