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에는 양문 곁에 “베데스다”라는 연못이 있었습니다. 그 못의 주변에는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3절) 있었습니다. 그 이유가 4절에 있습니다.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3절-4절)
베데스다 연못은 바로 기적의 연못이었습니다. 그 기적에 사람들은 일말의 희망을 걸어 연못 주변에 모여 있었습니다. 거기는 소망이 넘치는 장소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장소는 병이나 장애를 입은 많은 사람들이 겹치듯이 누워 있었던 것입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비참한 광경이 머릿속에 떠오릅니다. 아마 가족도 병이나 장애를 입은 자기들의 가족을 거기에 데리고 왔으면 집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의 생활이 있고 일도 있습니다. 자기들의 일상생활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비참한 광경의 장소에 있고 싶지 않습니다. 아마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은 양문 밖에 있는 그 연못에 아무도 가까이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기적이 일어난다고 하면서도 거기는 결코 소망의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보기 좋게 병이나 장애를 입은 사람들을 버리는 장소가 되어 있었습니다. 베데스다란 “동정의 집”이라는 뜻이지만 동정은커녕 “버림을 받은 집” 같은 비참한 장소였습니다. 아무도 가까이 가려고 하지 않는 장소입니다. 그러나 그 장소에 예수님께서는 오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는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1절) 축제 분위기로 활기차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데스다 못 주변은 가족에게서 버림받고 소망도 아무 것도 없는 어두운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거기에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5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6절)고 물으셨습니다. 그러나 이 예수님의 말씀은 좀 위화감이 있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38년이나 병으로 괴로워하고 있는데 낫고자 하는 게 틀림없잖아요.그러나 그 병자는 낫고자 한다고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대답한 것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7절,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7절) 그가 이 못에 오게 된 당초는 낫고자 원하고 있었지요. 물이 움직일 때에 먼저 들어가려고 하는 소망에 넘쳐 있었지요.
그러나 물이 언제 움직일지 모릅니다. 그리고 몇번 물이 움직여도 먼저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나날을 몇년이나 지내는 동안 먼저 들어가는 것이 어렵고 가혹한 현실을 깨달아 이 사람은 절망적인 마음이 되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주변의 있는 사람들은 남을 밀어내어도 자기가 먼저 들어가고 싶다는 사람밖에 없는 것입니다. 서로 라이벌입니다. 그런 경쟁 상대로서 남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나 주변 사람을 염려할 여유는 없습니다. 그를 친절하게 못에 들어가게 해주는 사람은 어무도 없습니다. 그러한 상황도 그를 어두운 마음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여기밖에 올 수 있는 장소가 없었습니다. 먼저 내려가서 낫게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알면서도 그에게는 여기밖에 있을 수 있는 장소가 없었던 것입니다. 집에서도 있지 못합니다. 가족들도 성가신 존재로서 나를 보고 있고 보기 좋게 쫓아내는 현실을 알아차려 그램에도 가족들의 마음을 생각하면 나의 본심도 말하지 못해서 그는 매일 체념과 절망을 안고 있으면서 여기에 누워 있었던 게 아닐까요?
38년간 병을 안고 이 못 주변에 누워 있는 나날을 지내면서 그는 무의식중에 자신의 인생 최대의 문제를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병이 아닙니다. 물론 낫게 될 수 있으면 낫게 되고 싶었지요. 그러나 병이 낫게 되는 것보다 들어가게 해주는 사람이 없다는 현실, 즉 병을 안고 있는 자기를 돌보아 주고 사랑해 주는 사람이 없다는 현실이야말로 그에게는 괴롭고 슬픈 최대의 문제였을 것입니다. 우리도 사랑해 주는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자신의 생각대로 잘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상도 하지 않았던 일, 좋지 않는 일, 괴롭고 슬픈 일들이 여러가지 일어납니다. 그래서 그런 나에게 가까이 와서 함께 사는 사람,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는지 어떤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랑이 있다면 우리는 괴로움이나 슬픔 속에서도 자신을 받아들이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로서 이 사람의 예수님에 대한 7절의 대답은 “당신께서는 나를 사랑해 주십니까?” 라는 호소였던 것입니다.
사람은 병을 안고 있어도 괴로움이나 문제를 안고 있어도 자기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38년간 병으로 누워 있는 이 사람 곁에 오셨습니다. 그 고뇌의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그에게 가까이하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8절) 라고 사랑과 용기의 말씀을 고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갔”(9절)습니다. 병이 낫게 되었으면 더 좋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으면 그 힘으로 반드시 병이 낫게 된다, 문제나 괴로움이 해결된다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믿는다는 것은 낫게 되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낫게 되었으면 좋고 낫게 되지 않아도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가까이하시고 나를 사랑해 주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있으니까 병이 있어도 문제나 괴로움을 안고 있어도 그것을 받아들여 그러한 “나”를 받아들여서 감사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병으라는 자리에 “들려 있는” 인생으로부터 자리를 “들고 있는” 인생으로의 전환입니다. 즉 병이 자신의 인생의 주체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인생의 주체, 주역이라는 것입니다. 뭐가 있어도 결정하는 것은 자가 자신입니다. 그래서 병에 얽매이고 절망이나 체념에 빠지는 게 아니라 병이 있어도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절망이나 불안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병의 자리에 얽매여 눕는 게 아니라 병의 자리를 들고 주체적으로 살아가라.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평안히 감사해서 살아가라. 당신은 그것이 할 수 있다. 8절의 예수님의 말씀은 그러한 격려의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도 여러가지 있습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현실만 얽매여 지배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빋고 주체적으로 자유롭게 감사해서 살아가는 인생을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병의 자리를 들고 사는 신앙의 인생을 걸어갑시다.
18.05.06主日(韓国語版)「良くなりたいか」ヨハネ 5章1~9節
エルサレムには羊の門の傍らに「ベトサダ」という池がありました。その池の周りには、「病気の人、目の見えない人、足の不自由な人、体の麻痺した人などが、大勢横たわって」(3節)おりました。その理由が4節にあります。「彼らは、水が動くのを待っていた。それは、主の使いがときどき池に降りて来て、水が動くことがあり、水が動いたとき、真っ先に入る者は、どんな病気にかかっていても、いやされたからである。」(3節~4節)
ベトサダの池はまさに奇跡の池でした。その奇跡に、人々は一縷(いちる)の望みをかけて、池の周りに集まっていたのです。そこは希望溢れる場所であったはずです。でも、実際には、その場所は、病気や障がいを負った人々が大勢折り重なるようにそこに横たわっているのです。想像してみて下さい。とても悲惨な光景が頭に浮かびます。たぶん家族も、病気や障がいを持った自分たちの家族をそこに連れて来たら、家に帰ったのだろうと思います。だって、自分たちの生活があります。仕事もあります。自分の日常の生活があります。おそらくエルサレムに住む人々は、町の外壁の外にあるその池に、だれも近寄ろうとしなかったのではないかと思います。奇跡が起こると言いながら、そこは決して希望の場所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体良く、病気や障がいを負った人々を見捨てる場所になっていたのだろうと思います。ベトザタとは“憐れみの家”という意味だそうですが、憐れみの家どころか、“見捨てられた家”のような、悲惨な場所だったのだろうと想像されます。
だれも寄りつこうとしない。けれども、その場所に、イエスさまはおいでになったのです。エルサレムでは「ユダヤ人の祭り」(1節)が行われている時で、外壁の内側は、何かの記念を祝うお祝いムードにあふれていたでしょう。でも、ベトサダの池の周辺は、家族から見捨てられ、希望もなにもない、暗いムードであったわけです。けれども、イエスさまはそこにおいでになったのです。
さて、そこに「三十八年も病気で苦しんでいる人」(5節)がいました。イエスさまはその人に「良くなりたいか」(6節)と、お尋ねになったのです。でも、このイエスさまの言葉、ちょっと違和感のある言葉です。だってそうでしょう。38年間も病に苦しんでいるのに、良くなりたいに決まっているじゃないですか?
しかし、その病人は、良くなりたい、とは答えないのです。彼が答えたのはこうです。7節、「主よ、水が動くとき、わたしを池の中に入れてくれる人がいないのです。わたしが行くうちに、ほかの人が先に降りて行くのです。」(7節)彼(病人)が、この池に連れて来られた当初は、良くなりたいと願っていたでしょう。水が動いた時に、真っ先に飛び込もうという希望にあふれていたでしょう。けれども、水はいつ動くか分かりません。そして、何度水が動いても真っ先には飛び込めないのです。そういう日々を何か月、あるいは何年と過ごすうちに、水に真っ先に飛び込むのは難しい、非常に厳しいという現実を悟らされ、この人は絶望的な気持になった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しかも、周りは、人を出し抜いても、押しのけても、自分が真っ先に入りたいという人しかいないのです。お互いにライバルです。そういう競争相手として周りを見ているのです。だれにも周りの人を気遣う余裕などありません。彼のことを、親切に池に運び入れてくれる人など、誰もいないのです。そういうギスギスした空気も、彼を暗い、ネガティブな気持に追いやったことでしょう。
だったら、もうこんなところに来なければいいじゃないか、と思うかも知れません。ところが、彼には、ここしか来る場所がなかったのです。真っ先に飛び込んで治ることなど不可能だと知りながら、しかし、彼には、ここしか居る場所がなかったのです。他に行く場所などありません。家にだって居られません。ある意味、家族からも、厄介者として、体良く追い出されている現実に気づいて、けれども、家族のことを考えれば、自分の気持も言えなくて、彼は毎日、諦めと絶望を抱えながら、ここに横たわっていた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38年間、病を抱え、この池のそばに横たわる毎日を過ごしながら、彼は無意識のうちに、自分の人生の最大の問題に気づいていたのでしょう。それは病ではありません。もちろん治るものなら治りたかったでしょう。けれども、病気が治ること以上に、病気の自分を運んでくれる人がいないという現実、つまり病気を抱えている自分に本気で関わってくれる人がいない、寄り添って生きてくれる人、愛してくれる人がいない、という現実こそ、彼にとっては、辛く厳しく寂しい最大の問題だった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私たちも、愛してくれる人を必要としています。私たちの人生は、思うようにうまくいくことばかりではありません。想定外のこと、不都合なこと、苦しく悲しいこと、色々なことが起こります。だからこそ、重要なのは、そういう自分に寄り添って一緒に生きてくれる人、愛してくれる人がいるかどうか、なのです。そういう人がいれば、そういう愛があれば、私たちは、苦しみや不都合の中でも、自分を受け入れて生き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そういう意味で、この人のイエスさまに対する7節の答えは、“あなたはわたしのことを愛してくれますか?”という訴えだったと思うのです。人は、病を抱えていても、苦しみや問題を抱えていても、自分を愛してくれる人がいるなら、きっと生きていけます。
イエスさまは、38年間病気で横たわっていたこの人のもとに来られました。その苦悩の声を聞きました。彼に寄り添おうとされました。そして、「起き上がりなさい。床を担いで歩きなさい」(8節)と愛と勇気の言葉を告げたのです。すると、「その人はすぐに良くなって、床を担いで歩きだし」(9節)ました。病は治るに越したことはありません。けれども、神さまを信じたら、その力で必ず病が治る、問題や苦しみが解決するというわけではありません。
皆さん、信じるとは、治ることを信じることではないのです。治ればよし、治らなくとも、イエスさまを通して、神さまが自分に寄り添い、自分を愛してくださっていることを信じることなのです。その愛があるから、病気であっても、問題や苦しみを抱えていても、それを受け入れて、そういう“自分”を受け入れて、感謝して生きていけるのです。言わば、それは病という名の床に“担がれている”人生から、床を“担ぐ”人生への転換です。つまり、病が自分の人生の主体ではなく、“自分自身”が人生の主体、主役だということです。何があっても決めるのは自分です。だから、病に縛られて、絶望やあきらめに陥るのではなく、病があっても神さまの愛を信じて、絶望や不安から解放され、自由に生きていけるのです。病の床に縛られて横たわるのではなく、病の床を担いで、主体的に生きなさい。神さまの愛を信じて、平安に、感謝して生きなさい。あなたには、それができる! 8節のイエスさまの言葉は、そういう語りかけ、励ましの言葉であったのです。
皆さん、私たちの人生も色々あります。しかし、目に見える現実にのみ縛られ、支配されず、神さまの愛を信じて、主体的に、自由に、感謝して生きていく人生でありたいと思うのです。イエスさまの御言葉に従って、病の床を担いで生きる信仰の人生を歩んで行きましょ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