過越しの食事をしているときに、重大事件が起こりました。何と!弟子たちの中に裏切り者がいることをイエスさまが宣言なさったのです。18節です。「はっきり言っておくが、あなたがたのうちの一人で、わたしと一緒に食事をしている者が、わたしを裏切ろうとしている。」(18節)弟子たちはみんなびっくりしたことでしょう。12人の弟子たちは、「まさかわたしのことでは」(19節)と代わる代わるイエスさまに聞き始めました。
私たちは、この後の聖書の話を知っていますので、イスカリオテのユダが裏切ることを知っています。けれども、この時、イエスさまは“イスカリオテのユダが裏切る”とは、一言もおっしゃいませんでした。そうしましたら、弟子たち全員が不安になったのです。誰も“私は裏切らない”と断言する自信がないのです。代わる代わる「まさかわたしのことでは」と尋ねる弟子たちに、イエスさまはやはりはっきりとは言いませんでした。「十二人のうちの一人で、わたしと一緒に鉢に食べ物を浸している者がそれだ」(20節)と言われるだけなんですね。この辺りがちょっとイエスさま嫌らしいと思うんですね。だって、弟子たち全員、イエスさまと一緒に、鉢の中のスープにパンを浸しているのです。ですから、誰なのか分かりません。もしかしたら自分なのかもって、皆思うわけですね
迷っている弟子たちに、イエスさまは言われました。21節です。「人の子は、聖書に書いてあるとおりに、去って行く。だが、人の子を裏切るその者は不幸だ。生まれなかった方が、その者のためによかった。」(21節)「生まれなかった方が、その者のためによかった」とイエスさまは言われたんですけど、ちょっとひどくないですか? “お前なんか、死んでしまえ!”と言っているのと同じですよね。弟子の一人が裏切ることに腹が立ち、憎らしくなるのは分かりますけど、何もそこまで言わなくて良いんではないか、イエスさまらしくない言葉だと思いませんか?
けれども、よーく読んでみると、ちょっと違うんです。イエスさまは、「その者のためによかった」と言っているのです。この違いが分かりますか?ただ“生れなかった方がよかった”と言うのなら、それは“私にとって”“私のために”生れなかった方がよかった、ということですから、自己中心な考えです。自分が裏切られ、迷惑だから、邪魔だから、お前なんかいない方がいい、と言っているのと同じです。
ところが、「その者のために」ということは、相手のことを考えている、裏切る相手のことを思いやっ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弟子の一人が裏切るだろう。でも、その人は裏切ったら、きっと後で後悔するよ。自分のことを許せなくなるよ。惨めな裏切り者の気持をずっと背負っていくことになるよ。実際、ユダは後で後悔して自殺をしてしまいますけど、そんなのは、その人にとって本当に不幸なことだ。そんな不幸を背負うぐらいなら、生れなかった方がまだましだったかも知れない。だから、そんな不幸は背負わないでほしいと、イエスさまは、その人のために、裏切り者のために、そう言っているのです。
そう考えますと、イエスさまがどうして裏切り者の名前を言わなかったのかが分かって来ます。イエスさまは、裏切るのがイスカリオテのユダだと勿論知っておられたでしょう。自分の命がかかっているのです。普通だったら、他の弟子たちの前で“ユダ、お前だ!”と言って、弟子たちと一緒に懲らしめ、制裁を加えてもおかしくない場面です。ところが、イエスさまは決して名前を言いませんでした。
どうしてでしょうか? それは、ユダに思い直してほしかったからだと思います。裏切る心を入れ替えてほしかったからだと思います。名前を言わなければ、だれにも分からない。もう一度やり直せる。大きな後悔と不幸を背負わずに済む。それはみな、ユダを思ってのことです。「その者のために」と思いやってとっている行動です。まさに、愛による行動です。
そして、それはユダに対する思いだけではありません。イエスさまがどうして裏切り者の名前を言わなかったのかと言いますと、裏切りの問題がユダだけの問題ではなかったからです。ユダ以外の弟子たちは、このユダの裏切りによってイエスさまが拘束され連れて行かれた後、皆逃げ出してしまいました。
イエスさまはマルコによる福音書14章27節以下で、弟子たちが躓き、散ってしまうこと、すなわち、イエスさまを裏切ることを指摘されましたが、それに対してペトロは言いました。「たとえ、御一緒に死なねばならなくなっても、あなたのことを知らないなどとは決して申しません。」(14:31)と。でも、皆さんご存じの通り、ペトロは3度、「知らない」と言いました。ですから、裏切りという行為が自分には身に覚えがないとは誰も言えないのです。
過越しの食事を共にしていたすべての弟子たちが、イエスさまと共に「同じ鉢に食べ物を浸して」(20節)食べていた裏切り者であったわけです。イエスさまはユダをはじめ、すべての弟子たちが裏切ることを知っておられながら、それでも、それを赦すとおっしゃっているわけですね。
それから、この過越しの食事をしているときに、イエスさまはパンを裂き、「これは私の体である」と言われて、弟子たちに分け与えました。また、ぶどう酒の杯を取って、「これは多くの人のために流される私の血、契約の血である」と言われて、弟子たちに分け与えました。これを元にして私たちは聖餐式を守っておりますが、私たちはこの聖餐式を通して、イエスさまと共に過越しの食事をしているわけですね。私たちが簡単にイエスさまを裏切ることを知りながらも、イエスさまは私たちと食事をしておられるということです。
皆さん、私たちが聖餐式に与るというのは、裏切り者の一人としてイエスさまからパンとぶどう酒を頂くということなのです。裏切り者の私たちに対して、それでも赦すと、愛しているとイエスさまの思いを受け取る行為であるのです。
「お前たちは私を裏切るだろう。でも、赦す。それでも、愛している」と。「だから、そのことで躓いてはならない。私を信じて、共に信仰の道を歩んで欲しい」という願いが聖餐式には込められているのだと思うのです。
皆さん、私たちは今、受難節(レント)の期間を過ごしていますが、イエスさまがご自分を裏切る弟子のことさえも愛されたように、私たちのことも「その者のために」と思いやってくださる、愛してくださることを感謝して、喜んで歩みたいと思います。
【 2018년 3월 4일 주일예배설교 】
“배신을 넘어서” 마가복음 14장 12-21절
유월절의 삭사를 하고 있을 때, 중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어쩌면 제자들 가운데 배신 자가 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18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한 사람이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18절) 제자들은 모두 다 놀랐을 것입니다. 열두 제자들은 근심하며 “나는 아니지요”(19절) 라고 하나 씩 하나 씩 묻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이 후의 성경의 내용을 알고 있으니까 가룟 유다가 배신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가 배신한다고는 한마디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랬더니 제자들은 모두 다 불안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무도 “나는 배신하지 않겠다”고 단언할 자신이 없는 것입니다. 번갈아 “나는 아니지요” 라고 묻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결코 뚜렷하게는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열둘 중의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21절) 라고 말씀하셨을 뿐입니다. 이 말은 제자들을 더 불안하게 해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제들이 모두 다 예수님과 함께 그릇에 손을 넣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누구인지 모릅니다. 어쩌면 나의 것인가고 근심한 것입니다.
헤매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21절입니다.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21절)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좀 참혹하지 않겠어요? 너 따위 죽어 버리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은 말이지요. 제자의 한 사람이 배신하는 것에 화내는 것은 알지만, 그것까지 말하지 않아도 좋은 것 같고 예수님답지 않습니다.
그러나 잘 읽어보면 좀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 차이가 아십니까? 그냥 “좋을 뻔하였느니라” 라고 말하면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예수님을 위하여” 좋았다는 것이니까 자기 중심적인 생각입니다. 자기가 배신당하고 괴롭히니까 너 같은 사람은 없는 게 좋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라고 말할 때 그것은 상대방을 생각하여 배신하는 상대방을 헤아려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자의 한 사람이 배신할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은 배신했으면 꼭 나중에 후회할 것이다. 자기를 용서하지 못하게 되어버려 비참한 배신자의 마음을 쭉 짊어지게 될 것이다. 실제로 유다는 나중에 자살해버렸습니다만 그렇게 되면 그 사람에게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그런 불행을 짊어질 바에야 태어나지 않은 게 차라리 좋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그런 불행을 짊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을 위해 배신자를 위해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예수님께서 어째서 배신자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는지가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신하는 사람이 가룟 유다라고 물론 알고 계셨지요. 자신의 생명에 관계된 것입니다. 보통이라면 다른 제자들 앞에서 “유다, 네가 배신자다” 라고 말해서 제자들과 같이 혼내주고 제재를 가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결코 이름을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어째서일까요? 그것은 유다에게 배신하는 마음을 돌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름을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릅니다. 다시 한번 시작할 수 있습니다. 큰 후회와 불행을 짊어지지 않아도 됩니다. 그것은 다 유다를 위해 생각해서 하신 것입니다. 바로 유다를 위한 사랑의 행동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유다에 대한 마음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어째서 배신자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느냐면 배신의 문제가 유다만의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유다 이외의 제자들은 이 유다의 배신으로 예수님께서 구속되신 후 모두 다 도망쳐 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가복음 14장 27절 이하에서 제자들이 도망쳐 흩어지리라고 지적하셨습니다만 그것에 대하여 베드로는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29절) 라고 말했습니다. 게다가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 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31절) 라고도 말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베드로는 세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러니까 배신이라는 행위가 자신이 한 기억이 없다고는 아무도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유월절의 식사를 같이 하고 있었던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20절) 즉 배신자 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를 비롯하여 모든 제자들이 배신하는 것을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용서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유월절의 식사를 하셨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떡을 떼어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셔서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또 포도주의 잔을 가지사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하셔서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이것을 기원으로 우리는 성찬식을 지키고 있습니다만, 우리는 이 성찬식을 통해서 예수님과 함께 유월절의 식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쉽게 배신하는 것을 아시면서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식사를 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찬식에 참여한다는 것은 배신자의 한 사람으로서 예수님께로부터 떡과 포도주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배신자의 우리들에 대하여 그런데도 용서한다고, 사랑한다는 예수님의 마음을 받는 행위인 것입니다. 너희들은 나를 배신할 것이다. 그런데도 용서한다, 그런데도 사랑한다”고. “그래서 근심하지 말고 나를 믿으면서 함께 신앙의 길을 걸었으면 좋겠다”는 예수님의 소원이 성찬식에는 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사순절의 기간을 보내고 있습니다만, 예수님께서 배신하는 제자들조차도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들도 용서하여 사랑해 주시는 것을 감사하면서 기쁨 가운데 걸어갑시다. 기도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