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을 보면, 하나님의 불가사의한 인도하심으로 사도 베드로와 로마군 이탈리아 부대의 고넬료가 만나게 되고 베드로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고넬료와 그 가족이나 친족들은 믿음을 가지고 베드로에게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 사도 베드로가 이방인들에게 세례를 주고, 성령이 내렸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방인들에 대한 선교를 공식적으로 행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루살렘 교회의 승인이 필요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그것을 원하신다고 해도 그것을 교회 사람들이 받아들이기에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루살렘 교회에 돌아와서 일의 경과를 보고하려고 했습니다만, 예루살렘 교회의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게 됩니다. 그것은 이방인에게 세례를 준 것 때문이 아니라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 자리를 함께한 이유로 비판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유대의 전통에 의거하면 이방인들과의 식사는 금지되어 있었고, 함께 식사를 하면 더러워진다고 여겼고, 더러워졌다면 부정을 씻기 위하여 여러 가지 의식을 거쳐서 그 더러움을 깨끗이 없애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거기서 베드로는 황급히 변명해야 했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가이사랴에서 일어난 것을 “차례로”(4절) 설명했습니다. 베드로에게 일어난 일, 그리고 가이사랴에서 일어난 일을 그대로 이야기 한 것입니다. 그 이외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굉장한 은혜에 압도되었고,오히려 기쁨 가운데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것입니다. 설마 자기가 비난받으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 예상했더라면 변명의 준비를 했었겠지만, 생각지도 못한 비난을 받았으니 베드로는 사실 그대로를 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이야기의 결론으로서 17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17절)
오늘의 부름 말씀으로 이사야 55장을 봉독했습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가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에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보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너희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이사야 55:8-11)
이 예언의 말씀이 말해진 당시의 이스라엘 상황은 너무나 비참한 상태였습니다. 나라가 멸망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떠나서 그만큼 큰 죄를 범했기 때문이라고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어찌할 수 없다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버리셨다고, 모두 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선지자 이사야는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그렇지 않다. 너희들은 벌써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을 구원해 주신다. 하나님의 마음은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사야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이스라엘의 사람들은 다시 일어섰습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그대로 해 주셨습니다. 국토를 회복시켜 주시고 파괴되어 버린 성전도 성벽도 재건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과 그렇지 않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베드로도 여기서 자기에게 일어난 일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다. 이방인들이 구원받는 것도 하나님의 마음이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마음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변명했습니다만, 잘 생각해 보면 베드로는 예루살렘 교회 사람들의 물음에는 직접 대답하고 있지 않음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인들은 네가 왜 이방인들과 식사를 했느냐. 어찌하여 이런 일을 했느냐며 베드로를 비난했습니다. 이방인들과 식사를 한 것을 문제 삼은 것입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와 이방인들에게 세례를 준 것을 비난한 것도 아니고,이방인들을 교회 안에 들인 것을 비난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베드로는 식사에 관한 질문에는 직접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일어난 일만을 차례대로 바르게 설명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마음이 바로 이러한 것이기에 내가 그뜻을 거역할 수는 없다라고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 결과는 어땠을까요? 그들은 베드로의 말을 묵묵히 들었습니다. 베드로의 말이 끝난 후에도 잠시 동안은 침묵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일의 사태를 이해하기에는 잠시 동안 시간이 걸렸습니만, 베드로가 말하려고 하는 뜻을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그들도 하나님의 마음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제까지의 생각을 바꿨습니다. 베드로와 예루살렘 교회의 사람들은 서로 마음이 통했습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함께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여기서 일어난 것은 그러한 일입니다.
왜 베드로와 예루살렘 교회 사람들은 의견의 차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이야기하여 마음을 통할 수 있었을까요? 교회 안에서도 밖에서도 어디나 의견의 차이는 생깁니다. 대립할 때도 있습니다. 그 경우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여러분, 어떻게 예루살렘 교회 사람들은 베드로의 이야기를 믿었을까요? 베드로가 교회 지도자였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 사람들이 베드로를 비난하던 시점에 적대의 벽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만약 베드로가 이상한 핑계를 댔더라면 완전한 대립을 일으켰겠지요. 그러나 베드로는 핑계를 대지 않고 자기에게 일어난 사실 그대로를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판단을 교회 사람들에게 맡긴 것입니다. 교회 사람들은 생각했습니다. 답을 내기까지는 좀 시간이 걸렸겠지요. 그러나 교회 사람들은 베드로와 대립되는 생각이 있었더라도 베드로와 공통되는 토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것,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서 하나님의 마음을 따른다는 신앙입니다.
교회 사람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고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 논의도 했지요. 그러나 최종적으로 베드로가 믿은 하나님의 마음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따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기의 그 때까지의 생각을 바꾼다는 것입니다. 역시 그러기까지는 큰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교회 사람들은 처음에 품고 있었던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베드로와 서로 이야기하고 의견을 바꾸어 나갔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마음에 맞도록 바꾸어 갔습니다. 이렇게 생각을 해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서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 때 생긴 차이는 할례의 유무, 그리고 이방인과 식사를 한 것이었습니다. 지금의 우리 입장에서 보면 사소한 문제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들에게도 이와 같은 사소한 문제가 생길 때가 있습니다. 나중에 돌이켜 보면 처음엔 아무것도 아닌 문제가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공통된 토대를 가질 수 있습니다. 이웃과 마음을 서로 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마음을 서로 통할 수 있는 것은 이웃 사람뿐만이 아닙니다. 다름아닌 하나님과도 마음을 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예루살렘 교회 사람들도 차차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갔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과 마음을 통하여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 2020年 10月 11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
「神の御心を知ること」使徒言行録11章 1~18節
10章において、神さまの不思議な導きによって使徒ペトロとローマ軍イタリア隊の百人隊長であるコルネリウスが出会い、ペトロを通して、神さまの御言葉を聞き、コルネリウスとその家族や親族らは信じて、ペトロから洗礼を受けました。
この使徒ペトロが異邦人に対して洗礼を授け、聖霊が降ったという出来事は、キリストの教会が異邦人に対する宣教を公式に行ったということです。ただ、それはエルサレム教会の承認が必要でした。神さまが望んでいると言っても、それを教会の人々が受け入れるには、時間が必要であったのです。
ペトロはエルサレム教会の戻り、事の次第を報告しようとしましたが、エルサレム教会の人々に批判されたのです。それは異邦人に対して洗礼を授けたことではなく、異邦人と食事の席を共にしたことが批判の対象となりました。
ユダヤの伝統によれば、異邦人との食事は禁止されており、一緒に食事をすれば汚れることになります。汚れたなら、様々な清めの儀式を経てその汚れを取り去る必要があったのです。
そこでペトロは慌てて弁明をしなくてはなりませんでした。その時、ペトロはカイサリアで起こったことを「順序正しく」(4節)説明しました。ペトロに起こったこと、そしてカイサリアで起こった出来事をそのまま語ったのです。それ以外のことは何も語っておりません。
ペトロは神さまの素晴らしい恵みに圧倒されて、むしろ喜びの中でエルサレムに帰って来たのでしょう。まさか、自分が非難されるとは思ってもいませんでした。予想していたら、弁明の準備をしていたでしょうが、思いも寄らない非難を受けたものですから、ペトロは、事実をありのまま話すしかなかったのです。
ペトロは話しの結論として17節でこのように語っています。「こうして、主イエス・キリストを信じるようになったわたしたちに与えてくださったのと同じ賜物を、神が彼らにもお与えになったのなら、わたしのような者が、神がそうなさるのをどうして妨げることができたでしょうか。」(17節)
今日の招きの言葉として、イザヤ書55章をお読みしました。「わたしの思いは、あなたたちの思いと異なり、わたしの道はあなたたちの道と異なると、主は言われる。天が地を高く超えているように、わたしの道は、あなたたちの道を、わたしの思いは、あなたたちの思いを、高く超えている。雨も雪も、ひとたび天から降れば、むなしく天に戻ることはない。それは大地を潤し、芽を出させ、生い茂らせ、種蒔く人には種を与え、食べる人には糧を与える。そのように、わたしの口から出るわたしの言葉も、むなしくは、わたしのもとに戻らない。それはわたしの望むことを成し遂げ、わたしが与えた使命を必ず果たす」(イザヤ55:8-11)
この預言の言葉が語られた当時のイスラエルの状況は、ひどい有様でありました。国が滅ぼされていたのです。彼らは自分たちが神さまから離れ、それほど大きな罪を犯してしまったからだ、と誰もがそう考えていました。もう駄目だ、神さまは私たちのことを見捨ててしまわれたのだ、と皆がそう思っていました。
しかしそんな中に、預言者イザヤは語ったのです。神さまの御心はそうではない。あなたがたはもう駄目だと思っているかもしれないけれども、神さまはそうは思われない。神さまはあなたがたを救ってくださる。神さまの御心は必ず実現するからだ。イザヤはそのように語りました。
この言葉を聴き、イスラエルの人たちは立ち直りました。実際に神さまはその通りにしてくださいました。国土を回復させてくださり、破壊されてしまった神殿も城壁も再建することが出来たのです。神さまの御心を知るのと、そうではないのとでは、えらい違いです。ペトロもここで、自分に起こった出来事から神さまの御心を知りました。これが神さまの御心なのだ。異邦人が救われるのも神さまの御心なのだ。ペトロは神さまの御心の話をしているのです。
ペトロはこのように弁明しましたが、よくよく考えてみると、ペトロはエルサレム教会の人たちの問いには直接、答えていないのがすぐに分かります。エルサレム教会のユダヤ人たちは、あなたは異邦人と食事をした。何たることをしたのかと、ペトロを非難しています。食事のことが問題だったのです。ペトロがコルネリウスたち異邦人に洗礼を授けたことを非難したのでも、異邦人を教会の中に入れたことを非難しているのでもないのです。
それに対してペトロは、食事の質問には直接、答えることはしていません。起こった出来事を順序正しく説明しました。そうすると神さまの御心が分かる。神さまの御心がこうだった、私はそれを妨げることができない、そう語ったのです。
その結果はどうだったでしょうか。彼らはペトロの言葉を黙って聴きました。ペトロが語り終わった後も、しばらく沈黙があったようです。事柄の事態を理解するのにしばらく時間がかかったようですが、でも、ペトロが言わんとすることを理解しました。そして、彼らも神さまの御心を受け入れたのです。今までの考えを変えました。ペトロとエルサレム教会の人たちは心が通い合ったのです。そして、最終的には、一緒に神さまを讃美しております。ここで起こっているのはそういう出来事なのです。
なぜペトロとエルサレム教会の人たちは、意見の相違があったにもかかわらず、話し合って心を通わせることができたのでしょうか。教会の中でも外でも、どこでも意見の相違が発生します。衝突が起こることがあります。そのときにどのようにしたらよいでしょうか。
皆さん、どうして、エルサレム教会の人々はペトロの話を信じたのでしょうか? ペトロが教会の指導者だったからでしょうか? そうではないんですね。教会の人々がペトロを非難している時点で、敵対の壁がそこにはあったのです。もし、ペトロが変にいいわけでもしていたら完全な対立を起こしておりました。でも、ペトロはいいわけをすることなく、自分に起こったありのままを話しました。そして、その判断を教会の人々に委ねたのです。教会の人々は考えました。答えが出るのに時間もかかったでしょう。でも、教会の人々はペトロと対立するような考えがあったとしても、ペトロと共通する土台があったのです。それはイエス・キリストを信じていること、そして、イエス・キリストを信じるものとして神さまの御心に従うという信仰です。
教会の人々は、神さまの御心を知ろうとしました。そのために議論もしたでしょう。でも、最終的にペトロが信じた神さまの御心を受け入れ、それに従ったのです。
神さまの御心を受け入れるというのは、自分のそれまでの考えを変えるということです。やはりそれには大きな決断が必要です。それでも、エルサレム教会の人たちは、最初に抱いていた考えを変えました。ペトロと話し合い、意見を変えて行きました。それも神さまの御心に沿うように変えていきました。このように考えていくと、イエス・キリストを信じるキリスト者は、必ず分かり合えることが分かります。このときに生じていた違いは、割礼の有無、そして異邦人と食事をしたことでありました。今の私たちからすると、些細な問題であるかもしれません。しかし、今の私たちにも、同じような些細な問題が起こることがあります。後から振り返ってみると、最初は何でもない問題だったようなことがあります。
それでも、私たちは神さまを信じることにおいて、共通の土台を持つことが出来ます。隣人と心を通い合わせることが出来るのです。そして、私たちが心を通い合わせることが出来るのは、隣人とだけではありません。他ならぬ神さまとも心を通い合わせることが出来ます。ペトロもエルサレム教会の人たちも、順々に神さまの御心を知って行きました。私たちも神さまの御心を知り、神さまと心を通い合わせて生きていくことができるのです。
【2020년 10월11일 주일예배(요약판)】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 사도행전 11장 1~18절
10장을 보면, 하나님의 불가사의한 인도하심으로 사도 베드로와 로마군 이탈리아 부대의 고넬료가 만나게 되고 베드로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고넬료와 그 가족이나 친족들은 믿음을 가지고 베드로에게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 사도 베드로가 이방인들에게 세례를 주고, 성령이 내렸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방인들에 대한 선교를 공식적으로 행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루살렘 교회의 승인이 필요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그것을 원하신다고 해도 그것을 교회 사람들이 받아들이기에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루살렘 교회에 돌아와서 일의 경과를 보고하려고 했습니다만, 예루살렘 교회의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게 됩니다. 그것은 이방인에게 세례를 준 것 때문이 아니라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 자리를 함께한 이유로 비판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유대의 전통에 의거하면 이방인들과의 식사는 금지되어 있었고, 함께 식사를 하면 더러워진다고 여겼고, 더러워졌다면 부정을 씻기 위하여 여러 가지 의식을 거쳐서 그 더러움을 깨끗이 없애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거기서 베드로는 황급히 변명해야 했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가이사랴에서 일어난 것을 “차례로”(4절) 설명했습니다. 베드로에게 일어난 일, 그리고 가이사랴에서 일어난 일을 그대로 이야기 한 것입니다. 그 이외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굉장한 은혜에 압도되었고,오히려 기쁨 가운데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것입니다. 설마 자기가 비난받으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 예상했더라면 변명의 준비를 했었겠지만, 생각지도 못한 비난을 받았으니 베드로는 사실 그대로를 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이야기의 결론으로서 17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17절)
오늘의 부름 말씀으로 이사야 55장을 봉독했습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가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에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보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너희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이사야 55:8-11)
이 예언의 말씀이 말해진 당시의 이스라엘 상황은 너무나 비참한 상태였습니다. 나라가 멸망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떠나서 그만큼 큰 죄를 범했기 때문이라고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어찌할 수 없다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버리셨다고, 모두 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선지자 이사야는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그렇지 않다. 너희들은 벌써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을 구원해 주신다. 하나님의 마음은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사야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이스라엘의 사람들은 다시 일어섰습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그대로 해 주셨습니다. 국토를 회복시켜 주시고 파괴되어 버린 성전도 성벽도 재건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과 그렇지 않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베드로도 여기서 자기에게 일어난 일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다. 이방인들이 구원받는 것도 하나님의 마음이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마음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변명했습니다만, 잘 생각해 보면 베드로는 예루살렘 교회 사람들의 물음에는 직접 대답하고 있지 않음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인들은 네가 왜 이방인들과 식사를 했느냐. 어찌하여 이런 일을 했느냐며 베드로를 비난했습니다. 이방인들과 식사를 한 것을 문제 삼은 것입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와 이방인들에게 세례를 준 것을 비난한 것도 아니고,이방인들을 교회 안에 들인 것을 비난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베드로는 식사에 관한 질문에는 직접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일어난 일만을 차례대로 바르게 설명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마음이 바로 이러한 것이기에 내가 그뜻을 거역할 수는 없다라고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 결과는 어땠을까요? 그들은 베드로의 말을 묵묵히 들었습니다. 베드로의 말이 끝난 후에도 잠시 동안은 침묵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일의 사태를 이해하기에는 잠시 동안 시간이 걸렸습니만, 베드로가 말하려고 하는 뜻을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그들도 하나님의 마음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제까지의 생각을 바꿨습니다. 베드로와 예루살렘 교회의 사람들은 서로 마음이 통했습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함께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여기서 일어난 것은 그러한 일입니다.
왜 베드로와 예루살렘 교회 사람들은 의견의 차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이야기하여 마음을 통할 수 있었을까요? 교회 안에서도 밖에서도 어디나 의견의 차이는 생깁니다. 대립할 때도 있습니다. 그 경우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여러분, 어떻게 예루살렘 교회 사람들은 베드로의 이야기를 믿었을까요? 베드로가 교회 지도자였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 사람들이 베드로를 비난하던 시점에 적대의 벽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만약 베드로가 이상한 핑계를 댔더라면 완전한 대립을 일으켰겠지요. 그러나 베드로는 핑계를 대지 않고 자기에게 일어난 사실 그대로를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판단을 교회 사람들에게 맡긴 것입니다. 교회 사람들은 생각했습니다. 답을 내기까지는 좀 시간이 걸렸겠지요. 그러나 교회 사람들은 베드로와 대립되는 생각이 있었더라도 베드로와 공통되는 토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것,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서 하나님의 마음을 따른다는 신앙입니다.
교회 사람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고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 논의도 했지요. 그러나 최종적으로 베드로가 믿은 하나님의 마음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따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기의 그 때까지의 생각을 바꾼다는 것입니다. 역시 그러기까지는 큰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교회 사람들은 처음에 품고 있었던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베드로와 서로 이야기하고 의견을 바꾸어 나갔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마음에 맞도록 바꾸어 갔습니다. 이렇게 생각을 해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서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 때 생긴 차이는 할례의 유무, 그리고 이방인과 식사를 한 것이었습니다. 지금의 우리 입장에서 보면 사소한 문제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들에게도 이와 같은 사소한 문제가 생길 때가 있습니다. 나중에 돌이켜 보면 처음엔 아무것도 아닌 문제가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공통된 토대를 가질 수 있습니다. 이웃과 마음을 서로 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마음을 서로 통할 수 있는 것은 이웃 사람뿐만이 아닙니다. 다름아닌 하나님과도 마음을 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예루살렘 교회 사람들도 차차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갔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과 마음을 통하여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