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교회 달력으로 “주현절”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주현절에 관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주현절이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신 날이며 이 날로부터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을 때, 하나님께서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막1:11) 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인간 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으로 바꿔지신 수간이며, 그 순간으로부터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모습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보통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것, 대지 못하는 것”이라고 정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세례를 받으신 후의 예수님의 살아가신 모습, 죽어가신 모습, 그 모든 말씀과 행동 속에 하나님께서 나타나 있다고 합니다. 즉 그 때까지의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보이는 하나님”으로서 모습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도 인간이기 때문에 이윽고 죽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괴로운 처형 방법으로 살해되었습니다. 그것이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의 소원과는 아주 멀었다는 것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막 14:36) 라고 기도하신 것이나 죽으실 순간에 큰 소리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막 14:36) 라고 외치신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이 십자가의 일로서 단 수년간의 “보이는 하나님”의 시간은 끝나고 다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시대가 이어져 약 2000년 후의 현재에 이르렀습니다.
“보이는 하나님”이라고 말했습니다만, 이 “보이는 하나님”이라는 것은 실은 아주 위험한 사상이기도 합니다. 역사 가운데 많은 왕권이 “자기의 권위는 신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라고 주장하여 “나를 신으로서 경배하라”고 백성에게 요구하는 왕도 많이 나타났습니다. 일본에서도 태평양 전쟁에 지어서 “인간 선언”을 하기까지 천황을 “現人神(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 신)”으로서 우러러 받들라고 요구되었고 전쟁에서 죽은 병사는 호국의 신으로서 야수쿠니 신사에 신으로 받들어 모셨습니다.
물건이든 인간이든, 눈에 보이는 것을 신으로 받들어 모시는 것은 반드시 그것을 보관하고 있는 조직이나 왕이나 천황 등의 특정의 인물에게 권력을 집중시켜 피라미드 형의 신분 제도를 만들어내어 하나님의 이름을 말하면서 휘두르는 권력이나 폭력을 초래합니다. “보이는 하나님”으로서 예수님을 경배하는 것도 이것과 같은 위험이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 하나님으로서 우러러 받드는 것으로 예수님을 정점으로 삼는 권위적인 종교 단체를 만들어 버리는 위험성이 기독교 안에도 있었습니다. 실제로 일시기의 가톨릭 교회가 그랬습니다.
그런 의미로서 예수님을 “왕이신 그리스도”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님의 마음에 어긋나는 것 같이 저는 느낍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라는 것은 3년 정도입니다. 그것은 “보이는 하나님”으로서의 위험성이 있었기 때문인 것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님의 생애는 왕권이나 영광이라는 것과 아주 먼 데에 있었습니다. 늘 병자들이나 가난한 자들과 같이 하여, 권력이나 권위를 가진 제사장들에게 목숨을 위험받고 최후는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모욕을 받으면서 가장 고통스러운 형벌을 받고 죽어가셨습니다. “이 사람의 어디에 권력이나 영광이 있느냐”고 보는 사람이 괴로워해야 하는 정도 보잘것 없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시작으로부터 끝까지 그런 권위나 영광이 없는 것 같은 생애를 보내신 것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권위나 영광이라는 것을 거절하신 것 같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우상화하지 않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을 정점으로 하여 예수님께 가까운 제자들의 권위를 우러러 받들거나 그 전통을 이어받는 교회의 성직자가 일방신도 보다도 위에 서는 자로서 군림하거나 그런 것이 있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예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막 10:43-44) 라고 마가복음 10장 43절에 있 듯이 예수님께서는 사람에게 섬김을 받기 보다 사람을 섬기는 것을 원하시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하는 것을 권유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뭔가 권위적인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 같이 사람을 섬기는 생활을 실천해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까 찬양한 찬송가 369장에서는 “죄 짐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라고 부르고 있고 요한복음 15장 14절에도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 15:14-15) 라고 써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높은 곳에 치켜올리는 게 아니라 땅을 디디고 걸으며 사람들과 같이 이야기하여 웃고 사람들과 함께 우는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새로운 일년도 예수님과 함께 걸어갑시다. 우리가 함께 기도하면서 함께 웃고 우는 우리 교제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보이는 하나님”으로서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18.01.07主日「見えない神から見える神へ」マルコ 1章9~11節
皆さん、明けましておめでとうございます。新しいこの年も、主の豊かな恵みが、皆さまの上に降り注がれますよう、お祈り申しあげます。2018年、今年最初の主日礼拝を献げられますことを、神さまに感謝します。今年は広島教会にとって、教会創立70周年を迎える節目の年でもあります。これまでの広島教会の歩みを支えて下さった神さまに感謝しつつ、私たち、協力して、共に祈りながら、特別な一年となりますよう、歩んで行きたいと思います。どうぞ皆さま、宜しくお願いいたします。
さて、今日7日は、教会の暦で「公現日(こうげんび)」ということになっています。通常ですと、1月6日が公現日として守られるのですが、今年は7日が公現日となっております。それで今日は、この公現日に関して、お話しをしようかと思います。公現日というのは、もともと東方の教会の習慣で、この日にイエス様のご誕生、子ども時代の出来事から、ヨルダン川の洗礼にいたるまでのさまざまな出来事を記念する祭として祝われてきました。
この公現日が西方の教会にも伝わるうちに、クリスマスの期間を12月25日から1月6日までとし、1月6日にはイエスさまが洗礼を受けて、神さまが「あなたはわたしの愛する子、わたしの御心にかなうもの」(マルコによる福音書1章11節)と宣言したことをお祝いするようになってきました。
さて、ここで気になるのは、神さまがそう宣言したから、イエスが神の子となったという風に理解するやり方があるということです。
イエス様自身が、ご自分のことを「わたしは生まれながらも神の子だ」と思っておられたのではなく、人間としてのイエスさまの意志ともかかわりなく、神さまがイエスさまを選んで神の子だと宣言した、その瞬間から、神さまが私たちの間に姿を現したのだ、という風に考える考え方もあるというわけです。そこで、この日のお祝いを「神現祭(しんげんさい)」すなわち「神が現われた日の祭」とも呼びます。イエスさまご自身も、苦難の人生を歩まれる中で、「実は自分は『来たるべき人の子』なのかも知れない」と悟っていったのでしょうけれど、もともとはイエスさまご自身も生まれる前に自分の霊がどうであったかは知りませんでした。その点においては、私たちと同じであったということです。
通常、神さまは「見えないもの、触れないもの」と決まっています。
しかし、キリスト教では、洗礼を受けて以降のイエスさまの生き様、死に様、その全ての言葉と振る舞いのなかに、神さまが現われていると考えます。つまり、それまでの「見えない神」が、イエスさまにおいて「見える神」として姿を現したわけです。もちろんイエスさまも人間ですから、やがて死にます。イエスさまはこの世で最も苦しい処刑の方法で殺されました。そのことが人間としてのイエスさま自身の願いとは程遠かったことは、ゲツセマネの園で「この杯をわたしから取りのけてください」(マルコによる福音書14章36節他)と祈られたことや、死の瞬間に大声で「わが神、わが神、なぜわたしをお見捨てになったのですか」(マルコによる福音書15章34節他)と叫ばれたことからもわかります。
この十字架の出来事によって、たった数年間の「見える神」の時間は終わり、ふたたび「見えない神」の時代が続いて、約2000年後の現在に至っているわけです。
「見える神」と先ほどから言っていますが、この「見える神」というのは、実はたいへん危険な思想でもあります。歴史の中でいくつもの王権が、「自分の権威は神から与えられたものである」と主張し、「自分を神として拝め」と庶民に要求する皇帝も数多く現われました。日本でも、太平洋戦争に敗れて天皇が「人間宣言」をするまで、天皇を「現人神(あらひとがみ)」としてあがめることが要求されていましたし、戦争で死んだ兵士は護国のカミとして靖国神社に祀られていました。
物体であれ、人間であれ、目に見えるものを神としてあがめることは、必ずその物体(つまりご神体)を保管している組織や、皇帝や天皇などの特定の人物に権力を集中させ、ピラミッド型の身分制度を作り出し、神の名を語りながら振るわれる権力の横暴や暴力を招きます。「見える神」としてイエスさまを拝することにも、これと同じような危険が伴うわけですね。イエスさまを現人神としてあがめることで、イエスさまの頂点とする権威的な宗教団体をつくってしまう危険性がキリスト教の中にもあったわけです。実際、一時期のカトリック教会がそうでした。そういう意味で、イエスさまのことを、「王なるキリスト」とかとか呼ぶのは、イエスさま自身の思いに反するのではないかと、私は感じるのです。
イエスさまの実際の公生涯というのは、3年足らずです。それは、「見える神」としての危険性があったからでしょう。そして何よりも、イエスさまの生涯は、王権とか栄光とかいうものとは程遠いものでした。いつも病人や貧しい者と共に生き、権力や権威を持つ祭司たちに命を狙われ、最後はもっともひどい辱めを受けながら、最も苦しい刑罰を受けて死んでいかれました。「この人のどこに権威や栄光などあるのだろうか」と見る人が悩まなければならないほどに落ちぶれた人生でした。しかし、始まりから終わりまで、そういう権威や栄光のかけらもないような生涯を送ったことを通して、イエスさまは権威とか栄光といった類のものをあえて拒絶しているように感じるのです。
これは私たちがイエスさまを偶像化しないためであったと思います。キリスト教は、イエスさまを頂点とし、イエスさまに近い者と自称する直弟子たちの権威をあがめたり、その伝統を受け継ぐものとして教会の聖職者が一般信徒よりも上に立つものとして君臨したり、というようなことではあってはならないのですね。そういうことはイエスさまご自身が一番いやがることだったのではないかと思います。
「あなたがたの中で偉くなりたい者は、皆に仕える者になり、いちばん上になりたい者は、すべての人の僕になりなさい。人の子は仕えられるためではなく仕えるために、また、多くの人の身代金として自分の命を献げるために来たのである」(マルコ10:43-45節他)と伝えられているとおり、イエスさまは人に仕えられるよりも、人に仕えることを望み、他の人びとにもそのようにすることを勧めていました。
ですから私たちは、何か権威的なものをありがたがったり、自分が権威に近いことを喜びに思ったりするのではなく、イエスさまが教えてくださったように、人の下に自分を置き、人に仕える生き方を実践してゆくことが大切なのではないかと思います。さきほど歌いました讃頌歌369番では「いつくしみ深き 友なるイエスは」と歌われていますし、ヨハネによる福音書15章14-15節にも、「わたしの命じることを行うならば、あなたがたはわたしの友である。もはや、わたしはあなたがたを僕とは呼ばない。僕は主人が何をしているか知らないからである。わたしはあなたがたを友と呼ぶ。父から聞いたことをすべてあなたがたに知らせたからである」と記されています。
わたしたちは、イエスを高みに祭り上げてあがめるのではなく、大地を踏みしめて歩き、人びとと語らって笑い、人びとと共に泣いたイエスさまと共に生きてゆくことを、聖書を通してイエスさまご自身から勧められているのではないかと思います。皆さん、この新しい一年も、イエスさまと共に歩んで生きましょう。私たちが共に祈りながら、共に語らい笑い、共に泣く、そのような私たちの交わりの中に、イエスさまが「見える神」として、共に居て下さ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