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히실 전날 밤,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이라고 불리는 교제 시간을 지내셨습니다. 제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발을 씻으시고 마치 유언을 남기는 것 같이 많은 말씀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의 일부가 오늘의 성경말씀입니다. 그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16절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16-17절)
지금까지는 예수님께서 제자들 곁에 계셔서 친히 가르치시고 지켜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 예수님께서 안 계시게 됩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여 버립니다. 아니, 부활하셔서 아버지 하나님이 께시는 하늘에 승천하십니다. 그래서 “다른 보혜사”를 보내시고 제자들과 “영원토록” 함께 있게 한다고 역속하신 것입니다. 그 “보혜사”란 “진리의 영”, 우리가 “성령”이라고 부르는 분이십니다.
“보혜사”라고 하면 여러분은 어떤 이미지가 떠오릅니까? 우리를 도와 주시고 인도해 주시는 분이시라는 이미지가 떠오를지도 모릅니다. 또 성경말씀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간증할 때의 말은 성령께서 주신다고 있으니까 우리에게 지혜나 힘이나 용기를 주시는 분이시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성령을 자기 대신으로 제자들에게 보낸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자기 대신에 라고 말하는 것 보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자기 자신 그대로”라고도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18절의 말씀으로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8절)
이 말씀으로 생각하면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성령이 되셔서 돌아오실 작정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더 한 가지 아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자식 같이 생각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버이 마음으로 늘 제자들을 대하셨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방탕한 자식의 비유”가 있습니다만, 아버지에게 생전증여시켜서 반항하여 집을 떠나간 아들의 이야기입니다. 먼 데에서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는 가운데 아들은 얼마 안 있어 몰락해 버려 궁지에 빠졌습니다. 그 때, 아들은 스스로 돌이켜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서 사과하자. 그리고 아들이 아니라 품꾼의 하나로 두어 달라고 결심해서 아버지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 아들을 아버지는 걱정하여 아들이 돌아오기를 날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들의 모습을 보자마자 뛰어서 다가가서 꼭 껴안았습니다. 게다가 아들의 사과를 도중에 가로막고 축연을 베풀어 이전과 변함없고 아들로서 맞아들였던 갓입습니다.
저는 이 비유를 생각할 때마다 “믿을 수 없다”는 놀람과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 같은 감동을 느낍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궁극적인 어버이 마음, 진실한 사랑이라고 느낍니다. 보수나 보답을 구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이 비유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 하나님, 그리고 아들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랑, 어버이 마음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사랑받고 있는 존재인 것입니다. 얼마나 죄 많은 우리라도 “당신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로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아 주십니다. 그러한 뜨거운 열정을 담아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곁에, 우리들 곁에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다고 성령을 통해서 돌아와 주셨습니다.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과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살아 주십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와 주시는 것을 무엇으로 확인할 수 있을까요? 성령께서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손으로 닿을 수도 없습니다. 뭔가 기적이 일어나는 것도 없습니다. 시각적, 감각적으로는 확인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으로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23절입니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23절) 예수님의 말씀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요한복음 13장 34절에 있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중 알리라.”(요 13:34-35) 이 말씀은 15장에도 나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교제 가운데 살아 계신다고 또 예수님과 하나님께서 함께 계신다고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나 성령이라는 것은 이론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영혼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어디로 느끼는가? 사랑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그 사랑에 우리 인간의 상식이나 계산을 넘는 다정함이나 보답을 구하지 않는 마음, 자기 희생적인 마음을 느낄 때, 우리는 거기에 “하나님”을 느끼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교회가 생겨서 2,000년, 그리고 우리 히로시마교회가 생겨서 70년이 지났습니다. 교회를 만들어 가는 것, 서로 사랑하는 교회를 만들어가는 것은 늘 과제입니다. 사랑이 없는 나의 마음과의 싸움입니다. 위대한 목표입니다. 도전, 챌린지입니다. 그래서 보람이 있습니다. 진심의 기도가 생깁니다. 창립70주년을 맞이하는 우리는 새로운 뜻을 가지고 챌린저로서 성령과 사랑을 구하여 기도해 갑시다.
18.05.20主日(韓国語版)「見えない聖霊に愛されて」ヨハネ14章15~27節
イエスさまは、十字架に架けられる前夜、弟子たちと最後の晩餐と呼ばれる交わりの時間を過ごされました。弟子たち一人ひとりの足を洗い、あたかも遺言を遺すかのように多くの言葉を語られました。その言葉の一部が、今日の聖書箇所です。その中で、主イエスは弟子たちに、次のように約束されました。16節です。「わたしは父にお願いしよう。父は別の弁護者を遣わして、永遠にあなたがたと一緒にいるようにしてくださる。この方は、真理の霊である。」(16~17節)
今まではイエスさまが弟子たちのそばにいて、親しく教え、守って来ました。けれども、そのイエスさまご自身がいなくなるのです。十字架に架けられて殺されてしまいます。否、復活して父なる神のおられる天に昇って行かれます。そこで「別の弁護者」を遣わして、弟子たちと「永遠に」一緒にいるように計らってくださる、と約束されたのです。その弁護者とは「真理の霊」、私たちが“聖霊”と呼んでいるお方です。
「弁護者」と言うと、いわゆる“弁護士”を連想して、何だか固い感じがします。弁舌によって、何を弁護してくださるのだろう、というようなイメージを持つかも知れません。聖書の中に、イエス・キリストの救いを証しする時の言葉は聖霊が授けてくださる、とありますので、弁護士のイメージが必ずしも間違ってい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が、違う聖書を読むと、“助け主”と訳されています。助け主でもまだ固い感じがしますが、砕いて言えば、私たちを助け、支え、愛してくださる方ということです。
このような霊を、イエスさまはご自分の代わりとして、弟子たちに遣わすと約束なさったのです。
ご自分の代わりに、と言うよりも、イエスさまは聖霊を“ご自分そのもの”とも考えておられたようです。それは18節の御言葉から分かります。「わたしはあなたがたをみなしごにはしておかない。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戻って来る。」(18節)この言葉からすると、イエスさまはご自分が、聖霊となって戻って来るおつもりだったようです。そして、もう一つ分かることは、イエスさまは弟子たちを、子どものように思っていた、また、ご自分のことを弟子たちの“親”のように思っていた、ということです。親心で、いつも弟子たちに接しておられたのです。
ルカによる福音書の15章に〈放蕩息子のたとえ〉がありますが、父親が生きているうちに財産を生前贈与させて、反抗し、家を飛び出して行った息子の話です。遠いところで、やりたい放題の放蕩生活を続けた息子は、やがて落ちぶれ、窮地に陥ります。その時、息子は我に返り、父の家に帰って謝ろう、そしてもはや息子ではなく、雇人としておいてもらおうと決心して、父の家に戻ります。そんな息子を、父は来る日も来る日も案じて、帰る日を待っていました。そして、息子の姿を見つけるや、門から飛び出し、走り寄って抱き締めました。さらに、息子の謝罪を途中でさえぎり、喜びの宴を開いて、以前と変わらずに息子として迎え入れたのです。
私は、このたとえを思い起こす度に、“信じられない”という驚きと、涙がこぼれそうな感動を覚えます。そして、これが究極の親心、本当の愛だなあ、と感じます。報いや見返りを求めない愛です。
このたとえ話の父親は、天におられる父なる神さまを、そして息子は私たち一人ひとりを表しています。このような究極の愛、親心で、私たちは神さまに愛されている存在なのです。どんなに罪深くとも、どんなに迷惑をかけようとも、どんなに惨めであろうとも、“あなたはわたしの愛する子”として、神さまは私たちを見ていてくださいます。
そのような熱い思いを込めて、イエスさまは弟子たちのもとに、私たちのもとに聖霊を遣わしてくださいます。みなしごにはしないと、聖霊を通して戻って来てくださいます。聖霊を通して、イエスさまと父なる神さまが、私たちの内に住んでくださいます。けれども、聖霊が来てくださることを、何によって確かめることができるでしょうか。聖霊は目に見えません。手で触れることもできません。何か奇跡が起こるわけでもありません。視覚的、感覚的には確認できないのです。
けれども、“あること”によって、あなたがたは聖霊が一緒にいてくださることを、ご自分と父なる神さまがあなたがたの内に住んでくださっていると信じて良い、と言われました。それは、イエスさまの掟を守ること、イエスさまの言葉を守ることによって、です。23節、「わたしを愛する人は、わたしの言葉を守る。わたしの父はその人を愛され、父とわたしとはその人のところに行き、一緒に住む。」(23節)
イエスさまの掟、イエスさまの言葉とは何でしょうか? それは、ヨハネによる福音書13章34節に示されています。「あなたがたに新しい掟を与える。互いに愛し合いなさい。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愛したように、あなたがたも互いに愛し合いなさい。互いに愛し合うならば、それによってあなたがたがわたしの弟子であることを、皆が知るようになる。」(ヨハネ34~35節)この掟は、後の15章でも繰り返して命じられます。私たちが互いに愛し合う交わりの中に、聖霊は生きて働いている。互いに愛し合う関係の中に、イエスさまと父なる神さまは一緒に住んでおられる、と信じることができます。
神さまや聖霊というものは、理屈で知るものではなく、心で、魂で感じるものです。どこに感じるのか? 愛に感じるのです。互いに愛し合う。その愛に、私たち人間の当然、常識、計算を超えた優しさや、見返りを求めない思い、自己犠牲的な心を感じるとき、私たちは、そこに“神さま”を感じるのです。
聖霊の働きによって教会が生み出されて2千年、そして、私たちの広島教会が生み出されて70年が経ちました。教会を造り上げていくこと、互いに愛し合う交わりを造り上げていくことは、常に課題です。愛のない自分の心との闘いです。大いなる目標です。挑戦、チャレンジです。だからこそ、やりがいがあります。本気の祈りが生まれます。創立70周年を迎えた私たちは、新たな志を持って、チャレンジャーとして、聖霊と愛を祈り求めていきましょ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