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16절) 마틴 루터는 이 16절의 말씀을 “작은 성경”, “성경 중의 성경”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오늘의 성경말씀은 하나님의 마음을 한 마디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중심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이 세상의 사람들을 사랑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나타내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의 사람들에게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 사람으로서 하늘에서 파견하셔서 사람들을 죄에 인한 멸망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를 희생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십자가 형이 이 구원을 위한 희생이라고 우리 크리스챤은 믿고 있습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자식을 준다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고통인지, 얼마나 큰 사랑의 용기인지, 상상하기만 해도 괴로운 마음이 됩니다. 자신의 독생자를 잃어도 이 세상에 사랑을 준다. 이 사랑은 하나의 선물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것은 “영생(영원한 생명)”이라고 불리는 구원의 은혜입니다.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을 그 말로만 생각하면 영원히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만, 영원한 생명이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문답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이 나옵니다. 니고데모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구원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영원한 생명”이란 이 “하나님의 나라”를 바꿔 말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도 공간적인 장소가 있다거나 정리된 법이나 제도가 있다거나 그런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란 “하나님의 사랑이 빈틈없는 상태” 라는 것입니다. 그런 장소라고 하는 것보다 그런 관계 가운데 사는 것, 그것이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러니까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은 죽고 “천국”이라고 불리는 저 세상에 거서 비로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면 지금 벌써 이 세상에서 주어지는 생명인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벌써 이 세상에서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것으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구세주라고 믿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생명을 강렬하게 경험한 사람으로서 생각난 것은 세리장 삭개오입니다. 삭개오는 이 세상에서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않고 고독이었습니다. 그 고독이나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삭개오는 세리라는 일에 힘쓰고 악랄한 방법을 써도 돈벌이밖에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삭개오에게 예수님께서는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눅19:5)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접하여 삭개오의 닫힌 마음은 열어갔습니다. 삭개오는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눅19:8) 라고 예수님께 약속했습니다. 그렇게까지 구애된 재산을 선선히 버릴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마음 속에 충족된 기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받고 있다는 것, 예수님께 인정받고 있다는 기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삭개오의 기쁨을 “구원”(눅19:9)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기쁨이야말로 바꿔 말하면 “영생(영원한 생명)”입니다. 이 세상에서 주어진 “영원한 생명”입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예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또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주어지는 은혜, 하나님께 사랑받고 사는 기쁨입니다. 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오늘의 성경 말씀에서는 예수라는 “빛”으로 오는지 안 오는지 라는 관계성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나는 세상의 빛”(요8:12)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빛이란 삭개오에 대해서 그랬던 것 같이 사람의 생명을 부드럽게 따뜻하게 싸는 빛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성경말씀에서는 그 사람의 행함을 비추어 밝히는 빛으로 쓰여져 있습니다. 성전에서 행하여졌던 장사나 돈 바꾸는 것을 하나님과 예배를 이용한 나쁜 관습으로서 예수님께서는 밝히셨습니다. 또 그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라는 말로 니고데모의 “율법의 행함이 전부라”는 신앙의 잘못을 밝히셨습니다.
자신의 욕망, 자신의 잘못, 자신의 비밀을 밝혀지는 것은 누구나 실어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경원하거나 반대로 공격합니다. 20절에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20절) 라고 말하고 있는 그대로입니다. 예를 들면, 학교에서 청소 시간에 착실하게 청소하는 사람이 있으면 자기가 게을리하는 것이 밝혀지고 그 사람이 멀리하고 싶게 됩니다. 잘 아이를 기르는 사람을 보면 자신의 육아가 비난받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됩니다. 똑바로 올바르게 사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에게서 경원당하지 않도록 정론이나 올바른 행동을 삼가거나 하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신 것은 단순히 정론이나 올바른 행동 뿐이 아니었습니다. 거기에 반드시 사랑이 있었습니다. 용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하시고 회개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분명히 가리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의 빛”(요8:12)이라고 하신 말씀의 직전, 요한복음 8장에 있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 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야기입니다.
음행 중에 잡혀온 여성이 예수님 앞에 끌려왔습니다. 율법학자나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의거하면 이 여자는 돌로 치라고 명하고 있는데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이 여성의 죄를 밝혔습니다. 그 의미로서는 그들은 빛이며 올바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올바름에는 사랑과 용서는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처음 잠자코 계셨습니다만, 집요하게 다그친 그들에게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7절)고 하셨습니다. 그 한 마디로 그들의 정론 뒤에 숨긴 죄의 마음을 밝히신 것입니다. 물론 사람들 앞에 드러낸 게 아닙니다. 단, 그들은 자신의 마음 속에서 강렬하게 의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한 사람씩 한 사람씩 모든 사람이 돌을 던지지 않고 떠나 버렸습니다. 한 편으로 예수님께서는 간음 죄를 범한 여성을 책망하지 않고 부드럽게 타일러 보내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라는 빛을 미워하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빛에 바취어 자신의 안쪽의 정론으로 덮어 가린 것을 다시 돌아볼 때, 참된 생명을 살 수 있는 게 아닐까요? 지지난 주의 설교 가운데 말씀드렸습니다만, 우리 인간은 누구나 죄를 안고 있습니다. 그것은 추한 생각이거나 은밀한 욕망이거나 누구에게나 말하지 못하는 마음의 비밀이라는 것을 안고 있습니다. 우리가 누구에게나 말할 수 있는 것 같은 관념이나 사상이나 도덕이라는 곳에서는 인간은 아무도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부모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친구에게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자기 혼자 괴로워하는 그곳에 밖에 인간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이런 “마음의 무거운 짐”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자신의 올바름이나 정론으로 감추어 있습니다. 그런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최를 의식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화내는지, 인정하고 자비를 구하는지, 어느 쪽인가입니다. 성전에서 가슴을 치면서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눅18:13) 라고 기도한 세리는 바로 자신의 마음에 있는 죄를 인정하여 자비를 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리는 이 마음의 죄를 하나님께 내어 주었을 때, 거기서 하나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냉담히 심판하는 하나님이 말고 그 죄를 받아들이시는 하나님, 사랑으로 채우시는 하나님,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17절) 하나님의 마음은 이 세상의 사람들을,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 밑에서 사람들을 살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기를 숨기지 않고 얼버무리지 않는 용기와 순진함이야말로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구원을 불러들이는 것입니다.
18.01.28主日「光か、闇か」ヨハネによる福音書3章16~21節
「神は、その独り子をお与えになったほどに、世を愛された。独り子を信じる者が一人も滅びないで、永遠の命を得るためである」(16節)。マルチン・ルターは、この16節の御言葉を“小さな聖書”“聖書の中の聖書”と呼びました。まさに、今日の御言葉は、神さまの御心を一言で表しております。
この御言葉の中心は、神の愛です。神さまがどれほど世の人々を、私たちを愛しているか、ということです。この愛を表わすために、神さまは、ご自分の独り子イエス・キリストを、世の人々にお与えになりました。この世に人として天から遣わし、人々を罪による滅びから救うために、ご自分の独り子を犠牲になさったのです。イエスさまがお受けになった十字架刑が、この救いのための犠牲だと、私たちクリスチャンは信じます。自分の愛する子どもを与えるということ、失うということが、どんなに苦しい痛みであるか、どんなに大きな愛の勇気であるか、想像するだけでも辛い想いがします。自分の独り子を失ってまでも、この世に愛を届ける。この愛は、一つのプレゼントとして私たちに与えられました。それは「永遠の命」と呼ばれる救いの恵みです。
「永遠の命」というものを、その言葉だけで考えると、永久に生きること、と考えてしまいますが、永遠の命とはそういう意味ではありません。ニコデモとイエスさまの問答の中に、「神の国」という言葉が出て来ます。ニコデモは神の国に入ることが救いであると考えているわけですが、「永遠の命」とは、この「神の国」を言い換えたものだと考えられます。
しかし、神の国という言葉も、空間的な場所があるとか、整えられた法や制度があるとか、そういったこととは違うのです。神の国とは、“神の愛が行き届い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そういう場所、と言うよりは、そういう関係の中で生きること。それが永遠の命です。だから、永遠の命というものは、死んで「神の国」、“天国”と呼ばれるあの世に行ってから初めて与えられるものではなく、神の愛を信じたら、今既に、この世で与えられる命なのです。神の愛のもとに、神さまに愛されて生きること、その喜びこそ永遠の命です。永遠の命とは、もう既に、この世で始まっているのです。神の愛を信じることによって、イエスさまを神の愛を届ける救い主と信じることによって始まっているのです。
この命を強烈に経験した人として思い浮かぶのは、徴税人ザアカイです。彼はこの世で、だれからも愛されず、相手にされず、孤独でした。その虚しさを逆にバネにして、彼は徴税という仕事に精を出し、多少あくどい方法で金を儲け続けました。そんなザアカイに、イエスさまは、「今日は、ぜひあなたの家に泊まりたい」(ルカ19章5節)と声をかけられたのです。イエスさまの愛に触れ、ザアカイの閉ざされた心は開いていきました。
ザアカイは、持っている財産の半分を貧しい人々に施し、残りの半分で税をだまし取った人には4倍にして返す、とイエスさまに宣言します。あれほどこだわっていた財産を、あっさりと捨てることが出来たのは、彼の心の内に満たされた喜びがあったからでした。愛されているということ、イエスさまから認められていることの喜びでした。イエスさまは、このザアカイの喜びを「救い」(10節)と言いました。この喜びこそ、言い換えれば「永遠の命」です。この世で与えられた「永遠の命」です。永遠の命とは、イエスさまとの関係において、神さまとの関係において与えられる恵み、神の愛のもとに、神さまに愛されて生きる喜びです。
この神さまとの関係が、今日の聖書箇所では、イエスという「光」のもとに来るか来ないか、という関係性で表わされています。イエスさまは、ご自分のことを「わたしは世の光である」(8章12節)と言われています。イエスさまの光とは、ザアカイに対してそうであったように、人の命を優しく、あたたかく包む光です。けれども、今日の箇所では、その人の行いを照らし、明るみに出す光として語られています。神殿で行われていた商売や両替を、神と礼拝を利用した悪しき慣習として、イエスさまは明るみに出しました。また、その思い切った行動をほめたニコデモを、「新たに生まれなければ」という言葉で、彼の“律法の行いがすべて”的な信仰の間違いを明るみに出されました。
自分の欲望、自分の間違い、自分の秘密を明るみに出されることは、だれしも嫌なものです。そういう人がいると、私たちは煙たがるか、逆に攻撃します。「悪を行う者は皆、光を憎み、その行いが明るみに出されるのを恐れて、光の方に来ないからである」(20節)と言われているとおりです。例えば、学校で掃除の時間に、まじめに掃除している人がいると、自分がさぼっていることがはっきりして、その人がうとましくなったりします。しっかりと子育てしている人を見ると、自分の子育てが非難されているような気分になったりします。まっすぐ、正しく生きることはなかなか難しいのです。ですから、私たちは人に煙たがられないようにと、正論や正しい行動を控えたりすることもあります。
しかし、イエスさまがなさっていることは、単に正論や正しい行動だけではないようです。そこには、必ず、愛があります。赦しがあります。だからこそ、人を自分の罪に気づかせ、悔い改めへと導く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それがはっきりと示されている聖書の箇所があります。それは、イエスさまが「わたしは世の光である」(8章12節)と言われた言葉の直前、ヨハネによる福音書8章にある〈わたしもあなたを罪に定めない〉という話です。姦通の現場で捕らえられた女性が、イエスさまの前に引っ張り出されました。律法学者やファリサイ派の人々は、“律法によれば、この女は石打の刑だ。あなたはどう思うか?”とイエスさまに詰め寄りました。彼らは、この女性の罪を明るみに出しました。その意味では、彼らは光であり、正しいのです。しかし、その正しさには、愛と赦しはありませんでした。イエスさまは、最初黙っていましたが、しつこく詰め寄る彼らに、「あなたがたの中で罪を犯したことのない者が、まず、この女に石を投げなさい」(8章7節)と言われました。その一言によって、彼らが正論の裏に秘めていた罪の心を明るみに出されたのです。もちろん、人前にさらされたわけではありません。ただ、彼らは、自分の心の中で強烈に意識させられたのです。彼らは一人、また一人と、すべての人が石を投げずに立ち去って行きました。
一方で、イエスさまは姦通の罪を犯した女性を咎めずに、やさしく諭して送り出されました。永遠の命へと送り出したのです。私たちは、イエスさまという光を憎むこともあります。けれども、この光に照らされて、自分の内側の、正論で覆った奥にあるものを見つめ直すとき、命を本当に生きることができ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先々週の説教でもお話しましたが、私たち人間は、誰もが罪を抱えております。それは、醜い考えであったり、密かな欲望であったり、誰にも言えな心の秘密というものを抱えております。私たちが誰にでも言えるような、観念や思想や道徳と言ったところでは、人間は誰も神さまに会うことはできません。親にも言えず、先生にも言えず、誰にも言えないで自分だけで(一人で)悩んでいる、また恥じている、そこでしか人間は神さまに会うことはできないのです。
正しさ、正論の奥にある心の罪を意識させられる時、私たちは、認められずに怒るか、認めて憐れみを願うか、どちらかでしょう。神殿で、自分の胸を打ちながら、「神様、罪人(つみびと)のわたしを憐れんでください」(ルカ18章13節)と祈った徴税人は、まさに自分の心の罪を認めて、憐れみを願わずにはおられなかったのです。
けれども、この徴税人は、この心の罪を、神さまに明け渡した時、そこで神さまと出会ったのです。自分の心の罪を冷たく裁く神さまではなく、その罪を受け止める神さま、愛で満たす神さま、救う神さまと出会ったのです。「神が御子を世に遣わされたのは、世を裁くためではなく、世を救うためである。」(17節)神さまの御心は、世の人々を、私たちを救うことです。ご自分の愛と赦しのもとで生かすことです。自分を隠さず、誤魔化さない勇気と素直さこそ、私たちの心に、神さまの救いを呼び寄せるので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