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성경말씀은 예수님께서 겟세마네라는 곳에서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신 장면입니다만, 오늘은 예수님의 “슬픔”에 착목하여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34절에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34절) 라고 있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그 만큼 슬퍼하셨을까요? 예수님의 기도를 보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35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36절) 라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라는 죽음이 자기에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십자가에서 죽지 않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도는 좀 이상한 느낌이 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그 때까지 여러 번 제자들에게 자기가 십자가에서 죽는다고 고하셨고 예수님 자신도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각오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이 마당에 이르러 십자가에서 죽는 것을 주저하셨을까요? 그것은 인간 예수로서의 연약함이었을까요? 물론 그런 견해도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예수님께서 그런 인간의 연약함을 감히 드러내시면서 자신의 기도를 제자들에게 기억하는 것을 바라셨다고 생각합니다. 또 예수님께서 슬퍼하시는 모습을 제자들의 눈에 새기는 것을 바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34절)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마당에 이르러 십자가에서 죽는 것을 두려워하셨던 게 아닙니다. 십자가 형이라는 육체의 고통을 두려워하셨 던 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죽는 것을 두려워하신 게 아니라 슬퍼하신 것입니다. 이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십자가로 인하여 죽는다는 것은 적에게 살해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탄 쪽에 넘겨져 죽는다는 것이지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떼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걸어오고 하나님의 뜻대로 걸어온 사람이 하나님께 버림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나를 적 쪽에 넘기시고 나를 버리실 것입니까?” 라고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고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만일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나는 따라가겠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안심해서 죽어가겠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라고 묻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이 때, 예수님께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오직 침묵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후에도 자기가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버림당한다는 게 아니냐는 것을 계속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 그 대답을 듣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대답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걸리신 게 아침 9시였습니다. 그리고 숨지신 게 오후 3시였습니다. 그 동안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말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 6시간 동안 예수님께서는 진짜 하나님께 버림당하느냐고 생각하시고 그 마지막에 나온 말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예수님의 외침이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하나님께 버림당해 버린다는 비통한 슬픔의 외침이었습니다. 예수님에 있어서 하나님께 버림당한다는 것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될 만큼 슬프고 죽는 것 보다 슬픈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두려운 것이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우리는 어떨까요? 우리는 하나님께 버림당한다는 것을 죽게 될 만큼 슬프다고 생각하고 있을까요? 우리는 하나님께 버림당한다는 것이 두렵다고는 생각하지요. 그러나 슬프다고 생각하고 있을까요? 우리가 하나님께 버림당한다는 것을 두렵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께 버림당하여 지옥에 떨어진다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떼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지옥에 가서 괴로워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떼어 버리는 것이 슬프다는 게 아니라 자기가 무서운 꼴을 당한다는 것이 싫다는 자기중심적인 생각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자기중심적인 인간입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들도 어떨 때에, 즉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렸을 때에 우리는 깊은 슬픔에 떨려 버립니다. 평소는 자기에게 편리하니까, 자기에게 여러가지 경제적인 것을 주니까 고맙다고 생각할 뿐의 관계라고 생각하고 있어도 막상 그 사람이 죽어버렸을 때에 우리는 그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이었는지가 알게 됩니다. 또는 남편의 사랑이 알게 됩니다. 아내의 사랑이 알게 됩니다. 그것은 단순한 자신의 이기적인 생각을 넘은 관계였다는 것이 아는 게 아닐까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람과의 관계가 사랑의 관계였다는 것이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우리 인간에게 알게 하기 위해 자신의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이제 예수님을 죄인의 한 사람으로서 십자가에서 죽게 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자기의 일 밖에 생각하지 않는 죄의 영락한 모습은 하나님께 버림당한다는 것을 어떤 일이 있어도 알게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 이외에 우리는 자신의 죄를 알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더없이 사랑한 제자들도 최후에는 자기자신 보신을 위해 예수님을 배신하여 예수님을 적 쪽에 넘기고 죽게 해 버렸습니다. 그 때,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을 보고 참으로 슬퍼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슬픔을 맛보게 하시는 것으로 우리 인간에게 죄를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머지않아 죽을 때가 옵니다. 혼자 죽어가는 것입니다. 만약 죽음이라는 것이 두렵지 않아도 혼자 죽는 것은 쓸쓸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도 인간은 함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니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을 때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 때에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시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하나님과의 관계를 얼마나 소홀히 하고 있는 게 아닙니까?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님을 버린 채로는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하나님께서는 사흘만에 살아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최후에는 버리지 않으셨다, 즉 우리 죄인인 인간을 하나님께서는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슬픔”은 우리 인간의 위로하지 못하는 깊은 슬픔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슬픔만은 하나님 밖에 가시게 해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랑에 있어서 상처받고 슬퍼하는 사람을 위로해 주시는 가장 깊은 사랑의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18.03.11主日(韓国語)「悲しみ」マルコ 14章 32~42節
今日の御言葉は、イエスさまがゲッセマネというところで父なる神さまに祈られた場面ですが、今日は、イエスさまの「悲しみ」に着目してお話しをしようかと思います。34節に「わたしは死ぬばかりに悲しい」(34節)とあります。この時、イエスさまは何をそれほど悲しまれたのでしょうか。イエスさまの祈りを見ますと、「この杯をわたしから取りのけて下さい」(36節)とあります。つまり、イエスさまは「十字架という死を過ぎ去らせてください、十字架で死なせないでください」と祈っておられるのです。
でも、この祈りは、私たちを不思議な思いにさせます。なぜかと言いますと、それまでイエスさまは再々にわたって、弟子たちに自分は十字架で死ぬのだと告げており、御自身が十字架に架かり死ぬことは覚悟が出来ていたはずですよね。なのに、なぜイエスさまはこの期に及んで十字架で死ぬことをためらったのでしょうか? それは人間イエスとしての弱さだったのでしょうか?
勿論、そのような見方も出来るかと思います。でも、私はイエスさまがそのような人間の弱さを敢えてさらしつつ、御自身の祈りを弟子たちに記憶して欲しかったのだと思うのです。また、イエスさまが悲しむ姿を弟子たちの目に焼き付けて欲しかったのだと思うのです。だからこそ、「ここを離れず、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と弟子たちに言われたのだと思うのです。イエスさまはこの期に及んで、十字架の死を恐れたわけではありません。十字架刑という、その肉体の苦痛を恐れたわけではないのです。イエスさまは死ぬことを恐れたのではなく、悲しまれたのです。このことが大事だと思うのです。
十字架によって死ぬということは、敵の手によって殺されると言うことです。それは、サタンの手に引き渡され死ぬと言うことですね。それは神さまから引き裂かれることなのです。神さまと共に歩み、神さまの御旨のまま歩んできた者が、神さまから見捨てられると言うことなのです。ですから、イエスさまは、「これがあなたの御心なのですか、あなは私を敵の手に渡して、お見捨てになるのですか」と、父なる神さまに祈り、問うているのです。
「もし、それがあなたの御心ならば、私はあなたに従います。なぜなら、これがあなたの御心であるならば、それはあなたが私を見捨てていないということだからです。だから安心して死んでいけます。これはあなたのみこころなのですか」と問うているのです。しかし、父なる神さまは、この時、イエスさまに何一つ答えようとしないのです。父なる神さまは全く沈黙しているのです。イエスさまは、この後も、自分が十字架で死ぬということは、神さまに見捨てられるということになるのではないかということを、ずっと思い続けたようです。父なる神さまにその答えを聞こうとしていたと思います。しかし、神さまの答えはありませんでした。
イエスさまが十字架につけられたのが、朝の9時です。そして、息を引き取ったのが午後の3時です。その間イエスさまは何一つ言葉を発していないのです。その6時間の間、イエスさまは自分は本当に神に見捨てられてしまうのかと思い続け、その最後に出た言葉が「わが神、わが神、どうしてわたしをお見捨てになったのですか」というイエスさまの絶叫になったのではないかと思います。それは自分が神さまに見捨てられてしまうという悲痛な悲しみの叫びでした。
イエスさまにとっては、神さまに見捨てられるということが死ぬばかりに悲しい、死ぬことよりも悲しいことだったのです。そして、それは恐ろしいことだったのです。それに対して私たちはどうでしょうか? 私たちは、神さまから見捨てられるということを死ぬばかりに悲しいと思っているんでしょうか? 私たちは神さまから見捨てられることを恐いとは思うかもしれません。でも、悲しいと思っているんでしょうか?
私たちが、神さまに見捨てられることを恐いと思うのは、神さまに見捨てられて地獄に突き落とされるのではないかと恐れているからではありませんか? それは、神さまから切り離されるから恐いのではなく、ただ自分が地獄にいって自分が苦しめられるのが恐いだけの話しです。神さまの愛から切り離されてることが悲しいというのではなくて、ただ自分が恐い目に会うのがいやだというだけの自己中心的な考えなのです。
私たちはこのように自己中心的な人間です。しかし、そういう私たちでも、ある時に、愛する者を失った時に、私たちは悲しみに突き落とされます。普段は、ただ自分に取って便利だから、自分にいろいろと経済的なものを与えてくれるからありがたいと思っているだけの関係でしかないと思っていても、いざその人が死んでしまった時に、私たちはその人がどんなに大事な人だったかということがわか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死なれてみて親の愛というものがわかる、あるいは夫の愛がわかる、妻の愛がわかる、それは単なる自分の利己的な思いを超えた関係だったということがわか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私たちにとって一番大事なことは、その人との関係が愛の関係だったのだということがわかることではないでしょうか?
神さまはそのことを私たち人間にわからせるために、神さまはご自分のひとり子イエスさまを十字架で死なせたのです。父なる神さまは、今イエスさまを罪人のひとりとして、十字架で死なそうとしているのです。自分のことしか考えようとしない罪のなれの果ては、神さまに捨てられることなのだということをどうしてもわからせなくてはならなかったのです。それ以外に私たちは自分の罪を知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のです。
イエスさまをこよなく愛していた弟子たちも、最後には、結局は自己保身のために、イエスさまを裏切り、イエスさまを敵の手に渡してしまい、死なせてしまいます。この時、弟子たちもイエスさまに死なれてみて、本当に悲しかったと思います。神さまはその悲しさを味会わせることによって、私たち人間に罪を悟らせたのです。
皆さん、私たちはいずれ死ぬ時が来ます。一人で死んで行くわけです。仮に死というものが恐くないとしても、一人で死ぬのは寂しいものだと思います。誰も人間は一緒に死の陰の谷を歩むことが出来ないのです。私たちが死ぬ時に、死の陰の谷を歩むときには、どうしても神さまが共に居ていただかないとだめなのです。それなのに、私たちはその神さまとの関係をどんなに粗末にしてしまっているでしょうか?
父なる神さまはこのイエスさまを見捨てたままにはしませんでした。このイエスさまを神さまは三日後によみがえらせたのです。イエスさまの復活は、神さまがイエスさまを最後には見捨てなかった、それはつまり、私たち罪人である人間を神さまは見捨てないということを私たちに示しているのです。
皆さん、イエスさまの「悲しみ」は、私たち人間の慰めようのない深い悲しみを表しております。この悲しみだけは、神さましかいやすことはできないのです。そして、神さまはそれをしてくださるのです。なぜなら、神さまは、愛において傷つき、愛に悲しんでいる者を慰めて下さるもっとも深い愛の方だからで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