藤木正三という牧師任が、「神の風景」という随筆の中で、次のように語っています。「神を信じるという人が神を信じてい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神に生かされている人が神を信じているのです。そして、神に生かされている人は神について語らないで、神に生かされている自分を語るでしょう。信仰の問題は、神の問題でも人間の問題でもなく、自分自身の問題です。信仰をおびやかすものは従って、無神論でも科学でもなく、多忙な生活でも物質的欲望でもなく、道徳的混乱でもないのです。それは、自分を批判吟味することに時間と労力を費やすことを無駄と考えて、簡単に自分を通過してしまうことです。」(『神の風景』158頁)
表現が少し難しい文章ですが、要するに、信仰というのは、自分が神さまを信じるということが問題なのではなく、日常の生活の中で、神さまの御言葉によって、自分がどのように生きるのか?を顧みながら、自分自身を再発見することが重要で、そのことによって、自分自身が神さまによって生かされていることを認識するわけですね。それがまさに信仰だというわけです。そして、神さまに生かされている人は、神さまを語るのではなく、神さまに生かされている自分を語ると言います。
皆さん、私たちもこのような信仰を持ちたいと思うのです。今日の御言葉に登場するバプテスマのヨハネもまさにそのような人でした。31節をご覧下さい。「上から来られる方は、すべてのものの上におられる。地から出る者は地に属し、地に属する者として語る」(31節)と、ヨハネは語っております。ヨハネは、イエスさまと自分とを対比しながら、イエスさまは天から来られた方で、すべてのものの上におられる、それに対して、自分はあくまで地に属する一人の人間だ、と証ししています。イエスさまこそ、「上から来られた方」であって、自分はこの方によって生かされている人間だと言っているのです。普通の人間関係であったなら、ヨハネはイエスさまの師匠です。イエスさまより上に人間であったはずなのに、どうしてヨハネはそれが分かったのでしょうか? だって、神さまが人となって、この世に現れたと言うことは、見た目には、私たちと何ら変わりない人でしょ。イエスさは神の子だとしても、人として語り、行動しています。その言動がどんなに偉大であっても、普通に見たら人間としか考えられません。それなのに、ヨハネはいったい何を見て、人であるイエスさまを神さまだと信じたのでしょうか?
それは、イエスさまに神の“霊”が与えられるのを見たからです。34節に、「神がお遣わしになった方は、神の言葉を話される。神が“霊”を限りなくお与えになるからである」(34節)と書かれています。
ヨハネは、イエスさまに神さまの霊が降るのを見ました。けれども、ここで見たと言っても、神さまの霊というものも本来、人の目には見えないのです。ヨハネは特別な人で、特別な目を持っているから見ることが出来たとするならば、私たち普通の人は、誰もイエスさまを神の子とは信じることは出来ません。ですから、私たちは、イエスさまこそ神である、救い主であると信じて生きるためには、もう少し、深く考える必要があります。
そこでまず、ヨハネによる福音書のメッセージの中心は何かを改めて考えてみたいと思います。ヨハネによる福音書3章16節に、「神は、その独り子をお与えになったほどに、世を愛された」とあります。神さまがこの世を、私たちを愛されたと言います。これこそがヨハネによる福音書のメッセージの中心です。神さまがこの世にお与えくださった独り子イエス・キリストは、「父(なる神)がわたしを愛されたように、わたしもあなたがたを愛してきた」(ヨハネ15:9)と言い、「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愛したように、互いに愛し合いなさい」(同12節)と弟子たちに命じています。簡単に言えば、“愛”が大事と言っているのです。そして、ヨハネによる福音書を受け継ぐヨハネの手紙(一)においては、「神は愛です」(4章16節)と語られています。「いまだかつて神を見た者はいません。わたしたちが互いに愛し合うならば、神はわたしたちの内にとどまってくださり、神の愛がわたしたちの内で全うされているのです」(4章12節)とも書かれています。
私たちの目には、神さまは見えません。人しか見えません。霊も見えません。けれども、愛は見えます。人が人を愛する姿は見えます。愛されていることは分かります。感じます。そういう愛のあるところに神さまはおられる。目には見えないけれど、人が愛し合うその愛の中に神さまはおられる。神さまは愛そのものだとヨハネによる福音書は私たちに語りかけるのです。そして、イエス・キリストという方は、まさに“愛のかたまり”のような方です。愛そのものが歩き、語っておられるような方です。その圧倒的な愛に触れて、ヨハネによる福音書の最後のシーンで、トマスという弟子が、イエスさまに向かって、「わたしの主、わたしの神よ」(20章28節)と告白しています。復活したイエスさまに自分一人だけ会えず、寂しさと疎外感からトマスは意固地になります。そして、イエスさまが十字架に釘づけられた時の手のひらの穴、脇腹の穴に自分の指を入れなければ、それが復活したイエスさまだとは信じないと啖呵を切るのです。後でトマスは自分の発言と態度を後悔したでしょう。そんなトマスのもとにイエスさまは現れます。そして、指を入れていい、それでいいから信じてほしいとトマスに語りかけるのです。傷口に指を入れるって、どれほど痛いでしょうか? 自分の痛み苦しみより、トマスの救いが大事だと思われる、イエスさまのその愛に、トマスは圧倒されます。その愛に神さまを感じて、トマスは“この方こそ神さまだ”と信じたのです。
洗礼者ヨハネもまた、イエスさまが人を愛する姿を目の当たりにしたのかも知れません。神さまが見えるとか、聖霊が見えるとか、そういう特別な目を持っていたわけではなく、イエスさまの愛の中に、聖霊を見、神さまを見た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愛によって救われる人の姿に、聖霊の働きを見、神さまを見た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ヨハネは、イエスさまに愛されて、人が救われる姿を見たのでしょう。そして、イエスさまの愛の中に“聖霊”の働きを見たのでしょう。神さまを見たのでしょう。それを見た者として、ヨハネもまた、イエスさまこそ、神さまがこの世にお遣わしになった方だと信じて証ししているのです。「地に属する者として語」っているのです。そして、私たちもまた「地に属する者として」、イエスさまは神であると証しすることができます。聖書という「神の言葉」を通して、教会の交わりを通して、イエスさまの愛を信じ、イエスさまによって愛されていることを感じて、トマスのように、イエスさまは私の神であると、私の救い主であると証しすることができます。
私たちがいくら聖書の御言葉を覚えて、語ったとしても、力がないのです。自分自身が、神さまに愛され、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救われている、生かされている、と納得していることが必要です。ですから、自分の生活とその中での悩み悲しみ、苦しみを抜きにして、神さまを語ることは出来ないのです。私たちが証しをするというのは、自分がどのようにして神さまに愛され、救われ、生かされて生きているか、それを具体的に語ることが、イエスは神であると証しすることなのです。
私たちの教会では、数年前から聖書通読を奨励しております。聖書を読みましょう。聖書の御言葉を聞きましょうと。でも、聖書の言葉を読んでも、あるいは聞いても、右から左に抜けてしまったら何の役にも立ちません。聖書の言葉によって自分の生活、自分の心、自分の姿を照らして、神さまがどのように自分に語りかけ、愛してくださっているかを発見するのです。そうでなければ、神さまの愛によって生かされている自分を語ることは出来ません。
イエスさまの御言葉は素晴らしい、イエスさまの愛は自分の心に温かくしてくれる。そのように“自分”を語れる時、私たちは、「永遠の命」(36節)と言われるものを生き始めているのだと思います。皆さん、神さまに愛され、生かされている自分を、是非、発見して下さい。
【 2018년 2월 4일 주일예배설교 】
“하나님께서 살려주신 사람” 요한복음 3장 31-36절
후지키 쇼죠(藤木正三)라는 목사님이 “하나님의 풍경”이라는 수필 속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살려주신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ㅅㄹ려주신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서 간증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살려주신 나 자신에 대해서 간증하지요. 신앙의 문제는 하나님의 문제나 인간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자신의 문제입니다. 신앙을 위협하는 것은 무신론도 과학도 아니고 다망한 생활도 물질적인 욕망도 아니고 도덕적인 혼란도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을 비판 은미하는 것에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것을 쓸데없다고 생각해서 간단히 자기를 통과해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풍경” p.158)
표현이 좀 어려운 문장이지만 요컨데 신앙이라는 것은 자기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일상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기가 어떻게 살아 있는지를 되돌아보면서 자기자신을 재발견하는 것이 종요하고 그것으로 하나님께서 살려주신 자기자신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그리고 하나님께서 살려주신 사람은 하나님을 간증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살려주신 자기를 간증한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도 그러한 신앙을 갖고 싶다고 생각합니다.오늘의 성셩말씀에 등장하는 세례 요한도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31절,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31절) 라고 요한은 말했습니다.요한은 예수님과 자기와를 대비하면서 예수님께서는 하늘로부터 오신 분이며 모든 것의 위에 계신다, 그것에 대해서 나는 땅에 속한 한 사람의 인간이라고 간증했습니다.예수님이시야말로 “위로부터 오신 분이시고 나는 이 분께서 살려주신 인간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통의 인간 관계라면 요한은 예수님의 스승입니다. 예수님 보다 위의 인간이었는데 어째서 요한은 그것이 알았을까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이 세상에 나타나셨다는 것은 겉보기에는 우리와 조금도 변함이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더라도 사람으로서 말하고 행동하셨습니다. 그 행동이 얼마나 위대한 것이라도 일반적으로 보면 인간으로서 밖에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요한은 도대체 무엇을 보고 사람인 예수님을 하나님이시라고 믿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께 하나님의 “성령”이 주어지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34절에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니라”(34절) 라고 써 있습니다.요한은 예수님께 하나님의 성령이 내리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보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성령이라는 것은 사람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요한은 특별한 사람이라서 특별한 눈을 가지고 있으니까 볼 수 있었다면 우리 보통 사람은 아무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서 믿을 수 없습니다.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이시다, 구세주이시다, 라고 믿고 살기 위해서는 조금 더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먼저 요한복음의 메시지의 중심은 무엇이냐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요한복음의 메시지의 중심입니다.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주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요 15:9) 라고 말씀하시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5:12) 라고 제자들에게 명하셨습니다. 쉽게 말하면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신 것입니다.그리고 요한복음을 이어받는 요한 1서에 있어서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느니라”(요일 4:16) 라고 있습니다. 또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요일 4:12) 라고도 있습니다.
우리의 눈으로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성령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보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모습은 보입니다. 사랑받고 있는 것은 압니다. 느낍니다. 그러한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는 계십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그 사랑 안에 하나님께서는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 그 자체라고 요한복음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은 바로 “사랑 덩어리” 같은 분이십니다. 사랑 그 자체가 걷고 말씀하시는 것 같은 분이십니다. 그 압도적인 사랑에 접하여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면에서 도마라는 제자가 예수님을 향하여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 자기 혼자만 만나지 못해서 외로움과 소외감으로 도마는 고집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때의 손의 못자국에 손가락을 넣으며 예수님의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나중에 도마는 자신의 발언과 태도를 후회했을 것입니다. 그런 도마에게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네 손가락을 내 못자국에 넣어도 되니까 믿지 않는 자가 아니라 믿는 자가 되리라고 도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목자국(상처자국)에 손가락을 넣다니 얼마나 아픕니까? 자신의 아픔과 괴로움 보다 도마의 구원이 종요하다고 생각하시는 예수님의 그 사랑에 도마는 압도되었습니다. 그 사랑에 하나님을 느껴서 도마는 이 분이시야말로 하나님이시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도 예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시는 모습을 눈앞에 보았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보인다거나 성령께서 보인다거나 그런 특별한 눈을 갖고 있었던 게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 안에 성령을 보며 하나님을 보았을 것입니다. 사랑으로 구원받는 사람의 모습에 하나님께서 임하시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님께 사랑받고 사람이 구원받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 안에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보았던 자로서 요한도 예수님이시야말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시라고 믿고 간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땅에 속한 자”로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땅에 속한 자”로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시라고 간증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교회의 교제를 통해서 예수님의 사랑을 믿고 예수님께 사랑받고 있는 것을 느껴서 도마처럼 예수님께서는 나의 하나님, 나의 구세주라고 간증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성경말씀을 기억해서 말했다고 하더라도 거기에는 힘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자신이 하나님께 사랑받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 하나님께서 나를 살려주신다고 납득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생활과 그 가운데의 괴로움과 슬픔을 빼고 하나님을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간증한다는 것은 자기가 어떻게 해서 하나님께 사랑받고 구원받고 살려주심을 받고 살아 있는지, 그것을 구체적으로 말하는 것이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라고 간증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수년전부터 성경통독을 장려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읽읍시다, 성경의 말씀을 들으십다, 라고. 그러나 성경을 읽어도 또는 들어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빠져 나가면 무슨 소용도 없습니다. 성경말씀으로 자신의 생활, 자신의 마음,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나에게 말씀하시고 사랑해 주시는지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살려주시는 나를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굉장하다, 예수님의 사랑은 나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신다. 그렇게 “나 자신”을 말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영생”(36절)이라는 것을 살기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살려 주시는 나 자신을 부디 발견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