今日の御言葉は、イスカリオテのユダがイエスさまを裏切った話です。ユダはイエスさまを捕らえるための手引きをいたしました。しかも、本来であれば信愛を表す接吻ということを合図に使って、イエスさまを裏切ったのです。ユダはなんて最低な人間だと思われるかも知れませんが、このユダの姿は、私たちの姿、人間の罪の姿を表しているのだろうと思うのです。
新約聖書の元々の言葉であるギリシア語では、「接吻する」と訳されているのは“フィレオー”という言葉です。このフィレオーという言葉の本来の意味は“愛する”ということです。ユダがイエスさまに、挨拶であったとしても、接吻をするというのは、イエスさまを愛しているのです。しかし、愛していながら裏切るのです。愛の行為が裏切りのしるしとなるのです。愛が突然裏切りに変わるんです。それは、ユダだけではなく、私たち人間の弱さ、罪の姿を象徴しているのです。なぜ、愛が突然、裏切りに変わるのでしょうか? それは、私たち人間の愛がもろいからです。私たちの愛というものが、どうしても自分本位(自分中心)の愛だからです。自分中心に考えて、自分に都合の良い時には、相手を愛することができるし、また相手の愛を感じることもできるのです。けれども、自分にとって不都合な時、不快な時は、愛せなくなるのです。愛を感じなくなるのです。
ユダがまさにそうでした。ユダは、“この人なら‥”とイエスさまを信頼して弟子となりました。宣教の旅を共にする中で、イエスさまに対する尊敬と親愛の情を深めて行ったはずです。とは言え、イエスさまとのズレを感じることが全くなかったわけではなかったでしょう。けれども、イエスさまとの関係がうまく行っている時には、大して問題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ところが、イエスさまに対するユダヤ人指導者たちの殺意が明らかになって来た、その緊張と不安の中で、一つの事件が起こったのです。それは、祭りの食事の席で、一人の女性が、イエスさまに対する心からの感謝と愛情を込めて、高価な香油をイエスさまの頭に注ぎかけた時のことです。ユダはその女性の行為を見たときに、もったいないと、それを売って貧しい人々に施すことができたと、その女性を非難しました。当然、イエスさまも自分と同じ気持だろうと思っていたら、イエスさまは彼女をかばい、逆に自分をたしなめるようなことを言われたのです。その時、ユダのイエスさまに対する愛と信頼がプツンッと切れてしまいました。
もしユダに、自分に責められた彼女の気持を、またイエスさまの心と立場を思いやる余裕があったなら、全く違っていたと思うのです。しかし、この時、ユダには、イエスさまが自分の味方ではないことと、そのイエスさまにたしなめられた自分の痛み、悔しさしか考え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ようです。そのためにユダは、イエスさまの愛を感じ取ることができなくなってしまったのです。その時、ユダの心の中で裏切りの引き金が引かれていたのです。自分中心ゆえの愛のもろさ、それが私たち自身の姿でもあ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そして、そのような自分中心な人の姿は、ユダの裏切りだけではなく、このイエスさまの逮捕の場面に登場するすべての人の姿となって現れています。
まず、イエスさまを捕えに来た人々です。まさにこの人たちは、自分の主張を押し通すために、力ずくで相手を退ける。愛のない、自己中心な人の姿でしょう。そして、もう一つはイエスさまを見捨てて逃げて行った弟子たちです。死んでも従って行くと言った、その舌の根も乾かぬうちに、我が身を守るためにイエスさまを見捨てて逃げました。我が身を守るために、人を見捨て、切り捨てる。それもまた自分中心な愛のもろさを露呈した人の姿です。そのように、自分中心な愛のもろさ、罪深さがあらわにされる中で、その場にそぐわない言葉が一つあることに気がつきます。49節の言葉です。
「しかし、これは聖書の言葉が実現するためである」(49節)。ここで、「聖書の言葉が実現する」というのは、神さまの御心が実現するということですが、では、何が、神さまの御心として実現したと言うのでしょうか。ユダの裏切りでしょうか。祭司長たちの暴力的な逮捕でしょうか。弟子たちの逃亡でしょうか。そういった姿に象徴される、人間の愛のもろさ、自己中心さがあらわになることが、「聖書の言葉」、神の御心の実現なのでしょうか。それもあるでしょう。けれども、人の罪の姿があらわにされることは、究極的な意味で「聖書の言葉」、神さまの御心が実現するための途中経過に過ぎません。「聖書の言葉が実現する」というのは、そのように自己中心で、もろい人間、私たちを救う神さまの究極の愛がこの世に表わされるということなのです。
先ほど、「接吻する」という言葉の元々の言葉、フィレオーについてお話ししました。これは、“人間”がだれかを、何かを愛する時に使う言葉です。そして、ギリシア語には、これとは別の“愛する”という言葉があります。アガパオーという言葉です。これは、“神”がだれかを、何かを愛する時に使われる言葉です。そして、人が神さまのように誰かを愛する時にも使われる言葉です。
では、神さまの愛とはどのような愛でしょうか。勿論、自分中心の愛ではありません。相手を裏切ったり、憎んだりする愛ではありません。自分中心を捨てた愛、相手を思いやる愛、相手のために命を捨てる愛です。この神さまの愛こそが人を救う。この愛に包まれる時、人は癒され、安心できるのです。
イエスさまは裏切られ、暴力を振るわれ、見捨てられても、それらの相手を憎まず、すべての人を抱きしめて十字架へと歩まれます。これが神の愛だと伝えるがためにです。この愛が私たちの間で実現することこそ、「聖書の言葉」、神さまの御心です。この愛と出会う時、私たちは、愛とは何かを知る。そして、自己中心で、愛のもろい私たちが赦され、愛されていることを知るのです。
皆さん、イエスさまの十字架の愛は、今も私たちを包み込んでおります。この神さまの愛に包まれて、たどたどしくとも愛する道、真の道を歩み始めましょう。
【 2018년 2월 18일 주일예배설교 】
“성경이 이루어진다” 마가복음 14장 43-50절
오늘의 성경말씀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한 이야기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잡기 위한 길잡이를 했습니다. 게다가 본래였으면 신애를 나타내는 입맞춘다는 것을 군호로 써서 예수님을 배신한 것입니다. 유다를 형편없는 놈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만, 이 유다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 인간의 죄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입맞춘다”고 본역된 말은 그리스 말로 “휘레오”라는 말입니다. 이 휘레오라는 말의 본래 의미는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입맞춘다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인사의 표시였더라도 유다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면서 배신한 것입니다. 사랑의 행위가 배신의 표시로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갑자가 배신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것은 유다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의 연약함, 죄의 모습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째서 사랑이 갑자기 배신으로 바뀌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 인간의 사랑이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아무리 해도 자기 본위(자기 중심)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중심으로 생각해서 자기에게 형편 좋을 때에는 상대를 사랑할 수 있고 또 상대의 사랑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형편이 나쁠 때에는 사랑하지 못하게 됩니다. 또 사랑을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유다가 바로 그랬습니다. 유대는 “이 사람이라면...” 라고 예수님을 신뢰하여 제자가 되었습니다. 선교 여행을 하는 가운데 예수님에 대한 존경과 신애의 정가 깊어졌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과의 어긋남을 느끼는 것이 전혀 없었던 게 아니지요. 그러나 예수님과의 관계가 잘 되어 있을 때에는 그다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유대인 지도자들의 살의가 밝혀져 온 그 긴장과 불안 가운데 하나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식사 자리에서 한 사람의 여성이 예수님에 대한 감사와 애정을 담아서 매우 값진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 때의 말입니다. 유다는 그 여성의 행위를 보았을 때에 아깝다고 그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다고 그 여성을 비난했습니다. 당연히 예수님도 자기와 같은 생각이라고 생각했더니 예수님께서는 그녀를 두둔하셔서 반대로 자기를 나무라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유대의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신뢰가 톡 끊어버렸습니다.
만약 유다에게 책망받은 그녀의 마음을, 또 예수님의 마음과 입장을 헤아리는 여유가 있었더라면 전혀 달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때, 유다에게는 예수님께서 내 편이 아니라는 것과 그 예수님께 주의받은 자신의 아픔과 억울함 밖에 생각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때문에 유다는 예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유다의 마음 속에서 배신의 방아쇠가 당겨졌습니다.
자기중심으로 인한 사랑의 연약함, 그것이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기중심적인 사람의 모습은 유대의 배신 뿐만 아니라 이 예수님의 체포 장면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을 잡으러 온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 사람들은 자신의 주장을 믿고 나가기 위해 강제로 물리치는 사랑이 없는 자기중심적인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더 한 가지는 예수님을 버려서 도망쳐 가버린 제자들입니다. 죽어도 따라가겠다,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다고 한 그 입에 침도 채 마르기 전에 자기 몸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을 버려서 도망쳤습니다. 자기 몸을 지키기 위해 사람을 버려 잘라 버린다. 그것도 자기중심적인 사랑의 연약함이 드러난 시람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기중심적인 사랑의 연약함, 사람의 죄가 드러나는 가운데 그 자리에 걸맞지 않는 말씀이 있습니다. 49절의 말씀입니다. “이는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라”(49절) 여기서 “성경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실현된다는 뜻이지만, 그렇다면 뭐가 하나님의 마음으로서 신현되었다고 하는 것일까요? 유다의 배신일까요? 제사장들의 폭력적인 제포일까요? 제자들의 도망일까요? 그런 모습에 상징되는 인간의 사랑의 연약함, 자기중심성이 드러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 실현된 것일가요?
그런 것도 있지요. 그러나 사람의 죄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실현되기 위한 도중 경과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실현된다는 것은 그렇게 자기중심이고 연약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사랑이 이 세상에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아까 “입맞춘다”는 말의 원래 말, 휘레오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누군가를 또 뭔가를 사랑할 때에 쓰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리스 말에는 이것과 다른 “사랑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가파오”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또 뭔가를 사랑하실 때에 쓰여지는 말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하나님 같이 누군가응 사랑할 때에도 쓰여지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이란 어떤 사랑일까요? 물론 자기 중심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상대를 배산한다거나 미워한다거나 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자기 중심을 버린 사랑, 상대를 헤아리는 사랑, 상대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사랑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이야말로 사람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에 싸일 때 사람은 치유되어 안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신당하고 버림을 받아도 상대를 미워하지 않으시고 모든 사람을 껴안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사랑이 우리 가운데 실현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 사랑과 만날 때, 우리는 사랑이란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중심으로 사랑이 연약한 우리기 용서받고 사랑받고 있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사랑은 지금도 우리를 싸 주십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에 싸여서 불안한 걸음걸이라도 사람을 사랑하는 길, 참된 길을 걷기 시작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